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침묵은 늘 가장 먼저 변질된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은 사실처럼 번진다.이수는 그 원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오래 말하지 않았다.아침이 밝았을 때,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수십 개의 부재중 알림이 쌓여 있었다.언론, 출판사, 번호를 숨긴 전화들.그리고 하나의 메시지.-오늘 오후 4시.작가님 의사에 따라 비공개 간담회를 제안드립니다.보낸 이는 문화재단 명의였다.‘비공개’라는 말은 언제나 가장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방식이었다.이수는 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도진은 주방에서 물을 따르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거기 가실 겁니까.”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어조였다.이수는 컵에 담긴 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가야겠죠.”“선택이 아니라.”“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이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마주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도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 자리에 함께 서겠다는 뜻을 굳이 말로 반복하지 않았다.간담회 장소는 재단 건물의 소회의실이었다.외부에서는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었다.방 안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 그리고 녹음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녹음은 공식 기록용입니다.”담당자가 말했다.“원치 않으시면 중단하셔도 됩니다.”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그녀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서 있는 쪽을 택했다.그 선택 하나로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작가님께서 최근 상황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시작했다.“저는 설명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해명도,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누군가 펜을 쥔 손을 멈췄다.“다만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이수는 시선을 들었다.“제가 쓴 이야기는 허구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합니다.”그 문장은 의도적으로 모순
요청은 항상 정중한 얼굴을 하고 온다.거절하기 어렵게, 화를 내기 애매하게,그러나 분명히 선 하나를 넘으라고 요구하는 방식으로.이수에게 도착한 첫 공식적인 요청도 그랬다.메일 제목은 단정했다.‘작가님 인터뷰 관련 제안 드립니다.’보낸 이는 대형 언론사 문화부 데스크였다.말투는 공손했고, 문장은 지나치게 예의 바랐다.그러나 문단 사이사이에 깔린 의도는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현재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작가님의 직접적인 입장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사생활에 대한 해명보다는 작품 세계관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작가님의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이수는 메일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요지는 하나였다.말하라. 침묵하지 말라. 이야기를 완성하라.그녀는 노트북을 덮었다.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출판사 대표였다.“작가님.”상대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부드러움 속에 숫자와 계산이 섞인 음색.“지금 상황이 출판 쪽에서도 조금 민감해졌습니다.”이수는 말하지 않았다.대표는 그 침묵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물론 작가님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그 말이 나오면 그 다음 문장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다만, 다음 신간 일정과 해외 판권 계약을 생각하면 지금의 오해를 정리하는 편이…”“정리라는 게,”이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무엇을 의미하죠?”잠시 침묵.대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최소한 작품과 현실은 분리된다는 입장 정도는 공식적으로 밝혀주시면”이수는 조용히 웃었다.“그럼 거짓말이 되겠네요.”대표의 숨이 전화 너머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작가님.”“제가 쓴 이야기가 현실과 닮았다는 걸 부정하면,”이수는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그건 제 작품을 부정하는 겁니다.”대표는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잠시…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난 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고요
그날 밤,도진은 집에 돌아와 지하로 내려갔다.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서도 그는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벽 한가운데, 장식처럼 꽂혀 있는 검.청명.도진은 검을 만지지 않았다.다만 그 앞에 서서 아주 낮게 말했다.“아직은.”그 말은 검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아직은 칼을 꺼낼 때가 아니다.그러나 칼이 필요해지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날 아침, 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았다.이전 같았으면 무의식처럼 손이 먼저 움직였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화면을 켜는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작가’로만 불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창밖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소음이 흘러들었다.차 소리, 사람 목소리, 아침을 시작하는 도시의 숨.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 빛이 오늘은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는 번호였다.편집장이었다.“…네.”이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작가님.”편집장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지금 기사 하나가 더 올라왔요.”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이번엔… 조금 더 직접적입니다.”잠시 정적.“실명은 아니에요.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게 쓰였어요.”이수는 침대 끝에 앉았다.손바닥이 천천히 매트리스에 닿았다.“…링크 보내주세요.”잠시 후, 화면에 기사가 떴다.제목은 짧았다.‘베스트셀러 작가의 사랑,소설보다 현실이 더 닮았다’기사 속 문장들은 조심스러운 척 정제되어 있었지만, 방향은 하나였다.‘측근에 따르면’‘주변에서는 이미’‘사실상 공개 연인’이수는 스크롤을 내리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편집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작가님, 당분간 외부 일정은”“취소하죠.”이수는 짧게 말했다.“모두요.”“네… 알겠습니다
