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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21 - Chapter 30

32 Chapters

21. 예고 없는 발걸음

새벽녘의 공기는 저물지 않은 밤의 기운을 조금 간직하고 있었다.하늘은 아직 흐릿한 회색빛이었고, 새는 울지 않았다.궁의 아침은 원래 고요하지만, 오늘의 고요는 유독 가라앉아 있었다.빈의 처소 앞에 궁녀들이 분주히 오가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였다.“저하 납시오”회랑 끝에서 울린 외침에 궁녀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췄다.현이 이른 아침에 빈의 처소를 찾는 일은 흔치 않았다.예고 없이 찾아온 발걸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현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눈빛은 평소처럼 담담했으나,그 담담함 아래 흐르는 기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궁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저하… 빈마마께선 아직… 아침 상을 들 준비를”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끊었다.“준비되지 않았어도 좋다. 잠시 얼굴만 보겠다.”궁녀들은 즉시 문을 열었다.방 안에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이른 아침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이수는 창가에 앉아 머리매듭을 다듬는 중이었다.햇살이 막 들기 시작해 그녀의 뺨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그 모습은 어제의 소문 따위와는 전혀 닿지 않은 그저 단정하고 조용한 아침의 부인이었다.그러나 현은 그 단정함 속에서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틀어짐’을 찾으려는 듯 잠시 말을 잃었다.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히 예를 갖췄다.“저하, 이른 시각… 어찌 이곳까지 오셨사옵니까.”현은 다가가며 천천히 말했다.“그대 얼굴을 보고자 하였다. 어제… 조용히 지내는 듯하여.”표현은 온화했으나 그 말의 결은 부드럽지만은 않았다.이수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압을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받아냈다.“저하는 괜한 염려를 하셨사옵니다. 어제도 그렇듯, 오늘도 무사히 지냈을 뿐이옵니다.”현은 그 말에 시선을 아주 천천히 내렸다.‘무사히’라는 표현이 왜인지 마음에 걸렸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침묵은 조금만 길어져도 한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듯한 침묵이었다.“정원에서 있었던 일은…”현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마음에 걸리지 않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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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입에서 입으로 번지는 그림자 

아침 햇빛이 궁 담장을 넘어오기도 전부터, 궁 안은 이미 작은 파문으로 흔들리고 있었다.소문은 언제나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누군가는 정원에서의 그 짧은 순간을 보았고,누군가는 세자의 처소 앞에서 들은 작은 기척을 이야기했으며,또 누군가는 밤늦게까지 호위관이 홀로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에 나름의 의미를 덧붙였다.그 모든 말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궁 전체에 잔물결처럼 번졌다.“정말이래. 빈마마께서 발걸음을 멈추셨다더라.”“호위관 도진도 그 순간 마치…”“쉿! 입조심하거라. 하지만 말이다… 세자저하께서 그걸 보셨다지 않느냐?”“그러니 지금이 가장 위험한 게지.”위험.그 한마디는 오늘 궁 안에 드리울 기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었다.이수의 처소 앞에도 평소보다 더 많은 궁녀들의 발걸음이 오갔다.문 밖에서 작은 숨소리만 나도 누군가가 말을 멈추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갑자기 걸음을 돌리곤 했다.그 모든 기척 속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긴장감이 있었다.이수는 침소 앞에 앉아 오늘의 소복을 천천히 갈아입고 있었다.궁녀 하나가 머리매듭을 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세한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무슨 일인가? 너의 손이… 떨리는 듯하구나.”궁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소인이 어리석어… 잘못을”“아니다. 잘못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이수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그 안에 담긴 온기는 깊고 단정했다.궁녀는 결국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냈다.“…마마. 지금… 궁 안에 좋지 않은 말들이 도는 듯하여…”그 말의 끝을 잇지 못했다.누구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궁이란 원래, 끝까지 말하면 죽는 곳이다.그러나 이수는 차분히 물었다.“나에 관한 말인가?”궁녀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손등이 숨길 수 없을 만큼 희게 질려 있었다.순간, 이수의 가슴춤이 아주 작은 파문을 그렸다.두려움이 아니었다. 놀람도 아니었다.그저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 사람의 마음은 가장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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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꺾이지 않는 마음

