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전갈은 종잇장 하나에 불과했으나, 그 무게는 사람 하나를 궁 밖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도진은 전각을 나서며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했다.발걸음은 담담했으나, 마음은 담담하지 않았다.멀어진다는 선택이 지킨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덜 비겁하게 만들었지만,조금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지켜야 할 것이 분명할수록 손에서 놓는 것도 분명해지는 법이었다.궁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뒤돌아보는 순간, 결심은 감정으로 변하고 감정은 다시 죄가 된다.그러나 궁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시선들이 따라왔다.말을 하지 않는 입술들,묻지 않는 눈동자들.그 시선의 끝에는 늘 같은 결론이 놓여 있었다.그가 떠나야 조용해진다.그 시각, 이수의 처소는 조용했으나그 조용함은 평온이 아니었다.상궁은 이수의 손짓에 따라 방 안의 창을 반쯤만 열어두었다.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은 이수의 숨결을 조금 흔들었다.“떠난다 하더냐.”이수의 물음은 낮았다.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예, 마마. 변방 순찰이라 하옵니다. 기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사옵니다.”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올 날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잠시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하늘은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잔인했다.“그가 떠난다면,”이수가 천천히 말했다.“궁은 정말 조용해질까.”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조용해진다는 말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곳에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웃지 않았다.대신, 아주 작은 숨을 내쉬었다.그 숨은 체념이 아니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호흡에 가까웠다.“상궁.”그녀가 말했다.“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말도, 소식도.”“마마”“지금
새벽은 오지 않았고, 밤은 여전히 궁을 붙잡고 있었다.그러나 공기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보이지 않는 문들이, 하나씩.도진은 동이 트기 전 군영을 나섰다.잠들지 못한 밤의 잔여가 어깨에 남아 있었고, 그 잔여는 피로가 아니라 경계였다.그는 의도적으로 빈의 처소 쪽을 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발이 움직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궁 안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았다.전갈은 간결해졌고, 시선은 노골적이었다.어제까지 ‘우연’으로 처리되던 일들이 오늘은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기록은 언제나 결론을 요구한다.도진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서 근위 하나가 다가왔다.말을 꺼내기 전, 그 근위는 주위를 훑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으리, 대비전에서… 오늘 중으로 인원이 바뀐답니다.”바뀐다는 말은, 정리된다는 뜻이었다.정리된다는 말은, 누군가 빠진다는 뜻이었다.“누가 나간다더냐.”“아직은”근위는 말을 흐렸다.“이름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빈의 처소 쪽 기록이 갑자기 두터워지고 있다는 말이…”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두터워지는 기록은 누군가의 손길이 겹겹이 덧대어졌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 손길의 방향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그만 말해라.”도진이 낮게 말했다.“오늘은 더 묻지 않겠다.”근위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도진의 마음은 오히려 더 조여들었다.묻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그 시각, 이수는 상궁과 마주 앉아 있었다.아침이 오기 전의 시간, 궁에서 가장 많은 결정이 내려지는 때였다.상궁의 손에는 얇은 장부 하나가 들려 있었다.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이수는 알았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대비마마께서 마마의 처소를 한 차례 둘러보실 수도 있다 하옵니다.”“둘러본다.”이수는 그 말을 되뇌었다.“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밤은 이미 제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어둠은 여전했으나, 그 어둠 속에 섞인 공기는 더 이상 이전의 것이 아니었다.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몸은 침상 곁에 앉아 있었으나 의식은 이미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방 안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는 오래된 연못의 수면처럼 언제든 작은 돌 하나에 산산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지금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체면인지, 가문의 명맥인지, 아니면 누구의 마음인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했다.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문밖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발소리라 하기에는 너무 가벼웠고, 바람이라 하기에는 의도가 느껴졌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그 기척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것을.잠시 후, 그 소리는 멀어졌다.마치 일부러 들리게 한 뒤 물러나는 것처럼.이수의 손이 천천히 옷자락을 움켜쥐었다.손끝이 차가웠다.그러나 마음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시험이다. 누군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그 시험은 공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그리고 반응이 없을수록 다음 수는 더 노골적이 될 것이다.그 시각, 도진은 더 이상 군영에 있지 않았다.그러나 빈의 처소로 향하지도 않았다.그는 그 중간 어딘가,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회랑 끝에 서 있었다.그곳은 궁의 구조상 어느 쪽으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자리였다.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공기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무사의 감각은 이럴 때 가장 또렷해졌다.소리보다 먼저, 기척보다 먼저 위험의 방향을 알아채는 감각.그리고 지금, 그 감각은 한쪽으로만 쏠려 있었다.빈의 처소에 그는 발을 내딛지 않았다.명령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지금 자신이 움직이면, 그
