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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11 - Chapter 20

32 Chapters

11. 스며든 불신의 씨앗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조금 전 세자가 앉았던 자리에는 아직도 작은 열기만 남아 있었다.그 열기가, 마음의 한 구석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창호 앞으로 걸어갔다.밤바람이 가볍게 창호지를 흔들었다.손끝으로 창호를 스치자, 바람이 흘러드는 틈이 살짝 떨리는 듯했다.바람이 차가운데 왜 내 마음은 이렇게 뜨겁게 뛰는 걸까.그녀는 눈을 감았다.도진이 무릎을 꿇고 있던 모습,현이 그 자리를 바라보던 눈빛,그리고 자신이 이름을 불러버린 그 순간의 긴장모든 것이 다시 또렷하게 떠올랐다.이수는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미련한 사람이군, 나.”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세자빈으로 살아야 하는 몸이감정의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는 건 결코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그녀는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뛰고 있었다.‘설마… 이 감정이 단순한 낯섦 때문일까.’’‘아니면… 처음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이…?그녀는 생각을 밀어냈다.궁에서는 인연을 꿈꿀 수 없다.꿈을 꾸는 순간, 누군가는 무너지고 누군가는 죽는다.이수는 눈을 떨구었다.“나는… 세자의 사람이다.”그 말은 다짐처럼 흘러나왔다.그러나 그 다짐은 촛불의 흔들림처럼 아주 약하게 떨렸다.그 떨림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알고 있는 진실 때문일지도 모른다.현과 마주할 때보다 도진과 마주할 때, 가슴이 더 크게 요동쳤다는 사실.그 사실이 이수에게는 두려움이자… 이상한 위안이었다.창밖에는 풀벌레 소리가 가볍게 피어올랐다.그 소리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이수에게 의미가 없었으나오늘은 왠지 더 또렷하게 들렸다.마치 누군가가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어딘가,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들리는 듯한 착각.도진이 궁 회랑을 따라 걸어가며 잠시 멈췄던 그 순간 그 감정의 울림이왜인지 이수의 가슴에도 함께 스며든 것이었다.이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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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흔들리는 검날, 흐려지는 아침

