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121 - Chapter 130

182 Chapters

121화 한국 문단에 남을 걸작(1)

오후 4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대형 출판사 '문학정신'의 편집장실.김 편집장은 피로가 잔뜩 몰려오는 눈을 비비며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니터 하단에 메일 알림창이 깜빡거렸다.[발신자: 강도진 작가] [제목: 신작 1부 1차 원고분 송부의 건]"오, 왔네."김 편집장의 입에서 반가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강도진. 데뷔작부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문단의 기린아로 불렸던 사내.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몇 안 되는 천재 작가. 앞서 세 챕터 분량의 샘플을 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번 메일은 1부 전체 흐름을 묶은 공식 1차 원고분이었다. 그것도 예정된 중간 마감보다 무려 두 달이나 일찍 도착했다."어디 보자. 이번엔 또 무슨 기가 막힌 글을 써오셨나."김 편집장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첨부된 한글 파일을 열었다.김 편집장은 첫 세 챕터 샘플을 읽었을 때 적어둔 메모를 옆에 펼쳤다. 당시에는 문장이 살아났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이번 1부 원고는 달랐다. 그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잔혹함’보다 ‘자기기만’이라는 단어에 더 자주 밑줄을 그었다. 인물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전한 문을 닫고 더 위험한 쪽을 선택하는 구조가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김 편집장은 메모장에 ‘사건보다 선택이 무섭다’고 적었다. 이전 강도진 작품의 차가운 완성도와도 달랐다. 이번 글에는 실제 체온처럼 불쾌한 생생함이 붙어 있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편집자로서는 놓칠 수 없는 변화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방금 막 내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딸깍, 딸깍.마우스 휠을 굴리며 첫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아내는 언제나 순백색이었다. 그녀의 옷장에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화이트 수트가 걸려 있었고, 그녀의 목에는 내가 채워둔 수억 원짜리 다이아몬드 목줄이 차갑게 빛났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순백의 피부 아래, 얼마나 천박하고 시궁창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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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한국 문단에 남을 걸작(2)

"자, 작가님! 강 작가님! 아, 아니, 도진 씨!"김 편집장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호칭마저 헛갈리며 고함을 질렀다.[왜 그러십니까. 목소리가 많이 상기되셨네요. 보내드린 1차 원고분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보내주신 원고분 전부 읽었습니다! 아직 결말도 안 왔는데 벌써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도대체 이게 뭡니까? 네?! 이 미친 원고 대체 뭐냐고요!"김 편집장의 평가는 읽는 동안 쌓인 메모와 함께 더 구체적으로 이어졌다.김 편집장은 통화 중에도 몇 문장을 다시 확인하며 도진에게 말했다."선생님, 이거 정말 선생님 원고 맞죠?"[무슨 뜻입니까.]"좋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전이랑 달라요. 훨씬 불편하고, 훨씬 빨라졌습니다."도진은 말없이 창밖을 보았다."예전 원고는 문장이 독자를 설득했는데, 이번 건 독자를 끌고 가네요. 인물이 어디까지 망가질지 계속 보게 됩니다."그 평가는 정확했다.편집장은 일정을 앞당길 수 있겠다고 말했다. 분량만 확보되면 내부 회의를 바로 잡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제목은 《타인의 뮤즈》로 확정하신 거죠?"[네. 그대로 가겠습니다.]"주인공 모델이 있습니까? 너무 구체적인데."도진은 잠시 웃었다.[관찰을 많이 했습니다.]수화기 너머로 강도진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마음에 안 드셨나 봅니다. 폐기하고 다시 쓸까요?] "장난하십니까?! 앞서 세 챕터만 읽었을 때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1부로 이어 붙여 보니 더 무섭습니다! 숨을 못 쉬겠다고요! 읽는 내내 제 목이 다 졸리는 것 같았습니다!"김 편집장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창틀을 부여잡았다."여주인공 심리 묘사…… 하아, 진짜 미쳤습니다. 불륜에 빠진 여자가 느끼는 그 알량한 우월감이 내연남의 폭력 앞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박살 나는지, 그 신경증적인 강박과 공포가 텍스트 위로 펄떡펄떡 뛰어다녀요! 읽다가 구역질이 날 뻔했습니다. 너무 리얼해서요!"[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주인공이 요즘 아주…… 다채로운 영감을 주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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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한국 문단에 남을 걸작(3)

