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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뮤즈》全部章節:第 111 章 - 第 120 章

131 章節

제111화. 활자로 빚어낸 광기, 그리고 완벽한 무대(1)

 타닥. 타다닥. 탁.타닥. 타닥. 타다다다닥. 탁.거대한 저택,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도진의 서재.무거운 암막 커튼이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한 그곳에는 오직 기계식 키보드의 파열음만이 서늘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것은 32인치 듀얼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백라이트뿐이었다.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도진의 얼굴은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창백했고, 턱 밑으로는 거뭇한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평소 언론과 대중 앞에서 보여주던 '완벽하고 단정한 지식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지금 이 서재 안의 도진은 철저한 괴물이었고, 동시에 완벽한 신(神)이었다."하하..."건조한 웃음소리가 키보드 소리 사이로 새어 나왔다.도진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모니터 화면을 집요하게 훑어 내렸다.왼쪽 모니터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흑백의 텍스트가, 오른쪽 모니터에는 잘게 분할된 폴더와 음성 파일, 그리고 수십 장의 사진들이 띄워져 있었다.그 사진들 속에는 그의 아내, 서아가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육체를 탐하는 젊은 화가, 이안의 모습도 함께."그래. 이 부분의 감정선이 조금 헐거웠어."도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오른쪽 모니터의 오디오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지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며칠 전 이안의 작업실에서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진이 서아의 숄더백 안감 깊숙한 곳에 심어둔 초소형 녹음기가 수집한 '생생한 날것'의 데이터였다.― "이안... 제발, 그만해. 우리 이러다 정말 큰일 나."― "큰일? 무슨 큰일. 남편한테 들킬까 봐 그래? 그 위선자 자식은 당신이 여기서 내 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상상도 못 해!"― "흐윽... 도진 씨는 그런 사람 아니야. 나한테, 나한테 너무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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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활자로 빚어낸 광기, 그리고 완벽한 무대(2)

 느낌이 아주 좋아, 서아. 어쩌면 내 평생의 역작이 될지도 몰라."도진의 말에 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편의 성공은 아내로서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서아의 가슴 한구석에는 이유 모를 섬뜩함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즘 도진이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그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서아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어떤... 내용인데요?"서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남편의 소설 내용에 크게 관여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왠지 모르게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도진은 차를 한 모금 천천히 넘기고는, 책상에 기대어 서아를 올려다보았다."한 여자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지.""...파멸이요?""응. 겉보기엔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야. 자상한 남편, 흠잡을 데 없는 지위, 안정적인 일상. 하지만 그녀는 그 완벽함 속에서 오히려 숨 막혀 해.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삶과는 정반대의 궤도에 있는 위태롭고 거친 남자에게 빠져들지."서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숨이 턱 막혀왔다.도진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했지만, 그 내용이 묘사하는 상황은 마치 자신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날카로운 단검 같았다."그... 남자는 어떤 사람인데요?"서아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물었다. 도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예술가. 혹은 예술가인 척하는 허풍쟁이. 여자는 남자의 그 위태로운 열정에 자신이 구원받고 있다고 착각해. 자신이 그의 '뮤즈'가 되었다고 믿지. 육체적인 쾌락과 일탈이 주는 자극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포장하면서 말이야.""......""하지만 서아, 진정한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돼."도진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서아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번쩍이는 광기를, 서아는 애써 외면해야 했다."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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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유리성의 붕괴(1)

 다음 날 오전.전날 투자자 회의실에 난입한 권이안이 자료를 던지고 사라진 뒤, 갤러리 도아는 곧바로 긴급 후속 이사회를 소집했다.갤러리 VIP 응접실의 공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통제된 항온 항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아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꼈다.테이블 위에는 서아가 전날 이미 보았던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권이안이 제출한 작업실 출입 CCTV 캡처본과 문자 일부, 그리고 법무팀의 1차 검토 의견서였다.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갤러리 메인 스폰서, 최 회장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그 옆에 배석한 이사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평소라면 서아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 백 관장님" 하며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았을 인간들이었다. 서아가 입은 옷의 브랜드, 서아가 기획한 전시의 우아함, 그리고 무엇보다 '천재 작가 강도진의 완벽한 아내'라는 타이틀을 핥아대기 바빴던 자들이, 지금은 벌레를 보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최 회장님. 어제 투자자 회의에 이어 곧바로 이사회까지 소집하신 이유는 압니다. 하지만 권이안이 남긴 자료는 원본조차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백 관장."최 회장이 무겁게 서아의 말을 잘랐다."어제 투자자들 앞에서 제출된 자료를 법무팀이 1차 검토했습니다. 이제 감정적인 해명이 아니라, 이 기록들이 왜 존재하는지 공식적으로 설명해요.""변명할 생각 마요. 찌라시 도는 거 막느라 내가 쓴 돈이 얼마인지 압니까? 우리 갤러리 후원하는 사모님들 사이에서 벌써 백 관장 이름이 어떻게 오르내리는지 알아요?"최 회장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서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천재 작가의 고결한 뮤즈. 우아하고 기품 있는 갤러리 관장. 우리가 백 관장한테 투자한 건 백 관장 안목 때문이 아니야. 강도진이라는 브랜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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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추락한 백조의 애원(1)

