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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이렇게 해야 끝난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1 07:08:53

이수는 창을 바라보았다. 별은 여전히 멀었고, 하늘은 끝없이 낮아 보였다.

궁의 하늘은 늘 그랬다.

사람의 숨이 닿지 않는 높이에서 모든 것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하늘.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앞에 스쳐간 것은 웃음도, 다짐도, 눈물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을 보던 어느 순간의 공기였다.

따뜻했던 그 공기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문밖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번에는 분명하게 울렸다.

누군가 칼을 뽑았다. 도진이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문을 막는 것은 나무도, 규율도 아니었다.

사람의 의지였고, 그 의지를 깨부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켜라."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 낮음 속에는 어떤 설명도 없었다.

설명은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근위는 한 발 물러났다. 그 물러섬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도진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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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 장소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유리창 너머로는 차들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실내에는 조용한 음악이 낮은 숨처럼 깔려 있었다.도진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그는 늘 그랬다.시간에 쫓기지 않는 대신, 시간을 먼저 맞이하는 쪽을 택해왔다.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펼쳐 들었지만, 글자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손끝이 미묘하게 떨렸고, 그 떨림은 긴장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다른 감각이었다.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도진은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한 박자 늦춰진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문 앞에 서 있었다.단정한 코트, 어깨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화장은 과하지 않았고, 표정은 차분했으나눈동자 안쪽에는 아주 오래 쌓인 무언가가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도진은 자신이 왜 숨을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다가올수록 가슴 안쪽에서 익숙한 통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도진 씨.”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전화로 들었을 때보다 훨씬 또렷한 목소리였다.그리고 그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그의 귀에 익숙했다.“이수 씨.”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두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눴다.손을 맞잡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졌다.자리에 앉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다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서로 조심하는 기색이 묻어 있을 뿐이었다.“이렇게 바로 만나자고 해서…”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해요.”“아닙니다.”도진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빨리 뵙고 싶었습니다.”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대답이조금은 솔직했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이수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다행이네요.”주문을 마치고 물컵이 채워졌다.유리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렸다.“작품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겠죠.”이수가 말했다.“네.”도진은

  • 천년의 기억   177. 이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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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174. 이렇게 해야 끝난다

    이수는 창을 바라보았다. 별은 여전히 멀었고, 하늘은 끝없이 낮아 보였다. 궁의 하늘은 늘 그랬다. 사람의 숨이 닿지 않는 높이에서 모든 것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하늘.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눈앞에 스쳐간 것은 웃음도, 다짐도, 눈물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을 보던 어느 순간의 공기였다. 따뜻했던 그 공기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문밖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번에는 분명하게 울렸다.누군가 칼을 뽑았다. 도진이었다.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문을 막는 것은 나무도, 규율도 아니었다. 사람의 의지였고, 그 의지를 깨부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비켜라."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그 낮음 속에는 어떤 설명도 없었다. 설명은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근위는 한 발 물러났다. 그 물러섬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도진은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방 안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이수는 눈을 떴다.손안의 차가움이 이제는 선명한 감각으로, 현실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렇게 해야... 끝난다."그 말은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마지막 문장이었다.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울렸다. 급하고 절박한 소리였다."열어라!"그 소리는 명령이 아니었다.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늦지 않기를,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간절함이었다.이수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슬픔도 체념도 아닌, 이상한 고요와 평온이었다.그녀는 칼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문밖에서 도진의 숨이 찢어질 듯 들려왔다."빈 마마!"그 순간, 이수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지금 이 선택이 그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그 생각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모든 미련이, 모든 아픔이.칼끝이

  • 천년의 기억   173. 피가 닿지 못한 이름

    "여기까지구나."그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고, 누구도 듣지 못했다.그때, 멀리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날카롭게 울렸다.아주 짧았지만 분명한 소리였다. 칼과 칼, 혹은 창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이수의 손이 무의식중에 창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왔다.'그 확신은 기쁨도, 안도도 아니었다. 그저 예정된 순서가 드디어 도착했다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는 감각이었다.같은 시각, 도진은 더 이상 말 위에 있지 않았다.말은 궁의 외곽에 남겨두었고, 그는 자신의 두 발로 회랑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숨은 이미 부서질 듯 거칠었고, 다리는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앞을 막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시간이었다.그는 그 시간을, 그 흘러가는 순간들을 부수듯이 달리고 있었다.회랑 끝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창을 든 근위였다."여기까지입니다."도진은 멈추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지도 않았다."지금 이 길을 막으면..."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되돌릴 수 없는 일이 생긴다."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근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물러섬이 허락은 아니라는 것을 그저 피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도진은 그 틈을 지나쳤다. 칼을 뽑지 않았다. 아직은. 그의 손은 허리에 닿아 있었으나 쥐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칼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이수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탁자 옆에 작은 함이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대비전을 나서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천천히 함을 열었다.차가운 기운이 손끝에 스쳤다. 서늘하고 냉정한 온도였다.이수는 잠시 그대로 멈춰 있었다. 두려움이 뒤늦게 아주 작게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 천년의 기억   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 천년의 기억   1.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그가 울었다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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