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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مؤلف: 삼심귀일

제1장

مؤلف: 삼심귀일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와야 진짜 동생이지요.”

윤해인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허공을 향한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냉기만이 가득했다.

“그 애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저는 평생 그런 걸 동생으로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윤기태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울컥 솟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씩씩거리던 그가, 발작하기 직전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

탁.

거칠게 내려놓은 찻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윽고 윤기태가 깊은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

“은자 백만 냥입니다.”

윤해인이 붉은 입술을 매끄럽게 열어 속삭였다.

“그리고 제가 시집가고 나면, 송태경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사생아의 호위무사로 붙여주세요.”

윤기태의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미치광이를 보듯 딸을 쏘아보는 눈빛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은자 백만 냥이면 내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아니냐! 게다가 송태경은 네가 목숨처럼 아끼던 호위무사가 아니더냐? 그놈에게 시집가겠다며 온 집안을 뒤흔들어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혼인을 하면서 그놈을 두고 가겠다는 게냐?”

“그저 수락하실 건지 말 건지만 말씀해 주시지요.”

윤해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몸을 돌리는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쾅!

“좋다!”

윤기태가 탁자를 사정없이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네가 서북으로 떠나는 날, 약조한 두 가지는 즉시 이행해 주마.”

윤기태에게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 골치 아픈 혼사를 하루라도 빨리 매듭짓고 싶을 뿐이었다.

과거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절, 윤기태는 서둘러 정혼을 맺었다. 본래는 아끼는 작은딸 윤채원을 그곳으로 시집보내 탄탄대로를 걷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조씨 가문의 외아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의원은 그가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할 것이라 단언했다.

곱게 키운 윤채원이 평생 수절하며 고생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윤기태는, 그제야 윤해인 역시 제 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윤해인은 대답 대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등줄기는 베일 듯이 곧게 뻗어 있었다. 평생을 오만하게 살아온 그녀는 단 한 번도 남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문지방을 넘어서려던 찰나, 등 뒤에서 윤기태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와 꽂혔다.

“재물을 탐하는 것은 이해한다만... 너는 송태경을 가장 아끼지 않았느냐? 어찌 그를 선뜻 채원이에게 내주겠다는 게냐?”

윤해인의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송태경.

그 이름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 가장 깊고 부드러운 곳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윤해인은 애써 발을 내디뎌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러곤 윤기태와 그의 질을 통째로 밀어내듯 문을 닫아걸었다.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칠흑 같은 밤이었다.

송태경의 처소 앞을 지나치던 순간이었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억눌린 신음이 발길을 붙잡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안쪽의 광경이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송태경은 침상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 발치에는 초상화 한 장이 걸려 있었다.

그가 두 눈을 감은 채 목젖을 들썩였다. 낮고 거친 숨결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관능적이었다.

“채원아... 내 사랑... 착하지...”

윤채원의 초상화였다.

그녀의 성인식 생일 잔치 때 그린 그림이었다. 소매가 넓은 상의와 주름이 아름답게 잡힌 치마를 입은 윤채원은 청순하고도 순진무구하게 웃고 있었다.

지이익.

윤해인의 손톱이 비단 자수 손수건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속으로 윤기태가 던졌던 질문의 답을 내렸다.

‘그 사람 역시 아버지와 똑같으니까요. 오직 윤채원만을 갈망하니까요.’

그 쓰라린 자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치며 오장육부를 불길로 짓눌렀다.

삼 년 전, 송태경을 처음 만난 건 호위무사를 선발하던 날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사내들이 늘어선 연무장에서 윤해인의 시선은 단박에 그에게 꽂혔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의 외모가 가장 눈부셨으니까.

팔 척에 달하는 훤칠한 키,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 게다가 칼로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까지. 특히나 얼음을 갈아 넣은 듯 서늘한 칠흑빛 눈동자가 압도적이었다.

윤해인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탓에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못했다. 매사 규율을 우습게 여기며 제멋대로 자란 그녀였기에 고지식할 정도로 법도를 지키는 그를 골려주고 싶다는 장난기가 발동했었다.

하지만 지난 삼 년 동안, 송태경은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다.

일부러 취한 척 그의 가슴팍으로 쓰러지면,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고양이처럼 침상 위에 던져두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비단 옷만 걸친 채 한밤중에 그의 방문을 두드리면, 넓은 망토로 그녀의 몸을 빈틈없이 감싸 정중하게 방으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척 연기를 했을 때조차, 그는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녀를 구하면서도 허리께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아무리 유혹하고 흔들어대도 그는 철벽처럼 예의를 갖추며 그녀를 큰아가씨라 불렀다.

