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Chapter 181 - Chapter 190

198 Chapters

제181화

위층에서 내려오던 장여진은 한껏 단장한 슬비를 보고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잠시 다른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인 듯 멍해졌다...“엄마?” 장여진이 멈춰 선 걸 보고 슬비가 조용히 불렀다.장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됐어. 시간 다 됐어. 이제 호텔로 가자.”...예식장은 호강시에서도 손꼽히는 반도호텔이었다. 이재는 연회층 전체를 통째로 빌렸다.호텔 로비에는 외부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출입구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십여 명이 무전 이어셋을 착용한 채 주변을 빈틈없이 살피고 있었다.포토월에는 천장부터 생화 장식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려하다 못해 호사스러웠고, 공기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감돌았다.슬비가 탄 차가 멈추자마자 문이 열렸다.무심코 고개를 든 슬비의 눈이 웃음기 어린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차 밖에는 이재가 서 있었다. 몸에 꼭 맞게 재단된 검은 턱시도에 흰 셔츠, 흐트러짐 없이 맨 보타이까지. 원래도 선명한 이목구비가 한층 더 차갑고 깊어 보였다.“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슬비는 어젯밤 꿈이 떠오르면서 괜히 귓불이 붉어졌다. 꿈속의 이재와 눈앞의 이재가 겹쳐 보였다.이재가 슬비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보고 싶어서.”“좀 얌전히 있어요.”이재는 입꼬리만 살짝 올렸을 뿐 더 놀리지는 않았다. 슬비의 손을 잡고 연회장 쪽으로 걸었다.지혁은 기둥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눈에 확 띄는 와인빛 정장을 입은 채 능청스럽게 웃다가, 두 사람이 다가오자 옆의 재떨이에 담배를 끄고 반갑게 다가왔다.“제수씨, 오늘 진짜 눈부신데요? 하이재, 너 복 터졌다. 오늘 밤 신났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이재가 곁눈질로 지혁을 째려봤다.감정이라고는 거의 없는 눈빛이었는데도 지혁의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곧바로 두 손을 들면서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잘못했다. 입 닫을게.”지혁은 입술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시선이 입구에서 하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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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호텔 입구로 키 큰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정장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반듯했고 허리는 긴 창처럼 꼿꼿했다. 차갑게 다듬어진 이목구비와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눌러버리는 분위기가 눈에 띄었다.지혁의 눈이 반짝이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형! 여기!”태혁이 다가와 먼저 이재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축하한다.”이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고마워.”태혁의 시선이 슬비에게 향했다.생화 포토월 앞에 선 슬비의 가느다란 몸을 새틴 머메이드 드레스가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쇄골 부근의 진주와 다이아 장식이 반짝이면서 하얀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태혁은 슬비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저 얼굴은...’옆에서 그 모습을 본 지혁의 가슴이 철렁했다.‘형이 원래 저렇게 사람 얼굴을 빤히 보는 타입이 아닌데?’‘남의 아내를 저렇게 보고 있으면 이재가 가만히 있겠어?’지혁이 태혁을 놀릴 말을 꺼내려는데, 시야 끝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들어왔다.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이재 일행도 지혁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같은 곳을 바라봤다.호텔 정문으로 여러 사람이 무리 지어 들어오고 있었다.맨 앞의 남자는 오십 세 전후로 보였다.관리를 잘한 체격에 곧은 어깨와 등에는 잘 재단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부드러운 눈매가 휘어 있어서 얼핏 보면 무척 인자한 인상이었다.그런데 오히려 그 온화하고 무해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사람들은 동시에 긴장했다.지혁은 습관처럼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가 빈손만 만졌다. 오늘은 결혼식이라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작은 소리로 욕을 내뱉은 지혁이 은강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 늙은 여우, 외국으로 쫓겨난 거 아니었어? 언제 돌아온 거야? 왜 아무 소식도 없었지?”은강의 표정도 어두웠다. “몰라. 나도 들은 거 없어.”