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191 - Chapter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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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화 화형식(火刑式)(1)

  텅 빈 작업실.도진이 떠난 지 한참이 지났다.이안은 찢어진 캔버스와 부러진 붓, 터진 물감 사이에 주저앉은 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닥치는 대로 그림을 뜯고 짓밟았던 탓에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손톱 밑에는 물감과 캔버스 섬유가 뒤엉켜 있었고, 바닥에는 자신이 그토록 귀하게 다뤘던 작품의 조각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흩어져 있었다.더 부술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이안을 진정시키지 못했다.오히려 모든 것이 망가진 뒤에야 작업실의 적막이 더 또렷해졌다. 그림을 찢을 때는 소리라도 있었다. 이젤이 넘어지고 나무틀이 부러지고 유리병이 깨지는 동안에는 분노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소리마저 끝났다.이안은 한참 동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이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이 손으로 서아를 붙잡았고, 자신이 그녀를 지배했다고 믿었다.그리고 방금 전에는 그 믿음의 증거라고 여겼던 것들을 제 손으로 전부 찢어버렸다.그런데도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가슴속에 박힌 패배감은 그대로였다.도진에게 들은 말도, 서아를 향해 품었던 집착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었던 시간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이안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벽에는 못과 액자 자국만 흉하게 남아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누드화들은 더 이상 그림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붉고 검은 물감이 뒤섞인 바닥은 마치 상처 난 피부처럼 번들거렸다.그는 그 잔해를 보고도 더는 발로 차지 않았다.작품을 망가뜨리는 일은 이미 끝났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이 공간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이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도 남는다. 벽과 바닥, 냄새와 얼룩, 부러진 이젤과 찢긴 캔버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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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화형식(火刑式)(2)

  이안은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두 팔을 벌리고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는 백서아의 얼굴들을 보며 지독한 희열을 느꼈다.파지직! 찌지직!캔버스 천이 타들어 가는 소리.유화 물감이 끓어오르며 터지는 소리.그것은 마치 이안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았다.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젤이 불타고, 소파가 불타고, 바닥에 흩뿌려진 기름길을 따라 작업실 전체가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순식간에 짙고 검은 유독가스가 천장으로 차올랐다."콜록! 콜록!"희열은 짧았다.유독가스가 폐부로 밀려들어 오자, 이안은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커헉… 콜록…!"이안은 본능적으로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실. 출구인 철문은 저 불길 너머에 있었다.'나가야 해.'이안은 비틀거리며 철문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바닥에 흩뿌려진 기름 탓에, 온통 불바다였다. 발을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뜨거워… 윽!"바지 밑단에 불이 붙을 뻔한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그때였다.자신이 불을 질렀던 가장 거대한 캔버스 더미 너머로, 미처 타지 않은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 백서아라는 여자에 미치기 전,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만으로 밤을 새워가며 그렸던 '자화상'이었다.불길이 그 그림의 가장자리를 핥아먹으려 하고 있었다."안 돼…."순간, 이안의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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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화 화형식(火刑式)(3)

  "양팔과 손에 깊은 3도 화상을 입으셨습니다. 특히 손등과 손가락 쪽의 손상이 심각합니다.""3도… 화상…?""네. 피부 전층과 피하조직이 광범위하게 손상됐고, 일부 신경 손상도 확인됩니다. 생명과 큰 관절의 움직임은 지킬 수 있겠지만, 손가락의 감각과 정밀 운동 기능은 회복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이안의 숨이 멎었다.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신경이… 파괴됐다고요…?"이안의 턱이 덜덜 떨렸다."그럼… 나을 수는 있는 거죠? 수술하면… 수술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거잖아요….""…….""대답해 봐요! 나 화가란 말이야! 나 천재 소리 듣는 화가라고! 손이 생명인데, 손이 안 움직이면 어떡해!"이안이 악을 쓰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통증 탓에 쉰 신음을 흘리며 다시 베개 위로 무너져 내렸다.의사는 차마 이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생명에는 지장이 없도록 피부 이식 수술을 진행할 겁니다. 일상생활에서 숟가락을 들거나, 문고리를 여는 정도의 큰 동작은 재활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그런 거 말고! 붓! 붓을 쥘 수 있냐고 묻잖아!"이안의 처절한 외침에, 병실 안에는 차가운 침묵만이 감돌았다."안타깝지만…."의사의 한숨 섞인 대답이, 사형 선고처럼 병실 안을 울렸다."미세한 손가락 움직임과 감각을 요구하는 정밀 작업은 회복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장기적인 재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뭐라고요?""적어도 이전과 같은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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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구역질 나는 안도(1)