하지만 윤해인은 그런 그에게 속절없이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감정이 시작되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외로웠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일곱 살 되던 해, 윤기태는 밖에서 사생아를 데려왔다.

그 사생아의 이름은 윤채원.

윤해인보다 고작 석 달 늦게 태어난 아이였다.

즉 윤기태는, 어머니 이보화와 혼인한 십 년이란 세월 중 무려 구 년 동안이나 밖에서 첩을 거느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날, 윤해인이 굳게 믿었던 평온한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는 윤기태의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출산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윤기태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이보화는 이성을 잃고 악을 쓰며 울부짖었고, 결국 그날 밤 극심한 충격으로 태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의원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어머니와 태중의 아이, 두 목숨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윤해인은 윤기태를 뼈저리게 증오하게 되었고, 윤채원 역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윤해인은 본가에서 나와 홀로 공부를 했고, 홀로 밥을 먹으며 외롭게 자라났다. 세월이 흘러 수려한 미모를 자랑하게 된 윤해인이 외출할 때마다 한량들이 거머리처럼 들러붙자, 그녀는 그제야 호위무사를 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만난 첫 번째 호위무사가 바로 송태경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송태경이 그림자처럼 곁을 지켰으니까.

가벼운 호기심과 도발에서 시작된 감정은 어느덧 깊은 연정으로 번져갔다. 하지만 삼 년이라는 그 수많은 밤낮 동안, 송태경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천성이 무심하고 차가운 사내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날, 송태경이 윤채원의 초상화를 붙들고 추잡한 짓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이윽고 그가 마친 직후, 그림자 하나가 창문으로 뛰어드는 것까지 지켜보게 되었다.

“전하, 이 호위무사 노릇은 대체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께서는 존귀하신 몸이거늘, 천하에 탐나는 여인이 누군들 없겠습니까? 윤채원에게 첫눈에 반하셨다면 당장 폐하께 혼인 교지를 내려달라 청하시면 그만인 것을, 어찌 그리 순정을 바치십니까. 그 언니 밑에서 호위무사 노릇을 하며 겨우 얼굴이나 보시겠다니요.”

송태경이 냉담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조사해 보니 채원이는 사생아라 어릴 때부터 모진 고생을 하며 자라 마음이 유약하다더군. 갑작스러운 혼인은 아이를 겁먹게 만들 뿐이다. 더군다나 워낙 순수한 아이라 나의 지위로 억누르고 싶지 않다. 차근차근 다가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게 만들 생각이다.”

“아이고, 황실에 어찌 이토록 지독한 정을 쏟아붓는 분이 태어나셨을꼬. 저는 윤씨 가문의 큰아가씨가 매일같이 유혹하길래 조금이라도 흔들리신 줄 알았습니다. 그분은 경성에서도 소문난 절세가인 아닙니까? 내로라하는 명문가 자제들 중 그녀를 마음에 품지 않은 자가 없거늘...”

송태경이 나직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윤해인을 영겁의 빙하 속으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그래 보았자 내 알 바 아니다. 그 계집은 채원이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따라가지 못하니까.”

한 자, 한 자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그 순간, 윤해인의 마음속에서 송태경에 대한 마지막 연정마저 흔적 없이 사그라졌다.

방 안의 열기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오늘 밤의 송태경은 좀처럼 절정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해인은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어 올렸다.

그리고, 세차게 문을 밀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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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22장

    나흘째 되던 날 아침.윤해인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송태경을 바라보았다.“이레가 다 되었으니, 난 떠나겠다.”차를 우리던 송태경의 손끝이 순간 멈춰 섰다.“보내주겠다고 말하긴 했었지.”천천히 몸을 돌리는 송태경의 눈동자가 심연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하지만 그전에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조도진의 곁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내 곁에 남을 것인지.”윤해인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내 선택은 당연히 조도진의 곁으로...”말이 채 끝나기도 전, 송태경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네 개의 잔으로 내리꽂혔다.“선택지는 단 두 가지다.”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네가 남을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송태경이 잔 하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이 네 개의 잔 중에서 세 잔은 맹물이고, 단 한 잔에는 독약이 들어 있다.”그가 서늘하게 덧붙였다.“지금부터 네가 한 글자를 뱉을 때마다, 난 한 잔씩 마실 것이다.”즉, 그녀가 남겠다고 말해야만 송태경은 살 수 있었다.하지만 기어코 떠나겠다고 한마디라도 내뱉는 순간,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윤해인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번뜩였다.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미쳤어? 네 목숨을 담보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아니.”송태경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난 그저 도박을 하려는 것뿐이다.”“내 목숨을 걸고 확인해보려는 거지. 네 마음에... 아주 조금이라도 내가 남아 있는지.”윤해인은 송태경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가슴이 분노로 격하게 들썩였다.“송태경.”윤해인은 이를 악물었다.“더 이상 널 증오하게 만들지 마.”“차라리 증오하거라.”송태경의 눈빛에 광기 어린 집착과 다정함이 동시에 서렸다.“적어도 나를 잊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무겁고 긴 침묵이 흘렀다.윤해인은 가슴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난...”탁!첫 번째 잔이 비워졌다. 맹물이었다.송태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떠...”탁!두 번째 잔 역시 맹물이었다.송태경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21장