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서로의 눈에는 똑같은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하석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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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넓고 따뜻한 이재의 손이 슬비의 귀를 완전히 감싸서 외부 소리를 막았다.슬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이재가 슬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는 아직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슬비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는 금세 부드러워졌다.“여보, 내 말을 잘 들어.”손가락 사이로 이재의 목소리가 조금 먹먹하게 들려왔다.“알맹이도 없는 놈 헛소리는 듣지 마.”이재는 ‘알맹이도 없는’이라는 부분을 유난히 또렷하게 말했다.지혁은 그 의미를 알아듣고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어깨를 계속 들썩거렸다.하빈의 얼굴이 금세 시퍼렇게 굳어졌다. 두 주먹을 꽉 쥐면서 곧바로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빈아.”그때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화를 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빈의 움직임은 그대로 멈췄다.하빈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재를 죽일 듯 노려본 뒤, 분을 삭이지 못한 얼굴로 결국 하석구의 뒤로 물러났다.주인이 목줄을 잡아당긴 사나운 개와도 같았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서도 더 이상 앞으로 달려들지는 못했다.하석구가 손을 들어 이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눈매는 다정하게 휘어 있었고 미소도 온화했다.“이재야, 좋은 날인데 형이랑 싸우지 마.”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석구가 만진 어깨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눈썹을 살짝 세우면서 손으로 천천히 털어냈다. 마치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처럼.하석구는 그 모습을 보고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시선이 곁에 선 슬비에게 향했다.“이 아이가 네 신부구나? 보기 좋네. 네가 꽁꽁 숨긴 이유를 알겠어. 삼촌한테 청첩장 한 장 안 보내더니.”이재가 담담하게 말했다. “삼촌은 괜한 말씀을 하시네요. 애초에 초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돌려 말할 생각도 아예 없다는 듯한 대답이었다.곁에서 듣던 지혁은 괜히 두피가 당기는 기분이 들면서 등을 곧게 세웠다.그런데도 하석구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재야, 그게 무슨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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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다들 입구에 서서 뭐 하니?”그때 민혜숙이 주예원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왔다.팽팽하던 분위기가 그나마 조금 누그러졌다.하석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자연스럽게 허리를 낮췄다. “어머니, 오셨습니까.”민혜숙이 하석구를 한번 보고 말했다. “셋째야, 나 좀 안으로 부축해다오.”“네.” 하석구가 한층 더 부드럽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민혜숙은 하석구의 팔을 잡고 몇 걸음 걸었다. 연회장 입구가 가까워졌을 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갈 생각이냐?”하석구는 진심 어린 얼굴로 웃었다. “이재 결혼인데 삼촌인 제가 며칠은 있어야죠. 식이 끝나고도 어머니 곁에서 며칠 더 지내면서 못한 효도도 좀 하겠습니다.”“효도?”민혜숙은 걸음을 잠깐 늦추고 하석구를 돌아본 뒤 다시 앞을 향했다. “그 마음만 받으마. 나도 나이가 들어서 시끄러운 건 힘들다. 네 효도는 나중에 천천히 받지.”하석구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셋째야.” 민혜숙이 말을 잘랐다. “내가 널 돌아오게 한 건 이재 결혼식에 참석하라는 뜻이지, 판을 흐리라고 부른 게 아니다.”하석구의 미소에 아주 미세하게 금이 갔다가 곧 아무 일도 없던 듯 사라졌다.하석구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는 너무 크게 생각하십니다. 제가 감히 그러겠습니까.”“안 그러면 됐다.”민혜숙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이 묻어났다. “이재는 어릴 때부터 팔자가 사나웠다. 부모도 일찍 잃었고, 내가 못해준 게 많아. 이제 겨우 제 짝을 만났으니 누구도 방해하게 두지 않을 거다.”하석구가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쓸데없는 욕심도 접어. 하씨 집안의 가주 자리는 네가 넘볼 자리가 아니야.”하석구의 손가락이 살짝 말렸다가 다시 펴졌다. 고개를 든 얼굴에는 흠잡을 데 없는 진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어머니가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조카 결혼을 축하하고 술 한잔 얻어 마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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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알았어요.”