도진의 반응도, 무릎을 꿇은 자세도,그 침착함도 모두 당연한 듯 보였지만 현의 마음은 알 수 없게 거슬렸다.그는 천천히 걷다가 아무도 없는 정자에 이르러 멈춰 섰다.바람이 정자 기둥을 흔들며 옅은 소리를 냈다.그 소리 속에서 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주했다.그는 입술을 조금 열었다.“도진이… 변한 것인가.”그 말은 밤공기 속에서 아주 천천히 흘러나갔다.그러나 그 안에는 말로 다하지 못한 질문들이 묻혀 있었다.정말 변한 것이 도진일까.아니면 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일까.현은 그 생각을 밀어내려 했으나 밀어낼수록 더 깊이 스며들었다. 그는 어두운 궁을 바라보며 높은 담벼락 너머로 이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달빛은 흐렸고, 그 흐림 속에서 이수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리고 그 뒤를 따라, 도진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그 두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순간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이 굳어드는 것을 느꼈다.그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쥐고 있는 감정은 분명 처음이었다.‘마마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는가.’아니면나는 왜 그 눈을 도진과 나누는 모습이 이렇게도 거슬리는가.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이건 분노가 아니다. 질투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감정이다.그 감정은 아직 작았다.작지만, 무시하면 안 되는 종류의 감정.그 감정이 앞으로 무엇을 흔들게 될지 모르는 감정.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이수의 얼굴. 그리고 도진의 눈빛.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도진아. 너는… 예전과 같아야 한다.”그는 정확히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한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도진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마마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아니면 마마가 도진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그 어느 쪽도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다.그저 처음으로 제 마음 어딘가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정자 위의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떨림과 함께 세자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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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새벽을 지나 마주한 잔상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을 궁녀 하나가 스쳐보았다.이수는 그 시선을 읽었고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가볍게 조여들었다.궁이란, 사람의 마음보다 빠르게 소문이 움직이는 곳이다.한 번의 시선, 한 번의 떨림 그 작은 파문이 내일이면 어떤 모양이 되어 퍼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이수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그러나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끝을 자신도 숨기기 어려웠다.같은 시간, 궁의 다른 한쪽에서는 세자 현이 홀로 마루에 앉아 있었다.그의 앞에는 이미 술 한 잔이 놓여 있었고,그 잔은 새벽의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온기를 잃고 있었다.현은 손을 잔 위에 얹었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손등이 희미하게 창백해져 있었다.그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이수가 도진을 바라보던 순간. 그 짧은 눈맞춤이 자신에게 남긴 감정의 파문.도진의 침착한 눈빛 속에 숨어 있던 말하지 못한 무언가.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그러나 단 하나,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어젯밤 이후로 궁의 공기 속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것을.그 어긋남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아직 색조도 형태도 없었으나그럼에도 마치 오래된 악몽처럼 어딘가에서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현은 주먹을 조금 쥐었다.뼈마디가 미세하게 드러났다.도진은 변해서는 안 된다.그 말은 누군가를 향한 경고이자 자신에게 던지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어디를 향하는지조차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해가 천천히 기와 너머로 솟아올랐다.아침 햇빛이 궁을 고르게 비추었고, 사람들은 평소처럼 하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그 평온함 아래에서 세 사람의 마음은 이미 어제와 달랐다.도진은 흔들리고 있었고, 이수는 숨기려 했으며, 현은 이유 모르는 불안을 움켜쥐고 있었다.궁은 겉보기엔 아무 변화 없었으나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이미 어둠처럼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아직은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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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늘진 빛 아래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거두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이수 역시 도진을 발견했다.그 순간, 정원에 불어오던 바람이 아주 잠시 멈춘 듯했다.둘 사이에 딱 한 걸음 그러나 그 거리 안에는전날 밤에 남긴 말과 눈빛과 침묵이 아직도 엉켜 있었다.궁녀들이 살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호위관 도진이옵니다, 마마.”궁녀의 말이 공기를 가르듯 흘렀고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이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여기에서 뵙는군요.”그 말은 매우 평범했다.그러나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미세하게 섞여 있었다.도진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마마의 동선이 이리로 들 줄 알지 못하였사옵니다. 불경하게 길을 막을 뻔하여 송구하옵니다.”그의 말투는 꼿꼿했고 격식은 완벽했다.그러나 격식 뒤에 숨어 있는 감정은 이수에게 그대로 전해졌다.그녀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그 흔들림이 얼굴에 드러날까 두려워 천천히 고개를 틀어 정원 쪽을 바라보았다.그러나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마치 바람이 옷자락을 잡아끄는 것처럼 잠시 멈춰버렸다.궁녀들은 그 미묘한 정적을 읽어냈고일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조금 억누르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정원 안쪽의 꽃잎이 휘날리며 둘 사이에 떨어졌다.찰나의 순간 이수와 도진의 시선이 서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또 다시 마주쳤다.그 시선은 길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짧았다.그러나 그 짧은 순간 안에 도진의 눈 속에는 말하지 못하는 망설임,누르려 애쓰는 감정, 그리고 은근한 침묵이 담겨 있었다.이수는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참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괜찮소.”그 말은 도진을 향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향한 다짐처럼 들렸다.그들이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려던 그때갑자기 정원 안쪽에서 궁인의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마마! 세자저하께서 곧 이 정원으로 향하시옵니다!”그 말이 울려 퍼지는 순간 궁녀들의 표정이 얇게 일그러졌다.이수와 도진 역시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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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워지지 않는 자국, 퍼져나가는 향