    이어진 사흘 동안, 송태경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영혼을 쥐어짜 냈다.첫째 날.송태경은 무릎을 꿇은 채 구백아흔아홉 개의 계단을 기어올랐다.삼신 할머니 사당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인연의 부적을 얻기 위해서였다.“삼신 할머니 사당의 인연 부적이 가장 효험이 있대. 이걸 구한 사람은 평생 함께하게 된다고 하더라고.”그의 눈빛에는 조심스러운 기대와 절박함이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윤해인은 차갑게 웃으며 그 부적을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발겼다.“그렇다면 이딴 부적은 흔적도 없이 없애는 게 좋겠어. 그래야 다음 생에서는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송태경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럼에도 그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해인아, 만약 처음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만약이란 없어.”윤해인은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둘째 날.송태경은 상다리가 부러질 듯한 산해진미를 직접 차려냈다.“네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기억하고 있다.”그는 매운탕 안의 살코기를 집어 윤해인의 밥공기에 정성스레 올려놓았다.그런 그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한번 맛보겠느냐?”윤해인은 접시를 힐끗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윤채원은 매운 음식을 안 먹으니, 예전에는 이런 요리를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겠네?”송태경의 손이 공중에서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윤해인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음식들을 통째로 구정물 통에 가차 없이 쏟아부었다.셋째 날.송태경은 온 성안을 화려하게 수놓을 불꽃놀이를 선물했다.어둠이 내리자, 밤하늘 위로 불꽃이 터지며 글자 하나 하나가 찬란하게 피어올랐다.[해인아, 너를 연모한다]“마음에 드느냐?”송태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윤해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비웃음과 함께 읊조렸다.“송태경, 예전에도 윤채원한테 이런 식으로 구애했었어?”송태경은 주먹을 움켜쥐었다.숨이 턱 막혀 목구멍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20장

    송태경은 꿈을 꾸었다.꿈속의 봄날, 어화원을 비추는 햇살은 더없이 따스했다.그는 다른 사람을 따라 자리를 뜨지 않았다.그저 나무 아래에 서서,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조심스럽게 새둥지를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가볍게 바닥으로 뛰어내린 그녀가 치맛자락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송태경의 눈동자와 똑바로 맞부딪쳤다.송태경은 성큼 앞으로 다가갔다.이윽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안녕. 내 이름은 송태경이다. 너한테 관심이 생겼느니라.”소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새침하게 턱을 치켜올렸다.“어라? 왜?”“예쁘니까.”송태경이 나직하게 웃었다.소녀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귓가에는 이미 붉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그렇게까지 내가 좋다면, 특별히 이 귀한 몸과 아는 사이가 될 기회를 주도록 하지.”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던 송태경은 그녀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꿈속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열렬한 구애 끝에 그녀가 마지못한 척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아끼며 품에 안았고,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어 온갖 어리광을 피웠다.마침내 혼례식을 올렸다.수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식을 마친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붉어진 얼굴로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태경아, 평생 나한테 잘해줘야 해.”“그럴게.”송태경이 미소를 지었다.“평생토록.”“영왕 전하! 영왕 전하!”호위무사의 다급한 부름이 송태경을 꿈속에서 강제로 끌어냈다.송태경은 번쩍 눈을 떴다.이윽고 텅 빈 처소가 눈에 들어왔다. 등 뒤와 가슴팍에서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이 잔인한 현실을 사정없이 일깨웠다.혼례도, 서로를 향한 사랑도 없었다.남은 것은 오직 피폐하게 찢겨 나간 상처뿐이었다.“해인이는... 윤해인은 어디 있느냐?”송태경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정원에 계십니다.”의원이 공손히 답했다.송태경은 만류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억지로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19장

