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Bab 121 - Bab 130

220 Bab

121화 : 허락된 빛, 짙어진 그림자 #1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상수의 목소리는 유난히 뜨거웠다. 그 기적 같은 화해 이후, 상수는 조향실에 홀로 남아 아버지의 진심을 곱씹다 결국 참지 못하고 혜연에게 전화를 건 참이었다."혜연 씨, 자요? 아버지가... 아까 조향실에 오셨었어요. 형이랑 같이 주소를 알아내서 오셨나 봐요."상수는 아이처럼 상기된 목소리로 낮에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 평생을 '실패한 아들' 혹은 '돌연변이' 취급을 받은 줄 오해했던 그에게, 아버지가 건넨 서툰 걱정과 작업대 위에 툭 던져두고 간 빈티지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수가 평생 갈구해온 '아버지의 인정'이라는 훈장이었다. 상수는 그 무뚝뚝한 문장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인정의 무게를 설명하며 몇 번이나 목이 메었다.혜연은 침대에 기대앉아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상수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그가 조향사로서 성공했음에도 왜 늘 한구석이 허전해 보였는지 알기에 그녀의 마음도 함께 벅차올랐다. 한참을 신나서 이야기하던 상수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저기, 혜연 씨... 혹시 괜찮으면 우리 아버지 한번 만나러 갈래요? 아버지가 혜연 씨를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나를 이렇게 사람 구실 하게 만든 여자가 누구냐고... 아, 물론 불편하면 안 그래도 돼요. 내가 잘 말씀드릴게요."상수의 배려 섞인 제안에 혜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망설일 수 없었다. 상수의 행복이 곧 자신의 구원이라 믿고 싶었으니까."아니요, 상수 씨. 저도 뵙고 싶어요. 상수 씨를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신 분이잖아요. 기쁘게 갈게요."며칠 뒤, 서울 근교의 호젓한 한정식 집에서 세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정갈한 나무 창살 사이로 오후의 볕이 길게 드리워진 방 안에서, 상수의 아버지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혜연을 맞이했다. 전직 군인 출신다운 엄격함이 배어 있었지만, 혜연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따스하게 풀려 있었다."상수가 요새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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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 허락된 빛, 짙어진 그림자 #2

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상수는 의아한 듯 차의 속도를 늦추며 그녀를 보았다."뭐가요? 오늘 우리 아버지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더 고마운데.""나는... 상수 씨를 우리 부모님께 인사시켜 드리지 못하고 있잖아요. 상수의 아버님은 저를 저렇게 축복해주시는데, 저는 상수 씨를 우리 집 문턱조차 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요."혜연의 고백에 상수는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웠다. 그는 벨트를 풀고 몸을 돌려 혜연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괜찮아요, 혜연 씨. 혜연 씨 마음이 준비된다면 나는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잖아요.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혜연 씨가 느끼는 그 부담감, 내가 다 이해해요.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요. 천천히 가요, 우리."상수의 위로는 다정했고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이 오히려 혜연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상수는 '준비'가 되면 된다고 했지만, 혜연은 알고 있었다. 그 준비라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혜연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살았던 그 집의 풍경을 떠올렸다. 마당 한편에 탐스럽게 피어있던 수국, 그리고 그 아래 평상에서 부모님과 함께 웃으며 수박을 깨 먹던 소영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소영은 20년 동안 혜연의 부모님에게 또 다른 딸이었다. 명절이면 혜연보다 먼저 내려가 부모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혜연의 어머니는 소영이가 좋아하는 깻잎 장아찌를 따로 챙겨두었다가 그녀의 손에 들려 보내곤 했다.혜연의 아버지는 소영을 보며 소영이 아버지에게 늘 말씀하셨다."소영이 저 녀석이 자네 집에 복덩이야. 게다가 한 남자를 저렇게 오래도록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도 보면 참 대단해. 우리 혜연이도 소영이 반만 닮았으면 좋겠구먼."소영의 부모님은 물론 혜연의 부모님에게도 소영과 상수의 결합은 당연한 순리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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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 침범당한 낙원 #1

