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내 친구의 남자였던, 그에게 향하다.: Kapitel 191 – Kapitel 200

220 Kapitel

191화 : 안개의 끝, 드러난 실루엣 #2

제3회의실 문을 열자 인사팀장뿐만 아니라 홍보팀, 법무팀 실무자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마치 '조직에 해를 끼친 불순물'을 감별하려는 듯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혜연의 인사기록 카드와 함께 블라인드 게시글을 캡처한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들어와요, 박 과장. 앉으세요."앉는 순간, 혜연은 자신이 마치 범죄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테이블 밑에서 맞잡은 두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다름이 아니고 그 블라인드 글 때문에 불렀어요. 그게 몇몇 외부 커뮤니티로 퍼진 모양입니다. 뭐, 공간 디자이너 신상까지는 아직 노출되지 않은 것 같지만... 아직까진 말이죠."인사팀장의 '아직까진'이라는 단어가 혜연의 정수리에 송곳처럼 박혔다. 그것은 "언제든 네 실명과 사진이 광장에 박제될 수 있다"는 시한폭탄 같은 경고였다.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 밤을 새우며 도면을 그리던 열정들이 '상간녀'라는 세 글자 아래에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환각이 보였다. 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문제는 '카페 블루밍'이라는 게 너무 티가 났어요. 블루밍 인스타그램 댓글에 악의적인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우리 회사와 진행 중인 다른 클라이언트사들로부터 우려 섞인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혜연은 침묵했다. 심장이 기형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 하나 때문에 회사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죄책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아빠가 말했던 "세상이 너를 버려도"라는 말이 떠올랐다. 정말 세상이 나를 버릴 준비를 마쳤구나. 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해고 통보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인사팀장의 다음 말은 예상 밖이었다."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 있더군요. 다행히 블루밍 오 사장님께서 박 과장님이나 강 작가님을 아주 좋게 보셨나 봐요. 본인이 직접 나서서 다른 클라이언트들에게 '그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1
Mehr lesen

192화 : 거울 뒤의 뱀 #1

혜연이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인사팀의 호출을 받고 20층으로 향하던 그 시각. 사무실의 공기는 혜연의 부재와 동시에 기묘하게 일렁였다. 혜연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 김진우 팀장은 마치 승전고를 울리러 나가는 장수처럼 여유로운 걸음으로 팀원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타났다. 그는 혜연의 빈 책상을 한 번 훑고는, 짐짓 안타까운 척 혀를 찼다. 하지만 입가에 미세하게 걸린 만족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이제야 회사가 좀 제대로 돌아가려나 보네." 혜연이 20층 회의실로 가기 위해 타는 엘레베이에서 끝에서 검은 정장의 무리들이 내려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김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렇죠. 정의는 항상 승리하죠." 그걸 들은 김진우는 민지의 말이 자신을 향한 응원이자, 박혜연이라는 '오물'을 치워낸 것에 대한 찬사라고 착각한 듯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정의구현 해야지. 회사 기강이 말이야." 그 직후였다. 혜연과 엇갈려(크로스되어) 들어온 법무팀 지성국 과장 일행이 김 팀장을 에워쌌다. "김진우 팀장님. 법무팀 지성국 과장입니다. 이야기 좀 하시죠." "네? 저요? 지금 박 과장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뭐 박혜연 과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일단 회의실에서 같이 이야기 하시죠." 김 팀장의 얼굴이 의기양양했다. 그동안 팀에서 유령취급하면서 박혜연을 배제하던 것이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싶어 보람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회의실 안에는 법무팀 실무자들과 그리고 민지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 정면 스크린에는 커다란 캡처 화면 하나가 띄워졌다. 블라인드 앱 특유의 인터페이스, 그리고 박혜연 과장을 악의적으로 저격했던 바로 그 폭로글이었다. 지 과장이 레이저 포인터로 화면을 가리키며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김 팀장님, 이 글 아시죠?" 김진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2
Mehr lesen