대비가 떠난 뒤, 방 안에는 긴 침묵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등잔의 불꽃을 아주 작게 흔들었다.이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옷자락이 바닥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졌고움직임 하나하나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행동의 단아함과는 전혀 다른 결을 품고 있었다.대비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희미하게 울렸다.궁은 사랑을 품는 곳이 아니다.마음도, 숨도, 눈짓도. 조심하여라.그 문장은 마치 차가운 바늘처럼 이수의 가슴 한복판에 깊게 꽂혀 있었다.궁녀들이 조용히 방을 정리하고 난 뒤,문이 닫히자 이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던 숨을 내쉬었다.그 숨은 긴장과 두려움과… 말하지 못한 감정이 뒤섞인 숨이었다.그녀는 머리매듭을 정돈하러 거울 앞에 앉았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낯설어 보였다.눈빛이 얇게 일렁였다.감정을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침착함은 더 단단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 크다면, 오히려 더 쉽게 들킨다.거울 너머에서 자신의 가느다란 떨림이 보였다.“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흔들리지 말아야…”그러나 입술이 그 말을 하기도 전에가슴은 이미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그 사실은 무서웠다.아니, 무서움을 넘어 절망에 가까웠다.궁은 마음을 품는 곳이 아니다.그 말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 말이 이제 자신에게 직접 칼끝을 들이댄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으로 체감하고 있었다.이수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그리고 깨달았다.도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금지’의 영역에 머물러야 하는 감정이라는 것을.그리고 그 감정은 지금 가장 위험한 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정오가 가까워질 즈음, 이수는 외전각으로 향했다.세자빈의 일상 의례 중 하나인 문안과 예법 점검을 위한 자리였다.궁녀 둘이 그녀를 뒤따랐다.그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소곤거림 하나 내지 않았다.외전각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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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스치는 순간, 마음은 가장 큰 소리를 낸다

햇빛이 회랑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중전과의 만남 이후, 이수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끝이 얇게 떨리는 걸 느꼈다.궁 안의 바람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오늘만큼은 몸을 파고드는 듯 차갑게 느껴졌다.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그녀는 계속해서 마음을 단단히 붙잡으려 애썼다.그러나 마음이란 붙잡는다고 붙잡히는 것이 아니다.붙들려 하는 순간 더 빠져나가곤 한다.이수는 회랑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그곳에서 오늘의 의례를 돕던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이들이 갑자기 자세를 낮췄다.“저하의 호위관 도진이 옵니다”그 말이 들리는 순간 이수의 속에서 작게 무언가 흔들렸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오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그의 걸음은 조용했고, 기척은 미세했지만 그 미세함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이수는 고개를 돌렸다.도진이 회랑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군복을 입고 있었고, 표정은 흔들림 없었다.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전날 밤의 흔들림이 은근히 남아 있었다.이수는 그 사실을 처음으로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둘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그러나 두 사람 모두 쉽게 줄일 수 없는 거리였다.궁 안의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햇빛 아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마주쳤다.도진이 먼저 자세를 낮추었다.“빈마마.”그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지만조금만 가까이 들으면 지나치게 오래 숨을 눌러 담은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이수는 천천히 대답했다.“호위관은 어찌 이리 일찍 움직였는가.”그 말은 평범한 인사였지만 도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정원에서의 그 순간. 세자의 눈빛.그리고 밤의 수련장에서 느껴진 저릿한 감시의 기척.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흔들고 있었다.“저하의 부름을 받을지 몰라…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옵니다.”대답은 청렴했다.그러나 그 말에는 평소와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말하지만그 속에서는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움직이는 음색.이수는 그 변화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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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단정한 진실

오후의 해가 회랑에 길게 누워 있는 시간.궁 안은 낮의 분주함을 조금씩 거두고 조용한 쉼의 기운을 품기 시작하고 있었다.바람은 느렸고, 대나무 숲 사이로 스치는 공기는 어딘가 눅눅하게 내려앉아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과 상관없이, 오늘 궁의 공기는 누군가의 숨결처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그 이유는 세자 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도진은 수문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그의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단단하고 규칙적이었다.검을 메고, 고개는 약간 숙이고, 모든 행동이 절도 있게 정돈된 모습.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그는 걷는 내내 어디선가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바람도 아니고, 궁인의 시선도 아니었다.더 무겁고, 더 깊고, 더 가라앉은 시선.그 시선은 ‘의심하는 자’의 시선이었다.도진은 걸음을 멈추었다.잠시 고개를 돌렸다.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숨어 있는 기척이 바람보다 묵직했다.그리고 그 순간 회랑 끝 기둥 뒤에서 현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그의 옷자락은 바람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표정 또한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두 눈은 전날 밤과도, 아침과도 다른 명확한 결을 띠고 있었다.도진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저하.”현은 천천히 다가왔다.답을 하지 않았다.그저 도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응답 없는 고요 속에서 공기는 더욱 더 무거워졌다.마침내, 현이 입을 열었다.“…호위관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느냐.”평범한 질문 같았다.그러나 그 말의 뒤에는 말하지 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너는 오늘, 누구와 마주쳤느냐.무슨 마음을 품었느냐.어떤 흔들림을 보였느냐.도진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그 결을 읽지 못할 만큼 둔하지도 않았다.“저는 그저… 저하의 곁을 지킬 준비만 하였사옵니다.”그 말은 진실이었으나, 진실이 너무 단정할 때 오히려 의심을 더 살기도 한다.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도진에게는 질문보다도 더 무거웠다.현은 잠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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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세자의 명(命)