이재가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며 슬비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결혼은 처음이라도 친구들의 결혼식에는 몇 번 가 본 적이 있었다.식이 끝난 뒤 신부가 하객들에게 얼굴도 비추지 않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하씨 집안은 원래 이런가?’...신부대기실은 조용했지만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이재는 지혁, 은강과 함께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했다.신랑이 직접 인사를 다니고 있었지만, 술은 대부분 지혁과 은강이 대신 받아 마셨다.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신랑이 둘인 줄 알 정도였다.“신부가 대단하긴 하네. 식 끝나고 얼굴 한 번 안 비치고 신랑이 친구 둘 데리고 다 돌잖아. 이게 뭐야?”“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신부가 인사 자리에 아예 안 나오는 결혼식은 처음 봐요. 하씨 집안에서 신부를 너무 감싸는 거 아니에요?”“쉿, 목소리 낮춰요. 신부 쪽 어른들이 바로 옆에 있잖아요.”옆 테이블에 앉은 몇 사람이 원국한과 장여진 쪽으로 턱짓을 했다. 눈에는 은근히 얕잡아보는 기색이 스쳤다.원국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에는 어느새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다.하객들이 목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띄엄띄엄 들려오는 말만으로도 등에 가시가 박히는 기분이었다.원국한은 장여진을 힐끗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슬비한테 가봐. 나와서 사람들한테 인사 좀 하라고 해. 계속 이러면 모양이 안 좋잖아.”장여진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신부대기실로 향했다.신부대기실은 연회장 옆 복도 끝에 있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어셔 따뜻한 금빛 조명이 열린 틈 사이로 흘러나왔다.문을 열자, 슬비는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 자락이 카펫 위로 꽃처럼 넓게 펼쳐져 있었다.“엄마? 어떻게 왔어? 밖은 다 끝났어?”“끝나긴 뭐가 끝나.”장여진은 슬비 앞으로 걸어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여기 앉아 있어? 밖에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얼굴도 안 비쳐?”슬비가 과일 포크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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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장여진의 웃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냥...”“장모님께서 그렇게 술자리 인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이재가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장모님께서 대신 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장여진이 멍하니 굳었다.“아까 말씀하신 대로 테이블마다 다 돌고, 잔을 권하면 남기지 말고 받으십시오. 조금 마시다 내려놓으면 성의가 없어 보인다고 하셨죠.”이재는 말을 멈추고 슬비의 손목에 아직 남아 있는 붉은 자국을 내려다봤다.“장모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부 하시면 됩니다. 괜찮으시죠?”장여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입술을 떨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이재의 어두운 눈을 마주하자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나오지 않았다.결국 울상에 가까운 웃음을 억지로 지었다. “그래... 내가 할게. 지금 바로 나가서 할게.”장여진이 나가자 대기실 문이 닫혔다. 바깥의 소란도 함께 멀어졌다.슬비는 반사적으로 뒤를 따라가려 했지만 이재가 허리를 감아 다시 끌어당겼다.“왜 그래요?”이재는 슬비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붉은 자국은 거의 가라앉고 연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아파?”슬비는 고개를 저으면서 이재를 올려다봤다. 맑은 눈동자 안에 남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비쳤다.“우리 엄마는 원래 저래요... 당신이 그렇게 겁을 주면 오늘 밤 잠도 못 잘걸요.”이재는 조용히 웃으면서 엄지로 슬비의 손목을 살살 문질렀다. “잠 안 오면 잘됐네. 몇 잔 더 마시면 푹 자겠지.”슬비는 말문이 막혔다가 결국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 남자... 진짜 뒤끝 작렬이네.’...피로연 후반부, 장여진은 술잔을 들고 테이블을 하나씩 돌며 인사를 했다.원래 술이 센 편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와인을 두어 잔 마시는 정도였다.잔이 작기는 해도 테이블 수가 너무 많았다.테이블마다 한 잔씩만 받아도 십여 잔이 금방 쌓였다.절반쯤 돌았을 때 이미 한계가 왔다.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장여진은 급히 입을 막고 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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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네 앞가림이나 해. 