193화 : 거울 뒤의 뱀 #2

[사건의 전말. 회의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이 글을 본인이 올리고 난 뒤 태도였다. 그 글이 사내에 파장을 일으키자마자, 김 팀장은 가장 먼저 혜연을 불렀다. 민지는 열린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김 팀장은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혜연의 어깨를 두드렸다."박 과장, 지금 회사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이럴 땐 좀 쉬어가는 게 본인한테도 좋아. 울산 지점에 자리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는건 어때? 아니면 잠시 휴직하는 것도 좋고. 내가 널 보호하려고 그러는 거야. 알지?"보호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업무 배제'. 혜연이 밤새워 그린 도면들을 빼앗아 후배들에게 넘기며, 그는 혜연을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동료들 앞에서 "박 과장이 마음이 많이 상해서 당분간 업무는 어려울 것 같네"라며 그녀를 나약하고 문제 있는 낙인자로 확정 지은 것도 그였다. 혜연이 실무에서 멀어져 고립될수록, 김 팀장의 입지는 '문제 인력을 단호히 정리하는 유능한 상사'로 굳어져 갔다.'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민지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민지는 결심했다. 본능적으로 휴대폰의 화면들을 미친 듯이 캡처해 자신의 메신저로 전송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김 팀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민지야,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얘? 어디 아프니?"그 오만한 확신이 민지의 가슴 속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아뇨, 팀장님. 그냥... 우리팀이 앞으로 어떻게 잘 될지 문득 궁금해져서요."김 팀장은 허허 웃으며 "그래, 우린 잘 되게 되어 있지"라고 맞장구를 쳤다. [다시 현재, 회의실]스크린에 띄워진 자신의 닉네임과 혜연을 난도질했던 글들을 보며 김진우는 파르르 떨었다."저... 저게 나라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누가 내 아이디를 도용했을 수도 있잖아요!"민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를 응시했다."도용요? 팀장님, 그 글 올리고 나서 혜연이 업무 배제시키면서 그러셨죠? '내가 널 보호해주려고 그러는 거다'라고. 그 위선적인 가면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2
Mehr lesen

194화 : 승리의 비린내 #1

법무팀 지 과장에게 아이디가 발각된 직후, 김진우 팀장은 사죄도 변명도 없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입사 이후 늘 모셔온 사수의 마지막 뒷모습은 비참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자리는 비어있지 않았다. 그가 혜연에게 심어놓은 '신뢰'라는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었다.혜연은 제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책상 상판을 쓸어내렸다. 매끄러운 인조 대리석의 감촉이 오늘따라 유독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이 책상은 혜연의 전장이자 성소였다. 수천 장의 도면을 수정하고, 현장의 먼지를 마시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왔던 곳. 하지만 오늘, 그 성벽은 고작 이름 모를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글 하나에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내 10년이 고작 이거였나.’허탈했다. 10년이다. 누군가는 '겨우'라 말할지 모르나 혜연에게는 청춘을 다 바친 시간이었다. 수천 장의 도면을 수정하고, 현장의 먼지를 마시며 증명해왔던 자신의 '능력'이 고작 익명의 가십 하나에 이토록 처참하게 난도질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무너진 커리어를 다시 세운 것조차 자신의 실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 사장의 변덕 섞인 호의, 상수의 고집스러운 강단. 그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낸 '면죄부'.사무실의 풍경은 여전히 잔인했다. 김진우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혜연을 향한 시선은 '응원'으로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극적인 가십의 중심으로 격상되었을 뿐이다. 파티션 너머로 들려오는 수군거림은 혜연의 정수리에 송곳처럼 박혔다."결국 김 팀장이었다며?", "박 과장 독하네, 민지 과장 시켜서 핸드폰까지 털고.""그렇게 독하니까 친구 남자도 뺏는거지. 그게 쉽니?"그녀는 여전히 '이슈의 중심'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씹기 좋은 안줏거리였다. 능력이 아닌 '자비'와 '폭로'로 지켜낸 자리. 혜연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승리자의 환희는 없었다. 그저 타인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3
Mehr lesen

