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평소라면 전화벨 소리와 고성으로 아수라장이었을 사무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출근을 하자마자 하루 일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주목.”
짧고 낮은 목소리 하나가 소음을 잠재웠다.
차수혁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사무실 중앙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공서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호기심, 경계, 그리고 무시. 다양한 감정이 섞인 눈빛들이었다.
“인사해. 오늘부로 경영지원팀 과장으로 발령 난 공서린 씨다.”
술렁임이 일었다.
과장.
입사 이틀 차, 그것도 경력직 면접만 보고 들어온 외부인에게 주어지기엔 파격적인 직책이었다.
영업 1팀장 심재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려 했지만, 수혁이 더 빨랐다.
“앞으로 회사 내 모든 자금 집행, 정산, 그리고 감사 권한은 공 과장이 갖는다.”
수혁의 시선이 사무실을 천천히 훑었다.
“10원짜리 하나라도 공 과장 결재 없이는 밖으로 못 나간다. 딜러 수수료, 매입 자금, 하다못해 너희들 회식비까지 전부.”
“대표님, 그건 너무…”
“불만 있나?”
수혁이 심 팀장을 쳐다보았다.
서늘한 눈빛에 심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
“공 과장의 말은 곧 내 말이다. 협조가 아니라, 지시에 따르도록. 이상.”
수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표실로 들어갔다.
블라인드가 내려가고, 사무실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직원들은 멍하니 서린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투명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의 밥줄을 쥔 ‘감시자’였다.
사무실 구석에서 작은 숨소리들이 새어 나왔다.
"입사 이틀 만에 과장?"
"감사 권한까지 준다고?"
"대표가 미친 거 아냐?"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충 넘기던 영수증 하나, 관행처럼 처리하던 정산 하나까지 모두 다시 들여다볼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특히 몇몇 직원들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가장 크게 동요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조용했다.
그 모습을 스쳐 보던 서린은 굳이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서린은 직원들을 향해 정중하지만 건조하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업무상 필요한 자료는 제때 넘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서린이 자리에 앉자 사무실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 그녀를 신입 취급하던 직원들이 눈을 피했다.
누군가는 커피잔을 들고 가다 발걸음을 멈췄고, 누군가는 모니터만 들여다보는 척했다.
서린은 그 시선들을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떠들썩한 하루가 다 가고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매매 단지의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서린은 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야외 주차장 구석, 세차장 쪽으로 향했다.
“동하 씨.”
서린이 부르자, 동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기름때 묻은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과… 과장님?”
호칭이 바뀌어 있었다.
아침의 소동을 그도 들은 모양이었다.
동하는 황급히 장갑을 벗으며 허둥지둥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퇴근 안 하셨어요?”
“저녁, 아직이죠?”
서린은 무심하게 물었다.
“네? 아, 네. 이거만 끝내고 컵라면이나 먹을까 했는데….”
“제가 살게요. 나가죠.”
“……네?”
동하는 멍하니 있다가, 서린이 다시 한번 눈짓을 주자 그제야 활짝 웃었다.
“저야 영광이죠! 근처에 진짜 맛있는 순대국밥집 있어요. 가시죠!”
막 두 걸음을 옮기던 동하가 갑자기 멈춰 섰다.
자신의 작업복을 내려다봤다.
기름때와 먼지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소매는 광택 약품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 잠깐만요.”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 꼴로 가면 과장님한테 너무 민폐일 것 같아서요. 손이랑 얼굴만 좀 씻고 금방 올게요!”
대답도 듣지 않고 세차장 수도 쪽으로 뛰어갔다.
손을 대충 씻고, 머리까지 물로 쓸어 넘긴 뒤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에 서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작업복부터 신경 쓰는 사람.
그 사소한 배려가 오히려 낯설었다.
단지 앞 기사식당은 저녁 시간이라 딜러들과 기사들로 북적였다.
소주잔 부딪치는 소리, 찌개 끓는 소리가 요란했다.
서린의 단정한 차림이 이 곳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국밥을 주문했다.
“와, 과장님 이런 데도 오시는구나. 저는 파스타 같은 것만 드실 줄 알았는데.”
동하는 신이 나서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르며 서린을 챙겼다.
그는 서린이 자신에게 밥을 사자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죠.”
서린은 깍두기를 집으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동하 씨는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이제 1년 좀 넘었습니다. 힘들긴 해도 재밌어요. 차 닦아서 새 주인 만나게 해 주면 뿌듯하기도 하고.”
