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o / 로판 / 천년의 기억 / Capítulo 171 - Capítulo 180

Todos los capítulos de 천년의 기억: Capítulo 171 - Capítulo 180

202 Capítulos

171. 돌아올 수 없는 밤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물을 것도, 확인할 것도 없었다.이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많은 얼굴들이 물결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뛰놀던 마당, 가문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소리, 궁에 들어오던 날의 긴장과 설렘. 그리고도진.그의 얼굴이 가장 마지막에,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언제나 한 발 뒤에서 그녀를 지키던 그 조용한 눈빛.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 넓은 등.그녀는 그 얼굴을 마음속 깊은 곳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어 넣었다. 다시는 꺼내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알겠사옵니다."그 말은 승복이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마지막 결정이었다."내일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 빈의 선택을 기다리겠다."대비의 말이 방 안을 정리했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다."그때까지 빈의 처소는 엄중히 봉쇄한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럴 필요는 없사옵니다."대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왜 그러하냐.""이미 도망갈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그 대답은 대비조차 잠시 말을 잃게 만들었다. 방 안이 다시 한 번 깊은 정적에 잠겼다.이수는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대비전을 나섰다. 문이 뒤에서 무겁게 닫히는 순간, 상궁이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마마..."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이수는 상궁의 차가운 손을 잠시 잡았다. 그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울지 말거라.""마마... 어찌..."상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나는 지금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이수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준비해온 일처럼."끝내러 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대로."그 시각, 궁 밖의 밤은 갑자기 요란해졌다.말발굽 소리가 어둠을 거칠게 가르며 울려 퍼졌다. 도진은 숨이 찢어질 듯한 속도로 말을 몰고 있었다. 명령도 없었고, 허락도 없었다. 그러나 이유 없는 확신이 그를 미친 듯이 밀어붙이고 있었다.'지금 가지 않으면 영
Leer más

172. 평생 이 문을 넘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낮게 중얼거렸다.그 순간, 아주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처음에는 바람 소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희미했다. 그러나 이수의 심장은 그 소리를 즉시 알아보았다. 수많은 소리 중에서도 그 하나만을 구별해낼 수 있었다.이상하게도 가슴이 조여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래전 잊었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는 듯했다.'늦지 마.'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서 한 번 울리고는, 여운처럼 사라졌다.같은 시각, 도진은 더 이상 숨을 고르지 않았다.말의 거친 숨과 자신의 숨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뒤섞여 있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멈출 수 없었다.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장면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닫힌 문. 불이 켜진 방. 그리고 그 안에 홀로 앉아 있을 이수의 모습.그는 그 장면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상상으로만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밤바람의 결은 너무도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불길한 예감처럼 뼈 속까지 파고들었다.궁의 문루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도진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비켜라."그의 목소리는 명령도 아니었고, 부탁도 아니었다. 그저 피할 수 없는 사실에 가까운 말이었다.근위들이 앞을 막아섰다. 그들의 눈빛에는 이미 각오가 서려 있었다. 명을 따르겠다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였다.도진은 칼을 뽑지 않았다. 아직은."돌아가십시오."누군가 단호하게 말했다.도진은 그 얼굴을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보면 주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지금 돌아가면..."그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평생 이 문을 넘지 못한다."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였다. 돌아서면 영원히 끝이었다.근위 하나가 조심스럽게 창을 들어 올렸다.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그 순간, 도진의 몸이 본능처럼 움직였다.아직 칼을 뽑지 않았음에도 그의 동작은 이미 수십 번의 전장을 경험한 사람의 것
Leer más

173. 피가 닿지 못한 이름

"여기까지구나."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고, 누구도 듣지 못했다.그때, 멀리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날카롭게 울렸다.아주 짧았지만 분명한 소리였다. 칼과 칼, 혹은 창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이수의 손이 무의식중에 창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왔다.'그 확신은 기쁨도, 안도도 아니었다. 그저 예정된 순서가 드디어 도착했다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는 감각이었다.같은 시각, 도진은 더 이상 말 위에 있지 않았다.말은 궁의 외곽에 남겨두었고, 그는 자신의 두 발로 회랑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숨은 이미 부서질 듯 거칠었고, 다리는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앞을 막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시간이었다.그는 그 시간을, 그 흘러가는 순간들을 부수듯이 달리고 있었다.회랑 끝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창을 든 근위였다."여기까지입니다."도진은 멈추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지금 이 길을 막으면..."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긴다."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근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물러섬이 허락은 아니라는 것을 그저 피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도진은 그 틈을 지나쳤다. 칼을 뽑지 않았다. 아직은. 그의 손은 허리에 닿아 있었으나 쥐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칼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이수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탁자 옆에 작은 함이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비전을 나서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천천히 함을 열었다.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스쳤다. 서늘하고 냉정한 온도였다.이수는 잠시 그대로 멈춰 있었다. 두려움이 뒤늦게 아주 작게
Leer más