주말의 오후는 비현실적일 만큼 평화로웠다. 상수의 작업실이 위치한 한적한 골목은 따스한 햇살 아래 낮잠을 자는 고양이처럼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담벼락을 타고 올라간 넝쿨장미들이 유독 붉게 피어난 그 길 위로,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민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재현 씨, 오늘 데이트 코스 정말 완벽했어요. 혜연이한테 자랑하면 아마 부러워서 잠도 못 잘걸요? 걔 요새 하도 작업실에만 박혀 있어서 광합성이 좀 필요하거든요."민지는 상수의 형 재현의 팔짱을 꽉 낀 채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최근 부쩍 가까워진 사이였다. 민지는 혜연이 상수와 함께 작업실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상수는 밀린 조향 작업을 하고, 혜연은 그 곁에서 책을 읽거나 소소한 도움을 주며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럼 우리, 마지막으로 상수 작업실에 들러서 간식이나 좀 넣어주고 갈까요? 혜연이 얼굴도 좀 보고요. 재현 씨가 동생 응원도 좀 해주고요."민지의 제안에 재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 역시 동생 상수가 혜연을 만나며 비로소 정서적 안정을 찾은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했다. 두 사람은 근처 유명 베이커리에서 산 갓 구운 빵 봉투를 흔들며 작업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고소한 버터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행복한 순간이었다.하지만 작업실 건물 입구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민지의 걸음이 발작적으로 우뚝 멈춰 섰다."어...? 저기... 저 여자..."민지의 시선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상수의 작업실 건물 앞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닫힌 유리문 너머를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인영.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옆얼굴, 초점 없는 눈동자로 건물 안을 훑는 그 실루엣은 분명 윤소영이었다. 한때 혜연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지금은 혜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파멸의 전조.민지는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소영은 마치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는 강박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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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 침범당한 낙원 #2

하지만 재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소영의 말을 공격으로 받아치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움이 서린 오빠의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소영아,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지금 과거의 일들을 꺼내며 아파하는 마음은 이해해. 나도 너를 친동생처럼 아꼈고, 우리가 나눈 시간들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소영아, 그 시간들은 네가 상수의 연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축복이었어. 이젠 난 너희가 좋은 관계이길 축복하지 않아. 하지만 윤소영이라는 사람이 부디 더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기를 축복할 게"재현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그 안에 담긴 선은 단호했다."상수는 이미 너와의 관계를 다 정리했어. 그건 누구의 조종 때문이 아니라, 상수 스스로 내린 결정이야. 상수는 이제 너를 잊었어. 그건 너를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네가 없는 삶에서 자기만의 평온을 찾았다는 뜻이야. 소영아, 제발... 더 추해지지 마."'더 추해지지 마.' 그 짧은 문장은 소영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재현은 소영을 상수의 인생과 상관없는 완벽한 외부자로 규정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상수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소영의 자리는 없음을, 재현은 이성적인 언어로 못 박았다.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입가에는 기묘하게 뒤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민지를 빤히 바라보며 아주 나직하고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민지 씨, 혜연이는 잘 지내죠? 우리 혜연이... 안 본 지 꽤 됐네요. 걔가 요새 너무 바빠 보여서 내가 찾아가기가 좀 미안했거든."갑작스러운 혜연의 이름에 민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소영은 그 반응을 사냥개처럼 놓치지 않았다는 듯, 더욱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조만간 혜연이 집으로 찾아간다고 전해줄래요? 아니면 제가 직접 사무실로 가도 되고. 보고 싶다고. 우리가 나눈 추억이 워낙 많아서... 상수의 향기만큼이나 진한 얘기들이 많거든요. 혜연이가 나를 잊었을까 봐 좀 걱정되네."그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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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 낙원의 균열, 무너진 관찰자 #1