 강남의 한복판.화려한 빌딩 숲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리는 바람 소리가 마치 거대한 괴물의 기괴한 울음소리처럼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도심의 화려한 네온사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오색찬란하게 번쩍였지만, 그 빛들은 지금 서아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비참한 처지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폭로하는 레이저 포인터 같았다.서아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손톱이 가죽 커버를 깊숙하게 파고들어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핏기가 완전히 가신 손가락 마디마디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 모를 차가운 한기가 터져 나와 온몸의 혈관을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불규칙하고 거칠게 요동쳤다.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방금 전 갤러리 VVIP 응접실에서 최 회장과 이사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당한 끝에 직무 정지와 최종 경고를 받고 밀려나온 그녀였다."더러운 스캔들이 난 여자의 그림은 거실에 걸 수 없다"던 최 회장의 잔인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이명처럼 윙윙거리며 맴돌았다.자신을 우러러보던 직원들의 그 차가운 조소와 멸시의 눈빛이 온몸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이제 그녀에게는 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발밑이 툭 꺼져버린 것 같은 아득한 절망감이 전신을 지배했다.수십 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사회적 수명이 다음 이사회 결정 하나에 끊길 위기에 놓인 것이다.'집으로 가야 하나? 아니야, 거긴 안 돼.'생각이 거기에 미치자마자 서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 거대하고 차가운 저택에는 강도진이 있었다.아무것도 모른 채 서재에서 고결하게 글을 쓰고 있을, 혹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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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추락한 백조의 애원(2)

 "뭐...? 결국 터졌네? 너 지금 그게 말이 상상이나 돼? 너한테는 이게 남 얘기야? 그 갤러리가 나한테 어떤 곳이었는지 몰라? 내 전부였어! 내 인생이자 내 목숨 같은 곳이었다고! 내 손으로 바닥부터 일궈낸 내 왕국이었단 말이야! 내 지위, 내 명예가 다 거기 있었는데... 그런데 네가... 네가 날 완전히 망쳤어!"서아는 주먹으로 운전대를 거칠게 내리쳤다.클락션이 길게 빵- 하고 울리며 주변의 공기를 찢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이안의 무신경한 태도가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을 넘어 송곳으로 찌르고 있었다.그녀의 인생이 무너지는 순간에, 이안은 그저 날씨 얘기하듯 가볍게 대꾸하고 있었다.누나, 진정해. 그깟 갤러리 관장 자리가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그래? 어차피 그 돈 많은 영감탱이들 비자금 세탁해 주고 그림 장사하는 꼭두각시 방패막이였잖아. 백서아라는 이름 석 자보다 '강도진의 아내'라는 타이틀 덕에 앉아있던 자리 아니었어? 솔직해지자고. 누나도 알고 있었잖아. 그 자리가 누나 진짜 실력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거.이안의 뻔뻔하고 날카로운 대답에 서아는 숨이 턱 막혔다.가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그녀에게 그 갤러리는 단순히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직장이 아니었다.강도진이라는 거대한 천재의 그늘 밑에서 존재감을 잃고 말라 죽어갈 때, 오롯이 '백서아'라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안식처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성벽이었다.그것을 이안은 '꼭두각시', '가짜 자리'라며 거침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너한테는 그게 그렇게 우습고 천해 보여? 내가 그 자리를 지키려고 어떤 짓까지 했는지 알아? 대기업 사모님들 비위 맞추고, 비위 상하는 더러운 꼴 다 보면서 십 년 넘게 지켜온 자리야! 네가 뭘 안다고 내 인생을 네 멋대로 지껄여! 네가 내 고통을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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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추락한 백조의 애원(3)

