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131 - Chapter 140

197 Chapters

130화.

집무실에 도착하자 한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 지시하신 건 찾았습니다.”“보고해.”수혁은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물었다.한 실장의 표정이 평소보다 심각했다.“5년 전, 공지안 씨 사고 관련 데이터입니다. 한도오토링크 구형 서버 백업본에서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가져와.”“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수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직접 봐야 할 정도라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가자.”수혁은 곧바로 한도오토링크 본사로 향했다.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그는 서린에게 짧게 문자를 남겼다.[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 나갔다 올게. 혼자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한도오토링크 지하 전산실.서늘한 기계음만이 감도는 그곳에서 수혁은 모니터 앞에 앉았다.화면에는 5년 전 폐차 처리된 차량의 블랙박스 복원 영상과 ECU(전자제어장치) 로그 기록이 떠 있었다.“재생해 봐.”한 실장이 키보드를 두드렸다.치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비가 쏟아지는 밤거리.운전석 시점이었다.핸들을 잡은 하얀 손이 보였다.서린의 손이었다.그런데 갑자기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어? 왜 이래? 브레이크가……!영상 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안, 아니 서린의 목소리였다.[경고: 제어 시스템 응답 없음][외부 침입 신호 감지: 조향 장치 강제 잠금]로그 기록이 붉게 점멸했다.수혁이 화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이게 무슨 뜻이지?”“사고 직전 차량 제어 시스템에 외부 접속이 있었다는 뜻입니다.”한 실장이 로그 한 줄을 확대했다.“처음에는 단순 오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접속 기록을 시간대별로 대조해 보니 이상했습니다. 사고가 나기 직전부터 브레이크와 조향 장치에 순차적으로 명령이 들어갔습니다.”수혁의 시선이 화면에 박혔다.“운전자가 조작한 게 아니라는 거야?”“네. 운전석에서 들어온 명령과는 별개입니다.”한 실장이 다음 로그를 띄웠다.[제동 명령 차단][조향 제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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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수혁의 품 안에서 서린은 잠시 숨을 멈추고 있었다.그의 팔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마치 놓으면 사라질까 봐 붙잡고 있는 것처럼.수혁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공…….”지안.말끝이 나오기 직전, 수혁이 숨을 삼켰다.“... 대표님?”서린이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 보았다.수혁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팔을 풀었다.그래. 이렇게 내 눈앞에 살아 있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왜 숨겼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그러니 지금 당장은 묻지 않아도 괜찮았다.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밥 먹으러 가자.”너무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네? 갑자기요?”“저녁.”수혁이 한 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아직 안 먹었잖아.”서린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배고프잖아. 나 지금 너랑 맛있는 거 먹고 싶어.”수혁은 서린의 손을 꼭 잡고 사무실을 나섰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서린은 수혁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수혁이 짧게 대답했다.“아무 일도 없어.”수혁이 서린을 보며 싱긋 웃고는 잡은 손에 깍지를 꼈다.손바닥이 따뜻했다.아까보다 더 단단하게 잡혀 있었다.서린은 슬쩍 옆을 보았다.수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수혁은 주차된 차로 가서 조수석 문을 열어 서린을 태우고 운전석에 올라탔다.엔진이 부드럽게 깨어났다.“내일 주말이니까.”“네?”“좀 멀리 갈까.”서린이 눈을 깜빡였다.“멀리요? 어디로요?”“어디든.”“뭐 드시고 싶으신데요?”수혁이 피식 웃었다.“넌 뭐 먹고 싶어?”서린이 잠시 생각했다.“대표님이 먹고 싶은 걸로요.”“그건 재미없는데.”수혁이 차를 천천히 도로로 올렸다.“한 시간쯤 가야 하는 집이 있는데.”“한 시간이요?”서린이 고개를 갸웃했다.“그렇게 멀리 가자고요?”수혁이 어깨를 으쓱했다.“뭐 어때, 우리가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고.”“네-에??”차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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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도시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대신 어둠 속에 산의 윤곽이 또렷해졌다.잠시 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호텔 건물이 나타났다.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용한 리조트였다.로비는 늦은 시간이라 한산했다.수혁이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예약되어 있습니다. 차수혁입니다.”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키 카드를 내밀었다.“정상 전망 객실로 준비해 두었습니다.”수혁이 카드를 받아 들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 층에 내려서 방에 들어서니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서린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생각보다 공기가 차네요.”“산이라서 그래.”수혁이 손목시계를 힐끗 봤다.“와인 한잔 할까?”수혁이 물었지만, 서린은 창밖을 가리켰다.“산책해요. 공기가 너무 좋아요.”두 사람은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커피를 들고 호텔 정원으로 나왔다.산 입구 쪽으로 이어진 작은 산책로였다.잔잔한 조명이 길을 따라 켜져 있었고, 나무 사이로 별빛이 보였다.조금 걷다가 정원 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와…”“왜.”“조용해서 좋아요.”