  오전 11시.암막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서아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졌다."으음…."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치 뇌수를 시커먼 진흙으로 꽉 채워놓은 것 같은 묵직한 두통이었다. 어젯밤 도진이 먹여준 수면제의 독한 기운이 아직도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서아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최고급 구스다운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몸에서 흘러내렸다.초점 없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넓은 침실. 은은하게 풍기는 고가의 디퓨저 향기.모든 것이 반듯하고 평온했다.어젯밤, 이안이 보낸 끔찍한 누드화 앞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던 일이 마치 전생의 악몽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덜컥.그때, 침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도진이 들어왔다."깼어?"도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고 차분했다.그는 빳빳하게 다려진 네이비색 셔츠에 단정한 슬랙스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허브티가 담긴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도, 도진 씨…."서아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몸을 웅크렸다. 어젯밤 남편의 발밑에서 살려달라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비참하게 매달렸던 기억이 그제야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쉬어. 아직 약 기운이 안 빠졌을 거야."도진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서아의 손에 머그잔을 쥐여주었다.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서아의 차가운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손길에 서아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그… 그림은….""내가 거실에서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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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화 구역질 나는 안도(2)

  [불은 오늘 새벽 2시쯤 지하 작업실 내부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작업실 안에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던 시너와 유화 물감 등 인화성 물질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순식간에 화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인명 피해는 어떻습니까?]앵커의 질문에, 기자의 표정이 어둡게 굳어졌다.[네, 안타깝게도 화재 당시 작업실 안에 있던 화가 31세 권 모 씨가 양팔과 손을 중심으로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기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권 씨는 탈출 과정에서 쏟아진 인화성 물질을 뒤집어쓰면서 양팔과 손에 심한 3도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등과 손가락의 피부 전층과 피하조직이 광범위하게 손상됐고 일부 신경 손상도 확인된 상태입니다.]"……!"서아의 입이 벌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담당 주치의의 소견에 따르면, 권 씨는 손가락의 감각과 정밀 운동 기능을 회복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로, 사실상 이전과 같은 화가 활동으로 복귀하기는 힘들 것으로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권 씨는 최근 미술계에서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목받던 신진 작가였습니다.]쨍그랑-!서아의 손에서 미끄러진 유리컵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차가운 물과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그녀의 맨발 위로 튀었지만, 서아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양팔과 손에 심한 3도 화상.''손의 정밀 기능 회복 불가.''이전과 같은 화가 활동으로 복귀하기는 힘들 것으로….'기자의 건조한 목소리가 서아의 고막을 잔인하게 난도질했다."이안… 이안이&h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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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구역질 나는 안도(3)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서아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멈췄다.그녀의 입술 끝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듯 위로 말려 올라갔다."하…."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하하…."그녀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폭발적인 안도감이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뻗어 나갔다.이안이 화상을 입어 평생 붓을 잡지 못한다는 끔찍한 비극은 더 이상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오직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 자신의 완벽한 인생에 묻을 뻔했던 오물이, 저 불길 속에서 말끔하게 타버려 정화되었다는 사실만이 그녀를 걷잡을 수 없는 환희에 젖게 만들었다."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서아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 위로 엎드리며 낄낄거렸다."