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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مؤلف: 삼심귀일
송태경이 고개를 드는 순간, 윤해인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본래 고귀한 신분이라서일까.

이토록 은밀하고 음사한 짓을 들켰음에도, 송태경의 안색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초상화를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느긋하게 허리띠를 매만졌다.

불과 몇 초 사이, 송태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고 금욕적인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던 사내의 모습이 한낱 환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윤해인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끝까지 풀지도 못하고 집어넣다니, 답답해서 병이라도 나지 않겠어? 원하면 내가 도와줄까?”

송태경은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저 몸을 슬그머니 뒤로 물려 윤해인과의 거리를 벌릴 뿐이었다.

“큰아가씨, 무슨 용건이 있으십니까?”

늘 이런 식이었다.

윤채원의 초상화만 보고도 짐승처럼 욕망을 불태우면서, 윤해인 앞에서는 세상 모든 번뇌를 끊어낸 성인군자라도 되는 양 굴었다.

윤해인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윤채원의 밋밋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몸매도, 이목구비도 나보다 한참은 떨어지는 년이거늘.’

세상 사내들은 왜 그 가증스러운 순진한 척에 속아 넘어가지 못해 안달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윤해인은 수려한 미모도, 넘쳐나는 재력도, 그리고 관능적인 몸매도 지니고 있었으니까.

오늘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가차 없이 내버릴 생각이었다.

“내일 진보각(珍寶閣)에 진품들이 새로 들어온다니 같이 가보자.”

윤해인은 차가운 목소리로 할 말만 툭 던지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뒤에 서 있던 송태경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소인이 기억하기로 이번 이틀간은 공무를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날이옵니다.”

“윤채원도 온다더구나.”

윤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마디 내뱉었다.

뒤편에서 숨 막히는 침묵이 일었다.

이윽고 송태경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큰아가씨.”

윤해인의 가슴 한구석이 송곳으로 찔린 듯 찌르르 아파왔다.

역시나 윤채원의 이름 석 자만 나오면, 송태경은 제 신조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려버렸다.

‘걱정 마.’

‘조금만 참으면, 내가 직접 널 윤채원의 품으로 기꺼이 던져줄 테니까.’

다음 날 아침, 윤해인이 저택 밖으로 걸어 나오자마자 마차 옆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송태경의 모습이 보였다.

몸에 딱 붙는 검은색 무복이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하게 조여진 허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그의 날카롭고 수려한 옆모습을 타고 은은한 금빛 테두리를 그렸다.

평소라면 윤해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노골적으로 유혹했을 터였다.

발목이 삔 척 그의 너른 품에 쓰러지거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붉은 입술을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윤해인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송태경에게는 단 한 줌의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송태경 역시 예상치 못했다는 듯 윤해인을 가만히 쳐다보았지만,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묵묵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진보각으로 향하는 내내 윤해인은 줄곧 창밖만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말을 섞기 위해 시답지 않은 핑계를 대지 않으니, 차 안에는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아슬아슬하게 부딪치고 있었다.

진보각은 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다.

새로운 보물이 들어올 때마다 신분이 고귀한 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드는 명소였다.

윤해인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저 멀리 서 있는 윤채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윤채원은 벚꽃 문양의 치마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올린 채, 유난히 희고 가는 목선을 드러내며 다른 가문의 영애들과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무해하고 연약한 가련함 그 자체였다.

찰나의 순간, 송태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여전히 윤해인의 뒤에 버텨 서서 호위무사로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윤해인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신경이 이미 윤채원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언니!”

두 사람을 발견한 윤채원이 걸음을 재촉해 다가와서는 윤해인의 팔짱을 다정하게 꼈다.

“참 우연이네요. 언니도 장신구를 고르러 진보각에 오신 거예요?”

윤해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윤채원의 팔을 단번에 쳐냈다.

“내 몸에 손대지 말거라.”

순간, 윤채원의 커다란 눈망울에 즉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윽고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송태경을 올려다보았다.

“태경 오라버니... 전 그저 언니랑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송태경의 미간이 단박에 구겨졌다.

윤해인을 내려다보는 눈빛 깊숙한 곳에는 차가운 혐오가 번뜩이고 있었다.

한편, 윤채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송태경의 옷소매를 슬그머니 움켜쥐었다.

“태경 오라버니, 지난번에 제가 고열로 끙끙 앓았을 때 팥고물 떡을 먹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하세요? 오라버니께서 한밤중에 장대비를 다 맞아가며 그걸 사다 제 처소에 두고 가셨다면서요. 그땐 정신을 잃을 만큼 아파서... 이제야 겨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네요.”