목소리는 조용하고 단정했으나 그 끝에는 짧은 숨이 얹혀 있었다.그 작은 떨림을 궁녀 몇 명이 동시에 느끼는 듯 몸을 조금 굳히는 기색을 보였다.현은 이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그는 그녀의 말보다 말할 수 없는 결을 더 읽으려는 듯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그러나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수의 뒤쪽으로 흘러갔다.도진이 서 있던 자리. 이제는 비어 있는 그 자리.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몰랐다.설명할 수 없고, 낱말로 붙일 수 없었다.그저 배경처럼 조용히 서 있던 누군가의 부재가 이토록 크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현은 천천히 시선을 이수에게 돌렸다.“정원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지요. 오늘 이 시간, 빈의 마음은… 어떠하오?”질문은 공손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언가를 떠보는 듯한 얇은 의문이 숨어 있었다.그 의문을 이수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켜고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저하의 뜻과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니 제 마음 또한 정갈해지옵니다.”그 말은 모범답안과도 같았다.감정을 철저히 가려낸 말. 하지만 그것이 더 문제였다.너무 정갈한 말은 오히려 감추려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이다.현의 눈빛이 아주 짧게 변했다.파문. 그 파문은 작은 것이었으나 분명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더 묻지 않았다.지금 이 자리에서 더 묻게 되면자신의 질문이 다른 감정의 이름을 갖게 될까 두렵기도 했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소. 빈이 평안하다 하니 과인 또한 마음이 놓이오.”말은 그렇다 했지만 그의 눈에는 놓이지 않은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그 순간, 바람이 정원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매화 한 송이의 꽃잎이 떨어져 이수의 어깨 끝에 닿았다.궁녀 하나가 나서서 꽃잎을 떼려는 순간, 현이 손을 들었다.“그대로 두어라.”궁녀는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현은 이수를 바라봤다.“잘 어울리오.”그 말은 겉으로는 따뜻했으나,안쪽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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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줄줄이 얽힌 침묵, 칼날이 지는 길

정원에 떨어진 꽃잎, 그 위에 스친 바람,그 바람에 흔들린 이수의 옷자락.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했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허리를 굽혀 검집을 고쳐 잡았다.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으나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뒤쪽에서 다른 호위관 하나가 다가왔다.“도진, 무슨 일 있는가. 얼굴빛이… 평소와 다르다.”도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답했다.“아무 일도 아니다.”목소리는 단단했으나 그 안에 실린 힘은 지나칠 만큼 조심스러웠다.무언가를 보호하려는 사람처럼.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그 걸음은 무사답게 일정했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묻혀 있었다.이수는 처소로 돌아온 뒤 궁녀들 틈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부채로 얼굴 아래쪽을 가렸으나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궁녀 하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빈마마, 저하께서… 오늘 따라 매우 세심히 살피시는 듯하옵니다.”말 자체는 중립적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세자가 빈을 살핀다.그건 곧 ‘빈의 마음에 어쩐지 생긴 미묘한 파동을 감지한 것 같다’는 뜻.이수는 부채를 천천히 내렸다.“그런 듯하더구나.”속내는 짧고 조용했지만 그 말끝에는 아주 얇은 떨림이 실려 있었다.궁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 위를 손질했다.그러나 손끝이 스치며 미세하게 흔들렸다.“빈마마… 혹, 걱정되는 일이 있으시온지…”이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걱정이 없겠느냐만, 이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궁녀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더 묻지 않았으나, 그 침묵을 이수는 오히려 더 깊게 느꼈다.궁은 말이 적어도 침묵이 소문을 대신하는 곳이다.한편, 현은 정원에서 걸음을 옮긴 뒤 내관 하나를 물러나게 하고 홀로 회랑에 서 있었다.그는 손끝으로 난간을 천천히 짚었다.나무결이 차갑게 느껴졌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묵직한 감정이 움직이고 있었다.그 감정은,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다.걱정이라 하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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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빛바랜 금빛, 칼날의 그림자

