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Chapter 111 - Chapter 120

197 Chapters

110화.

서린은 잠시 멍하니 수혁을 바라보다가—푸흡-작게 웃음이 터졌다.“웃어?”“대표님, 도윤이 말이에요.”“어, 도윤인지 도분인지.”“제 동생이에요.”수혁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뭐?”“친동생이요. 공도윤.”“동……생?”“네. 강민재가 제게 접근하니까, 남자친구인 척해준 거예요.”“하―”수혁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그리고 잠시 후.“푸하하하하!”박장대소를 터뜨렸다.식탁이 들썩거릴 정도로 시원한 웃음이었다.“와- 대박이다 진짜.”눈가를 닦으며 말을 잇는다.“그럼 강민재 그 새끼, 어제 처남한테 질투하고 시비 건 거야?”다시 웃음이 터졌다.“와- 새끼, 완전 물먹었네. 꼴 좋-다.”방금 전까지의 묵직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연하남이 아니라 처남이라니.세상에 이렇게 반가운 소식이 또 있을까.“그럼 굳이 밝히지 마.”수혁이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말했다.“그 새끼한테는 계속 오해하게 둬. 너 양다리 걸치는 나쁜 여자라고 욕하면서도 못 놓는 꼴— 상상만 해도 재밌다.”“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당연하지.”수혁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서린을 봤다.“처남이었으면 어제 밥이라도 사 먹여서 보냈을 텐데. 나중에 같이 보자. 제대로 인사해야지.”서린도 따라 웃었다.어제의 피비린내 나는 밤과 카페의 싸움, 경찰서까지 이어진 소란이,이 아침 웃음 속에서 조금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나란히 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수혁의 차가 한도오토링크 정문 앞에 멈췄다.“먼저 내려. 난 주차장으로 갈게.”“네.”서린은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엘리베이터 앞에서 김다은 대리가 서린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려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어? 부장님!”“어, 김 대리. 좋은 아침.”“부장님…… 어제 그 옷 아니에요?”김 대리의 시선이 서린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위아래로 훑었다.“…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주변에 있던 직원들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게 느껴졌다.서린은 침착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1
Read more

111화.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전 9시.주식 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속보] 한도전자, 5천억 규모 유동성 위기… 부도설 확산[반도체 소재 사업 실패… 분식 회계 의혹 제기]순식간에 매도 물량이 쏟아졌다.호가창이 붉게 번졌고, 주가 그래프는 단 한 번의 반등도 없이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차상우 전무가 야심 차게 밀어붙였던 반도체 소재 사업은 실체보다 기대감이 앞선 도박에 가까웠다.그 손실을 감추기 위해 끌어다 쓴 계열사 자금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그룹 전체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한도오토링크 대표실에서 수혁은 모니터에 떠 있는 한도전자의 주가 그래프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급격히 꺾여 내려가는 파란 선.누군가에겐 파국의 신호였지만,그에겐 계산이 끝난 결과였다.그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타이밍, 정확하네.”낮게 중얼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그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두툼한 파일철을 든 서린이 들어왔다.“준비됐습니다, 대표님.”감정이 배제된, 정확한 보고였다.“채권단 매입 작업 완료했습니다. 우호 지분까지 합치면 30%를 넘습니다.현재 한도전자의 실질 최대 채권자는 한도오토링크입니다.”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서린에게 닿았다.“민우는.”“법적 검토 마쳤고, 이사회장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임시 주주총회 소집 요건도 충족됩니다. 절차상 하자는 없습니다.”수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재킷을 걸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저 건물 어딘가에서는 지금 공포가 번지고 있을 것이다.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책임을 떠넘기는 고함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이 싸움은 오늘 시작된 게 아니었으니까.풍선은 이미 충분히 부풀어 있었다.그는 단지, 터지는 순간을 기다렸을 뿐이었다.수혁이 고개를 돌려 서린을 바라봤다.“가자.”수혁이 먼저 문을 나섰고, 서린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같은 시각, 한도전자 회장실의 문이 거의 부서질 듯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Read more

112화.