동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깍두기 더 드실래요?"
"안 먹습니다."
"그럼 제가 먹을게요."
“사실 다들 과장님 무서워하는데, 저는 알아요. 되게 따뜻한 분이라는 거.”
“…….”
“어제도 덥다고 짜증 내실 수도 있었는데, 커피 받아주셨잖아요. 눈빛도… 슬퍼 보이고.”
서린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5년 전, 공지안이 가장 많이 듣던 말이었다.
따뜻하다, 맑다, 사람을 잘 믿는다.
그 ‘맑음’이 결국 그녀를 차가운 바다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이제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동하 씨.”
“네?”
“착각이에요. 저는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게 있어서 온 거예요.”
서린은 감정을 억누르고 본론을 꺼냈다.
차는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저녁 도시의 불빛이 유리창을 스쳐 지나갔다.라디오도 켜지지 않은 차 안은 조용했다.엔진 소리와 간헐적인 방향지시등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릴 때 말이야.”그는 앞을 본 채였다.“아버지는 회사 얘기를 집에서는 거의 안 하셨어.”의외라는 듯 서린이 고개를 돌렸다.“그럼요?”“대신 공장 데려가는 걸 좋아하셨어.”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초등학생 때였는데, 작업복 입혀서 라인 한 바퀴 돌게 했지. 사람들한테 ‘내 아들이다’ 자랑도 하고.”“대표님이요?”“그땐 그냥 애였지, 근데 그날 이후로, 제품 하나 볼 때마다 ‘저건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하게 됐어.”차가 신호에 멈췄다.붉은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물들였다.“어머니는 완전 반대였고.”“어떻게요?”“회사 얘기만 나오면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자’고 하셨어.”그가 짧게 웃었다.“주말이면 무조건 가족 시간. 산에 가거나, 바다 보러 가거나.”이번엔 웃음이 조금 더 선명했다.“그래도 아버지 얘기 제일 잘 들어준 사람도 어머니였어.”그가 천천히 덧붙였다.“결국 밤에 두 분이 앉아서 다 얘기하셨겠지.”차가 다시 움직였다.“사고 소식 들은 날….”그는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이어갔다.“처음엔 실감이 안 나더라. 아버지가 늘 출장 다니셨으니까, 이번에도 금방 돌아올 것 같았어.”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가 풀렸다.“근데 집이 조용해지니까 알겠더라고. 진짜로 안 오는구나.”차 안 공기가 조금 가라앉았다.서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후회되는 거 있으세요?”수혁은 잠시 생각했다.“유학 가기 전날, 아버지가 술 한잔 하자고 하셨거든.”그가 희미하게 웃었다.“귀찮아서 핑계 대고 방으로 들어갔어. ‘다녀와서 하자’고.”짧은 숨이 흘렀다.“그게 마지막이었지.”말은 담담했지만, 여운이 길었다.차는 점점 도심을 벗어나고 있었다.가로등 사이
모두가 빠져나간 한도전자 본사 20층.한때 선대 회장이 사용하던 옛 집무실은 고요했다.차윤호가 회장 자리에 오른 뒤 새로 꾸민 집무실을 사용하면서,이곳은 오랫동안 비워진 채 남아 있었다.정기적인 관리는 되고 있었지만,사람의 온기만큼은 오래전에 끊어진 공간이었다.문패는 이미 떼어졌고,벽에는 아무 이름도 걸려 있지 않았다.유리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수혁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책상 앞으로 가 의자에 손을 얹었다.짙은 나무 결.손잡이에 남은 희미한 사용감.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도,이상하게 아버지의 흔적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는 의자를 천천히 돌려 앉아 보려다가,이내 멈췄다.“좋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겁네.”민우가 캔커피를 던지듯 건넸다.“원래 왕관은 액세서리가 아니야. 폼 잡으려고 쓰는 거면 아예 쓰지를 마.”수혁은 피식 웃으며 캔을 땄다.치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맴돌았다.한 모금.쓴맛이 오래 남았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아래로 펼쳐진 도심. 퇴근 시간의 차량 행렬.건너편 빌딩 유리창에 번지는 붉은 노을.정문 앞에는 아직도 취재 차량 몇 대가 남아 있었다.새로운 대표의 얼굴을 한 컷이라도 더 담으려는 듯.“아버지가 이 자리 좋아하셨어.”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여기 서서 저 불빛들 보면서 그러셨지. 저 중에 우리 냉장고 쓰는 집도 있고, 우리 부품 들어간 휴대폰 쓰는 사람도 있고.”그가 미세하게 웃었다.“눈에 안 보여도 다 연결돼 있다고.”잠시 멈췄다.“그래서 이 자리는 권력이 아니라 책임이라고.”서린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말보다 눈빛에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벽 한쪽에 걸린 대형 세계지도가 눈에 들어왔다.색색의 핀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저건…?”“해외 거래처 표시야.”수혁이 다가가 손끝으로 핀 하나를 건드렸다.“아버지가 직접 꽂았다고 들었어.”그는 특정 지점을 짚었다.동남아 해안 도시.“사고 나기 직전에
