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판 / 천년의 기억 / 13. 새벽을 지나 마주한 잔상

Share

13. 새벽을 지나 마주한 잔상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8 11:30:05

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을 궁녀 하나가 스쳐보았다.

이수는 그 시선을 읽었고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가볍게 조여들었다.

궁이란, 사람의 마음보다 빠르게 소문이 움직이는 곳이다.

한 번의 시선, 한 번의 떨림 그 작은 파문이 내일이면 어떤 모양이 되어 퍼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수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끝을 자신도 숨기기 어려웠다.

같은 시간, 궁의 다른 한쪽에서는 세자 현이 홀로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이미 술 한 잔이 놓여 있었고,

그 잔은 새벽의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온기를 잃고 있었다.

현은 손을 잔 위에 얹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손등이 희미하게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기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이수가 도진을 바라보던 순간. 그 짧은 눈맞춤이 자신에게 남긴 감정의 파문.

도진의 침착한 눈빛 속에 숨어 있던 말하지 못한 무언가.

그것이 무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천년의 기억   224. 해질녘 애매한 빛 아래 생겨나는 기억의 그림자

    해가 지기 전의 시간은 항상 애매했다.낮이라고 부르기엔 빛이 약했고, 밤이라 하기엔 아직 사람들의 기척이 남아 있었다.이수는 그 애매한 시간대를 유난히 싫어했다.무언가를 결심하기엔 부족하고,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엔 감정이 너무 또렷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그날도 그랬다.원고를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날일수록 머릿속에서는 문장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이수는 메모 앱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지금 적어두면, 그 문장들은 다시 ‘이야기’로 변해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지금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붙잡고 싶었다.도진의 목소리, 잠시 멈췄던 숨,그리고 “천천히 가자”라는 말에 담긴 그의 태도.그것들은 소설처럼 극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 믿을 수 있었다.도진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다가 곧 껐다.어떤 목소리도 지금의 정적을 대신할 수 없었다.현과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다.’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도진을 화나게 하기보다 경계하게 만들었다.그 말 속에는 경쟁의식보다 소유욕에 가까운 감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도진은 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가 그 감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며칠 뒤,이수는 출판사에서 미팅 요청을 받았다.현이 직접 나오는 자리였다.“부담되시면, 다른 편집자를”담당자가 말을 꺼냈지만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괜찮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피하는 것은 지금의 이수에게 선택지가 아니었다.회의실에서 현은 여전히 매끄러운 사람이었다.말투도, 표정도, 거리 조절도.“최근 원고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그가 말했다.“독자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이수가 대답했다.“그게 문제일 수도 있죠.”현은 미소를 지었다.“독자들이 좋아하는 건 언제나 ‘변화’니까.”이수는 그 말이 원고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구분하지 않았다.“현 대표님은,”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천년의 기억   223. 흔들리는 쪽의 이름

    밤새 비가 내렸다.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창을 두드리는 리듬이 일정하지 않아 이수는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깨었다기보다, 완전히 잠들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아침이 되었을 때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젖은 흔적만 남기고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사람들은 출근했고, 차들은 신호에 맞춰 멈췄다.세상은 늘 이렇게 개인의 동요와 무관하게 정확한 속도로 돌아갔다.그 점이 이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원고 작업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문장은 분명히 머릿속에 있었는데,키보드 위로 내려오는 순간마다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났다.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문단을 지우고 다시 썼다.결국 이수는 노트북을 덮었다.“지금은 아니야.”말을 해도 방 안에는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그 고요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이수는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도진의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연락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했지만,연락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그 모호함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같은 시각, 도진은 체육관에서 묵묵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무리한 훈련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더 오래, 더 집중해서 움직였다.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호흡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익숙한 압박감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그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손바닥으로 흉부를 눌렀다.“지금은… 아니야.”누군가에게 말하듯, 혹은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이 통증이 항상 나타나는 시점이 있었다.이수와 관련된 생각이 깊어질 때.혹은, 그녀와의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고 느낄 때.도진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부정하기 어려웠다.오후가 되자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현이었다.-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잠깐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도진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짧게 답했다.-네.-가능합니다.답장을 보내고 나서 그는 이유를 곱씹었다.왜 망설였는지