황혼이 궁을 적시기 직전, 붉은빛이 회랑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해가 지기 전의 빛은 언제나 가장 길고,가장 고요한 법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고요가 불길함에 가까워 보였다.도진은 호위관으로서의 일과를 정리하고 저녁 보고를 위해 세자의 처소로 향하고 있었다.걸음은 규칙적이었으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낮에 느껴졌던 현의 시선. 단 한마디로도 날카롭게 심장을 긋던 그 목소리.“…네 마음, 스스로 잘 살피거라.”그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아 섬처럼 떠 있었다.도진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 말이 ‘감시’의 단어가 아니라 ‘경계’의 단어라는 것은 느껴졌다.어떤 경계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욱 불편했다.세자의 처소 앞에 도착하자 내관이 조용히 인사했다.“호위관 도진, 들라 하셨나이다.”문이 열리고, 도진은 안으로 들어섰다.현은 창가에 서 있었다.황혼빛이 그의 뺨에 닿아 그림자를 깊게 내려앉히고 있었다.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왔느냐.”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들렸다.도진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저하, 부르셨사옵니까.”잠시 침묵이 흘렀다.길지 않은 침묵이었지만 그 사이에 피부를 얼어붙게 할 정도의 기류가 있었다.마침내 현이 고개를 돌렸다.“도진.”그는 아주 천천히 도진 앞으로 걸어왔다.발걸음 하나하나가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궁의 경비를 강화하라.”그 말은 명령이었다.그러나 명령치고 지나치게 모호했다.도진은 눈을 들지 않은 채 물었다.“강화라 하심은… 어느 구역을 뜻하시옵니까.”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도진을 바로 내려다보았다.“네가 보고 판단하라.”그 말에는 분명한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내가 말하지 않아도 너는 알아야 한다.’‘내가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네가 헤아려야 한다.’도진은 다시 한번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명 받들겠사옵니다.”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더 큰 혼란이 파문처럼 번졌다.도대체 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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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소문의 찌꺼기

밤은 어느새 궁을 완전히 덮고 있었다.달빛은 얇게 깎인 조각처럼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회랑을 스치는 바람은 하루 종일 궁을 뒤흔든 소문들의 찌꺼기를 어디엔가 쓸어가는 듯 섬뜩하게 흘렀다.이수의 처소는 조용했다.궁녀들은 모두 물러나 있었고, 촛불 몇 개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혀주고 있었다.이수는 홀로 앉아 있었다.책상 앞, 손등 위로 떨어지는 달빛이 마치 차가운 손길처럼 느껴졌다.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하고 또 말했다.그러나 말은 공허했고, 마음은 그 말을 붙잡아주지 않았다.머릿속은 온종일 들었던 말들로 가득했다.대비의 경고. 중전의 차가운 눈빛.궁녀들의 떨리는 손끝. 스치는 시선들.그리고… 도진의 낮은 목소리.“빈마마… 몸을 조심하시옵소서.”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서 맴돌았다.그 말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그 문장이 더 선명해졌다.이수는 조용히 손을 쥐었다.그러나 손끝은 식은 지 오래였다.그녀는 섬세한 자태로 컵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컵의 옆면을 스친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떨림이 컵의 가장자리에 작게 반사되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수는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두렵다.’궁의 소문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질책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비난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두려운 것은 소문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더 선명해지는 것이었다.그녀는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부드러운 비단이 바닥에서 미세하게 닿으며 잔잔한 소리를 냈다.방 안에 깔린 침묵이 마치 물속처럼 무거워질 때쯤, 이수는 창문을 올렸다.바깥의 공기가 스며들었다.차갑고, 맑고, 어디에도 거짓이 없는 공기.그런데,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이수는 이유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그러자 낮에 마주쳤던 도진의 눈빛이 떠올랐다.짧았지만, 그 안에는 감춰진 떨림이 있었고, 그 떨림이 지금 이수를 더 흔들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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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침묵의 밤