송태경의 얼어붙어 있던 눈매가 순식간에 봄눈 녹듯 부드러워졌다.

“둘째 아가씨,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입니다.”

‘지나가던 길?’

윤해인은 속으로 피식 비웃었다.

그날 밤 무려 다섯 시진 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돌아왔던 자가 이런 뻔뻔한 수작을 지껄이다니.

“그래도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요!”

윤채원이 콧소리를 섞어가며 애교 섞인 말투로 쫑알거렸다.

송태경은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았다.

“둘째 아가씨께서 편한 시간으로 정하십시오.”

“그럼 그때 언니도 같이 가는 거예요!”

윤채원이 돌연 윤해인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란 척 입술을 가렸다.

“어머, 그런데 언니는 왜 이렇게 초췌해 보여요? 정작 아팠던 건 나인데...”

그때, 윤해인은 가차 없이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내가 너 따위와 살갑게 지낼 처지더냐? 사생아 주제에 네 앞가림이나 잘하거라.”

순간 윤채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갔고, 송태경의 미간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험악하게 좁혀졌다.

바로 그때, 진보각에서 물건을 고를 수 있다는 안내가 흘러나오며, 이 어색한 대화에 마침표를 그었다.

윤해인 역시 머지않아 조씨 가문으로 팔려 가듯 혼인을 치러야 했다.

제 아비라는 작자가 혼수를 보태줄 리는 만무하니, 스스로 지킬 몫은 본인의 손으로 마련해야만 했다.

그것이 윤해인이 이곳 진보각에 발을 들인 진짜 목적이기도 했다.

윤해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문 곳은 영롱한 푸른빛과 진주가 촘촘히 박힌 황금 봉황 비녀였다.

값은 은자 천 냥.

윤해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값을 치르려던 찰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이천 냥.”

윤채원이었다.

윤해인이 시선을 돌리자, 윤채원은 눈꼬리를 살랑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니, 저도 이게 아주 마음에 드는데 제게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차피 아버님께서 매달 챙겨주시는 용돈도 언니 쪽이 훨씬 적을 텐데 말이에요.”

윤해인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적은 정도가 아니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윤채원에게 매달 쥐여주는 용돈은 오백 냥에 달했던 반면, 적녀인 그녀에게 던져준 것은 고작 다섯 냥뿐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주신 지참금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굶어 죽어 거적으로 덮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윤해인의 손에는 그 가증스러운 아비의 목줄을 쥘 백만 냥의 은자가 쥐여 있으니까.

“삼천 냥.”

윤해인이 담담하게 호가를 높였다.

순간, 윤채원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으나 이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삼천오백 냥!”

“사천 냥.”

“사천오백 냥!”

단숨에 숨 막히는 공방이 이어지자, 윤채원의 낯빛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갔다.

“언니, 갑자기 그런 거금은 어디서 났어요? 나중에 돈을 지불하지 못해 망신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만 냥.”

윤해인은 단숨에 두 배가 넘는 금액을 내질렀다.

그리고 사들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윤채원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 눈에는 도리어 네가 당장 한 푼도 내밀지 못해 쩔쩔매는 것처럼 보인다만?”

윤채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볼만하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주위에서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수군거림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때, 가게 주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둘째 아가씨, 더 호가하시겠습니까?”

“잠시만요!”

윤채원은 다급한 몸짓으로 수하를 밖으로 내보냈다.

반 시진이 지난 후, 황급히 돌아온 시종의 보고를 전해 들은 윤채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핏기마저 완전히 가셔 있었다.

안 봐도 뻔한 결과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해인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제 아비의 금고에서 백만 냥의 은자를 통째로 빼앗았으니, 그 귀한 딸의 체면을 세워줄 돈이 어디 남아 있겠는가.

장내에 팽팽한 침묵이 흐르던 바로 그때.

갑작스럽게 정적을 깨부수며 한 사내가 진보각 문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장내를 울리는 웅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진보각에 들어온 모든 보석과 장신구는 전부 윤채원 아가씨의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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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22장