밤강물 위로 부서지는 가로등 불빛이 꼭 보석 가루를 뿌려놓은 듯했다. 상수는 혜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천천히 강변을 걸었다. 조금 전까지 작업실 근처에서 느꼈던 소영의 서늘한 기운은 이곳까지 닿지 못하는 듯했다. 상수의 품은 따뜻했고, 그가 내뱉는 숨결은 혜연의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혜연 씨, 조금 전엔 정말 놀랐죠? 형이랑 민지 씨가 잘 해결했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상수의 다정한 음성에 혜연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들어찬 돌덩이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민지가 전해준 소영의 마지막 인사. '곧 혜연이한테 찾아간다고 전해줄래요?'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때렸지만, 혜연은 지금 제 어깨를 감싸는 상수의 온기에 매달렸다.상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혜연을 마주 보았다. 그는 혜연의 두 손을 꼭 잡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좁은 주머니 안에서 서로의 손가락이 얽혔다. 상수의 체온이 혜연의 차가운 손등을 덮어올 때, 혜연은 잠시나마 소영이라는 존재를 지워낼 수 있었다."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게 누구든... 난 상관없어요. 나한테는 혜연 씨가 내 전부고, 내 유일한 안식처니까. 내가 혜연 씨 지킬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상수의 고백은 이성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열기는 델 듯이 뜨거웠다. 혜연은 상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상수의 심장 박동이 규칙적으로 전해져 왔다. 이 남자는 정말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구나. 혜연은 그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이 밟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위태로운 모래성인지 새삼 실감했다.강바람이 차가워지자 상수는 혜연의 코트 깃을 여며주며 속삭였다."우리 조금만 더 걷다가 들어갈까요? 오늘 밤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혜연 씨랑 있으면 현실의 골치 아픈 일들이 다 가짜처럼 느껴지거든요."상수는 혜연의 머리카락에 코를 부비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비누 향과 혜연 특유의 달큰한 살냄새가 상수의 이성을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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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 낙원의 균열, 무너진 관찰자 #2

소영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이 전신을 덮쳤다. 20년 동안 제 옆에서 제 연애 상담을 들어주던 친구가, 지금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상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상수는 혜연을 세워두고 그녀의 목도리를 정성스럽게 고쳐 매주었다. 차가운 밤바람에 혜연이 추울까 봐 자신의 코트 깃을 세워 그녀를 감싸 안기도 했다.상수는 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소영은 그 광경을 보며 자신의 온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환각을 보았다. 상수가 혜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작업실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은, 소영에게 그 어떤 칼날보다 예리하게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8년의 세월이 단 한 번의 눈맞춤에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굳게 닫히자, 소영은 버티고 서 있을 힘을 잃었다. 그녀는 골목 한복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냉기가 코트 너머로 스며들었지만,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아아아아...!"입술을 깨물며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짐승 같은 통곡이 터져 나왔다. 소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바닥을 긁었다. 단순히 상수를 잃었다는 상실감만은 아니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그 우정이라는 이름의 시간이 통째로 부정당했다는 모멸감이 그녀를 덮쳤다.'박혜연... 너였어? 정말 너였던 거야?'혜연은 소영의 인생에서 늘 배경 같은 존재였다. 소영이 빛날 때 박수를 쳐주고, 소영이 상수와의 고민을 털어놓을 때 묵묵히 들어주던 만만한 위로자. 그런데 그 배경이 어느덧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소영의 인생을 비웃고 있었다. 소영은 혜연과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을 떠올렸다. 상수와의 다툼을 고백하며 울던 밤, 혜연은 소영의 등을 토닥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혜연은 그때부터 소영의 자리를 탐내며 상수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영의 머릿속을 독사처럼 휘저었다.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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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 깨진 거울의 파편 #1