  • 천년의 기억   222. 서로를 향한 속도의 차이

    아침은 늘 공평하게 밝아왔지만, 사람의 마음속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이수는 창문을 열어둔 채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어쩐지 그 여운이 요즘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며칠 사이, 그녀는 자신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확실한 변화라기보다는 결의의 방향이 미세하게 틀어진 느낌에 가까웠다.예전 같았으면 굳이 생각하지 않았을 감정들에 자꾸만 발이 걸렸다.도진.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은 이제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하루의 중간중간, 숨을 고르는 틈마다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그 사실이 이수를 가장 경계하게 만들었다.오후가 되자 약속이 하나 잡혔다.출판사 미팅이 끝난 뒤, 도진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근처에 계시면-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요?이수는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잠깐’이라는 말이 요즘 들어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그래도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네.-조금 늦어도 괜찮다면요.-물론이죠.그의 답장은 늘 빠르지만 조급하지는 않았다.그 점이 이수를 안심시키면서도 또 다른 생각을 불러왔다.카페는 낮보다 사람이 적었다.창가 자리에 앉은 도진은 서류를 정리하다가 이수가 들어오는 걸 보고 곧바로 일어섰다.“미팅은 잘 끝났어요?”“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늘 그렇듯 무난하게요.”“무난한 게 제일 어렵죠.”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도진은 이수의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얼굴에 남아 있었다.“피곤해 보여요.”“조금요.”이수는 솔직하게 말했다.“몸보다는… 생각이요.”도진은 그 말의 끝을 더 묻지 않았다.대신 컵을 밀어주었다.“차로 시켰습니다. 커피보다 나을 것 같아서요.”“고마워요.”그 배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이런 사소한 것들이 어느새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이수 씨.”도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제가 너무 빠른 건 아닐까요.”그 질문은

  • 천년의 기억   221. 확신보다 지켜보겠다는 말

    아침은 생각보다 밝았다.비가 지나간 뒤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결 가벼웠고, 빛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이수는 커튼을 조금 열었다.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며 바닥에 얇은 선을 그렸다.그 선 위에 어젯밤의 말들이 조용히 겹쳐졌다.확신보다 지켜보겠다는 말.그 문장은 이수의 마음속에서 여러 번 되뇌어졌지만모양을 바꾸지는 않았다.그대로 남아 있었다.따뜻한 온도만을 유지한 채.출근길의 도시는 어제보다 조금 분주했다.사람들은 다시 속도를 찾았고, 차들은 규칙적으로 신호를 따랐다.그러나 이수의 걸음은 그 속도에 완전히 올라타지 않았다.사무실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고,메일을 확인하고, 회의를 지나며 그녀는 평소처럼 움직였다.다만, 마음 한편에 조용한 여지가 남아 있었다.누군가를 생각하기 위한 자리.점심 무렵, 휴대전화가 진동했다.-오늘은-바쁘신가요?이수는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창밖을 한 번 바라본 뒤 손가락을 움직였다.-조금요.-하지만 저녁은 괜찮아요.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그럼,-어제보다 조금만 더 걷죠.이수는 그 문장을 읽고 작게 웃었다.어제보다 조금만 더. 그 말이 지나치게 욕심스럽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저녁의 공기는 낮보다 더 부드러웠다.도진은 약속 장소 근처에서 잠시 걸음을 늦췄다.이수보다 먼저 도착해 주변을 살피는 버릇은 아직 남아 있었다.그녀가 보였다.멀리서도 걸음의 리듬이 눈에 익었다.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자신만의 속도.“기다리셨어요?”“조금요.”도진은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그게 싫지 않아서.”이수는 그 말의 끝을 묻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섰다.“어디로 갈까요?”“정해두진 않았어요.”도진이 말했다.“걸으면서 생각해도 될까요.”“네.”이수의 대답은 짧았지만 거절의 여지는 없었다.길은 어제보다 밝았다.가로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고, 노을이 마지막 힘을 쓰고 있었다.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어깨가 닿지 않는 거리, 그러나 멀지도 않은