강민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도전자 일은 들었겠지.“예. 보고 있습니다.”— 그놈이 회사를 먹으려고 들어왔네.강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차윤호의 다급함이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졌다.한도전자는 강민재에게도 중요했다.차윤호와 여러 가지 일을 해 오는 동안 한도전자는 좋은 먹잇감이었다.돈도, 정보도, 필요할 때마다 빼먹을 것이 많은 곳이었다.그런 곳을 차수혁에게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더구나 놈이 안쪽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곤란해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물고 뜯는 동안, 다른 곳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그 틈이라면 서린을 다시 제 쪽으로 끌어올 기회도 생길 것이다.강민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시간이 필요하네.“해 보죠.”***오후 2시. 한도전자 본사 20층, 대회의실.긴급 이사회가 열린 회의실은 숨 막히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유리창 너머로는 본사 로비를 점거한 채권단의 고함이 낮게 울려 퍼졌고, 안에서는 이사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이게 대체 무슨 경영입니까!”“언론에 다 터졌습니다. 더 숨길 것도 없어요!”상석에 앉은 차윤호 회장은 핏발 선 눈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조용히 해! 다들 입 안 다물어?”사외 이사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회장님, 입 다물고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법정 관리입니다. 대안이 있으십니까?”차윤호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그, 그건… 금융권과 다시 협의 중이니—”“이미 상환 연장 거부 공문이 왔습니다.”다른 이사가 말을 잘랐다.“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그 순간, 차상우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번 반도체 소재만 납품되면 해결됩니다. 이건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이지, 실패가 아닙니다!”회의실 곳곳에서 한숨과 냉소가 터져 나왔다.“납품처 세 곳이 이미 부도났습니다.”“분식 회계 의혹까지 제기됐는데, 이걸 어떻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2
Read more

113화.

“동시에, 신임 대표이사 취임안을 상정합니다.”차수혁은 단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높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회의실 공기를 단단히 눌렀다.“뭐, 뭐라고? 네가 지금… 회사를 꿀꺽하겠다는 거냐?”차윤호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그러나 수혁은 그를 보지 않았다.동요하는 이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다들 불안하신 거 압니다. 유통업만 하던 놈이 제조업을 알겠느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다 회사 기둥까지 뽑는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죠.”이사들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이사님들. 기술은 엔지니어가 만듭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돈으로 바꾸는 건 경영입니다.”그의 손짓에 서린이 화면을 띄웠다.[한도오토링크 경영 성과 분석]가파르게 우상향하는 그래프가 회의실을 비췄다.“취임 이후 3년. 영업이익 42% 상승. 부채비율 30% 감소. 만년 적자였던 동남아 법인, 1년 만에 흑자 전환.”부정할 수 없는 숫자뿐이었다.“저는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계산합니다.”수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데이터 없는 투자는 도박이고, 수익 모델 없는 확장은 자살입니다. 저는 이 회사를 도박판에서 끌어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겠습니다.”“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지금 당장 부도 위기입니다. 현금이 없습니다.”한 상무이사가 조심스럽게 묻자, 수혁이 즉답했다.“현금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급한 불을 끄고, 썩은 살을 도려내겠습니다.”서린이 다음 화면을 넘겼다.[한도전자 경영 정상화 로드맵]“신소재 사업부는 즉시 정리하고, 고정비 차단해서 2분기 내 현금 흐름 정상화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기존 강점 사업에 집중하면 3분기 내 흑자 전환이 가능합니다.”서린의 브리핑까지 더해지자, 이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잠시 후, 테이블 끝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예전 회장님 생각나는군.”“숫자부터 보셨지. 도박은 싫어하셨고. 계산 안 서는 사업은 절대 허락 안 했고.”차윤호의 얼굴이 굳었다.“저는 오너가 아니라, 책임자가 되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Read more

114화.