증거가 없어… 이제 아무도 날 협박 못 해. 도진 씨도 모를 거야. 나는 영원히 우아하고 고결한 백서아로 남을 수 있어."그녀는 환희에 찬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꺼져가는 TV 화면 속에서, 여전히 시커멓게 불타버린 작업실의 잔해가 비치고 있었다. 그 잔해 속에서 이안이 얼마나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을지, 얼마나 고통스럽게 자신의 손이 타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을지.그 끔찍한 이미지가 다시 한번 서아의 머릿속을 강타했다."……!"그 순간이었다.광적으로 웃고 있던 서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명확하게 인지되었다.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남자.나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박살 나고,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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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타인의 뮤즈(1)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그날 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던 마포구 망원동 낡은 상가 건물 지하 작업실의 화염은 거짓말처럼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젊고 전도유망했던 천재 화가 이안.그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양팔과 손의 신경이 크게 손상된 채 영원히 붓을 놓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뉴스는, 하루 이틀 대중의 가십거리가 되더니 이내 새로운 연예계 스캔들과 정치판의 비리 뉴스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타인의 비극은 대중에게 그저 씹다 버리는 껌보다 못한 유희거리에 불과했다.화재로 작업실에 남아 있던 나머지 누드화 원본과 작업용 저장 장치가 전소되자, 이사회가 확보한 CCTV 캡처본과 일부 문자만으로는 편집 여부와 전체 맥락을 확정하기 어려워졌다. 도진은 외부에 서아가 집착적인 화가에게 스토킹과 협박을 당한 피해자라는 입장을 조용히 흘렸다. 법무팀이 원본 파일과 메타데이터의 부재를 문제 삼으면서 해임안은 보류되었고, 서아는 여섯 주 뒤 대외활동 제한을 조건으로 관장직에 복귀했다.복귀한 뒤 남은 넉 달여 동안 서아는 후원자들을 다시 붙잡고 스캔들을 덮는 데 매달렸다. 상처 난 평판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강도진의 명성과 피해자 프레임은 그녀가 관장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방패가 되어주었다.그리고 화재로부터 정확히 6개월 후, 다음 해 봄.대한민국 문단과 출판계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폭발적인 이슈로 들끓고 있었다.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수백 명의 기자와 문학 평론가, 그리고 출판계 관계자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플래시 세례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쉴 새 없이 터졌다.찰칵! 찰칵찰칵!그 눈부신 빛의 홍수 중심에, 강도진이 앉아 있었다.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지적인 인상을 주는 은테 안경. 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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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타인의 뮤즈(2)

  도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곧바로 인터넷 기사로 쏟아져 내렸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5위까지는 온통 '강도진', '타인의 뮤즈', '차희수' 등의 키워드로 도배되었다.간담회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도진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풀었다.벌컥.출판사 대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강 작가! 대박이야, 대박! 지금 교보랑 예스24 서버 또 터졌어! 2쇄 10만 부 추가로 발주 넣었고, 당장 다음 주부터 전국 서점 매대 싹 다 도배될 거야!""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도진이 가볍게 목례를 하자, 대표는 도진의 두 손을 덥석 부여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내가 진짜 소설 원고 처음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바지에 지릴 뻔했다니까? 도대체 지난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옛날 그 건조하고 관념적이던 문체는 싹 사라지고, 그냥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날카롭고 끈적해졌어. 특히 그 화가 놈 작업실 묘사! 그 테레빈유 냄새랑 여자의 땀 냄새가 섞이는 묘사는, 진짜 눈앞에서 불륜 현장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내 심장이 다 벌렁거리더라고!""과찬이십니다.""과찬은 무슨! 이 책은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 될 거야. 벌써 영화사 세 곳에서 판권 달라고 백지수표 내밀고, 해외 출판사에서도 번역 판권 문의가 쏟아지고 있어."출판사 대표가 침을 튀기며 떠드는 동안, 도진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화면에는 '사랑하는 아내'라는 발신자 이름이 떠 있었다.[도진 씨, 간담회 잘 마쳤어요? 기사 쏟아지는 거 보고 있어요. 내 남편이지만 너무 자랑스러워. 이따 저녁에 갤러리 파티에서 봐요. 사랑해♡]도진은 화면 속 서아의 애교 섞인 메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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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타인의 뮤즈(3)