무슨 축복 타령이야, 연애도 못 하는 놈이.”“야! 갑자기 사람을 왜 때려?”“아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네. 입 닫아.”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검은색 마이바흐는 도로의 차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차에 앉은 슬비는 달아오른 귓불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차가 운서원 안으로 천천히 들어갈수록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처음에는 결혼식이 끝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문제는 방금 지혁이 떠들어댄 말이었다...‘첫날밤... 나랑 하이재가?’어젯밤에 꾼 꿈까지 떠올랐다.솔직히 슬비는 이재가 싫지는 않았다.친밀 불안 장애가 있는데도 이재와 가까이 닿는 건 다른 사람만큼 거부감이 크지 않았다.오히려... 기대해 본 적도 있었다.‘언젠가 정말 누군가와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면...’‘그 사람이 하이재라면... 괜찮을지도 몰라...’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차가 멈췄다.슬비가 창밖을 보니 어느새 운서원에 도착해 있었다.개집에서 뛰쳐나온 흑풍이 차 주변을 돌면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도우가 재빨리 목줄을 잡아서 다른 쪽으로 데려갔다.이재가 먼저 내린 뒤 슬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가사도우미들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진작 자리를 비운 뒤였다. 넓은 집 안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만 조용히 울렸다.계단 앞에서 이재가 걸음을 멈추고 슬비를 마주 봤다.슬비가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턱선과 천천히 움직이는 목젖이 한눈에 들어왔다.“피곤해?”“안 피곤해요.”“배고파?”슬비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 배고프지 않아요.”이재는 더 묻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시선을 좀처럼 떼지 않았다.그 눈길이 어색해서 슬비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때, 이재가 허리를 숙이면서 슬비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아...”작게 놀란 슬비가 본능적으로 이재의 목을 끌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안아서 올라가려고.”“혼자도 걸을 수 있어요.”“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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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슬비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대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아... 아니에요...”이재는 단추가 반쯤 풀린 셔츠를 한 손으로 벗어 던졌다. 균형 잡힌 근육이 드러났다.슬비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근데 여보, 네가 정말 원하면 못 해줄 것도 없는데.”슬비는 얼굴을 붉힌 채 얼른 손을 빼냈다. 심장이 북을 울리는 것처럼 쿵쿵 뛰었다.이재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시선울 둘 곳도 없었고 머릿속은 더 엉망이었다.‘내가 원한다니. 먼저 이러는 건 자기면서...’슬비는 입술을 깨물고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이재가 한 걸음 가까워지자 슬비는 얼른 손을 뻗어서 밀려고 했다. 그런데 맨가슴에 손바닥이 닿자,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 곧바로 손을 거뒀다.피부를 통해 전해진 열기 때문인지 팔 한쪽이 저리는 것 같았다.“씻으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수준이었고 고개는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얼른 얼굴을 이불 속에 숨기고 싶었다.이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슬비를 가만히 바라봤다. 눈길은 얼굴에서 쇄골, 가느다란 허리를 지나 침대 위로 펼쳐진 드레스 자락까지 천천히 내려갔다.욕망을 대놓고 드러내는 시선도 아니었다. 오히려 참는 기색이 짙었다. 그런 절제가 더 심장을 빠르게 만들었다.슬비는 옷을 다 입고 있는데도 괜히 온몸이 간지러웠다.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이는 듯해서 심장이 뛰는 소리조차 감출 수 없을 것 같았다.손을 들어 이재의 눈을 가렸다. “당신... 보지 마요.”이재가 조용히 웃었다. 가슴속에서 울리는 웃음소리는 나지막하고 뜨거웠다. 작은 망치로 가슴을 계속 두드리는 기분이었다.이재가 몸을 숙여 슬비 양옆으로 팔을 짚었다. 몸 전체를 안에 가두듯 가까워졌지만 직접 닿지는 않았다.슬비의 호흡이 금세 흐트러졌다.따뜻하고 뜨거운 숨결이 뺨을 스쳤다. 은은한 소나무 향도 함께 느껴졌다.뒤로 물러나려 해도 등 뒤에는 매트리스뿐이었다. 더 피할 곳이 없었다.이재가 낮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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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9화