도진은 편집장이 특히 강하게 반응했던 구간을 떠올리며 1부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반응을 끌어낸 것은 노골적인 사건 자체보다, 남편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장면과 서아가 스스로 거짓말을 완성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는 그 공통점을 별도 메모에 적었다. 자극의 강도보다 인물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어떻게 합리화하는지가 이야기를 움직인다는 사실이, 편집자의 반응을 통해 처음으로 외부에서 검증됐다.도진은 편집장의 내부 회의 일정을 달력에 표시했다. 이제 원고는 몇 챕터짜리 샘플이 아니라 실제 편집 회의에서 다뤄질 1부 원고였다. 그는 달력 옆에 예상 수정 항목을 적었다. 장면 순서, 인물 동기, 반복되는 상징, 현실의 사건과 소설 속 사건이 너무 가까워진 구간. 출간 일정이 잡히자 해야 할 일의 성격도 달라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장면을 더 쌓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써 둔 원고를 낯선 독자가 읽어도 하나의 완결된 허구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이었다. 도진은 현실에서 가져온 세부와 소설을 위해 변형한 세부를 다시 분리해 표시했다. 그 작업만큼은 관찰이 아니라 작가로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이었다.'한국 문단에 남을 걸작이라.'당연한 반응이었다. 이건 작가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의 텍스트가 아니니까.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영혼을 실시간으로 도축해서 활자로 옮겨 담고 있는데, 리얼하지 않을 리가 있나.도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를 나섰다. 집 안은 무덤처럼 고요했다.그는 소리 없이 2층 복도를 걸어 안방 문을 열었다. 바깥은 이미 저녁이었다. 두꺼운 암막 커튼까지 닫힌 침실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백색소음 사이로, 누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흐읍…… 헉…… 아, 안 돼…… 오지 마……."침대 위. 서아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오늘 오후, 갤러리에서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낮에 복용한 신경안정제의 기운과 극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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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침입자, 그리고 붕괴하는 성벽(1)

밤 11시 30분. 이안의 작업실 바닥에는 빈 잭 다니엘 병과 소주병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하아…… 씨발."이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밤 9시까지 오라고 했다. 안 오면 그 잘난 남편의 서재로 쳐들어가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런데 백서아는 오지 않았다. 메시지 옆의 '1'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답장은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전원이 꺼져 있다는 무미건조한 기계음만 반복될 뿐이었다."백서아……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이안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펄떡거리며 뇌를 후벼 파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그의 눈동자는 이미 반쯤 돌아가 있었다.작업실 한가운데에는 어제 서아가 입고 왔던 크리스찬 디올의 화이트 수트가 갈기갈기 찢겨 걸레짝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서아의 남편, 그 재수 없는 강도진이라는 작자가 서아의 목에 채워두었던 수억 원짜리 개목걸이.이안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그 목걸이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다이아몬드 세공이 손바닥을 찔렀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나한테 그딴 식으로 굴면서, 그 가짜 새끼 품에서는 완벽한 아내인 척, 고상한 척 숨어 있겠다? 누구 마음대로."그는 서아가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오만함이 역겨웠다. 자신은 그저 그녀의 일탈을 위한 장난감, 스트레스 해소용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제 오후, 자신의 밑에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쾌락에 젖어 허덕이던 그 여자의 진짜 얼굴을 아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 완벽하고 새하얀 껍데기를 당장이라도 박살 내버리고 싶었다.이안은 목걸이를 청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한남동 저택으로 향하기 전, 이안은 작업실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결되지 않았다.네 번째 통화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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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침입자, 그리고 붕괴하는 성벽(2)