 서아는 구두 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성큼성큼 다가가 이안의 어깨를 붙잡아 억지로 돌려세웠다."이안! 내 말 안 들어?! 똑바로 내 눈 보고 말하라고!"이안은 붓을 멈추고 귀찮다는 듯 서아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그리고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매캐한 회색 연기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흐리며 시야를 답답하게 가로막았다."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차 막히는 시간인데 샛길로 잘 찾아왔나 봐.""시치미 떼지 마. 이사회에 CCTV 캡처본과 문자 일부를 넘긴 거 너지?! 나를 완전히 사회적으로 고립시켜서 네 장난감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터뜨린 거잖아!"서아의 눈이 핏발로 가득 차 번들거렸다.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갈라져 가늘게 떨렸다.이안은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담배를 바닥에 던져 구두 굽으로 비벼 껐다. 바닥에 검은 그을음과 담배 재가 새로 추가되었다."그래. 내가 넘겼어."이안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구두 굽으로 비벼 끄며,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은 채 인정했다."누나가 끝까지 갤러리랑 그 잘난 체면 뒤에 숨으려고 했잖아. 그 성벽이 무너지면 더는 나를 버리고 돌아갈 곳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누나가 내 작업실을 드나든 CCTV 캡처본이랑 우리가 주고받은 문자 일부를 이사회에 던진 거야.""이 미친 새끼... 나를 완전히 사회적으로 고립시켜서 네 손아귀에 쥐려고?"서아가 이안의 멱살을 잡으려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안은 가볍게 그녀의 두 손목을 낚아채며 비릿하게 웃었다."이제야 알아듣네. 진실을 전부 증명할 필요도 없었어. 원본이 없더라도 누나가 겁먹고 무너지는 모습만 만들면 충분했으니까. 누나는 이제 그 가짜 왕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갈 곳은 여기뿐이야.""닥쳐! 그래도 도진 씨에게만은 절대 알릴 수 없어.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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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추락한 백조의 애원(4)

 툭.무릎이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 바닥에 닿았다.그 충격이 뼈를 타고 전신으로 전해졌다.프랑스에서 직구한 수백만 원짜리 명품 실크 스커트가 바닥의 먼지와 검은 유화 물감 얼룩에 그대로 쓸려 더러워졌다. 하지만 서아에게는 그 비싼 옷 따윈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목숨줄이 끊어지게 생겼는데 옷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이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언제나 고고하고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을 아랫사람 대하듯, 혹은 장난감 대하듯 내려다보던 '상류층의 백조' 백서아가, 지금 자신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 완벽한 굴복의 형태에 이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오만한 자존심이 극상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다."누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이안의 목소리에서 거만함이 싹 가셨다.대신 당혹감과, 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상황이 주는 기묘한 충격이 그 자리를 채웠다.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더러운 바닥을 짚었다.손바닥에 닿는 거친 모래먼지와 굳은 물감의 감촉이 그녀의 비참함을 더욱 극대화했다.참아왔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시멘트 위의 먼지를 적셨다. 어둠 속에서 눈물 자국만이 투명하고 슬프게 빛났다."이안... 제발... 제발 부탁이야... 내 평생 처음으로 남한테 빌게..."서아가 바닥에 엎드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기 시작했다.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가득 차 가늘게 갈라져 있었다. 자존심 같은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그녀를 지배했다."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쳤었어. 다 내 잘못이야. 네 말대로 내 가식이었고, 내 이기적인 허영심이었어. 내가 감히 널 이용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나를 살려줘. 나를 이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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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파국의 조건(1)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테레빈유 냄새.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언제나 눅눅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숨이 막혔다. 서아는 축축하게 땀이 밴 손바닥을 코트에 문질러 닦으며 철문 앞에 섰다.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몇 시간 전, 이안은 바닥에 엎드린 서아의 애원에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녀를 작업실 밖으로 내쫓았고, 서아는 해가 완전히 진 뒤에야 한남동 저택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밤 10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이안에게서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안 오면, 내가 그 완벽한 집으로 갈게. 형이랑 같이 마실 와인이라도 사 들고.'첫 번째 애원에서 아무런 답도 얻지 못한 채 저택으로 돌아온 서아를, 한 시간 전 도착한 그 문자가 다시 이 지옥 같은 지하실로 끌어냈다. 도진이 서재에서 원고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 도망치듯 빠져나와 택시에 올라타는 내내 서아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다.끼기긱-.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캄캄한 작업실 한가운데에 이안이 앉아 있었다.불조차 켜지 않은 어둠 속. 오직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만이 그의 실루엣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이젤 앞에 앉아, 붓 대신 맨손으로 캔버스를 짓이기고 있었다."……이안아."서아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힘없이 떨어졌다.그제야 이안의 손이 멈췄다.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손에서 붉은색 유화 물감이 핏방울처럼 뚝, 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왔어?"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음성. 평소 그녀를 향해 애타게 짖어대던 짐승 같은 열기는 온데간데없고, 소름 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도진 형은? 자?""너… 진짜 미쳤어? 밤 열한 시에 거기로 오겠다는 둥,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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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파국의 조건(2)