    나흘째 되던 날 아침.윤해인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송태경을 바라보았다.“이레가 다 되었으니, 난 떠나겠다.”차를 우리던 송태경의 손끝이 순간 멈춰 섰다.“보내주겠다고 말하긴 했었지.”천천히 몸을 돌리는 송태경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하지만 그전에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조도진의 곁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내 곁에 남을 것인지.”윤해인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내 선택은 당연히 조도진의 곁으로...”말이 채 끝나기도 전, 송태경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네 개의 잔으로 내리꽂혔다.“선택지는 단 두 가지다.”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네가 남을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송태경이 잔 하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이 네 개의 잔 중에서 세 잔은 맹물이고, 단 한 잔에는 독약이 들어 있다.”그가 서늘하게 덧붙였다.“지금부터 네가 한 글자를 뱉을 때마다, 난 한 잔씩 마실 것이다.”즉, 그녀가 남겠다고 말해야만 송태경은 살 수 있었다.하지만 기어코 떠나겠다고 한마디라도 내뱉는 순간,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윤해인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번뜩였다.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미쳤어? 네 목숨을 담보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아니.”송태경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난 그저 도박을 하려는 것뿐이다.”“내 목숨을 걸고 확인해보려는 거지. 네 마음에...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남아 있는지.”윤해인은 송태경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가슴이 분노로 격하게 들썩였다.“송태경.”윤해인은 이를 악물었다.“더 이상 널 증오하게 만들지 마.”“차라리 증오하거라.”송태경의 눈빛에 광기 어린 집착과 다정함이 동시에 서렸다.“적어도 나를 잊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무겁고 긴 침묵이 흘렀다.윤해인은 가슴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난...”탁!첫 번째 잔이 비워졌다. 맹물이었다.송태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떠...”탁!두 번째 잔 역시 맹물이었다.송태경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21장

    이어진 사흘 동안, 송태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영혼을 쥐어짜 냈다.첫째 날.송태경은 무릎을 꿇은 채 구백아흔아홉 개의 계단을 기어올랐다.삼신 할머니 사당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인연의 부적을 얻기 위해서였다.“삼신 할머니 사당의 인연 부적이 가장 효험이 있대. 이걸 구한 사람은 평생 함께하게 된다고 하더라고.”그의 눈빛에는 조심스러운 기대와 절박함이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윤해인은 차갑게 웃으며 그 부적을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발겼다.“그렇다면 이딴 부적은 흔적도 없이 없애는 게 좋겠어. 그래야 다음 생에서는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송태경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럼에도 그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해인아, 만약 처음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만약이란 없어.”윤해인은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둘째 날.송태경은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산해진미를 직접 차려냈다.“네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기억하고 있다.”그는 매운탕 안의 살코기를 집어 윤해인의 밥공기에 정성스레 올려놓았다.그런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한번 맛보겠느냐?”윤해인은 접시를 힐끗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윤채원은 매운 음식을 안 먹으니, 예전에는 이런 요리를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겠네?”송태경의 손이 공중에서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윤해인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음식들을 통째로 구정물 통에 가차 없이 쏟아부었다.셋째 날.송태경은 온 성안을 화려하게 수놓을 불꽃놀이를 선물했다.어둠이 내리자, 밤하늘 위로 불꽃이 터지며 글자 하나 하나가 찬란하게 피어올랐다.[해인아, 너를 연모한다]“마음에 드느냐?”송태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윤해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비웃음과 함께 읊조렸다.“송태경, 예전에도 윤채원한테 이런 식으로 구애했었어?”송태경은 주먹을 움켜쥐었다.숨이 턱 막혀 목구멍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20장

    송태경은 꿈을 꾸었다.꿈속의 봄날, 어화원을 비추는 햇살은 더없이 따스했다.그는 다른 사람을 따라 자리를 뜨지 않았다.그저 나무 아래에 서서,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조심스럽게 새둥지를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린 그녀가 치맛자락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송태경의 눈동자와 똑바로 맞부딪쳤다.송태경은 성큼 앞으로 다가갔다.이윽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안녕. 내 이름은 송태경이다. 너한테 관심이 생겼느니라.”소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새침하게 턱을 치켜올렸다.“어라? 왜?”“예쁘니까.”송태경이 나직하게 웃었다.소녀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귓가에는 이미 붉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그렇게까지 내가 좋다면, 특별히 이 귀한 몸과 아는 사이가 될 기회를 주도록 하지.”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던 송태경은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꿈속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열렬한 구애 끝에 그녀가 마지못한 척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아끼며 품에 안았고,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어 온갖 어리광을 피웠다.마침내 혼례식을 올렸다.수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식을 마친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태경아, 평생 나한테 잘해줘야 해.”“그럴게.”송태경이 미소를 지었다.“평생토록.”“영왕 전하! 영왕 전하!”호위무사의 다급한 부름이 송태경을 꿈속에서 강제로 끌어냈다.송태경은 번쩍 눈을 떴다.이윽고 텅 빈 처소가 눈에 들어왔다. 등 뒤와 가슴팍에서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이 잔인한 현실을 사정없이 일깨웠다.혼례도, 서로를 향한 사랑도 없었다.남은 것은 오직 피폐하게 찢겨 나간 상처뿐이었다.“해인이는... 윤해인은 어디 있느냐?”송태경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정원에 계십니다.”의원이 공손히 답했다.송태경은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억지로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19장