운수가 나쁘려니 아침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다. 아니, 어긋났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불행의 톱니바퀴에 온몸이 끼여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혜연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감 기한을 착각했다. 내일인 줄 알았던 기획안 제출이 바로 오늘 오전이었다. 어제 상수와 보냈던 그 달콤한 시간이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일까. 혜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박 과장, 지금 장난해? 이 프로젝트가 우리 팀에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이래? 10년 차 베테랑이라는 사람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해? 당장 오늘 보고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꺼야? 초안 만들어 둔거부터 당장 가져와 일단."팀장의 서늘한 질타는 사무실의 모든 공기를 진공 상태로 만들었다. 평소 완벽주의자로 통하며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던 혜연이었기에, 동료들의 시선은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박혔다.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는 혜연의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다.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환청처럼 들렸다. '박 과장님 요새 연애하나 봐? 정신줄 놓은 거 보니까.' 그 비아냥이 사실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에 혜연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오후에 이어진 클라이언트 미팅은 그야말로 도살장이었다. 지난 몇 주간 상수와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다듬었던 메인 컨셉이 단칼에 부정당했다."박 과장님, 이거 너무 감상적인 거 아니에요? 아니 좀 다크하고 심플한 것을 원했는데 이건 무슨 여기서 연애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결과물이네. 제 요구사항이 그렇게 어려우세요? 아님 제 요구 사항보다 과장님의 생각이 우선인가? 지금 우린 당신의 예술을 하려는 게 아니라 돈을 벌려는 겁니다. 전면 재작업해 오세요. 이번 주말까지."비아냥거리는 클라이언트의 말투에 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애라도 해야 할 것 같은'이라는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들킨 것일까. 우리의 부적절한 밀어가 도면에 배어 나오기라도 한 것일까. 설상가상으로 신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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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 깨진 거울의 파편 #2

"너 방에서 묘한 향기 난다? 디퓨저 새로 산 거야? 네 취향치고는 좀... 남성적인데? 묵직한 우디 향이네. 이거 꼭... 내가 잘 아는 사람 살냄새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네."소영이 코를 킁킁거리며 혜연의 목덜미 근처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혜연은 찰나의 순간, 방어적으로 거짓말이 나왔다."어? 아니... 상수 씨가 프로젝트 끝난 기념으로 샘플 선물해 줬어. 향료 배합 테스트용이라 좀 진해.""하긴, 비즈니스 파트너니까 샘플 정도는 줄 수 있겠지. 근데 혜연아, 이제 프로젝트 거의 다 끝났다면서? 그럼 이제 상수 오빠랑은 더 볼 일 없겠네? 사적으로 만날 명분도 사라졌을 거고."소영은 '상수 오빠'라는 호칭을 마치 소유권 주장이라도 하듯 선명하고도 잔인하게 발음했다. 소영은 맥주 캔을 따며 혜연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쫓았다."프로젝트는 끝났지? 그럼 다른 게 또 남은 건가? 예를 들면... 정(情)이라든가, 미련이라든가."순간 혜연의 사고가 정지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버린 혜연을 보며 소영이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난도질했다."호호호!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놀라? 너 처음에 그 사람이 내 전 남친인 거 알고 엄청 곤란해했잖아. 억지로 일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제 끝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지? 나처럼 너도 마음이 놓일 거야. 그치?"소영은 혜연이 답할 때마다 왼쪽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혜연이 언제 숨을 참는지, 거짓말을 할 때 손가락을 어떻게 꼼지락거리는지 소영은 백과사전처럼 꿰고 있었다."다행이야. 사실 난 네가 어떤 이유에서건 상수 오빠를 만나는 게 좀 걸렸거든.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 등 잔 밑이 어둡다고 하잖아? 너처럼 단호하고 고지식한 애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야. 만약 네가 나 몰래 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면... 난 정말 세상을 못 믿었을 거야.""하... 하... 얘도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혜연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맥주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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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 가장 눈부신, 가장 잔인한 눈빛 #1

