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차는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빌딩의 유리면이 사라지고, 나무가 늘어선 도로가 나타났다.속도가 느려지자 이수의 숨도 조금씩 제 박자를 찾았다.창밖을 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이상하죠.”“무엇이요.”“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오히려 하지 않은 말들이 더 무겁게 남아 있어요.”도진은 잠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 선택의 영역에 있다는 뜻입니다.”“선택…”“네. 말해버리면 되돌릴 수 없지만, 말하지 않으면 아직 지킬 수 있죠.”이수는 그 말의 끝을 천천히 되짚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버거운 걸지도 모르겠어요.”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잠시의 정적. 엔진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경적만이 공기를 채웠다.그때 도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그는 화면을 힐끗 보았다.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무슨 일이에요?”“확인해야 할 게 생겼습니다.”“지금요?”“예.”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당신과 관련된 건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이수는 그 말에서 ‘당장’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현 씨 쪽이죠.”도진은 부정하지 않았다.“그 사람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습니다.”신호가 바뀌었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이수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조용히 물었다.“제가 부담이 되는 건 아니죠.”도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엔진을 껐다.“이수 씨.”그는 처음으로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부담이라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겁니다.”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그럼…”“지켜야 할 선택입니다.”도진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당신이 이야기를 선택했듯이, 저는 당신 곁에 있는 걸 선택했습니다.”그 말은 과장도, 각오의 선언도 아니었다.이미 내려진 결정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었다.이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저는요.”그녀가 말했다.“지금도 가끔 겁이 나요. 당신까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밝은 복도의 소음이 한 박자 늦게 밀려들었다.구두 소리, 낮은 인사, 서류가 스치는 소리들.모두 일상의 얼굴이었다.그러나 이수에게는 그 일상이 유리처럼 얇아 보였다.“이쪽입니다.”직원이 길을 안내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도진은 반 걸음 뒤에서 자연스럽게 위치를 잡았다.그 배치는 누가 정한 것도,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둘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한 거리였다.회의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안쪽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자였다.아니, 기자들.“오늘은 사진도 같이”“질문은 사전에”“SNS 반응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미 이야기는 이수의 것이 되어 있었다.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이수는 자신의 심장이 생각보다 차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괜찮겠습니까.”도진이 낮게 물었다.“네.”이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이제는 괜찮아요.”문이 열렸다.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플래시가 터졌고, 순간적으로 공기가 뜨거워졌다.이수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그 말 하나로 소음은 조금 가라앉았다.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앉으면 방어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오늘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겠습니다.”기자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대신 제가 먼저 말씀드릴 게요.”도진은 회의실 벽 쪽에 서서 그 모든 반응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제 소설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기억이기도 합니다.”그 말에 누군가 펜을 멈췄다.“그리고 그 기억은 제가 선택해서 쓴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질문이 나오기 전,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저와 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그녀는 잠깐 시선을 옮겼다.도진을 향해.“그 관심이 어디까지 허락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습니다.”회의실의 공기가 눈에 띄게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아침을 건너왔다.신호등은 제 시간을 지켰고, 카페의 문은 늘 하던 대로 열렸으며,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아무 설명 없이 안고 걸었다.그러나 이수의 하루는 이미 어제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거울 앞에 잠시 섰다.화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머리카락도, 옷차림도. 달라진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뿐이었다.도진은 현관 옆에 서 있었다.신발을 신은 채, 문을 먼저 열지 않고 기다리는 자세로.“같이 나갈 겁니까.”그가 물었다.“네.”이수는 주저 없이 답했다.“오늘은 숨기고 싶지 않아요.”도진은 그 말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의 선택이 사소한 동행이 아니라는 것도. 문을 나서자 바람이 먼저 스쳤다.이수의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그 순간,도진은 아주 짧게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익숙하지 않은 공기의 밀도.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공간에 남아 있는 듯한 기척.“잠깐.”그가 걸음을 멈췄다.“왜요?”“그냥 확인하고 가죠.”도진은 골목 끝을 한 번,건너편 유리창에 비친 반사를 한 번, 그리고 이수의 등 뒤를 한 번 더 살폈다.아무것도 없었다.적어도 보이는 것들 중에는.“괜찮습니다.”그는 말했지만,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차에 오르자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문화면의 짧은 코너였다.“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행보에 대해 업계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이수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껐다.“오늘은 그 이야기 안 듣고 싶어요.”“안 들어도 됩니다.”도진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요.”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흘러갔다.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누군가는 아무 표정 없이 길을 건넜다.이수는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도진 씨.”“네.”“만약에요.”그녀는 문장을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이 모든 게 더 커진다면, 당신까지 잃게 된다면”“그 가정은 하지
