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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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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봉인된 길 아래 스며드는 미묘한 흐름

‘저하께서… 무엇을 보게 되실지.’‘나와 마마를 어떻게 바라보실지.’한순간, 대비전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귀 안에서 되살아났다.“너희 셋은… 결국 같은 자리를 두고 서 있는 것이다.”그 말의 뜻을 그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사흘 후면그 말의 정면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저녁 무렵,이수의 처소에는 작은 등불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궁녀가 조심스레 물었다.“마마, 저하 환궁 소식이… 기쁘지 아니하시옵니까.”이수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기쁘지 않다 하여도…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 아니겠느냐.”말은 옳았다. 그러나 웃음이 눈까지 닿지는 못했다.궁녀가 조금 더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허나…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군영의 경 또한 다시 저하 곁으로 부르실 것이옵니다.”그 말은, 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말이었다.‘경이… 다시 저하의 곁으로만 서 계시게 되면…’‘그대의 시선에서도 나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겠지요.’이수는 그 생각을 길게 이어가지 않았다.대신, 손을 들어 등불 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것이… 본디 있어야 할 자리일지도 모르지.”그 말은 입술 위에서만 맴돌았다.마음속에서는 조용한 반대가 일어나고 있었다.‘본디 있어야 할 자리와 내가 바라는 자리가 다를 뿐이옵니다.’‘그러나, 그 차이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누군가에게는 죄가 되겠지요.’그녀는 불빛을 향해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마치 누군가의 숨처럼.그날 밤, 궁의 위쪽 하늘은 오래도록 맑았다.별빛이 기와 위에 떨어져 미세한 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군영의 밤도 조용했다.도진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세자 환궁 소식이 전해진 뒤로 군영의 공기는 묘하게 들떠 있었지만그에게는 오히려 더 무거운 안개처럼 느껴지고 있었다.‘저하께서 돌아오시면 나는 다시 그 곁에 서게 되겠지.’그 생각은 오래 기다려온 것처럼 익숙하고 익숙한 것처럼 아팠다.‘그러나… 마마와 나 사이에 드리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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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귀를 닫고 눈을 여는 침묵의 시작

귀를 닫는다그 말은, “빈마마와 관련된 말 한 줄도 입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좋은 신호가 아니었다.궁은 누군가에게 관심이 쏠릴 때 언제나 침묵으로 반응했다.침묵은 곧 감시였고, 감시는 곧 위험이었다.이수는 조심스럽게 말을 멈추었다.“알겠다. 준비하자.”입술은 다물었지만 마음은 조용히 흔들렸다.군영의 아침 훈련이 끝날 무렵, 장대에 걸린 깃발이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도진은 무사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살핀 뒤 훈련장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오늘 군영은 어제보다 더 많은 눈을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듯했다.도진은 그 시선을 모른 척했지만 그 시선이 가지는 의미만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세자 환궁을 앞두고 도진의 앞으로 배치될 감시가 더 강화되고 있다.그가 회랑 끝을 지나려던 순간 석윤이 조용히 따라붙었다.“경. 오늘 군영의 공기가 어제보다 무겁사옵니다.”“세자가 돌아오실 날이 가까워졌으니 군영이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말은 그럴싸했지만 석윤은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허나 오늘의 무게는… 단순한 긴장 때문만은 아니옵니다.”그는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저하께서 돌아오시면 사람들의 시선이경과 빈마마의 자리로 향할 것이기 때문이지요.”도진의 걸음이 아주 잠시 멈췄다.석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궁은 사람의 감정보다 자리를 먼저 보옵니다.”그리고 덧붙였다.“그 자리에서 누가 남고 누가 밀려나는지는… 지금 이 순간부터 결정되기 시작하지요.”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을 할 이유도, 할 말도 없었다.그는 단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하늘,공백을 품은 듯한 색.그 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다.‘저하께서 돌아오시면… 내 자리는 다시 저하의 곁이 되리라.’‘허나… 그 자리에서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겠는가.’그날 정오 무렵 대비전에서는 내명부의 중간급 상궁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세자 환궁을 앞두고 각 전각의 인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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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흔들리는 등불 아래, 마음의 결