정말 아무 소리도 없었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수혁은 옆에 앉은 서린을 잠시 바라봤다.“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겠다.”“왜요?”“일출 보러 가야 하니까.”서린이 웃었다.“진짜 가는 거예요?”“응.”수혁이 산 위를 가리켰다.어둠 속에 정상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저기까지 올라가면 꽤 괜찮대.”“걸어서요?”“케이블카도 있고.”수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그래도 걸어 올라가는 게 좋지.”서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체력 괜찮으세요?”수혁이 피식 웃었다.“문제 없다니까. 지금 당장 확인해 볼까?”“뭐라고요?”하하하수혁이 시원하게 웃었다.서린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도윤이도 부를까?”서린이 고개를 들었다.“도윤이요?”“응.”수혁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왕이면 좋은 데서 같이 시간 보내면 좋잖아.”이제는 알았다.누나라는 말도, 그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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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서린이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대표님. 어제 드린 USB요.”수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응.”“아직 못 보셨죠?”“어제는 볼 정신이 없었잖아.”서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수혁은 모르는 척 앞을 보며 웃었다.“그 안에는 기술 제휴 건과 관련된 자료가 있을 거예요.”5년 전.수혁은 그 말에 묻고 싶은 것을 꾹 눌렀다.어디서 얻었는지. 왜 그걸 네가 가지고 있었는지.그리고 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는지.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강민재하고도 연관되어 있고?”“아마도요. 민우 씨가 찾던 게 아닐까 싶어요.”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놈이 보면 좋아하겠네.”“어디서 났는지 안 물어보세요?”“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나한테 줬다는 게 중요하지.”“조만간 꼭 말씀드릴게요.”“천천히 해. 말 안 해도 괜찮고.”서린은 그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수혁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두 사람은 산을 내려와 입구에 있는 허름하지만 정겨운 식당에 들어갔다.메뉴는 뜨끈한 만둣국.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니, 새벽 산행의 한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맛있다.”서린이 발그레한 얼굴로 감탄하자, 수혁이 깍두기 접시를 밀어주며 웃었다.“많이 먹어. 도윤이 오면 힘써야 할지도 모르니까.”“힘을요? 도윤이가요?”“글쎄. 백수라 체력이 넘칠 텐데, 누나가 놀아주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겠지.”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칠 즈음, 도윤에게서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두 사람은 호텔 로비로 향했다.“누나! 매형, 아니 대표님!”회전문을 밀고 들어오던 도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청바지에 후드티, 백팩을 멘 영락없는 대학생의 모습이었다.“왔어? 아침 일찍 오느라 고생했네.”서린이 도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반갑게 맞이했다.“고생은 무슨. 누나 얼굴 보러 오는 건데.”수혁은 한 발짝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너무나 평범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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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그때 수혁이 끼어들었다.“사정이 있었겠지.”수혁은 고개를 숙인 서린을 바라봤다.말없이 떠나야 했던 사람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었을 테니까.수혁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누구나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야.”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죠.”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도윤이 이내 웃었다.“그때는 좀 서운하긴 했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도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누나가 돌아왔고, 또 이렇게 좋은 분이 옆에 계시니까요. 대표님 같은 분이 누나 지켜주셔서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도윤이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수혁은 피식 웃으며 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나도 고맙다. 누나 잘 지켜줘서.”세 사람 사이에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서린은 창밖의 산을 바라보았다.붉은 단풍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눈가가 조금 뜨거워졌다.잃어버렸던 시간들이, 수혁의 배려 속에서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라운지에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가까워졌다.“배 안 고파요?”도윤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일찍 오느라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 먹고 왔거든요.”“그러면 큰일이지.”수혁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밥 먹고 가자.”호텔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한산했다.큰 창으로 산이 보였고, 따뜻한 햇살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세 사람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도윤은 메뉴판을 보자마자 신이 났다.“와, 여기 다 맛있어 보인다.”“천천히 골라.”수혁이 웃었다.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따뜻한 파스타와 스테이크, 샐러드.도윤은 연신 감탄하며 먹었다.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호텔 정원으로 내려갔다.