서린은 말없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처럼.“혼자가 아니잖아요, 이제.”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풀렸다.민우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그래. 깔끔하게 끝내자. 더럽게 끌지 말고.”세 사람의 잔이 동시에 부딪쳤다.결전의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같은 시각.불 꺼진 국회의원 의원실.강민재는 창가에 서서 도심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놈이 이렇게까지 판을 키울 줄은 몰랐어. 이사회 늙은이들이 다 돌아설 줄이야……“회장님. 지금 신세 한탄 듣자고 전화한 거 아닙니다. 정리, 다 됐습니까. 5년 전, 그리고 작년. ‘기술 제휴’ 명목으로 처리했던 자료들 말입니다.”수화기 너머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났다.— 서버는 이미 포맷했고, 백업본도 폐기했어. 관련자들 전부 입단속 끝냈고. 해외 쪽도 덮어씌웠네.강민재의 손가락이 창틀을 두드렸다.일정하던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주주총회까지 남은 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긁었다.“확실해야 합니다. 차수혁이 대표가 되면, 가장 먼저 과거 계약서부터 뒤질 겁니다. 횡령이나 배임은 돈으로 정리됩니다. 하지만 그 건은 다릅니다.”그는 낮게 덧붙였다.“밖으로 새는 순간, 우리는 변호사 선임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럴 일 없어. 아무도 모른다니까.“아무도 모른다고 믿는 건, 회장님 같은 분들이나 하는 실수죠. 그리고.”강민재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회장님 거취가 어떻게 되든, 우리 사이 거래는 유지됩니다. 회사가 넘어가도 자금 흐름은 멈추면 안 됩니다. 그게 멈추는 순간, 제가 회장님을 보호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이, 이보게! 강 의원!뚝.강민재는 망설임 없이 통화를 끊었다.어둠이 깔린 의원실 안에서 길게 숨을 뱉었다.“멍청한 늙은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짜증과 분노 아래, 다른 감정이 꿈틀거렸다.한도전자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씨발… 어르신한테서 연락 오면 뭐라고 둘러대지.’강민재는 창밖의 어둠을 노려보다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Read more

115화.

모두가 빠져나간 한도전자 본사 20층.한때 선대 회장이 사용하던 옛 집무실은 고요했다.차윤호가 회장 자리에 오른 뒤 새로 꾸민 집무실을 사용하면서,이곳은 오랫동안 비워진 채 남아 있었다.정기적인 관리는 되고 있었지만,사람의 온기만큼은 오래전에 끊어진 공간이었다.문패는 이미 떼어졌고,벽에는 아무 이름도 걸려 있지 않았다.유리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수혁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책상 앞으로 가 의자에 손을 얹었다.짙은 나무 결.손잡이에 남은 희미한 사용감.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도,이상하게 아버지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는 의자를 천천히 돌려 앉아 보려다가,이내 멈췄다.“좋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겁네.”민우가 캔커피를 던지듯 건넸다.“원래 왕관은 액세서리가 아니야. 폼 잡으려고 쓰는 거면 아예 쓰지를 마.”수혁은 피식 웃으며 캔을 땄다.치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맴돌았다.한 모금.쓴맛이 오래 남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아래로 펼쳐진 도심. 퇴근 시간의 차량 행렬.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번지는 붉은 노을.정문 앞에는 아직도 취재 차량 몇 대가 남아 있었다.새로운 대표의 얼굴을 한 컷이라도 더 담으려는 듯.“아버지가 이 자리 좋아하셨어.”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여기 서서 저 불빛들 보면서 그러셨지. 저 중에 우리 냉장고 쓰는 집도 있고, 우리 부품 들어간 휴대폰 쓰는 사람도 있고.”그가 미세하게 웃었다.“눈에 안 보여도 다 연결돼 있다고.”잠시 멈췄다.“그래서 이 자리는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라고.”서린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말보다 눈빛에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벽 한쪽에 걸린 대형 세계지도가 눈에 들어왔다.색색의 핀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저건…?”“해외 거래처 표시야.”수혁이 다가가 손끝으로 핀 하나를 건드렸다.“아버지가 직접 꽂았다고 들었어.”그는 특정 지점을 짚었다.동남아 해안 도시.“사고 나기 직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Read more

116화.