이수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돌아오지 못했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건물 입구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그녀를 불렀기 때문이다.“이수 작가님.”처음에는 자신을 부른 줄도 몰랐다.이름이 불리는 순간까지 그 목소리는 너무 일상 속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잠시만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남자는 기자증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그건 이미 필요 없는 단계라는 듯한 태도였다.“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이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이 가방끈을 조금 더 세게 쥐고 있었다.“알고 있습니다.”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질문은 하나만 드리려고요.”그 하나가 얼마나 많은 말을 불러올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요.”남자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수의 얼굴을 훑었다.“지금 곁에 계신 그분인가요.”그 질문은 확정처럼 던져졌다.이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은 기자의 눈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부정은 아니군요.”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그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이 사람은 답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침묵을 기록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을.“더 이상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이미 이수의 얼굴에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으니까.그 시각, 도진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엔진은 꺼져 있었고, 라디오는 켜지지 않았다.그는 멀리서 건물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수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그리고 잠시 뒤 기자가 등을 돌리는 모습.그 장면을 보는 동안 도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지금부터는 이수가 ‘작가’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을.도진은 차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수를 만났을 때, 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봤어요?”“네.”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이수는 웃으려 했지
이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집을 나섰다.그 이유를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그저 집 안의 공기가 어제보다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 무게를 더 견디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낯설었다.눈가에는 피로가 엷게 남아 있었고, 입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이미 무언가를 설명한 뒤처럼 굳어 있었다.밖으로 나오자 아침의 소음이 쏟아졌다.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이수는 그 흐름 속으로 조용히 섞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이수 작가님이시죠.”낯선 여자 목소리였다.공손했지만, 조심스러움보다는 확신이 먼저 느껴졌다.“네, 맞습니다.”“저는 ○○매거진입니다. 짧게 인터뷰 요청을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이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정중히 대답했다.“인터뷰는 현재 일정이”“아, 알고 있습니다.”상대가 말을 끊었다.“그래서 이번엔 작품이 아니라 ‘작가님의 경험’에 대해 여쭤보려 했어요.”이수의 발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경험이요?”“네. 소설에 등장하는 감정선이 너무 생생하다는 이야기가 많아서요.”말투는 여전히 공손했다.그러나 질문은 이미 방향을 정해두고 있었다.이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제 작품은 상상과 조사에 기반한”“그럼 모델은 없으신 거죠?”질문이 더 짧아졌다.그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이 통화는 대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응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인터뷰는 어렵겠습니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전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끊긴 뒤에도 이수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사람들이 옆을 지나쳤고, 누군가는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그 시선들 속에 아직 적의는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느꼈다.이제부터는 그 시선들이 조금씩 의미를 갖게 될 거라는 것을.출판사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웠고,눈을 마
현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창밖에는 빛이 많았고, 그 빛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그는 책상 위에 놓인 얇은 파일 하나를 열었다.이수.이름 석 자 아래로정리된 기사, 일정, 평판,그리고 사람들.현은 그중 한 줄에 시선을 멈췄다.“가까운 지인: 도진(기업가)”지인이라는 단어는 참 편리했다.애매하고, 무해해 보이고, 그래서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바꿀 수 있었다.현은 비서를 불렀다.“믿을만한 기자 한 명 알아봐.”“입이 무거워야 하겠죠?”“응”현의 대답은 짧았다.“요즘 문화면 말고, 사회면으로도 이야기 하나 던질 수 있는 사람.”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그는 이미 대표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질문이 금기인지 알고 있었다.잠시 후, 다른 전화가 연결됐다.“오랜만입니다.”상대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반가웠다.“요즘도 사람들 이야기 잘 쓰시죠.”현의 말투는 대화라기보다 날씨를 묻는 것처럼 가벼웠다.“덕분에요. 대표님 쪽은”“소설 하나가 있더군요.”현이 말을 잘랐다.“너무 현실적이라 사람들이 헷갈린다는.”상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웃으며 말했다.“아, 그 작품이요. 요즘 화제죠.”“그런데.”현은 의자를 천천히 밀며 몸을 기대었다.“그 리얼함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지지 않습니까.”“무슨 말씀이신지…”“작가의 경험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이야기인지.”현의 말은 단정이 아니라 질문처럼 포장된 암시였다.상대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묵이 길어졌다는 것은 이미 관심이 생겼다는 뜻이었다.“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면 재밌을 수도 있겠네요.”현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확인은 필요 없습니다.”그는 부드럽게 말했다.“그냥 의문이면 충분합니다.”전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현은 상대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그저 의심이 자랄 토양만 남겼다.전화를 끊고 난 뒤, 현은 창가로 갔다.이번에는 도시를 내려다봤다.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