산 아래로 이어진 산책로였다.햇살이 따뜻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수혁은 두 사람의 뒤를 천천히 걸었다.가끔 웃음소리가 터졌다.평범한 하루였다.그저 가족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웃는 시간.수혁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음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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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뭐?”수혁이 서린과 도윤을 오피스텔 입구에 내려주고 돌아가던 그 시각, 국회의원회관 의원실.강민재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현재 공 상무와 어떤 청년이 함께 공 상무의 오피스텔로 들어갔습니다.“분명히 차수혁 차였어?”— 예. 사진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하십시오.그는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막 전송된 사진들이 화면에 떠 있었다.첫 번째 사진.차수혁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그 앞에서 공서린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다음 사진.뒷좌석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강민재의 눈썹이 꿈틀했다.“이건…….”사진을 확대했다.“공도윤이잖아?”그의 시선이 급격히 가라앉았다.사진을 몇 장 더 넘겼다.차수혁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도윤.그리고 마지막 사진.공서린과 공도윤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강민재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여기까지 겹치는데, 우연일 리가 없잖아.”강민재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좋아.”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어디까지 가나 보자고.”똑똑.“들어와.”비서관이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의원님. 지시하신 2차 자료입니다.”서울의 야경이 유리창 너머로 흐르고 있었다.천천히 의자를 돌려 앉은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가져와.”[의료 기록 조회 결과 - 2차: 흉부 및 정형외과]서류 사이에서 두 장의 엑스레이 필름 사본이 미끄러져 나왔다.하나는 5년 전 공지안의 것.그리고 다른 하나는 최근 공서린의 건강검진 흉부 엑스레이였다.강민재는 아무 말 없이 엑스레이 필름 두 개를 들고, 천천히 사무실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머리 위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필름을 들어 올렸다.얇은 필름 너머로 희미하게 뼈의 윤곽이 떠올랐다.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갈비뼈.흉곽.그리고—쇄골.“……여기.”그의 손가락이 공지안의 엑스레이 위에 멈췄다.왼쪽 쇄골.미세하게 금이 갔다가 붙은 흔적.골절이 유합되며 남은 선이 희미하게 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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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아, 서린이요?”강민재의 시선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공 상무님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십니까?”“그날 처음 만났어요.”유정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대표님이 소개해주셨거든요.”“처음 만난 사이치고는 꽤나 각별해 보이던데요.”강민재의 눈빛이 조금 더 깊어졌다.유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대화가 너무 잘 통했거든요. 미술 보는 안목도 뛰어나고, 성격도 시원시원하고.”잠시 어깨를 으쓱했다.“서린이 같은 동갑내기 친구가 생겨서 저야 너무 좋죠.”“……동갑내기 친구라.”강민재는 와인잔의 기둥을 천천히 굴렸다.“공 상무님이 참 매력이 많은가 봅니다.”그리고 피식 웃었다.“차 대표도 홀딱 빠져 있고, 작가님도 하루 만에 베프가 되시고.”잠깐의 침묵.강민재의 입꼬리가 비틀렸다.“그런데 작가님.”“네?”“너무 정 주지 마세요.”그가 낮게 말했다.“사람 속은 모르는 겁니다.”유정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무슨 뜻이시죠?”“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더군요.”강민재가 말을 이어갔다.“제가 우연히 목격했는데, 차 대표랑 그렇게 공개 연애를 하면서 뒤로는 자기보다 어린 남자애를 오피스텔로 끌어들이더군요.”그는 유정을 똑바로 바라봤다.쿵-유정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양다리도 그런 양다리가 없습니다.”흔들리면 안 돼.“그것도, 한참 어린 애라니... 쯧- 취향이 뭐, 말 안해도 알죠?”강민재가 혀를 찼다.“하긴, 그 나이대 애들은 순진해서 다루기 쉽잖아요.”달그락.유정이 들고 있던 나이프가 접시 위에 내려앉았다.하지만 이건, 참을 수 없다.“말씀...”유정이 숨을 한번 내쉬고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가려서 하시죠.”강민재가 고개를 기울였다.“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이 얘기 하려고 저 만나자고 하셨어요?”유정의 눈이 번뜩였다.“그러면 제가, 서린이와의 관계를 정리라도 할 줄 아셨어요?”유정이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의원님이 어떤 의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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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유정은 레스토랑을 빠져나오며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강민재가 자신을 떠봤다. 그것도 서린과 도윤을 미끼로.당장 전화하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유정은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다 놓으며 전화를 해야 할지 망설였다.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 마침내 연결되었다.“어, 유정아.”— 서린아, 지금 어디야?“집 앞. 막 들어가려던 참이야.”— 그래? 오늘 별 일 없었어?“있었지.”순간, 전화기 너머로 유정이 숨을 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긴장 하지마. 좋은 일이야, 좀 있다 말해줄게. 너는?”— 나도 뭐, 그냥 그랬지. 일단 집에 들어가. 밤공기 차다.“갑자기 웬 걱정이야?”— 들어가면 얘기해.유정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서린은 걸음을 조금 재촉하다 뒤를 돌아보았다.