해가 동트기 전의 궁은 언제나 잠들어 있는 듯 조용했으나,오늘의 정적은 유난히 얇고 예민했다.마치 누군가의 발걸음 하나만으로도 금세 금이 갈 듯한 침묵.세자가 환궁하기까지 이제 이틀.궁은 조용히 숨을 참으며 어디로 흐를지 모를 긴장에 젖어 있었다.이수는 새벽 공기 속에서 홀로 깨어 있었다.머리맡 등불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고,그 불빛은 이수의 볼을 스쳐 지나가며 미묘한 색의 그림자를 남겼다.밤새 잠을 깊이 이루지 못했다.아니, 잠은 들었으나 눈을 감고 있는 동안조차마음은 쉬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반복했다.-대비의 한마디.-궁인들의 억눌린 숨소리.-도진이 더 깊은 감시에 놓였다는 암시.세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오고,궁은 그 돌아옴을 기점으로 새로운 칼날을 준비하는 듯한 공기.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불안은 명확한 형태를 갖지 않았지만마음의 내부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궁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마마… 대비전에서 아침 일찍 빈마마의 문안을 받들고 싶다 하옵니다.”이수는 눈을 떴다.“…이 시간에?”“예, 마마.”이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대비는 아침 일찍 움직이지 않는 편이었다.그런 대비가 직접 불렀다는 것은 단순한 ‘문안’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드디어 시작되는구나…’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채비하자.”그 짧은 말 안에는 긴장과 각오가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대비전은 햇빛이 아직 닿지 않는 시간임에도 기이하게 따뜻했다.향이 은은히 피어오르고, 여러 명의 상궁들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수가 들어서자 대비는 문밖의 기척만으로도 이미 알아챈 듯 고개를 돌렸다.“왔느냐, 빈.”이수는 곧바로 공손히 예를 갖췄다.“대비마마, 아침부터 소첩을 부르셨사옵니까.”대비는 그녀의 태도와 목소리를 한 번 끝까지 살피듯 바라보았다.그러고 나서 아주 미세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이제 이틀 뒤면 전하께서 환궁하시지. 빈의 마음가짐을 미리 보고 싶어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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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달이 기우는 자리마다 숨어드는 전운

밤이 완전히 걷히기 전, 궁은 이미 하루의 숨을 고르고 있었다.세자가 환궁하기까지 이제 단 하루.이 하루는 그 어떤 날보다 길고도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마치 모든 사람이 숨을 고르는 동안 보이지 않는 무언가만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리를 옮기는 듯한 긴장.이수는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처소에서 침소를 정리하며 앉아 있었다.궁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소리가 없었다.조금이라도 말이 새어 나가면 그 말이 어디까지 번질지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궁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마마… 대비전에서 아침 진상 전을 오늘은 빈마마께 직접 받겠다 하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오늘도인가.”“예, 마마. 오늘은 그 기력이 더 단단하시다 하옵니다.”기력이 단단하다는 말은 ‘무언가를 분별하고, 확인하고,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대비가 빈을 시험하는 시간이 곧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가자.”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으나내면 깊은 곳에서 아주 작은 파동이 울렸다.대비전의 아침은 기이할 만큼 차분했다.향은 은은했고 바닥에 깔린 돗자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반듯했다.대비는 이수가 들어오는 순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눈동자는 흐릿하지만 그 흐릿함 속에 서늘한 날이 숨어 있었다.“왔느냐, 빈.”이수는 고개를 숙였다.“마마, 진상 들이옵니다.”대비는 진상상을 살피지도 않고 조용히 물었다.“내일이 저하의 환궁일이다. 빈의 마음은 어떠하냐.”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조용히 답했다.“자리로서의 긴장은 있사오나…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하고 있사옵니다.”대비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흐트러뜨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냐.”이수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대비는 더욱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궁은 겉의 고요보다 속의 물결을 먼저 보는 곳이다.너의 마음이 비단 고요하기만 하다면 나는 너를 이렇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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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주 얇은 막 아래에서 숨을 참는 밤