이재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슬비의 손바닥 아래에서 이재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쿵- 쿵- 자신의 심장보다도 더 빠르게 뛰었다.“네가 지금 뭘 하는 건지는 알아?” 목소리는 거칠게 잠겨 있었다.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팔을 풀지도 않았다.고개를 내린 채 속눈썹만 가볍게 떨렸다. 감추려고 해도 긴장과 당황이 그대로 드러났다.이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꼭 감은 채 짧게 숨을 고르는 모습은 마치 큰 결정을 앞둔 사람과도 같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동안 붙잡고 있던 절제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이재가 입을 맞추자 슬비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지금까지의 가벼운 키스와는 달랐다. 깊고 거칠었다. 오래 눌러온 갈망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쏟아진 듯 슬비를 놓아주지 않았다.숨이 막힐 만큼 격한 키스가 이어졌다. 슬비는 두 손으로 이재의 가슴을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당신...”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 때마다 이재의 입술이 다시 말을 삼켰다.도망치려고 해도 팔이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어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생각은 점점 흐려졌다. 따뜻한 물속에 오래 잠겨 있는 듯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허리께에 닿은 이재의 손은 뜨거웠다. 얇은 드레스 천 너머인데도 피부가 델 것처럼 열기가 선명했다.불이 꺼졌다.커튼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바닥 위에 은빛 길처럼 길게 누웠다.시트가 사각거리면서 이불이 뒤엉켰다.창밖에는 짙은 달빛이 머물렀고, 방 안의 밤은 길게 이어졌다....슬비는 언제 이재에게 안겨서 욕실로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몸은 솜처럼 축 늘어져서 손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욕조 안에 몸을 담그자 따뜻한 물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수증기가 피어올라서 시야가 흐릿했다.이재는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수건으로 슬비의 머리카락을 닦아주고 있었다. 손길은 아주 느리고 부드러웠다.슬비가 몰래 이재를 올려다봤다.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고 관자놀이를 따라 물방울이 흘렀다. 느긋하고 만족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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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슬비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통유리창 가까이 닿았다. 눈앞에는 어두운 밤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야경이 아니었다.오히려 짙고 고요했다.바다는 먹빛처럼 어두웠고 멀리 작은 어선의 불빛 몇 개만 깜빡였다. 검은 벨벳 위에 흩뿌린 보석 조각과도 같았다.통유리창으로 쏟아진 달빛이 슬비의 몸을 은빛으로 감쌌다.뺨이 차가운 유리에 닿자, 내쉰 숨결이 유리 위에 얇은 김을 만들었다.유리에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비쳤다. 흐트러지고 겹쳐져서 형태를 알아보기가 어려웠다.“당신...”멈춰 달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생각과 다르게 떨렸다....몇 시간이 지난 뒤, 슬비는 이불 속에 푹 파묻힌 채 붉어진 귓바퀴만 조금 내놓고 있었다.이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고개를 돌려서 이불 밖으로 나온 작은 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이불을 조금 아래로 끌어내렸다.슬비의 얼굴이 드러났다. 삶은 새우처럼 온통 새빨갰다.“왜요?” 슬비가 노려봤다. 목소리에는 한바탕 울고 난 뒤의 쉰 기운이 남아 있었다.‘아까 그렇게까지 그만해 달라고 했는데...’‘‘여보’라고 부르라고 해서 불렀고,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서 불렀는데...’‘평소라면 입에 담지도 못할 민망한 호칭까지 전부 했는데...’‘그런데도 이 인간은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어!’‘나쁜놈이야!! 진짜 너무해!!’‘입으로는 계속 나를 ‘여보’, ‘자기야’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달래놓고.’‘정작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이재가 조용히 웃었다. “답답할까 봐.”슬비는 이제 머리도 몸도 몽롱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고 싶었다.이재는 슬비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가 없었다. 몸을 조금 일으켜 내려다보니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길고 검은 속눈썹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날개를 접고 쉬는 검은 두 마리의 나비 같았다.이재는 희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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