수혁은 아직 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서린은 작게 웃어 보이고는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들어왔어. 그런데 왜 그래?”잠깐의 침묵 끝에 유정이 낮게 말했다.— 서린아, 오늘 나 강민재 만났어.서린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강민재를?”— 응. 나 떠보려고 부른 거였어.“무슨 말 했는데?”유정은 강민재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서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새끼, 눈치챈 것 같아. 조심해.“…응. 알았어. 유정아, 고마워.”전화를 끊은 뒤에도 서린은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강민재가 눈치챈 것 같다.내가 공지안이라는 걸.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한기가 밀려왔다.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건 없으니까.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이었다.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지이잉—서린은 잠결에 눈을 떴다.창밖으로 희미한 아침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눈을 비비며 휴대폰을 더듬어 집어 들었다.화면에는 오전 7:00이 떠 있었다.“누구지….”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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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서린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아니야.”입술 사이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손이 떨렸다.젓가락으로 면을 조금 들어 올렸다.국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그리고—기억이 번쩍 떠올랐다.늦은 밤.대학생이었던 시절.서류 더미 사이에서 고개를 들던 강민재.“배고프지?”포장마차 봉투를 내려놓던 손.“야식.”그날도 우동이었다.서린은 늘 유부를 젓가락으로 먼저 빼냈다.“이거 기름져.”대신 김치를 국물에 조금 넣고, 쑥갓을 더 올려 먹었다.그 모습을 보던 강민재가 웃었었다.“너는 우동 먹는 것도 특이하다.”“……이게 더 맛있어요.”그 기억이—지금 눈앞의 우동과 완벽하게 겹쳐졌다.서린의 손에서 젓가락이 툭 떨어졌다.탁.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아침.7시. 전화벨.— 이 오빠가 매일 아침마다 모닝콜을 해 줄게. 어때?점심.12시 정각.“점심 맛있게 먹어요.”— 그러면 저는 오빠한테 점심 맛있게 드시라고 인사할게요.그리고 지금—이 우동.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졌다.강민재.그가 지금 말하고 있었다.‘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순간 속이 뒤틀렸다.“윽—”서린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그가.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서린의 시선이 사무실 문을 향했다.익숙했던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왜 그래요? 이 우동 뭐 이상해요?”입을 틀어막고 신음을 내는 서린을 보고 민우가 물었다.“아, 아니에요. 맛있어요. 드세요, 변호사님.”“아니… 지금 공 상무 안색이 창백해요.”숨을 고르며 억지로 웃었다.“아까 점심 먹은 게 소화가 안 됐나 봐요.”“정말 괜찮겠어요?”민우가 걱정스레 서린의 얼굴을 살폈다.“네. 변호사님 죄송하지만… 저 이만 가 봐야겠어요. 소화제라도 사서 먹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대표님께는… 그냥 일찍 갔다고만 해 주세요. 괜히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요.”“알았어요.”서린은 사무실을 나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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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수혁이 휴대폰을 내려다봤다.통화 기록 맨 위에 같은 이름이 반복되고 있었다.공서린.다시 한 번 발신 버튼을 눌렀다.전화를 거는 순간, 기계적인 안내음이 흘러나왔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연결할 수 없습니다.”수혁의 턱이 미묘하게 굳었다.“…….”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전화기는 꺼져 있었다.조금 전 민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공 상무님? 우동 배달된 거 확인하고는… 먹지도 않고 그냥 가셨어.먹지도 않고.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수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밤공기가 차갑게 가슴으로 파고들었다.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엔진 소리가 고요한 지하 주차장에 낮게 울렸다.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수혁은 잠시 차 안에 앉은 채 건물을 올려다봤다.불빛이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혹시 몰라 차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 끝까지 걸어갔다.그리고 그녀의 집 앞에 섰다.벨을 눌렀다.…아무 반응이 없었다.수혁의 시선이 문 아래로 내려갔다.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잠시 문 앞에 서 있던 수혁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손을 들어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결국 멈췄다.약 먹고 쉰다고 했으니 지금은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수혁은 한 발 물러섰다.집으로 돌아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어두운 방 안에서 휴대폰 화면만 희미하게 빛났다.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고객님의 전화기는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새벽 공기가 유리창에 흐릿하게 맺혀 있었다.왠지 모르게—가슴 한쪽이 계속 불편했다.마치, 어딘가에서 좋지 않은 일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다음 날 아침 7시.눈을 뜨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흘러나왔다.수혁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오전 9시.수혁은 출근하자마자 비서실장을 불렀다.“전략기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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