새벽은 언제나 먼저 도착한 사람처럼 조용히 집 안을 채웠다.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이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새 그대로였다.잠들지 못했다기보다는 잠들지 않기로 선택한 자세에 가까웠다.부엌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그리고 아주 짧은 숨.도진이었다.“잠이 안옵니까?.”그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책망도, 염려도 아닌 사실 확인에 가까운 말투였다.“도진 씨도요.”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도진은 그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조금 비켜 선 채 창가에 기대 섰다.그 거리에는 의도적인 계산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연락이 올 겁니다.”“누구에게서요.”“어제 그 사람들.”이수는 잠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풀었다.“조건을 제시하겠죠.”“네.”“저를 빼고?”도진은 즉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가능성이 큽니다.”이수는 작게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는 한 번 숨을 고른 표정에 가까웠다.“그럼 제가 해야 할 선택은 이미 정해진 거네요.”도진이 고개를 돌렸다.“아직은 아닙니다.”“도진 씨.”이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사람들이 원하는 건 항상 비슷해요. 조용해지라는 것. 말하지 말라는 것. 혼자 있으라는 것.”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눈동자가 맑았다.“하지만 그건 선택이 아니에요. 지워지는 과정이죠.”도진의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래서 제가 옆에 있는 겁니다.”“옆에 있으면 당신이 위험해져요.”“이미 그 선은 넘었습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담담함이 오히려 확고했다.잠시 후,이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예상보다 빠른 연락이었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왔어요.”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받으세요.”이수는 스피커를 켰다.“말씀하세요.”상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그러나 정중함 아래에는 명확한 방향이 있었다.“작가님께서 최근 공개적인 발언을 하신 이후, 여러 방향에서
차는 한동안 시동을 끄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엔진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얇게 긁고 있었다.도진은 창밖을 다시 한 번 살폈다.차 안의 어둠과 차 밖의 어둠은 비슷한 색을 하고 있었지만 성질은 전혀 달랐다.“내려보겠습니다.”그는 조용히 말했다.확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동작을 입 밖으로 옮긴 말에 가까웠다.“혼자”“잠깐이면 됩니다.”이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의 움직임을 막지 않는 것이 지금의 선택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도진이 차문을 닫자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그 소리는 괜히 크게 느껴졌고, 그만큼 이 밤이 예민하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는 천천히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도발하지도, 숨지도 않는 중간의 속도였다.차 안에서는 누군가 내릴 기척이 없었다.“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도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잠시 뒤, 조수석 창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안쪽에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젊지도, 늙지도 않은 얼굴.감정을 최대한 지운 표정.“도진 씨죠.”질문처럼 들렸지만이미 알고 있다는 어조였다.“무슨 용건입니까.”“확인차 왔습니다.”“무엇을.”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고른 뒤 말했다.“작가님이 오늘 하신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도진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그 의미를 당신이 판단할 필요는 없겠지요.”남자는 작게 웃었다.“보통은 그렇죠.”그는 창을 더 내리지 않았다.거리는 그대로 유지된 채였다.“하지만 누군가는 그 선택 이후를 관리해야 합니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진은 충분히 이해했다.“돌아가시죠.”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남자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차창이 다시 올라갔고, 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도진은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차 안에서 이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문이 열리고 도진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오후 네 시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이상하게 늘어졌다.시계 초침은 분명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그 사이사이에 불필요할 만큼 많은 생각이 끼어들었다.이수는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노트북은 닫혀 있었고, 그 옆에는 휴대전화 하나만 놓여 있었다.공식 입장. 말을 하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그 말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어떤 문장은 잘리고, 어떤 어조는 왜곡되고, 어떤 침묵은 의도와 상관없이 해석될 것이다.도진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서성이지도, 앉지도 않았다.마치 이 공간 전체를 몸으로 감각하고 있는 사람처럼.“지금이라도 형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그가 말했다.“서면으로만 전달하거나, 질문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사람들은 더 물을 거예요.”“그래도 지금보다는”“아니에요.”이수는 도진을 바라보았다.“지금은 애매함이 제일 위험해요.”그 말은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잠시 후, 휴대전화가 울렸다.재단 담당자였다.“작가님, 준비되셨을까요.”“네.”이수는 짧게 대답했다.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도진은 그녀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제가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그는 이수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그러나 바로 밖에 있을 겁니다.”이수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좋아요.”현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비공개라는 말은 입구까지만 유효했다.카메라, 노트북, 작게 켜진 녹음기들.이수는 지정된 자리에 섰다.의자에는 앉지 않았다.“오늘 이 자리는 질문을 받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그녀의 첫 문장은 분명했다.“제 이야기를 제 목소리로 전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몇몇 기자가 서둘러 메모를 시작했다.“최근 제 작품과 제 사생활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저는 작품의 진정성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그 문장은 순간 공기를 바꾸었다.“그러나 작품을 이유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일에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