174. 이렇게 해야 끝난다

이수는 창을 바라보았다. 별은 여전히 멀었고, 하늘은 끝없이 낮아 보였다. 궁의 하늘은 늘 그랬다. 사람의 숨이 닿지 않는 높이에서 모든 것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하늘.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눈앞에 스쳐간 것은 웃음도, 다짐도, 눈물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을 보던 어느 순간의 공기였다. 따뜻했던 그 공기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문밖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번에는 분명하게 울렸다.누군가 칼을 뽑았다. 도진이었다.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문을 막는 것은 나무도, 규율도 아니었다. 사람의 의지였고, 그 의지를 깨부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비켜라."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 낮음 속에는 어떤 설명도 없었다. 설명은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근위는 한 발 물러났다. 그 물러섬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도진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이수는 눈을 떴다.손안의 차가움이 이제는 선명한 감각으로,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해야... 끝난다."그 말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문장이었다.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울렸다. 급하고 절박한 소리였다."열어라!"그 소리는 명령이 아니었다.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늦지 않기를,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간절함이었다.이수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슬픔도 체념도 아닌, 이상한 고요와 평온이었다.그녀는 칼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문밖에서 도진의 숨이 찢어질 듯 들려왔다."빈 마마!"그 순간, 이수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지금 이 선택이 그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그 생각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모든 미련이, 모든 아픔이.칼끝이
Leer más

175. 이 삶은 처음이 아니다

칼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이었다.현의 눈앞에서 도진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졌다. 이수 곁으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의 피가 서로 닿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잔인하게 남았다.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무릎이 서서히 풀렸다. 그는 무너져 앉았다. 입술이 떨렸고,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울음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울음은 이제 너무 늦은 감정이었다. 너무 가벼운 감정이었다.방 안의 빛이 점점 사라졌다. 별은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완전히 닫혔다.세 사람의 시선은 더 이상 서로를 찾지 못했다.그리고 그 세계는 아주 조용히,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어둠은 갑작스럽게 걷히지 않았다. 천천히, 마치 물이 스며들듯 빛이 조금씩 번져 들어왔다.처음 느껴진 것은 통증이었다.심장 아래, 정확히 한 지점. 살을 찌르는 날카로운 고통이 아니라 기억을 눌러오는 압박처럼 둔하고 깊은,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도진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공기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궁의 밤처럼 무겁게 눌러앉은 공기도 아니었고, 피 냄새가 섞인 바람도 아니었다.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동시에 낯설기만 한 공기였다.눈을 떴다. 천장은 높았다. 너무 높아서 처음에는 여기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차가운 구조물, 직선으로 떨어지는 인공 조명, 규칙적으로 숨 쉬는 기계음.도진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했다. 피도, 상처도, 찢긴 옷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러나 가슴의 통증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고, 현실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손을 들어 가슴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 순간, 아주 짧은 환영이 시야를 스쳤다.붉은 빛. 차가운 바닥. 끝내
Leer más

176. 이름 없는 삶의 무게

아침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은 조심스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차갑게 통보하듯 방 안을 무심하게 채웠다.도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언제 침대에서 내려왔는지,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은 자동으로 움직였고, 의식은 그 뒤를 한참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탁자 위에는 반쯤 식은 커피가 놓여 있었다. 그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 그저 잔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쓴내가 공기 속에 천천히 퍼졌다."......"이 맛을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견디기 위해 억지로 익숙해진 것일까.도진은 그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취향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공허했다.창밖에서는 도시가 완전히 깨어 있었다. 차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사람들이 바쁘게 걸었고,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색을 바꾸었다. 그 모든 질서정연한 흐름 속에서 도진만이 유독 멈춰 있는 것 같았다.전화가 울렸다.짧고 명확한 진동. 그는 한 박자 늦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에는 비서의 이름이 떠 있었다."대표님."목소리는 늘 그렇듯 정중하고 차분했다."오늘 일정 말씀드리겠습니다."도진은 잠시 침묵했다. '일정'이라는 단어가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들렸다."말해."짧은 대답이었다. 더 이상 말할 힘이 없었다."오전 열 시, 이사회 보고가 있으십니다. 정오에는 재단 미팅, 오후에는"도진은 그 말을 절반쯤 흘려들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다른 소리가 겹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북소리. 말발굽. 칼이 바닥을 긁는 소리.그는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세게 움켜쥐었다."대표님?"비서가 조심스럽게 다시 불렀다."...알았다."도진이 낮게 말했다."필요한 건 정리해서 보내."전화를 끊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편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불안한 정적이었다.도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정장을 입은 몸이 거울에 비쳤다.
Leer más