    윤해인은 송태경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보상이라니.이미 뼈와 살에 깊숙이 박혀 버린 흉터들을 대체 어떻게 보상한단 말인가.윤해인은 차갑게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문을 거칠게 닫아걸었다.송태경이 문을 두드리며 저녁을 먹으라고 나직하게 부르기 전까지,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문을 열고 나섰을 때, 윤해인은 순간 멈칫했다.송태경은 수수한 무명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하고 선이 굵은 팔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전부 윤해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네가 한 거야?”윤해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응.”송태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윤해인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윤채원을 위해서 배운 요리 솜씨인가 보지?”송태경의 손가락이 굳어졌다.그의 짙은 눈동자 위로 처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해인아, 제발... 그 애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하지만 윤해인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식탁에 마주 앉은 순간부터 윤해인은 가시 돋친 칼날을 거침없이 들이밀었다.“윤채원이 단 음식을 좋아하잖아. 예전엔 그 애한테 매일 이런 걸 만들어 줬어?”“그 애에게 줄 꽃을 꺾으려 벼랑을 타다 떨어질 뻔했을 땐, 정말 목숨 아까운 줄 몰랐나 봐?”“가슴 팍에 자기 이름을 새긴 걸 보고 윤채원이 감격해서 울기라도 하던가?”비수가 되어 날아간 말들이 송태경의 심장을 사정없이 헤집었다.그는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견디듯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나중에는 그저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변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윤해인은 그 처참한 꼴을 보며 지독한 쾌감을 느꼈다.이윽고 식사가 끝났다.윤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송태경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해인아.”그는 윤해인의 앞으로 가죽 채찍을 내밀었다.순간, 윤해인의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18장

    장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영왕부의 재력은 가히 나라의 재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순간, 윤해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조도진이 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았기에, 이 거래를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조도진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그럴 필요 없습니다.”이윽고 조씨 가문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유미령은 거침없이 걸어와 윤해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해인이는 조씨 가문의 어엿한 세자빈이지 결코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윤해인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왈칵 뜨거운 온기가 차올랐다.송태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윤해인을 응시했다. “해인아... 제발, 나와 같이 가자. 응?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속죄하겠다.”비참할 정도로 처절한 애원이었다.윤해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에는 오직 시린 결연함만이 고여 있었다.“싫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집례관을 바라보았다.“혼례를 마저 진행해 주세요.”송태경의 눈에 서렸던 고통이 찰나의 순간, 번뜩이는 광기로 뒤바뀌었다.“누가 감히!”송태경의 포효가 식장을 찢어발겼다.그때, 호위무사 하나가 신속하게 다가와 송태경의 귀에 대고 나직이 아뢰었다.“영왕 전하, 바깥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윤해인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송태경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송태경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밖에 암위들을 깔아 두었다. 네가 나와 함께 가겠다고 약조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순식간에 대전 안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잠겼다.윤해인의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너 미쳤어?”“그래, 미쳤다.”송태경은 윤해인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글자씩 씹어 뱉었다.“네가 다른 사람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17장

    장내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저분, 영왕 전하 아니야?”“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결혼하지 말라고? 설마 신부를 가로채려는 건가?”“세상에. 세자 저하께서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혼례식에 이게 무슨 난리람...”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윤해인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송태경.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맺혔다. 오랫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한 듯, 송태경의 눈가에는 붉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그에게 시집가지 마라.”송태경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읊조렸다.윤해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을 감추며 억지로 이성을 붙잡았다.“송태경,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목소리에서 지독할 정도의 한기가 배어 나왔다.“네가 그토록 아끼는 윤채원이 질투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보네.”송태경의 숨이 턱 막혔다.눈동자 너머로 짙은 회한과 고통이 사정없이 소용돌이쳤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그가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속삭였다.“해인아, 삼 년 전 내가 첫눈에 반했던 사람은 윤채원이 아니라 너였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눈이 멀어 널 몰라보고 엉뚱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송태경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삼 년 전 봄날의 잔치에서, 네가 나무 위에 올라가 새둥지를 구했던 날을 기억하느냐? 그날 난 네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네 뒷모습만 보고, 그게 윤채원인 줄로만 착각했었지.”윤해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새둥지를 구하려 나무 위로 올라갔던 그 봄날을.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저 멀리 나무 그늘 뒤에 우뚝 서 있던 사내를 어렴풋이 보았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는데.'설마… 그때 그 사내가 송태경이었단 말이야?'침묵하는 윤해인을 보며 송태경은 조바심이 났는지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이미 다 조사해서 알아냈다. 윤채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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