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어둠은 궁의 지붕과 회랑을 따라 눌러앉아, 사람들의 숨결마저 낮추게 만들고 있었다.이수는 문에 얹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신호였다.누군가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이수는 한 발 물러나 방 안으로 돌아왔다.촛불을 다시 켜지 않았다.밝음은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밝히는 순간, 드러나는 것은 상대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될 테니까.잠시 후, 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기척으로만 자신을 알렸다.“마마…”아주 낮은 목소리였다.“문밖의 발소리는 이미 멀어졌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멀어졌다는 말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지금은 물러났을 뿐,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상궁.”이수가 낮게 불렀다.“지금부터는 이 처소의 모든 문을 평소보다 일찍 잠그도록 하라.”“예, 마마.”“그리고,”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누가 묻거든 내가 몸이 불편하여 사람을 받지 않는다 전하거라.”상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그러나 곧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상궁이 물러나고,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이수는 그 고요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지금 나는, 두려운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두려움은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를 흔들지는 못했다.이미 너무 많은 밤을 이와 비슷한 긴장 속에서 견뎌왔기 때문이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을 나와 천천히 궁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세자의 말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은 분명했다.‘빈의 처소와 거리를 두라.’그는 그 말의 무게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마음은 명령을 받지 않았다.도진은 걸음을 멈추었다.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빈의 처소 쪽 등불을 잠시 바라보았다.불빛은 여전히 약했고, 그 약함이 오히려 그의 시선을
밤은 다시 궁을 덮었다.낮 동안 숨죽여 있던 기척들이해가 기울자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닫아 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이제 숨기려 하지 않았다.다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할 뿐이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말이 되었다.지켜보고 있다.그리고 아직은 기다린다.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수의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졌다.불안은 모를 때 가장 크게 자라지만, 알고 나면 형태를 가진다.형태를 가진 두려움은 대비할 수 있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마마, 오늘 밤은…평소보다 인원이 많사옵니다.”“알고 있다.”이수는 창밖을 보며 답했다.“그만큼 누군가 서두르고 있다는 뜻이겠지.”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이수의 목소리에는 이미 판단이 끝났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 안에서 무기를 점검하고 있었다.검날을 닦는 손길은 늘 그렇듯 정확했고, 숨결마저 일정했다.그러나 오늘은 그의 시선이 유난히 자주 멈췄다.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지금의 나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지켜야 할 대상이 하나가 아니다.’빈을 지켜야 했고, 궁의 질서를 지켜야 했으며,무엇보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스스로 지켜야 했다.그 선은 검보다도 날카로웠다.“도진 나으리.”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그는 즉시 몸을 돌렸다.근위 하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저하께서 잠시 들르라 하십니다.”도진은 한순간 숨을 고르는 듯 보였으나 곧 고개를 숙였다.“지금 가겠다고 전하시오.”그는 검을 제자리에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발걸음은 무거웠으나 망설임은 없었다.피할 수 없는 만남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현은 침전 안에서 홀로 서 있었다.등불은 하나뿐이었고, 그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만을 비추고 있었다.“도진.”그는 호칭 없이 이름을 불렀다.그것만으로도 이 만남이 공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요 며칠,”현이 낮게
문은 반쯤 닫힌 채로 하루를 버텼다.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빛과 소리가 함께 스며들었다.그 틈은 작았으나, 궁에서는 작은 틈이 가장 오래 남는 법이었다.이수는 그 틈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등 뒤에서 오가는 기척을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제 숨기려 하지 않았다.대신 방향만을 숨겼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게 말했다.“마마, 오늘은… 말들이 많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대답에는 놀람도, 경계도 없었다.이미 예상하고 있던 흐름이었다.“말이 많다는 것은,”이수가 천천히 말했다.“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상궁은 그 말을 이해했다.결론이 나면, 말은 사라진다.남는 것은 명과 결과뿐이다.그 시각, 도진은 궁의 외곽을 따라 천천히 순찰을 돌고 있었다.명목은 경계였으나, 그의 시선은 늘 담장 너머가 아니라 담장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바람이 옷자락을 스쳤다.그 바람 속에는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피의 냄새는 아니었으나, 사람이 마음을 굳힐 때 나는 차가운 냄새에 가까웠다.도진은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으나,그 사이의 간격이 묘하게 일정했다.‘준비하고 있다.’그는 그렇게 느꼈다.누군가가, 아직 드러내지 않은 손을 정리하고 있다는 감각.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눈을 낮추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해주기 때문이다.현은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들이고 있었다.말은 길지 않았고, 표정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질문은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그날 밤의 기척은 정확히 언제였는가.”“도진 경은 그 전에도 그 근처에 있었느냐.”“빈의 처소에 드나드는 자의 수는 평소와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는가.”질문은 사실을 묻는 것처럼 보였으나,그 사실들이 모일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현은 혼자 남았을 때 잠시 눈을 감았다.머릿속에서 여러 장면이 겹쳐졌다.이수가 문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