차에서 내린 뒤에는 자신이 처음부터 사람 눈을 피할 동선만 고르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상적인 방문이라 믿었다면 굳이 이렇게 몸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안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분노를 확인받는 일이 안전하게 돌아가는 일보다 중요해진 순간이었다.'한남동 언덕 끝,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회색 담장. 남편이 조용한 걸 좋아해서 정원까지 전부 막아놨다고 했지.'이안은 담장 가장자리에 몸을 붙이고 한동안 경비등이 돌아가는 간격을 노려보았다. 주변이 어둠에 잠긴 순간, 그는 조경석을 딛고 후면 담장을 거칠게 넘어섰다.쿵.정원 흙바닥에 떨어진 이안은 무릎을 짚었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젖은 잔디와 정원수 사이로 난 돌길 끝에, 2층짜리 저택의 현관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주머니 속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차가운 감촉이 그의 분노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이안은 비틀거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넓은 현관 계단을 올랐다. 고급스러운 대리석이 깔린 현관 앞,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도진과 서아의 완벽한 성벽이었다.이안은 비틀거리며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현관문에 달린 최신식 카메라 렌즈를 노려보며,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보안등이 켜진 현관 앞에서 그는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릴 준비를 했다.이안은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문자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서아가 돌아가고 싶어 했던 반듯한 세계를 직접 흔들어 놓아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현관 카메라를 올려다본 뒤 초인종에 손가락을 올렸다.같은 시각. 서아는 안방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죽은 듯이 기절해 있었다. 낮에 복용한 신경안정제의 기운이 그녀의 의식을 깊은 심해로 끌어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약물로 억눌린 무의식 속에서도 이안의 환청과 도진의 차가운 눈빛이 교차하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반면, 서재에 있는 도진의 눈은 밤의 올빼미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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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침입자, 그리고 붕괴하는 성벽(3)

"남편 새끼 깨워!!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날 내 밑에서 헐떡거리던 년이!!"월패드의 스피커를 타고 이안의 천박한 폭언이 거실 전체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히익!"서아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막혀왔다. 눈앞이 새까맣게 점멸했다.도진은 화면 속의 이안과 바닥에 주저앉은 서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다가왔다."서아야, 괜찮아? 엄청 취한 것 같은데…… 저 사람, 지난번에 우리 집에 왔던 이안 작가 맞지? 왜 저러는 거야?" "나, 나도 몰라! 요즘 갑자기 이상해졌어!"서아는 도진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스, 스토커야! 갤러리에 자꾸 찾아오던 미친놈이야! 당신한테 해코지할지도 몰라. 제발 문 열지 마, 도진 씨. 당장 경찰에 신고해! 제발…… 경찰, 경찰 부르자!"서아는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찾으려 바닥을 더듬다가 멈췄다. 낮에 박살 낸 핸드폰은 가방 깊숙이 넣어둔 채였고, 액정과 전원이 모두 죽어 있어 신고에 쓸 수도 없었다.도진은 무릎을 굽혀 서아의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손이 서아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토록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인데, 서아는 그 손이 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스토커처럼 집착했다고? 지난번 만찬 때는 멀쩡해 보였는데." "그 뒤부터 자꾸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집착했어! 제발 무시해, 여보…… 조금만 있으면 경비실에서 알고 끌어낼 거야."서아는 끅끅대며 오열했다. 자신이 뱉어놓고도 너무나 허술하고 멍청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목숨을 거는 것뿐이었다.그때, 밖에서 쾅쾅거리는 소리가 멈추더니 화면 속 이안이 카메라 렌즈 앞까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야! 강도진!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신 마누라가 내 작업실에 두고 간 이거, 내가 친절하게 가져왔다고! 직접 나와서 네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화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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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완벽한 포식자, 그리고 구걸하는 짐승(1)