서린은 말없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처럼.“혼자가 아니잖아요, 이제.”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풀렸다.민우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그래. 깔끔하게 끝내자. 더럽게 끌지 말고.”세 사람의 잔이 동시에 부딪쳤다.결전의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같은 시각.불 꺼진 국회의원 의원실.강민재는 창가에 서서 도심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놈이 이렇게까지 판을 키울 줄은 몰랐어. 이사회 늙은이들이 다 돌아설 줄이야……“회장님. 지금 신세 한탄 듣자고 전화한 거 아닙니다. 정리, 다 됐습니까. 5년 전, 그리고 작년. ‘기술 제휴’ 명목으로 처리했던 자료들 말입니다.”수화기 너머에서 밭은기침 소리가 났다.— 서버는 이미 포맷했고, 백업본도 폐기했어. 관련자들 전부 입단속 끝냈고. 해외 쪽도 덮어씌웠네.강민재의 손가락이 창틀을 두드렸다.일정하던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주주총회까지 남은 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긁었다.“확실해야 합니다. 차수혁이 대표가 되면, 가장 먼저 과거 계약서부터 뒤질 겁니다. 횡령이나 배임은 돈으로 정리됩니다. 하지만 그 건은 다릅니다.”그는 낮게 덧붙였다.“밖으로 새는 순간, 우리는 변호사 선임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럴 일 없어. 아무도 모른다니까.“아무도 모른다고 믿는 건, 회장님 같은 분들이나 하는 실수죠. 그리고.”강민재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회장님 거취가 어떻게 되든, 우리 사이 거래는 유지됩니다. 회사가 넘어가도 자금 흐름은 멈추면 안 됩니다. 그게 멈추는 순간, 제가 회장님을 보호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이, 이보게! 강 의원!뚝.강민재는 망설임 없이 통화를 끊었다.어둠이 깔린 의원실 안에서 길게 숨을 뱉었다.“멍청한 늙은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짜증과 분노 아래, 다른 감정이 꿈틀거렸다.한도전자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씨발… 어르신한테서 연락 오면 뭐라고 둘러대지.’강민재는 창밖의 어둠을 노려보다가
“동시에, 신임 대표이사 취임안을 상정합니다.”차수혁은 단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높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회의실 공기를 단단히 눌렀다.“뭐, 뭐라고? 네가 지금… 회사를 꿀꺽하겠다는 거냐?”차윤호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그러나 수혁은 그를 보지 않았다.동요하는 이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다들 불안하신 거 압니다. 유통업만 하던 놈이 제조업을 알겠느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다 회사 기둥까지 뽑는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죠.”이사들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이사님들. 기술은 엔지니어가 만듭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돈으로 바꾸는 건 경영입니다.”그의 손짓에 서린이 화면을 띄웠다.[한도오토링크 경영 성과 분석]가파르게 우상향하는 그래프가 회의실을 비췄다.“취임 이후 3년. 영업이익 42% 상승. 부채비율 30% 감소. 만년 적자였던 동남아 법인, 1년 만에 흑자 전환.”부정할 수 없는 숫자뿐이었다.“저는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계산합니다.”수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데이터 없는 투자는 도박이고, 수익 모델 없는 확장은 자살입니다. 저는 이 회사를 도박판에서 끌어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겠습니다.”“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지금 당장 부도 위기입니다. 현금이 없습니다.”한 상무이사가 조심스럽게 묻자, 수혁이 즉답했다.“현금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급한 불을 끄고, 썩은 살을 도려내겠습니다.”서린이 다음 화면을 넘겼다.[한도전자 경영 정상화 로드맵]“신소재 사업부는 즉시 정리하고, 고정비 차단해서 2분기 내 현금 흐름 정상화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기존 강점 사업에 집중하면 3분기 내 흑자 전환이 가능합니다.”서린의 브리핑까지 더해지자, 이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잠시 후, 테이블 끝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예전 회장님 생각나는군.”“숫자부터 보셨지. 도박은 싫어하셨고. 계산 안 서는 사업은 절대 허락 안 했고.”차윤호의 얼굴이 굳었다.“저는 오너가 아니라, 책임자가 되겠