밤이 완전히 내려앉은 시각.궁 안의 등불들은 하나둘 사그라들고, 회랑에는 장식용 등만이 희미하게 깜빡였다.바람은 낮보다 차가웠고, 달빛은 지나치게 맑아서 숨조차 조심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세자의 명을 받은 뒤, 오늘부터 빈의 처소 주변 경계를 직접 맡고 있었다.그 명이 의미하는 바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명령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그는 처소 앞 회랑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의 호흡 또한 절제된 움직임이었다.그러나 그 절제 속에서도 가슴 한복판에는 말할 수 없는 결이 자리하고 있었다.중전의 방문. 대비의 경고. 궁 안에 퍼진 소문.그리고… 정원에서 마주친 이수의 눈빛.그 모든 것이 도진의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반대쪽 회랑에서 이수는 혼자 걸어나오고 있었다.저녁 식사 후, 밤 공기를 쐬기 위해 잠깐 회랑을 도는 것이 그녀의 작은 습관이었다.그러나 오늘 밤 그 습관이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이수는 알지 못했다.그녀가 회랑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가벼운 발소리가 아주 조용히 들렸다.밤공기 속 바람이 흐르는 소리가 아닌,궁녀들의 분주한 걸음도 아닌 익숙한, 단단한, 규칙적인 발걸음.이수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회랑의 길목에서 마주쳤다.달빛 아래, 둘은 말없이 서 있었다.도진이 먼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빈마마.”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오히려 마음속의 떨림을 감추기 더 어려운 결이었다.이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호위관은 이 밤에… 왜 여기에…”도진은 정직한 듯 대답하려다가 말을 삼켰다.'경계 때문입니다. 저하의 명 때문입니다. 빈마마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그 어떤 문장도 입에 올리기엔 지나치게 무거웠다.대신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경계를 돌고 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복잡하게 흔들렸다.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그 바라봄이 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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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무언의 조율

밤의 회랑은 점차 어둠에 잠겨 있었다.달빛은 처마 끝에서 가늘게 흘러내렸고,바람은 촛불 같은 숨결로 회랑을 스쳐갔다.그 고요 속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아주 천천히 회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현이었다.그는 내관 하나 없이 혼자 회랑을 걷고 있었다.오늘 밤만큼은 누구의 눈도 원치 않았다.발걸음은 규칙적이었으나 그 규칙 속에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숨어 있었다.도진.빈.그 두 사람의 이름이 오늘 하루 종일 마음 한복판 어딘가에서 자꾸만 마찰을 일으켰다.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말해서도 안 되는 감정이었다.그러나 그는 그 감정을 놓지 못했다.현이 빈의 처소 쪽 회랑을 지날 때였다.바람이 문득 방향을 바꿨다.아주 희미하지만, 사람의 숨이 섞인 기척이 바람 사이에서 실처럼 엮였다.현은 걸음을 멈추었다.눈을 찡그린 채 회랑 끝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달빛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났다.도진. 그리고… 이수였다.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둘 사이의 공기는 이상할 만큼 고요했고,말로 할 수 없는 결이 흐르고 있었다.현은 움직이지 못했다.아니,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그저 숨을 낮게 깎아내리며 그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도진이 이수에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이고, 이수가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머뭇이는 모습.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말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사이에서 흘러가고 있었다.이는 세자의 눈에는 숨결처럼 명확하게 보였다.이수의 눈빛은 고요했으나 아렸다.도진의 태도는 절도 있었으나 흔들렸다.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람이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 아주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다.현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그는 자신이 분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아니, 알 수 없었다.왜냐하면 그가 보고 있는 장면에 명백한 잘못은 없었기 때문이다.둘은 멀찍이 서 있었고 예를 갖추고 있었고 그 어떤 무례도 없었다.하지만, 이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마음이라는 것이 거리로 측정된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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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낮의 침묵, 말로 가려진 칼날

다음 날 아침의 궁은 전날보다 훨씬 조용했다.바람은 느리게 흘렀고, 새벽 안개가 아직 회랑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햇빛은 비스듬하게 기와 사이를 파고들며 궁의 윤곽을 은근히 밝혀주고 있었다.이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세자의 아침 문안을 드리러 나섰다.어제의 밤을 잊으려 애썼지만,떨림은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가벼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전날 밤 회랑에서 마주했던 도진의 모습이 어딘가에서 느리게 흔들렸다.'그의 눈빛이… 왜 아직도 떠오르는가.'그 이유를 스스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수는 더 괴로웠다.조금 흔들린 마음을 다잡으며 세자의 처소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내관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빈마마를 들이라 하셨나이다.”문이 열리고, 이수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아침 햇빛에 비친 그의 옆얼굴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침착했다.그러나 이수는 그의 침착함 아래 알 수 없는 기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이수는 예를 올렸다.“전하, 평안하셨사옵니까.”현은 고개를 들었다.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이전과 달랐다.조금 더 깊었고, 조금 더 조용했으며,조금 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빈은 어제… 밤에 잘 들었소?.”평범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평범하지 않았다.이수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 떨림을 숨기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네, 전하. 밤공기가 차가워 잠시 회랑을 거닐었사오나…이내 잘 들었사옵니다.”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진실 모두는 아니었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수의 얼굴을 향해 오랫동안 머물렀다.오늘따라 그 눈빛이 지나치게 깊어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현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빈은 어찌하여 밤중에 혼자 거닐었느냐.”그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말의 결이 분명히 달랐다.이수는 놀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 마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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