궁이 완전히 어둠에 잠긴 날은 흔치 않았다.늘 어디선가 등불이 깨어 있고,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했으며,고요조차 누군가의 감시 아래 움직였다.그러나 오늘의 고요는 평소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세자가 환궁하기 전날 밤 궁 전체가 아주 얇은 막 아래에서 숨을 참는 듯했다.바람 한 줄기조차 불면 안 되는 듯한 긴장.발자국 소리가 마치 금을 긋는 듯 퍼져 나가는 공간.누군가는 말하지 않았고,누군가는 듣지 않았으며,누군가는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수와 도진, 그리고 곧 돌아올 현이 있었다.이수는 책상 앞에 앉아 오늘 하루의 문서 검토를 끝마치고 있었다.촛불은 작게 흔들렸고, 흔들림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궁녀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왔다.“마마… 대비전에서 사람을 보내셨사옵니다.”이수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지금 시간에?”“예, 마마. 전갈의 내용은 ‘빈이 이 시간에도 깨어 있는지 확인하라’ 하시옵니다.”그 말은 감시인지, 관심인지, 의심인지 단숨에 구분할 수 없었다.그러나 궁은 언제나 그랬다.감시는 쉽게 걱정으로,의심은 쉽게 배려로,책임은 쉽게 격려로 포장되었다.이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깨어 있다 전하거라.”궁녀가 물러갔지만 이수의 시선은 오래도록 창밖에 머물렀다.‘대비마마께서 이토록 자주 나를 확인하신다는 건…’‘내일, 나를 어디에 두고 싶으신가.’그 순간 창밖에서 바람이 일었고멀리서 들려오는 군영의 금속성 울림이 밤공기를 스쳤다.이수는 그 울림 하나만으로도 도진이 아직 군영에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그리고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주 조용히 흔들렸다.군영의 한기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 날카로워졌다.도진은 검끝을 천천히 닦으며 혼자 서 있었다.달빛은 흐렸고, 구름이 지나갈 때마다 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그리고 마침내 부장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경.”도진은 고개만 돌렸다.“대비전에서 마지막 명이 내려왔사옵니다.”그는 검을 멈추고, 부장의 입술이 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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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새벽이 숨기는 것들

그 말에는 애정도, 경고도, 예언도 모두 담겨 있었다.밤이 더 깊어지자 궁은 마침내 숨을 죽였다. 이수는 방 안에 홀로 남아 곁에 놓인 작은 등불을 바라보고 있었다.등불은 그녀의 마음처럼 작게 떨리고 있었다.‘빈마마께서는 오늘 하루… 많이 흔들려 보였사옵니다.’궁녀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이수는 두 손을 포개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흔들리는 건 내 마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으려 하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경… 내일은… 부디 무사하시기를.”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아주 낮고 조용했지만 그 안의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그 순간, 멀리서 군영의 기합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이수는 그 소리만으로도 도진이 그곳 어디엔가 서 있을 것을 확신했다.그리고 마음이 아주 조용히 다시 흔들렸다.도진은 검을 거두고 자리를 떠나려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고 달빛은 흐릿한 숲 그림자를 땅에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석윤이 뒤에서 걸어왔다.“경.”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석윤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내일, 마마를 뵐 수 없을 것이옵니다.”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무슨 뜻이냐.”“동선을 교차하지 말라 했으니 마마도 경을 보지 못할 것이옵니다.”잠시 정적.그 정적 안에서 도진의 눈빛이 차갑게, 그러나 고요하게 흔들렸다.석윤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경… 궁은 마음을 미워하지 않사옵니다. 허나…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부터는미워할 이유가 생기지요.”도진은 혼잣말처럼 말했다.“…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다.”석윤은 그 말에 조용히 눈길을 돌렸다.“그러나… 마음을 숨긴 적도 없지 않사옵니까.”그 말은 도진을 향한 직언이었다.그리고 그 직언마저 오늘 밤의 어둠에 삼켜졌다.밤이 완전히 저물기 직전, 이수는 새벽 전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내일이 오면 모든 시선이 모일 것이다.세자가 돌아오고 궁의 물결이 바뀔 것이다.그 물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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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궁은 빈의 숨 하나만으로도