도진은 즉시 답했다.“우연이었사옵니다. 정원 순찰 도중 길이 겹쳤을 뿐”“우연.”현이 짧게 되뇌었다.그 한 단어는 믿거나 의심하거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다만, 다시 설명하라는 듯한 얇은 울림이 있었다.도진은 더 자세히 말하려 했으나 현이 손을 들었다.“아니. 더 말할 필요는 없다.”현은 도진에게 다가가 거의 정면의 거리까지 다가섰다.빛과 그림자가 둘 사이에 얇게 내려앉았다.“그대가 무사로서 그 자리에 있었으니 우연이겠지.”말투는 담담했으나 그 끝에 미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도진은 머리를 숙였다.“저하는… 무엇을 염려하시옵니까?”그 질문은 조심스러웠다.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칼끝처럼. 현은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은 짧았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길게 당겨져 있었다.마침내 현이 말했다.“그대는… 나에게 소중한 벗이다.”그 말 자체는 따뜻했다.그러나 그 온기 속에는 무언가 다른 의미가 섞여 있었다.“그대와 나 사이에 거짓된 소문이 퍼지거나, 궁의 귀가 흔들리는 일은 있어서는 아니 된다.”말은 조심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그러나 그 경계가 도진 때문인지, 이수 때문인지,아니면 그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이유 때문인지 현 자신도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다.도진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저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현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평소라면 결코 오래 바라보지 않을 얼굴이었다.그러나 오늘은…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다문 뒤 아주 짧게 말했다.“도진.”“…예, 저하.”“그대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바람이 정자의 대나무 발을 크게 흔들었다.발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둘의 얼굴을 번갈아 스쳤다.도진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그러나 가슴 깊은 곳이 이름 모를 불편함으로 아주 작게 울렸다.그 울림은 어떤 예감이기도 했다.오늘의 이 대화가… 앞으로 어떤 파국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예감.하지만 그는 그 예감을 말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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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벽이 듣는 속삭임, 퍼지는 먹구름

오히려 그 말을 뱉은 순간 낮 동안 마주했던 장면들이 더 또렷하게 되살아났다.-정원 앞에서 마주친 도진의 시선.-말 한마디 없이 스친 떨림.-금지된 거리 안에 머물렀던 그 짧은 침묵.그리고…-현의 눈빛.그 눈빛은 뜻을 알 수 없었기에 더 무서웠다.그 안에 담긴 감정이 의심인지, 질투인지,불안인지, 아니면 단순한 관찰인지.그 어느 쪽이든 빈으로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이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밤이 깊어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를 압박하는 감정이 이름을 갖는 듯했다.두렵다.그 두려움은 자신 때문에 도진이 죄를 입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또는 자신이 마음을 숨기지 못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길까 하는 두려움.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혹시라도 마음이 자라버릴까 하는 두려움.그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기에. 그 끝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아직 알지 못해도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창밖에서 달이 천천히 떠올랐다.궁의 지붕 위로 얇은 달빛이 내리며 방 안을 흐리게 비추었다.그 달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닿자 이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눈을 감는 순간 어둠은 그녀에게 두 사람의 형상을 동시에 내밀었다.도진. 오늘 정원에서 바람을 스치는 듯한 그의 시선.그리고 현. 말 한마디 없이 그녀를 관찰하던 그 묘한 눈빛.둘의 형상이 교차하자 이수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어찌하여… 왜 하필 오늘부터 이리 흔들리는가…”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다만, 인정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궁은 넓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가깝다.오늘 하루 동안 그 가까운 마음들이서로 스치고, 흔들리고, 흔들린 채 남았다.그 파문이 내일 어떤 모양으로 번져갈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달빛 아래서 이수는 조용히 눈을 떴다.눈가에 얇게 맺힌 물기.그 물기는 슬픔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스스로조차 알지 못했다.다만 분명한 것은 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이미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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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번지는 먹, 칼끝에 맺히는 의심