햇살이 유달리 다정한 아침이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빛줄기가 침대 머리맡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혜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암막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빛은 마치 축복의 손길처럼 그녀의 뺨을 간지럽혔다. 지난 며칠간 자신을 짐승처럼 옥죄던 지독한 두통도, 소영이 현관문 앞에서 남기고 간 그 서늘한 잔상도 오늘만큼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어쩌면 그 모든 불안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벌주기 위해 지어낸 가상의 지옥이 아니었을까. 혜연은 가벼운 기지개를 켜며 창밖의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투명한 시야는 오늘 그녀에게 일어날 모든 일이 순수할 것임을 암시하는 듯했다.협탁 위 휴대폰 진동이 짧게 울렸다. 상수의 메시지였다.[잘 잤어요? 오늘 아침은 꽤 쌀쌀하네요. 따뜻하게 입고 나와요. 이따 퇴근하고 회사 앞으로 갈게요. 보고 싶네요.]'보고 싶다'는 직설적인 문장에 혜연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삭막한 직장인의 메마른 일상, 무채색이었던 그녀의 세계에 상수는 유일하게 채색된 원색의 존재였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소영이 좋은 친구였단 인사를 남기고 떠난 뒤, 혜연은 오히려 기묘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입어온 '친구'라는 이름의 구속복을 마침내 벗어 던진 기분.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지자,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욕망이 비로소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이제 정말 모든 폭풍이 지나간 것일까. 혜연은 화장대 앞에 앉아 평소보다 조금 더 세심하게 립스틱을 발랐다. 선명한 코랄 빛이 입술 위에 얹어지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더 이상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단독적인 존재였다.사무실에서의 하루도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평소라면 날카롭게 각을 세우며 기안서의 토씨 하나까지 잡아내던 팀장의 피드백도 오늘은 유순한 강물처럼 흘러갔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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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 가장 눈부신, 가장 잔인한 눈빛 #2

[다시 몇 시간 전]혜연이 퇴근하던 무렵의 회사 앞. 윤소영은 그곳에 있었다.그녀는 화단 뒤편의 짙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잡지 한 권 보지 않고 무서운 집중력으로 혜연의 회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 혜연을 만나러 오던 시간보다 훨씬 일찍부터 소영은 그 자리에 박제된 듯 서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혜연과 소영의 20년 세월이 켜켜이 쌓인 낡은 앨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앨범은 이제 추억의 저장고가 아니라, 상대를 난도질할 흉기가 되어 있었다.소영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공허함은 오히려 주변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처럼 기이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소영의 옆을 스칠 때마다 그 서늘한 기운에 움찔거리며 피해 갔지만, 소영은 미동조차 없었다.마침내 멀리서 회전문을 밀고 나오는 혜연을 발견했을 때, 소영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혜연의 눈빛, 초조하게 상수를 기다리는 그 설렘 가득한 얼굴. 그것을 지켜보는 소영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행복해 보이네, 혜연아. 유달리 평화롭고. 네가 마시는 그 공기가 그렇게 달콤하니? 내 폐부가 썩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소영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혜연이 가장 행복해하는 그 정점의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서 그녀의 추락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있었다.그들을 따라 회사 건물을 나설 때, 하늘은 이미 지독한 보랏빛으로 멍들어 있었다. 오후 7시 30분. 퇴근 인파로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의 공기는 차가운 도시의 소음과 자동차 매연, 그리고 누군가의 고단한 한숨들로 뒤섞여 걸쭉하게 흐르고 있었다.소영에게 그 도시의 소음은 찢어지는 비명처럼 들렸고, 화려한 전광판의 불빛은 눈을 찌르는 흉기처럼 보였다. 그녀는 최대한 어둠 속에 자신의 몸을 감추고 있었다.그녀의 앞에는 혜연과 상수가 걷고 있었다.하루의 업무를 끝낸 해방감 때문일까, 아니면 서로를 마주 본 안도감 때문일까. 상수의 얼굴에는 소영이 지난 8년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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