문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서늘한 새벽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그 바람 속에는 이미 다양한 의도들이 흩어져 있는 듯했다.궁의 군데군데에서 귓속말처럼 번지고 있는 소문,눈을 마주치지 않고 걸어가는 궁인들,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무사들의 그림자.고요하지만 고요하지 않은 아침이었다.오늘의 군영은 새벽부터 강철의 냄새가 더 짙게 퍼져 있었다.도진은 한밤중의 점검을 끝낸 뒤아직 돌아가지 못한 무사들을 향해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모든 인원은 지정된 자리에 서라. 아무도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그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단함 너머 오늘 하루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또한 알고 있었다.세자가 돌아오는 날.궁의 판도가 흔들리는 날.그 흔들림은 곧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고, 누군가에게 위협이 된다.석윤이 옆으로 다가왔다.“경. 오늘은 누구의 시선이 가장 날카로운지 아시겠습니까.”도진은 짧게 시선을 돌렸다.“…대비전이겠지.”“예, 경. 그리고… 빈마마의 주변 또한 오늘 하루 종일 눈이 머물 것이옵니다.”그 말이 끝나자 바람이 잠시 멈춘 듯한 순간이 흘렀다.석윤은 목소리를 낮추었다.“경. 오늘은… 경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도진의 손끝이 검자루 위에서 아주 느리게 굳어갔다.“내 마음이 드러난 적은 없었다.”석윤은 그 말이 더 이상의 말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심스레 덧붙였다.“드러내지 않은 것과 지켜보는 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일이옵니다.”도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그 짧은 시간 동안 어딘가 멀리서 이수의 발걸음이 들리는 듯했다.그녀의 목소리,그녀의 눈빛,그녀가 오늘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모든 생각이 잠시 그의 마음을 스쳤다.그러나 그는 곧 눈을 뜨고 말했다.“내 자리는… 변하지 않는다.”석윤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그 자리는 세자의 오른편. 지켜야 할 자리에 서는 무인의 자리.그러나 그 자리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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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어느 길을 지나 어느 전각에 머무는지

그녀의 말은 예언처럼 내려앉았다.전각을 나서자 햇빛이 처음으로 궁의 담장을 밝히기 시작하고 있었다.이수는 그 빛을 마주보았다.기분 좋은 따뜻함보다는 등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더 먼저 찾아왔다.그 순간 담장 너머로 군영의 금속음이 멀리서 들려왔다.이수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울렸다.‘경… 오늘 무사하시오.’바람이 지나가며 그 한마디를 어디론가 흩어지게 만들었다.도진은 마지막 검 점검을 마치고 자신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다.그의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지만오늘 배치된 자리의 의미는 그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다.그 자리에서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그리고, 오늘 이수의 움직임을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칠 수도 없었다.‘마마를… 오늘은 볼 수 없겠군요.’그 생각이 의도와 다르게 가슴 깊은 곳을 눌렀다.그는 그 흔들림을 철저히 숨기듯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무인의 걸음으로. 세자를 기다리는 자리의 걸음으로.그러나 마음은 궁이 움직이는 이 하루가 무언가를 바꾸기 시작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새벽빛이 완전히 궁을 덮는 순간, 모든 전각에서 문이 동시에 열렸다.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누군가는 속삭였고,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었고, 누군가는 마음을 숨겼다.그리고 그 가운데 바람처럼 스며드는 그림자가 있었다.그것은 현이 오고 있다는 첫 번째 전조였고,오늘 하루가 세 사람의 운명을 조용히 비틀어놓을 시작이었다.정오는 아직 멀었으나, 아침 공기는 어느새 이미 정오의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세자의 환궁이 가까워질수록 궁 전체의 숨결이 가늘어지고,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등불처럼 모든 표정이 예민하게 떨렸다.이수는 아침 의례를 마치고 전각을 나서던 중이었다.오늘은 누구도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누구도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그들의 침묵 속에는 어떤 감정도, 어떤 판단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이미 하나의 경계였다.궁녀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마마… 오늘은 내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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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어느 전각에도 오래 머물지 말라 하심은