  • 천년의 기억   220. 비가 멎은 뒤에도

    비는 밤새 내렸다.소리가 크지도, 잦아들지도 않은 채 마치 약속된 리듬처럼 창을 두드렸다.이수는 잠들다 깨기를 반복했다.꿈을 꾸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잠들지도 못했다.새벽녘, 비가 멎었다.멎는 순간은 언제나 소리가 없다.있던 것이 사라질 때의 침묵만이 방 안에 남는다.이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창가에 희미한 빛이 걸려 있었다.젖은 나뭇잎이 반사하는 회색의 빛.어젯밤의 대화가 그 빛처럼 조용히 떠올랐다.‘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겠다.’그 말은 미루겠다는 뜻이 아니었다.지금 이 상태를 지금의 온도로 그대로 두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아침 식탁은 간단했다.커피, 토스트, 그리고 휴대전화.이수는 화면을 켰다가 곧바로 끄지 않았다.알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허전하지도 않았다.기다림이 아니라 여백에 가까운 감각이었다.컵을 들고 창가에 섰다.어제 내린 비로 도시는 잠시 숨을 고른 듯했다.사람들도, 신호도, 모든 것이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비 그쳤네요.이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짧은 문장이었지만 어제의 연장선 같았다.-네.-공기가 달라요.잠시 후,-오늘은-더 선명해질 것 같아요.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도진은 사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유리 너머로 구름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다.빛이 드러날 준비를 하는 하늘.어제 이후 마음이 묘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불안이 줄어든 건 분명했다.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라 확신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회의 중에도 그는 상대의 말을 평소보다 더 주의 깊게 들었다.사소한 표정, 잠깐의 침묵.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가 물었다.“오늘도 혼자예요?”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은요.”그 대답은 어제의 대화와 닮아 있었다.단정하지 않고, 닫히지 않은 말.퇴근 무렵, 하늘은 맑아져 있었다.이수는 사무실을 나서며 가방을 고쳐 멨다.하루가 길지도,

  • 천년의 기억   219. 서로를 향해 조용히 흘러가는 빗소리

    아침은 생각보다 선명했다.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의 통화를 떠올렸다.말은 많지 않았고, 끝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어쩌면 기억에 남은 건 말보다 숨의 간격이었는지도 몰랐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런데 눈빛 어딘가가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긴장을 풀어도 괜찮아진 사람의 얼굴처럼.휴대전화 위로 짧은 알림이 떴다.-오늘은 비가 올 것 같아요.이수는 그 문장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어제도 그랬죠.-비 오기 직전의 공기, 이상해요.잠시 뒤,-맞아요.-괜히 말을 아끼게 되는 공기.그 답장을 읽으며 이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서로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안심으로 이어졌다.오전 일정은 바빴다.이수는 회의실을 오가며 필기를 하고, 질문에 답하고, 결정을 미뤘다.일은 늘 그렇듯 현실적인 속도로 흘러갔다.그런데 회의 중간중간 마음이 다른 곳으로 기울었다.도진의 목소리,어제의 빗소리,오늘 아침의 짧은 문장들.집중해야 할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회의가 끝난 뒤 이수는 커피를 들고 사무실 복도를 걸었다.창밖으로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지금 연락해도 될까.’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괜히 마음이 앞서가는 것 같았다.지금은 조금 더 지켜봐도 되는 시간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도진은 차 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빛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그는 어젯밤 이후 자신의 반응이 달라졌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이전 같았으면 전화 한 통에 이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했지만, 마음 한쪽이 계속해서 다른 방향을 향했다.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건 아니었지만,일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만 상기하게 됐다.점심시간이 다가올 즈음, 도진은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점심은-혼자 드세요?이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 천년의 기억   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 천년의 기억   1.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그가 울었다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