“말을 삼가야 한다. 빈마마께 누가라도 해를 입히면 안 된다.”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궁녀들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두 가지 역할을 한다.하나는 경계, 하나는 예언.그리고 지금의 대화는 분명 후자였다.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그 떨림은 마치 이들의 속삭임이 퍼져 나갈 방향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한편, 바깥 회랑에서는 잠시 쉬려고 모여든 하급 궁녀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고 있었다.“진짜라더라. 빈마마께서 호위관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셨다고.”“그것이 어찌 소문이 되었단 말이냐?”“정원에는 귀가 많지 않느냐. 한 곳에서 들린 말이 열 곳에서 번지고…”“저하께서도… 보셨다더군.”그 마지막 말은 소문을 넘어 ‘사건’의 형태를 갖추는 순간이었다.궁녀들은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누구도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이미 방향을 정한 뒤였다.“혹여… 감정이 있으셨던 건 아닐까…”그 말이 조용히 흘러나왔다.그리고 그 말이 오늘 궁이 품는 첫 번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소문은 언제나 사실보다 먼저 움직이고사람의 마음보다 더 빨리 번지며 현실보다 더 잔인하게 변한다.촛불이 완전히 기울기 전, 궁녀들의 속삭임은 이미 회랑을 타고 퍼져나가고 있었다.그리고 그 소문은 가장 먼저 현의 귀에 닿게 될 것이다.달빛이 궁의 지붕을 넘기 시작한 밤,궁 안은 낮보다 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등불은 회랑을 따라 길게 이어졌고,바람이 스쳐 갈 때마다 등불의 불꽃은 작게 떨리며 흔들렸다.현은 서고에서 홀로 책을 펼쳐 두고 있었다.책장은 규칙적으로 넘겨졌지만 그의 눈은 글자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생각이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그때였다.밖에서 발걸음이 조심스레 다가왔다.옅은 어둠 속에서 내관이 몸을 깊게 낮추며 말했다.“저하…”현은 천천히 책을 덮었다.달빛이 책의 금박 글씨에 얇게 내려앉았다.“무슨 일이냐.”내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궁의 공기 중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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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흔들린 검끝

현은 고개를 들었다.“아니다. 오늘은 그럴 필요 없다.”그러나 그 말과 달리 그의 눈빛은 이미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내관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허면… 빈마마께는…”현은 그 말을 끊었다.“빈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마라. 내가 직접 살필 것이다.”그 말은 명령이었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결이 들어 있었다.‘직접 확인하겠다’는 뜻.‘다른 누구도 개입하게 두지 않겠다’는 뜻.그리고, ‘이미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내관은 그 뜻을 정확히 읽었다.현은 등불을 향해 다가가 불꽃을 잠시 바라보았다.촛불은 작은 떨림에도 형태가 쉽게 바뀌었다.바람 없이도 흔들릴 수 있었다.그리고 그는 그 촛불을 응시하며 느꼈다.오늘 처음으로 도진이 불편했다.그 불편함은 우정에 대한 흔들림이고, 질서에 대한 위기이며,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시작이었다.현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내일… 내가 직접 보겠다.”그 말은 도진을 본다는 뜻인지,이수를 본다는 뜻인지 내관은 알 수 없었다.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세자 현의 마음에서 지금 막 태어난 이 감정은 소문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라날 것이다.촛불이 마지막으로 크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함께 세자의 마음속 균열도 처음으로 명확한 모양을 갖추었다.밤이 궁을 완전히 덮을 무렵, 하늘에는 조각난 달빛이 떠올라 기와 지붕 위에 은빛 파문을 흘리고 있었다.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공기는 식었고,대나무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이 밤의 수련장을 스치고 지나갔다.수련장은 보통 호위관들의 발걸음으로 붐볐으나, 오늘은 유독 조용했다.마치 하루 동안 궁 전체에 퍼진 미묘한 기류가 여기에까지 내려앉은 듯했다.그 고요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도진.그는 누구보다 숙련된 몸짓으로 수백 번도 넘게 익힌 자세를 취했다.달빛이 검날에 얇게 비쳤다.빛은 날카로웠고, 칼은 흔들림이 없어야 했다.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첫 동작이 시작되자마자 검날이 미세하게 떨렸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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