석윤이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경. 궁은 누가 움직이는지보다 왜 움직이는지를 먼저 본다 하옵니다.”도진은 눈을 떴다.“알고 있다.”석윤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그러니 오늘… 경께서는 평소보다 더 마음을 다스리셔야 합니다.”그 말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조심 속에 담겨 있는 말의 진심은 분명했다.경의 마음은 이미 움직였으니 오늘 하루만큼은 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게 하시오.그러나 도진은 외면한 듯 말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그리고, 그 무심한 걸음 하나조차 누군가의 눈에는 이미 어떤 표정으로 보이고 있을지 그는 알고 있었다.이수는 오전 점검을 위해 후원 가까운 전각을 살피고 있었다.햇빛이 이미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고, 정오의 열기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그 예고만으로도 공기가 묵직하게 갈라져 있었다.궁녀가 귀에 바짝 대고 말했다.“마마… 오늘은 각 전각에서 마마를 뵙기를 꺼린다 하옵니다.”“…나를?”“예, 마마. 빈마마를 향한 작은 말도 오늘은 조심해야 한다고… 궁인들끼리 서로 경계하고 있사옵니다.”경계. 그 말은 곧 ‘위험’이었다.궁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먼저 경계했고, 가장 조용한 사람이 가장 많은 말을 듣는 법이었다.이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 하루는 누구도 믿지 말라는 뜻이겠지.”궁녀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그 침묵이 이미 대답이었다.그 순간, 멀리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군영이었다.정확히는 도진이 있을 자리였다.이수의 발끝이 아주 조금 멈췄다.그 멈춤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질 듯 흔들렸다.‘경… 오늘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이 하루를 버티고 있을까.’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오늘 하루는 감정을 누르는 날이었다.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단 한 번이라도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곧 궁의 칼이 될 수 있었다.정오가 가까워질수록 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마치 바람도, 햇빛도, 사람도 모두 한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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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환궁의 북이 마음을 가를 때

정오의 북이 세 번 울리고, 궁의 공기는 한순간에 형태를 달리했다.바람도, 햇빛도, 사람들의 숨결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쏠려 들어갔다.오늘 세자가 돌아온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궁의 수많은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이수는 전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그녀의 시선은 담장 너머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 너머의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그러나 마음은 이미 그곳을 향해 가 있었고, 그 마음을 억누르는 힘만 더욱 깊어져 갔다.궁녀가 다가와 속삭였다.“마마… 오늘은 빈마마의 표정까지 궁에서 기록한다 하옵니다.상궁들이 곳곳에서… 마마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사옵니다.”이수는 그 말에 아무런 놀람도, 두려움도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속은 차가운 물결이 한 번 크게 흔들린 듯 미묘하게 떨렸다.“숨을 쉬는 것도 이제는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지.”궁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수는 걸음을 내딛었다.그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그러나 오직 오늘 하루만큼은 그 걸음의 리듬마저도 궁의 눈들이 헤아리고 있었다.군영에서는 세자 환궁을 위한 준비가 이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정렬된 무사들의 발끝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도진은 그들보다 더 단단하게 서 있었다.그의 앞에는 공문이 놓여 있었고,그 공문에는 오늘 그가 맡아야 할 자리와 그 자리에서의 모든 행동이 적혀 있었다.그 행동 하나하나가 궁의 질서와 체면을 지키는 일이자그 질서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가두는 일이기도 했다.석윤이 다가왔다.“경… 전각에서 빈마마의 동선을 조금 전 다시 보고했다 하옵니다.”도진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디로 향하셨느냐.”“대비전과 후원 사이… 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대비마마의 명 때문이라 합니다.”그녀가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왜 이토록 가슴을 묵직하게 만드는지 도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오늘… 그대의 발걸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석윤이 다시 말했다.“경께서도 오늘은 어떤 표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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