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해가 회랑에 길게 누워 있는 시간.궁 안은 낮의 분주함을 조금씩 거두고 조용한 쉼의 기운을 품기 시작하고 있었다.바람은 느렸고, 대나무 숲 사이로 스치는 공기는 어딘가 눅눅하게 내려앉아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과 상관없이, 오늘 궁의 공기는 누군가의 숨결처럼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그 이유는 세자 현의 움직임 때문이었다.도진은 수문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그의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단단하고 규칙적이었다.검을 메고, 고개는 약간 숙이고, 모든 행동이 절도 있게 정돈된 모습.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랐다.그는 걷는 내내 어디선가 자신을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바람도 아니고, 궁인의 시선도 아니었다.더 무겁고, 더 깊고, 더 가라앉은 시선.그 시선은 ‘의심하는 자’의 시선이었다.도진은 걸음을 멈추었다.잠시 고개를 돌렸다.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숨어 있는 기척이 바람보다 묵직했다.그리고 그 순간 회랑 끝 기둥 뒤에서 현의 모습이 천천히 나타났다.그의 옷자락은 바람에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표정 또한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두 눈은 전날 밤과도, 아침과도 다른 명확한 결을 띠고 있었다.도진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저하.”현은 천천히 다가왔다.답을 하지 않았다.그저 도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응답 없는 고요 속에서 공기는 더욱 더 무거워졌다.마침내, 현이 입을 열었다.“…호위관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느냐.”평범한 질문 같았다.그러나 그 말의 뒤에는 말하지 않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너는 오늘, 누구와 마주쳤느냐.무슨 마음을 품었느냐.어떤 흔들림을 보였느냐.도진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그 결을 읽지 못할 만큼 둔하지도 않았다.“저는 그저… 저하의 곁을 지킬 준비만 하였사옵니다.”그 말은 진실이었으나, 진실이 너무 단정할 때 오히려 의심을 더 살기도 한다.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도진에게는 질문보다도 더 무거웠다.현은 잠시
Last Updated : 2026-06-2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