 "난 잃을 게 없거든. 애초에 밑바닥이었으니까. 그런데 넌 다르지. 백서아 관장님. 유명 소설가 강도진의 우아한 아내. 네가 가진 그 알량한 명예, 지위, 돈, 그리고 완벽한 가정."이안이 서아의 뺨을 물감 묻은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아의 하얗고 비싼 실크 블라우스 위로, 이안의 손에 묻어 있던 붉은 물감이 마치 핏자국처럼 흉측하게 번져갔다."이 그림들, 형 출판사로 보낼까? 아니면 네 갤러리 로비에 걸어둘까.""안 돼… 안 돼, 제발. 넌 예술가잖아. 네 재능을 이런 데 쓰지 마. 넌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어? 제발, 내가 뭐든 다 해줄 테니까…."서아가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참혹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동정심이라고는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차가운 얼음장 같았다."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이안이 서아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페인팅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서아는 그가 자신을 찌르기라도 할까 봐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하지만 이안은 나이프의 날카로운 끝으로 서아의 얼굴이 그려진 캔버스를 툭툭 치며 말했다."도진 형한테 말해.""……뭐?""내 앞에서."이안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그 잘난 형 얼굴 똑바로 보고,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지금까지 날 기만하고 내 뒤에서 이딴 짓을 벌였다고. 네가 사랑하는 건 강도진이 아니라 나, 이안이라고.""미쳤어…? 도진 씨가 알면 널 가만둘 것 같아?! 그 사람은 내 남편이야! 날 사랑한다고!""사랑? 형이 널 사랑해?"이안이 미친 사람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텅 빈 지하실을 섬뜩하게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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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가장 따뜻한 지옥(1)

 "기사님, 빨리요. 제발 조금만 더 빨리 가주세요."서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뒷좌석에 웅크리듯 앉은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손님, 지금 과속 카메라 구간이라서요. 여기서 더 밟으면 딱지 날아옵니다."룸미러로 서아를 힐끗 쳐다본 택시 기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제가 낼게요! 벌금 제가 다 낼 테니까, 그냥 밟아주세요. 네? 제발요…."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서아의 눈빛은 반쯤 초점을 잃고 있었다. 기사는 혀를 끌쯧 차며 속도를 조금 올렸지만, 서아에게는 그것조차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가로등 불빛이 마치 이안의 작업실에서 번뜩이던 백열등처럼 서아의 눈을 찔렀다.『내일 밤. 도진 형한테 이 대표작 한 점이 배달되기 전에, 네가 먼저 형을 끌고 이리로 와.』귓가에 이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하아… 하아…."서아는 숨을 고르기 위해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코끝에서는 여전히 지독한 테레빈유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미친놈. 그건 사람이 아니야. 미쳤어, 완전히 돌았어.'자신의 가장 추악하고 적나라한 모습을 담아낸 수십 장의 캔버스. 그중 가장 노골적인 대표작 한 점이 도진의 눈앞에 펼쳐지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손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영 안 좋은데, 병원으로 모실까요?""아니요! 아니요, 그냥 집으로 가주세요. 똑바로 가고 있는 거 맞죠? 다른 길로 새는 거 아니죠?""아 참, 내비게이션대로 똑바로 가고 있다니까요. 손님이 방금 타셔놓고 무슨…."서아는 기사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코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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