강민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도전자 일은 들었겠지.“예. 보고 있습니다.”— 그놈이 회사를 먹으려고 들어왔네.강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차윤호의 다급함이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졌다.한도전자는 강민재에게도 중요했다.차윤호와 여러 가지 일을 해 오는 동안 한도전자는 좋은 먹잇감이었다.돈도, 정보도, 필요할 때마다 빼먹을 것이 많은 곳이었다.그런 곳을 차수혁에게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더구나 놈이 안쪽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곤란해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물고 뜯는 동안, 다른 곳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그 틈이라면 서린을 다시 제 쪽으로 끌어올 기회도 생길 것이다.강민재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시간이 필요하네.“해 보죠.”***오후 2시. 한도전자 본사 20층, 대회의실.긴급 이사회가 열린 회의실은 숨 막히는 정적에 잠겨 있었다.유리창 너머로는 본사 로비를 점거한 채권단의 고함이 낮게 울려 퍼졌고, 안에서는 이사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이게 대체 무슨 경영입니까!”“언론에 다 터졌습니다. 더 숨길 것도 없어요!”상석에 앉은 차윤호 회장은 핏발 선 눈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조용히 해! 다들 입 안 다물어?”사외 이사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회장님, 입 다물고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당장 내일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하면 법정 관리입니다. 대안이 있으십니까?”차윤호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그, 그건… 금융권과 다시 협의 중이니—”“이미 상환 연장 거부 공문이 왔습니다.”다른 이사가 말을 잘랐다.“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그 순간, 차상우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번 반도체 소재만 납품되면 해결됩니다. 이건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이지, 실패가 아닙니다!”회의실 곳곳에서 한숨과 냉소가 터져 나왔다.“납품처 세 곳이 이미 부도났습니다.”“분식 회계 의혹까지 제기됐는데, 이걸 어떻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전 9시.주식 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속보] 한도전자, 5천억 규모 유동성 위기… 부도설 확산[반도체 소재 사업 실패… 분식 회계 의혹 제기]순식간에 매도 물량이 쏟아졌다.호가창이 붉게 번졌고, 주가 그래프는 단 한 번의 반등도 없이 수직으로 곤두박질쳤다.차상우 전무가 야심 차게 밀어붙였던 반도체 소재 사업은 실체보다 기대감이 앞선 도박에 가까웠다.그 손실을 감추기 위해 끌어다 쓴 계열사 자금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그룹 전체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한도오토링크 대표실에서 수혁은 모니터에 떠 있는 한도전자의 주가 그래프를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급격히 꺾여 내려가는 파란 선.누군가에겐 파국의 신호였지만,그에겐 계산이 끝난 결과였다.그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타이밍, 정확하네.”낮게 중얼거리며 펜을 내려놓았다.그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두툼한 파일철을 든 서린이 들어왔다.“준비됐습니다, 대표님.”감정이 배제된, 정확한 보고였다.“채권단 매입 작업 완료했습니다. 우호 지분까지 합치면 30%를 넘습니다.현재 한도전자의 실질 최대 채권자는 한도오토링크입니다.”수혁의 시선이 천천히 서린에게 닿았다.“민우는.”“법적 검토 마쳤고, 이사회장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임시 주주총회 소집 요건도 충족됩니다. 절차상 하자는 없습니다.”수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재킷을 걸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저 건물 어딘가에서는 지금 공포가 번지고 있을 것이다.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책임을 떠넘기는 고함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조급하지 않았다.이 싸움은 오늘 시작된 게 아니었으니까.풍선은 이미 충분히 부풀어 있었다.그는 단지, 터지는 순간을 기다렸을 뿐이었다.수혁이 고개를 돌려 서린을 바라봤다.“가자.”수혁이 먼저 문을 나섰고, 서린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같은 시각, 한도전자 회장실의 문이 거의 부서질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