철문이 반쯤 열리자, 현관 조명이 이안의 흐트러진 몰골을 선명하게 드러냈다."이 씨발년아! 당장 안 기어 나와?!"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이었다. 만취한 이안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현관 안으로 거칠게 몸을 들이밀었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백서아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이 바닥에 질질 끌어다 놓은 다음, 그녀의 완벽한 남편 앞에서 모든 진실을 까발려 그 알량한 가정을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하지만."어쿠."현관문 턱에 발이 걸린 이안의 몸이 흉하게 앞으로 쏠렸다. 알코올에 절여진 몸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 했다. 그 순간, 단정하고 길쭉한 두 손이 불쑥 뻗어 나와 이안의 양어깨를 단단하게 움켜쥐었다."조심하셔야죠. 대리석 바닥이라 머리 깨지기 십상입니다."서늘하고 차분한, 고급스러운 바리톤의 음성."……어?"이안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백서아가 아니었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큰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사내였다. 고급스러운 다크 네이비 실크 가운을 걸치고, 흐트러짐 없는 머리칼 아래로 무테안경을 쓴 남자. 강도진이었다."뭐, 뭐야. 놔, 이 새끼야!"이안은 화들짝 놀라며 도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도진은 순순히 손을 거두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주 흥미로운 벌레를 관찰하는 표정으로 이안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싸구려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늘어난 티셔츠, 무릎이 튀어나온 청바지. 그리고 코를 찌르는 역겨운 알코올 냄새와 테레빈유의 쩐내.'이런 게 내 완벽한 아내의 내연남이라니.'도진은 속으로 짧게 비웃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자신이 텍스트로 창조해 낸 '야만적이고 날것의 매력을 지닌 수컷'에 비하면, 눈앞에 선 이안은 그저 길거리를 떠도는 덜떨어진 똥개 새끼에 불과했다."남의 집 문을 다 부술 기세로 두드리시더니, 막상 주인이 나오니까 당황하신 모양이군요."도진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강도진……." "이안 작가님. 지난번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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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완벽한 포식자, 그리고 구걸하는 짐승(2)

"너, 진짜 다 알고 있었냐?"도진은 웃었다."계속 말씀하시죠."답을 주지 않는 태도가 이안의 불안을 더 키웠다.이안은 자신이 한 말 가운데 몇 개를 곧바로 주워 담으려 했다."아니,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고."도진은 고치지 않았다."계속하세요."그 한마디가 더 무서웠다.도진은 공격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스스로 모순을 만들게 했다. 어느 시점부터 이안은 서아를 폭로하러 왔다는 목적보다, 자신이 도진보다 우위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더 많은 말을 쏟았다.그리고 그럴수록 우위는 사라졌다.도진은 이안이 거짓말을 하는지보다 왜 그 말을 선택하는지를 봤다. 상대는 서아를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녀가 망가진 장면을 자랑했다. 소유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공개하겠다고 위협했다. 모순은 너무 선명했다. 도진은 그 점을 공격하지 않았다. 스스로 더 많이 드러내도록 두었다.이안은 말할수록 자신의 논리를 잃었다. 마지막에는 도진을 이기고 싶다는 감정만 남았다. 도진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도진은 이안이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상대가 감정에 밀려 스스로 더 많은 말을 고르게 두었다. 책임까지 장면의 일부로 계산하는 냉정함이었다.도진은 이안이 반복해서 서아의 선택을 자신의 승리처럼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럴수록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이안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확인이 아니라 우월감의 확인이었다. 도진은 그 욕망이 꺾이는 순간 어떤 표정이 나오는지 보고 싶었다.이안은 도진의 멱살을 잡기 위해 거칠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도진은 가볍게 몸을 틀어 이안의 손을 피했다. 그리고는 아주 유감스럽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술을 너무 많이 드셨네요. 안주도 없이 깡소주만 들이부으셨나. 숨을 쉴 때마다 속에서 썩은 내가 올라오는데, 비위가 상해서 대화를 못 하겠습니다."도진이 손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살짝 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철저한 경멸. 벌레를 대하는 듯한 그 노골적인 태도에 이안의 머릿속 퓨즈가 끊어졌다."이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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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완벽한 포식자, 그리고 구걸하는 짐승(3)

