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밤,도진은 집에 돌아와 지하로 내려갔다.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서도 그는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벽 한가운데, 장식처럼 꽂혀 있는 검.청명.도진은 검을 만지지 않았다.다만 그 앞에 서서 아주 낮게 말했다.“아직은.”그 말은 검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아직은 칼을 꺼낼 때가 아니다.그러나 칼이 필요해지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날 아침, 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았다.이전 같았으면 무의식처럼 손이 먼저 움직였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화면을 켜는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작가’로만 불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창밖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소음이 흘러들었다.차 소리, 사람 목소리, 아침을 시작하는 도시의 숨.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 빛이 오늘은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는 번호였다.편집장이었다.“…네.”이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작가님.”편집장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지금 기사 하나가 더 올라왔요.”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이번엔… 조금 더 직접적입니다.”잠시 정적.“실명은 아니에요.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게 쓰였어요.”이수는 침대 끝에 앉았다.손바닥이 천천히 매트리스에 닿았다.“…링크 보내주세요.”잠시 후, 화면에 기사가 떴다.제목은 짧았다.‘베스트셀러 작가의 사랑,소설보다 현실이 더 닮았다’기사 속 문장들은 조심스러운 척 정제되어 있었지만, 방향은 하나였다.‘측근에 따르면’‘주변에서는 이미’‘사실상 공개 연인’이수는 스크롤을 내리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편집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작가님, 당분간 외부 일정은”“취소하죠.”이수는 짧게 말했다.“모두요.”“네… 알겠습니다
이수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돌아오지 못했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건물 입구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그녀를 불렀기 때문이다.“이수 작가님.”처음에는 자신을 부른 줄도 몰랐다.이름이 불리는 순간까지 그 목소리는 너무 일상 속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잠시만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남자는 기자증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그건 이미 필요 없는 단계라는 듯한 태도였다.“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이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이 가방끈을 조금 더 세게 쥐고 있었다.“알고 있습니다.”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질문은 하나만 드리려고요.”그 하나가 얼마나 많은 말을 불러올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요.”남자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수의 얼굴을 훑었다.“지금 곁에 계신 그분인가요.”그 질문은 확정처럼 던져졌다.이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은 기자의 눈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부정은 아니군요.”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그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이 사람은 답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침묵을 기록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을.“더 이상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이미 이수의 얼굴에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으니까.그 시각, 도진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엔진은 꺼져 있었고, 라디오는 켜지지 않았다.그는 멀리서 건물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수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그리고 잠시 뒤 기자가 등을 돌리는 모습.그 장면을 보는 동안 도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지금부터는 이수가 ‘작가’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을.도진은 차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수를 만났을 때, 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봤어요?”“네.”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이수는 웃으려 했지
이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집을 나섰다.그 이유를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그저 집 안의 공기가 어제보다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 무게를 더 견디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낯설었다.눈가에는 피로가 엷게 남아 있었고, 입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이미 무언가를 설명한 뒤처럼 굳어 있었다.밖으로 나오자 아침의 소음이 쏟아졌다.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이수는 그 흐름 속으로 조용히 섞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이수 작가님이시죠.”낯선 여자 목소리였다.공손했지만, 조심스러움보다는 확신이 먼저 느껴졌다.“네, 맞습니다.”“저는 ○○매거진입니다. 짧게 인터뷰 요청을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이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정중히 대답했다.“인터뷰는 현재 일정이”“아, 알고 있습니다.”상대가 말을 끊었다.“그래서 이번엔 작품이 아니라 ‘작가님의 경험’에 대해 여쭤보려 했어요.”이수의 발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경험이요?”“네. 소설에 등장하는 감정선이 너무 생생하다는 이야기가 많아서요.”말투는 여전히 공손했다.그러나 질문은 이미 방향을 정해두고 있었다.이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제 작품은 상상과 조사에 기반한”“그럼 모델은 없으신 거죠?”질문이 더 짧아졌다.그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이 통화는 대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응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인터뷰는 어렵겠습니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전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끊긴 뒤에도 이수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사람들이 옆을 지나쳤고, 누군가는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그 시선들 속에 아직 적의는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느꼈다.이제부터는 그 시선들이 조금씩 의미를 갖게 될 거라는 것을.출판사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웠고,눈을 마