    윤해인은 송태경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보상이라니.이미 뼈와 살에 깊숙이 박혀 버린 흉터들을 대체 어떻게 보상한단 말인가.윤해인은 차갑게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문을 거칠게 닫아걸었다.송태경이 문을 두드리며 저녁을 먹으라고 나직하게 부르기 전까지,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문을 열고 나섰을 때, 윤해인은 순간 멈칫했다.송태경은 수수한 무명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하고 선이 굵은 팔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전부 윤해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네가 한 거야?”윤해인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응.”송태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다른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윤해인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윤채원을 위해서 배운 요리 솜씨인가 보지?”송태경의 손가락이 굳어졌다.그의 짙은 눈동자 위로 처참한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해인아, 제발... 그 애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하지만 윤해인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식탁에 마주 앉은 순간부터 윤해인은 가시 돋친 칼날을 거침없이 들이밀었다.“윤채원이 단 음식을 좋아하잖아. 예전엔 그 애한테 매일 이런 걸 만들어 줬어?”“그 애에게 줄 꽃을 꺾으려 벼랑을 타다 떨어질 뻔했을 땐, 정말 목숨 아까운 줄 몰랐나 봐?”“가슴 팍에 자기 이름을 새긴 걸 보고 윤채원이 감격해서 울기라도 하던가?”비수가 되어 날아간 말들이 송태경의 심장을 사정없이 헤집었다.그는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견디듯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나중에는 그저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변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윤해인은 그 처참한 꼴을 보며 지독한 쾌감을 느꼈다.이윽고 식사가 끝났다.윤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송태경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해인아.”그는 윤해인의 앞으로 가죽 채찍을 내밀었다.순간, 윤해인의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18장

    장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영왕부의 재력은 가히 나라의 재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순간, 윤해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는 조도진이 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았기에, 이 거래를 거절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조도진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그럴 필요 없습니다.”이윽고 조씨 가문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유미령은 거침없이 걸어와 윤해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해인이는 조씨 가문의 어엿한 세자빈이지 결코 거래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윤해인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왈칵 뜨거운 온기가 차올랐다.송태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돌려 윤해인을 응시했다. “해인아... 제발, 나와 같이 가자. 응? 내 평생을 바쳐서라도 속죄하겠다.”비참할 정도로 처절한 애원이었다.윤해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에는 오직 시린 결연함만이 고여 있었다.“싫다.”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집례관을 바라보았다.“혼례를 마저 진행해 주세요.”송태경의 눈에 서렸던 고통이 찰나의 순간, 번뜩이는 광기로 뒤바뀌었다.“누가 감히!”송태경의 포효가 식장을 찢어발겼다.그때, 호위무사 하나가 신속하게 다가와 송태경의 귀에 대고 나직이 아뢰었다.“영왕 전하, 바깥은 모두 준비되었습니다.”윤해인의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송태경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송태경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밖에 암위들을 깔아 두었다. 네가 나와 함께 가겠다고 약조하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순식간에 대전 안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잠겼다.윤해인의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렸다.“너 미쳤어?”“그래, 미쳤다.”송태경은 윤해인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한 글자씩 씹어 뱉었다.“네가 다른 사람

  • 이유 없이 봄바람에 속아   제17장

    장내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저분, 영왕 전하 아니야?”“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결혼하지 말라고? 설마 신부를 가로채려는 건가?”“세상에. 세자 저하께서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혼례식에 이게 무슨 난리람...”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윤해인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송태경.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맺혔다. 오랫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한 듯, 송태경의 눈가에는 붉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그에게 시집가지 마라.”송태경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읊조렸다.윤해인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을 감추며 억지로 이성을 붙잡았다.“송태경, 여긴 무슨 일로 온 거냐?”목소리에서 지독할 정도의 한기가 배어 나왔다.“네가 그토록 아끼는 윤채원이 질투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보네.”송태경의 숨이 턱 막혔다.눈동자 너머로 짙은 회한과 고통이 사정없이 소용돌이쳤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그가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낮게 속삭였다.“해인아, 삼 년 전 내가 첫눈에 반했던 사람은 윤채원이 아니라 너였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눈이 멀어 널 몰라보고 엉뚱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송태경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삼 년 전 봄날의 잔치에서, 네가 나무 위에 올라가 새둥지를 구했던 날을 기억하느냐? 그날 난 네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네 뒷모습만 보고, 그게 윤채원인 줄로만 착각했었지.”윤해인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을까.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새둥지를 구하려 나무 위로 올라갔던 그 봄날을.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저 멀리 나무 그늘 뒤에 우뚝 서 있던 사내를 어렴풋이 보았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는데.'설마… 그때 그 사내가 송태경이었단 말이야?'침묵하는 윤해인을 보며 송태경은 조바심이 났는지 다급하게 말을 쏟아냈다.“이미 다 조사해서 알아냈다. 윤채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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