  디자이너가 흥미롭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불륜? 도진 씨가 그런 삼류 소재를 썼다고?'뭔가 기분이 찜찜했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어차피 천재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픽션에 대중이 열광하는 것일 테니,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다 됐습니다, 사모님. 오늘 정말 최고로 아름다우세요."자리에서 일어난 서아는 카드를 내밀어 수백만 원어치의 결제를 시원하게 긁었다.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오늘 밤은 내가 주인공이야.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겠지.'오후 7시.서아가 관장으로 있는 청담동 갤러리 도아.갤러리 1층은 전시된 미술품들 사이로 화려한 케이터링 뷔페가 차려져 있었고, 대한민국 정재계와 문화 예술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모여들었다.오늘의 표면적인 이유는 갤러리의 봄 기획전 오프닝이었지만, 사실상 강도진의 신작 출간을 축하하는 부부의 화려한 사교 파티나 다름없었다."어머, 서아 관장님! 오늘 너무 아름다워요.""강 작가님 책 대박 난 거 축하해요! 두 분 정말 부러워 죽겠어."서아는 밀려드는 축하 인사에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감사해요. 도진 씨가 워낙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옆에서 챙겨준 것밖에 없는걸요."그녀는 완벽한 현모양처의 얼굴로 가식을 떨었다.딸깍, 쿵.그때 갤러리 입구의 육중한 유리문이 열리고, 도진이 들어섰다.그가 등장하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사람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비켜주며 박수를 쳤다."도진 씨!"서아가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미끄러지듯 다가가 도진의 팔짱을 꼈다.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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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화 거울 속의 지옥(1)

  화재로부터 정확히 여섯 달이 지난 그날 밤.서아는 관장직을 유지한 채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이전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이사회 조사 뒤 대외활동 제한이 한동안 이어졌지만, 갤러리 운영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몇몇 행사는 여전히 부관장이 대신 참석했고 주요 계약은 공동 결재를 거쳤다. 예전처럼 모든 권한이 한 손에 모여 있지는 않았지만, 명함에는 다시 ‘관장 백서아’가 적혀 있었다.사람들은 그녀의 회복이 빠르다고 말했다. 오전 일정은 다시 분 단위로 정리됐고, 작품 설명회에서는 예전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피하던 전시장에도 들어갈 수 있었고, 컬렉터들의 시선을 받아내는 법도 되찾았다.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달랐다. 잠들기 전 현관 잠금장치를 두 번 확인했고, 낯선 배송 알림이 뜨면 손부터 차가워졌다. 붉은색이 강한 그림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짧아졌다. 회복은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무너진 부분을 남에게 보이지 않게 관리하는 기술에 가까웠다.도진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평온했다. 그는 이전보다 더 자상했고, 이안에 관해서는 먼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 침묵 덕분에 서아는 모든 일이 끝났다고 믿을 수 있었다.출간 행사를 마치고 귀가한 뒤 도진에게서 직접 받은 양장본을 품에 안고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초판 띠지에는 도진의 신작이 기록적인 판매 속도를 보이고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속표지에는 도진의 익숙한 필체가 남아 있었다.‘나의 영원하고도 완벽한 뮤즈, 서아에게.’그래서 양장본을 품에 안은 채 침실 문 앞에 섰다. 아직은 그 책이 축하와 사랑의 증표라고 믿고 있었다.침실 문을 닫기 직전까지도, 이 책이 지난 여섯 달 동안 간신히 복원해 둔 세계를 다시 무너뜨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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