차는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저녁 도시의 불빛이 유리창을 스쳐 지나갔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은 차 안은 조용했다.엔진 소리와 간헐적인 방향지시등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릴 때 말이야.”그는 앞을 본 채였다.“아버지는 회사 얘기를 집에서는 거의 안 하셨어.”의외라는 듯 서린이 고개를 돌렸다.“그럼요?”“대신 공장 데려가는 걸 좋아하셨어.”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초등학생 때였는데, 작업복 입혀서 라인 한 바퀴 돌게 했지. 사람들한테 ‘내 아들이다’ 자랑도 하고.”“대표님이요?”“그땐 그냥 애였지, 근데 그날 이후로, 제품 하나 볼 때마다 ‘저건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하게 됐어.”차가 신호에 멈췄다.붉은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물들였다.“어머니는 완전 반대였고.”“어떻게요?”“회사 얘기만 나오면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자’고 하셨어.”그가 짧게 웃었다.“주말이면 무조건 가족 시간. 산에 가거나, 바다 보러 가거나.”이번엔 웃음이 조금 더 선명했다.“그래도 아버지 얘기 제일 잘 들어준 사람도 어머니였어.”그가 천천히 덧붙였다.“결국 밤에 두 분이 앉아서 다 얘기하셨겠지.”차가 다시 움직였다.“사고 소식 들은 날….”그는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이어갔다.“처음엔 실감이 안 나더라. 아버지가 늘 출장 다니셨으니까, 이번에도 금방 돌아올 것 같았어.”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가 풀렸다.“근데 집이 조용해지니까 알겠더라고. 진짜로 안 오는구나.”차 안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서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되는 거 있으세요?”수혁은 잠시 생각했다.“유학 가기 전날, 아버지가 술 한잔 하자고 하셨거든.”그가 희미하게 웃었다.“귀찮아서 핑계 대고 방으로 들어갔어. ‘다녀와서 하자’고.”짧은 숨이 흘렀다.“그게 마지막이었지.”말은 담담했지만, 여운이 길었다.차는 점점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가로등 사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Read more

117화.

도윤은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방금 전, 강민재에게서 걸려온 전화.— 집 근처야. 곧 도착해. 아버님, 어머님 곧 들어오신다니까 너도 잠깐 얼굴 보자.그 한 마디가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미친… 왜 갑자기 집으로 와.”욕을 삼킨 도윤은 가족 단톡방을 열었다.[도윤]엄마 아빠 민재형 온다며?전송.숫자 2에서 1이 되었다.[도윤]급함누나 얘기야카페에서 만났는데 누나가 민재형 피하는 것 같아서내가 남자친구인 척 했어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이번엔 숫자 2.사라지지 않았다.“왜 안 봐…”거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손바닥이 미끄러울 만큼 젖어 있었다.“제발 좀 보라고…”소파에 털썩 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결국 도윤은 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민재가 집에 오고 있음을 알렸다.그때.삐—.인터폰이 울렸다.기계음 뒤로 경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강민재 의원 도착했습니다. 지금 들어가십니다.”심장이 바짝 조였다.정문을 통과했다는 말은, 이제 돌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 시각, 강변도로를 달리는 차 안.서린은 수혁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저기, 그게…….”말끝이 흐려졌다.부모님.그 단어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렸다.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모든 걸 말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수혁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그때였다.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도윤]서린은 수혁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눈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어, 도윤아.”— 누나, 지금 어디야?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빠르다.“밖이야. 무슨 일 있어?”잠시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강민재 형이 집으로 오고 있어.서린의 숨이 멎었다.“왜…? 갑자기 왜 온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근데 느낌이 좀 이상해.— 걱정 마. 그냥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서린이 입을 꾹 다문채 머리를 젖혔다.“……어.”— 도착한 것 같아. 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Read more

118화.