177. 이수입니다

회의실의 공기는 늘 같은 온도로 유지되어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 인공적인 온도는 마치 사람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만 같았다.도진은 회의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보고서와 태블릿, 그리고 빈틈없이 정리된 일정표가 놓여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 어느 것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아침에 스쳐간 그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신호등. 사람들. 그리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움켜쥐게 만들었던 그 짧은 순간."대표님."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도진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네.""이 안건에 대한 대표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도진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수치와 그래프, 논리적으로 정리된 문장들이 깔끔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문제없습니다. 진행하십시오."그가 짧게 말했다.회의실 안에 작은 정적이 흘렀다. 그의 대답은 늘 정확했고 명확했기에, 이렇게 짧은 답변은 다소 의외였던 것이다.회의는 예정보다 빠르게 끝났다.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도진은 여전히 앉아 있었다. 움직일 힘이 없는 것처럼."대표님, 괜찮으십니까?"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동안 너무 자주 써온 말이었다. 거짓말처럼 자연스러웠다.회의실을 나서며 도진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 그런데도 손바닥 어딘가가 이상하게 저릿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 무언가를 놓친 감각이 지금에서야 되살아난 것처럼.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숫자가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도진은 무심코 가슴을 다시 눌렀다. 통증은 아침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마치 무언가가 그 안에서 계속 꿈틀거리는 것처럼.'이건... 뭐지.'병명도, 원인도 없는 통증.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끌
Leer más

178. 식지 않는 여운

약속 장소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유리창 너머로는 차들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실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낮은 숨처럼 깔려 있었다.도진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그는 늘 그랬다.시간에 쫓기지 않는 대신, 시간을 먼저 맞이하는 쪽을 택해왔다.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펼쳐 들었지만, 글자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손끝이 미묘하게 떨렸고, 그 떨림은 긴장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다른 감각이었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도진은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한 박자 늦춰진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문 앞에 서 있었다.단정한 코트, 어깨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화장은 과하지 않았고, 표정은 차분했으나눈동자 안쪽에는 아주 오래 쌓인 무언가가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도진은 자신이 왜 숨을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다가올수록 가슴 안쪽에서 익숙한 통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도진 씨.”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전화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또렷한 목소리였다.그리고 그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그의 귀에 익숙했다.“이수 씨.”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두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눴다.손을 맞잡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졌다.자리에 앉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다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서로 조심하는 기색이 묻어 있을 뿐이었다.“이렇게 바로 만나자고 해서…”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해요.”“아닙니다.”도진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대답이조금은 솔직했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이수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다행이네요.”주문을 마치고 물컵이 채워졌다.유리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렸다.“작품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겠죠.”이수가 말했다.“네.”도진은
Leer más

179. 잠들지 않는 심장

밤은 도시 위에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불빛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사람들의 하루는 각자의 이유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그러나 도진의 밤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집 안은 조용했다.높은 천장과 넓은 거실,의도적으로 채워 넣지 않은 공간들.그곳은 언제나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고요였고, 그 고요 덕분에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적어도 오늘 전까지는.도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재킷은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고, 셔츠의 단추 하나가 풀려 있었다.평소라면 그 정도 흐트러짐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오늘은 그 사실조차 뒤늦게 알아차렸다.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그는 몇 번이나 다시 손을 뻗어 확인했다.연락이 올 이유는 없었다.약속도, 남겨야 할 말도 이미 끝난 상태였다.그런데도 가슴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도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수많은 불빛들. 그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기억을 안고 지금도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사람들.그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도진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한 얼굴이 떠올랐다.이수.그녀의 말투. 숨을 고르는 방식.말을 멈출 때마다 눈동자에 스치던 아주 미묘한 망설임.‘기억에 가까워요.’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서 울렸다.기억이라는 단어는 도진에게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울림을 남겼다.그는 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밀어내려 했다.이유 없는 통증, 설명할 수 없는 끌림.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도진은 다시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또렷했다.눈을 뜨면 사라질 줄 알았던 형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가슴이 다시 아려왔다.이번에는 아침보다도, 레스토랑에서보다도 더 분명한 통증이었다.도진은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빠르게 느껴졌다.“하아…”짧은 숨
Leer más

180.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다.밀려오는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아직은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였다.그의 삶은 이미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그 중심에는 이수라는 이름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그리고 이 밤이 지나면, 그는 더 이상 이 감정을 외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다.밤은 도시 위에 고르게 내려앉아 있었다. 불빛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사람들의 하루는 각자의 이유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그러나 도진의 밤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집 안은 조용했다.높은 천장과 넓은 거실,의도적으로 채워 넣지 않은 공간들.그곳은 언제나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고요였고, 그 고요 덕분에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적어도 오늘 전까지는.도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재킷은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고, 셔츠의 단추 하나가 풀려 있었다.평소라면 그 정도 흐트러짐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오늘은 그 사실조차 뒤늦게 알아차렸다.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그는 몇 번이나 다시 손을 뻗어 확인했다.연락이 올 이유는 없었다.약속도, 남겨야 할 말도 이미 끝난 상태였다.그런데도 가슴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도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수많은 불빛들. 그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각자의 사정과 각자의 기억을 안고 지금도 어딘가로 향하고 있을 사람들.그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도진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한 얼굴이 떠올랐다.이수.그녀의 말투.숨을 고르는 방식. 말을 멈출 때마다 눈동자에 스치던 아주 미묘한 망설임.‘기억에 가까워요.’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서 울렸다.기억이라는 단어는 도진에게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울림을 남겼다.그는 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밀어내려 했다.이유 없는 통증, 설명할 수 없는 끌림.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도진은 다시
Leer más
ANTERIOR
1
...
161718192021
ESCANEA EL CÓDIGO PARA LEER EN L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