도진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는 한 치의 분노나 질투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오만과 조롱만이 가득했다."착각하지 마세요. 내 아내는 그저 '더러운 것'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입니다." "이, 씨발……!" "매일 최고급 요리만 먹고, 최고급 실크만 두르다 보니까 지루했던 거지. 그래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오물이 신기해서 잠깐 만져본 겁니다. 당신 말대로, 잠깐 다리를 벌려주고 스트레스나 푸는 딜도처럼 쓴 거죠."딜도. 오물. 도진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이안의 알량한 자존심을 난도질했다."그런데 어쩌죠. 오물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해도 결국 냄새가 나기 마련이거든요. 아내가 최근에 당신을 피하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제 냄새가 배니까 질려서 버리려는 겁니다. 역겨워졌다는 뜻이에요."도진은 이안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아주 다정하고 모욕적인 손길이었다."그러니까 이렇게 새벽에 남의 집까지 기어 와서 짖어대는 거 아닙니까. 주인한테 버림받기 싫어서 안달 난 똥개처럼." "아, 아니야……. 서, 서아는 나한테……!"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입 찢어버리기 전에."순간. 도진의 목소리가 영하의 온도로 뚝 떨어졌다. 부드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온데간데없고, 사람을 산 채로 회 쳐버릴 듯한 살의가 뚝뚝 묻어나는 눈빛이 이안을 정면으로 꿰뚫었다.이안은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끝까지 올랐던 취기가 단숨에 얼어붙으며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무서웠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내의 불륜을 다 알면서도, 그 내연남을 눈앞에 두고도 이토록 철저히 상황을 통제하고 조롱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자신은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 애초에 차원이 달랐다. 자신이 기껏해야 길거리에서 칼을 휘두르는 양아치라면, 강도진은 하늘 위에서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말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설계자였다.이안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주르륵 미끄러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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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구원자의 완벽한 품(1)

현관 쪽의 소음은 이미 끊겨 있었다. 방금 닫힌 육중한 철문과 잠긴 도어락 너머로, 조금 전까지 현관을 뒤흔들던 이안의 고함과 난동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숨 막히는 정적. 무덤 속 같은 고요가 거실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히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아의 공포를 더 키웠다. 현관 밖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도진이 무엇을 들었는지, 자신은 단 하나도 확인할 수 없었다."……하아, 헉…… 흑……."거실 한가운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엎드려 있던 서아는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몸을 둥글게 말고 바들바들 떨었다. 낮에 복용한 신경안정제의 잔여 기운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지만, 극도의 공포가 약효를 완전히 짓눌러버렸다.'어, 어떻게 된 거지? 그 미친 새끼가 돌아간 건가? 도진 씨가 경찰을 불렀나? 아니면…… 도진 씨가 다 들은 건가? 내가 그 새끼랑 뒹굴었다는 그 더러운 소리들을, 내 남편이 다 들어버린 건가?'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갔다. 이안이 밖에서 지껄였던 천박한 단어들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내 침대. 다리를 벌려. 내 장난감."아, 아아…… 안 돼, 제발……."서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벌벌 떨렸다. 그때였다.서아의 시야 위로 길고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도진은 이미 거실 안에 들어와 몇 걸음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관문을 닫고 돌아선 뒤부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사람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서아는 마치 사형 집행인과 눈이 마주친 사형수처럼 몸을 흠칫 굳혔다."서아야."차분하고, 다정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시야 너머로, 단정한 다크 네이비 가운을 입은 도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도진의 얼굴에는 분노도, 경멸도, 배신감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서아를 안심시키던 그 따뜻하고 자상한 남편의 얼굴, 그 자체였다. 도진은 바닥에 웅크린 서아의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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