도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카톡 못 보신 거야?’강민재의 눈이 가늘어졌다.‘어?’공기 결이 바뀌었다.이건 단순한 부모의 호기심이 아니었다.‘이상한데.’의심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쾅—!공대현이 탁자를 내리쳤다.“이 녀석이-! 너 제정신이야?”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같은 공 씨는 안 되는 거 몰라?”강민재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우리 집안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알잖아! 족보 따져보면 다 엮여 있어. 동성동본은 안된다!”윤정희도 다급히 거들었다.“도윤아… 정말이야? 공 씨라고?”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도윤은 잠시 얼어 있다가, 뒤늦게 분위기에 올라탔다.“아니, 요즘 누가 그런 걸 따져요! 법적으로도 문제없다니까요!”“안 돼!”“허락 안 해줘도 만날 거예요!”부자간의 고성이 오갔다.거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강민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아니, 더 있다가는 괜히 불똥이 튈 판이었다.“제가 괜한 화제를 꺼냈군요.”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가게! 이 녀석 교육을 다시 시켜야겠어!”공대현은 도윤을 노려보느라 강민재를 보지도 않았다.현관문이 닫혔다.차에 올라탄 강민재는 한동안 시동을 걸지 않았다.룸미러에 저택이 비쳤다.“역시… 아닌 건가.”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 없다.만약 그렇다면, 이름을 말했을 때의 반응은 달랐을 것이다.공대현은 화를 냈고, 윤정희는 놀랐다.충분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그게 또 거슬렸다.이미 너무 많은 우연을 겪어서 그런가.공서린이라는 이름과 함께 나오는 반응들이 강민재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강민재는 주주총회에 참석하고서 계속 서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래서 알 수 있었다.뒷모습은 영락없는 지안이었다.앉아있는 폼새, 손목을 문지르던 습관.긴장하면 움츠러들던 어깨의 잔떨림까지.그래서 확인해 보기 위해 왔다.얻은 답은 애매했다.가족들의 반응만 놓고 보면 자신의 의심이 틀린 것 같았다.그렇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Read more

119화.

수혁은 더 묻지 않았다.서린이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대신 그는 핸들을 꺾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자.”“네?”“지금 상태로 집에 가면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 그리고 나도 배고프고.”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웃어 보였다.“산 사람은 밥을 먹어야지.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좀 풀릴 거야.”차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수혁은 익숙하게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통유리 너머로 검은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이 보석처럼 부서지고 있었다.잔잔한 음악과 따뜻한 조명 때문인지, 차 안에서부터 굳어 있던 서린의 어깨가 조금씩 풀렸다.“여기 자주 오세요?”“그렇게 자주는 아니고, 오늘은 그냥… 분위기라도 좋으면 나을까 해서.”그 담백한 배려에 서린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곧이어 주문한 스테이크와 붉은 와인이 테이블에 놓였다.“맛있어?”“네. 정말 맛있어요.”서린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긴장을 풀려던 찰나였다.“야.”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서린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성유정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너 여기서 뭐 해?”서린의 눈이 동그래졌다.“유정아?”“전화는 안 받더니, 여기서 데이트 중이었어? 아주 깨가 쏟아지네.”유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럽게 웃었다.“아니 그게 아니라—”“농담이야. 대표님, 오랜만이에요.”유정은 능청스럽게 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수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오랜만이네요, 작가님.”“여기서 다 뵙네요. 저 오늘 부모님이랑 저녁 먹으러 왔거든요.”유정이 뒤쪽, 가장 안쪽의 조용한 테이블을 가리켰다.그곳에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 부부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서린은 그중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숨을 들이켰다.성. 도. 형.여당의 실세이자 혁신위원장.그리고 유정의 아버지.“아…….”서린이 당황하는 사이, 수혁이 먼저 반응했다.“위원장님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Read more
PREV
1
...
1011121314
...
2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