현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창밖에는 빛이 많았고, 그 빛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그는 책상 위에 놓인 얇은 파일 하나를 열었다.이수.이름 석 자 아래로정리된 기사, 일정, 평판,그리고 사람들.현은 그중 한 줄에 시선을 멈췄다.“가까운 지인: 도진(기업가)”지인이라는 단어는 참 편리했다.애매하고, 무해해 보이고, 그래서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바꿀 수 있었다.현은 비서를 불렀다.“믿을만한 기자 한 명 알아봐.”“입이 무거워야 하겠죠?”“응”현의 대답은 짧았다.“요즘 문화면 말고, 사회면으로도 이야기 하나 던질 수 있는 사람.”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그는 이미 대표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질문이 금기인지 알고 있었다.잠시 후, 다른 전화가 연결됐다.“오랜만입니다.”상대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반가웠다.“요즘도 사람들 이야기 잘 쓰시죠.”현의 말투는 대화라기보다 날씨를 묻는 것처럼 가벼웠다.“덕분에요. 대표님 쪽은”“소설 하나가 있더군요.”현이 말을 잘랐다.“너무 현실적이라 사람들이 헷갈린다는.”상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웃으며 말했다.“아, 그 작품이요. 요즘 화제죠.”“그런데.”현은 의자를 천천히 밀며 몸을 기대었다.“그 리얼함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지지 않습니까.”“무슨 말씀이신지…”“작가의 경험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이야기인지.”현의 말은 단정이 아니라 질문처럼 포장된 암시였다.상대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묵이 길어졌다는 것은 이미 관심이 생겼다는 뜻이었다.“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면 재밌을 수도 있겠네요.”현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확인은 필요 없습니다.”그는 부드럽게 말했다.“그냥 의문이면 충분합니다.”전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현은 상대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그저 의심이 자랄 토양만 남겼다.전화를 끊고 난 뒤, 현은 창가로 갔다.이번에는 도시를 내려다봤다.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도진은 이수가 평소보다 말을 적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화가 끝난 뒤에야 알아차렸다.말수가 줄었다기보다는,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달라져 있었다.예전보다 조금 더 길었고, 그 사이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 듯한 공기가 있었다.“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네요.”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요즘 일정이 조금 겹쳐서.”괜찮다는 말은 늘 그렇듯대답이 아니라 마침표처럼 들렸다. 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배려일 때가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저녁이 내려앉은 거리,유리창에 반사된 불빛들이 천천히 발밑으로 흘러갔다.“집까지 바래다줄게요.”“아니에요. 여기서 갈게요.”이수의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 걸음 뒤에 섰다.그 순간, 그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났다.아픔은 아니었다.익숙한 통증도 아니었다.대신, 공기가 바뀌는 감각.도진은 고개를 들었다.거리는 여전히 평온했고,사람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느꼈다.지금, 이 풍경 안에 이질적인 시선이 하나 섞여 있다는 것.그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았다.따라오지도 않았고, 부딪히지도 않았다.그저 너무 정확하게,이수의 동선을 알고 있다는 느낌.도진은 멈췄다.이수는 몇 걸음 더 걷다가 그를 돌아봤다.“왜 그래요?”“아니요.”그는 짧게 답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반대편 유리창을 바라봤다.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얼굴.그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지켜야 할 대상이 생겼을 때의 감각.도진은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없었다.그저 몸이 먼저 반응했다.“이수 씨.”그가 불렀다.“오늘은 제가 여기까지만 갈게요.”이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아까는 집까지”“오늘은 여기까지만.”그의 말투는
현은 같은 문장을 세 번째로 읽고 있었다.이미 외워버린 문장이었고,그럼에도 다시 읽는 이유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 문장은 이수의 소설 속에 있었다.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은 조용히 화면을 껐다.모니터가 꺼지자 방 안의 조명이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지킨다…”그는 낮게 웃었다.웃음이라기엔 숨에 가까운 소리였다.지킨다는 말은 언제나 선택받은 자의 언어였다.그리고 그 선택권을 현은 한 번도 남에게 준 적이 없었다.탁자 위에 놓인 자료철을 집어 들었다.이수의 일정. 출판사 미팅.사인회 이후의 인터뷰 요청들.그리고 그 사이,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한 줄.도진 - 비공식 동행 추정현의 손끝이 멈췄다.“추정.”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확실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든다.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일정 하나 비워둬.”잠시 침묵.“예, 대표님.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묻지마.”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러나 그 부드러움에는 대화를 끝내는 힘이 있었다.전화를 끊은 뒤 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창가로 가지 않았다.오늘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대신 거울 앞에 섰다.말끔한 정장. 흐트러짐 없는 머리.누가 봐도 안정적인 얼굴.현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상하지 않나.”대답은 없었다.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나는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불편했어.”그 불편함은 사랑도, 증오도 아니었다.그보다는 ‘내 것이 아닌 무언가를 이미 가진 사람’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에 가까웠다.현은 기억해냈다.백화점의 소음. 사인회장의 빛.그리고, 도진이 쓰러지던 순간.그 장면에서 이수는 단 한 번도 현을 보지 않았다.그 사실이 현의 마음을 가장 깊이 긁었다.그는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확인해야겠지.”누가 먼저 그 선을 넘었는지.아니면, 이미 선이 없어진 건지.다음 날, 현은 이수를 찾았다.공식적인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