195화 : 승리의 비린내 #2

그날 저녁, 민지의 주도로 혜연과 상수, 그리고 민지와 재현, 이 넷의 저녁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자, 자! 다들 주목! 오늘 이 자리는 누가 만든 거다? 바로 나, 김민지 되시겠다! 박혜연, 너 오늘 진짜 나한테 절해야 돼. 내 손가락이 캡처 버튼 누르느라 지문이 닳아 없어질 뻔했다고!"민지가 맥주잔을 높이 들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평소 사무실에서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옆에 앉은 재현은 그런 민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고기를 구워 그녀의 앞접시에 수북이 쌓아주며 거들었다."당연하지. 우리 민지가 아니었으면 그 뱀 같은 김진우가 아직도 팀장 노릇 하고 있었을걸? 상수 너도 인마, 형수님한테 감사하다고 해. 형수님이 정의 구현 안 하셨으면 혜연씨가 아직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만해도.. 어휴..아찔하다.""형수님은 무슨... 오빠, 아직 김칫국 마시지 마요."민지가 새침하게 대꾸하면서도 재현이 먹여주는 쌈을 넙죽 받아먹었다. 둘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진 듯 서로의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아주며 달달한 분위기를 풍겼다."혜연아, 나 오늘 성게알 초밥 먹고 싶었는데 참은 거야. 그러니까 오늘 고깃값은 네가 내는 거다? 아니, 차기 박팀장님이 쏘는건가?"민지의 쾌활한 농담에 혜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 앉은 상수 역시 잔을 만지작거릴 뿐, 평소처럼 재현의 농담을 받아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승리의 고양감 대신, 짙은 안개 같은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눈치 빠른 민지였다. 민지는 상추를 집어 들려다 말고 혜연의 얼굴을 빤히 살폈다."어라? 박혜연, 왜 그래? 오늘같이 좋은 날에 왜 표정이 그 모양이야? 김진우 그 인간, 아예 짐도 못 챙기고 도망가듯 퇴근했다며. 완전 통쾌한 엔딩인데, 왜 네 얼굴은 초상집이야?"재현 역시 상수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상수 너도. 계약 유지됐다면서? 오 사장이 직접 등판해서 클라이언트 입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3
Mehr lesen

196화 : 무거운 진실, 가벼운 입술 #1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찜질방 소금방 안. 노란 수건을 양머리 모양으로 말아 쓴 동네 여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식혜와 구운 계란이 놓인 자리보다 더 뜨거운 것은 단연 혜연에 대한 '뒷담화'였다."아니, 진짜 상종 못 할 물건이라니까? 어떻게 이 좁은 동네에 버젓이 얼굴을 들고 나타날 수가 있어? 보통 낯짝이 아니고서야 그게 가능하냐고."선혜 엄마가 부채질을 해대며 열을 올렸다. 그 곁에 앉은 다른 엄마들도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그러니까 소영이 남친을 홀라당 채갔지. 선혜 말로는 회사에도 소문이 쫙 났다는데, 여전히 뻔뻔하게 출근한다며? 사장인지 뭔지 하는 거물 배경 믿고 기세등등하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벌써 짐 싸서 야반도주했을 거야. 소영 엄마, 안 그래? 시장에서 그 혜연네 모녀 하는 꼴 봤잖아. 진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자, 소영 엄마는 움찔하며 쥐고 있던 식혜 컵을 꽉 쥐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혜연네를 비난했을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소영 엄마의 입술은 본드로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차마 열 수가 없었다.'사실은... 우리 소영이가... 그놈 때문에 힘든 게 아니래...'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비참한 진실이 뜨거운 열기보다 더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며칠 전, 울며불며 매달리는 딸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소영 엄마의 세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려 놓았다. 내 딸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다는 사실. 정직하게 키웠다 자부했던 내 자식이 친구의 인생을 망치려 들었다는 그 끔찍한 진실."소영 엄마? 왜 말이 없어? 어디 아파? 얼굴이 왜 이렇게 흙빛이야."옆에 앉은 여자가 걱정스레 묻자, 소영 엄마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썼다."아... 아니, 좀 어지러워서 그래. 열기가 너무 세나 봐.""하긴, 소영 엄마 속이 지금 속이겠어? 금지옥엽 키운 딸은 저렇게 속앓이하는데, 혜연네는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4
Mehr lesen

197화 : 무거운 진실, 가벼운 입술 #2

소영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소파 모서리를 잡고 주저앉았다."나라고 마음이 편해서 이래요? 미안해서 그래요, 너무 미안해서... 그 여자 얼굴을 보면 내가 죄인이라 고개도 못 들 것 같아서...""욕을 먹으면 먹고, 뺨을 때리면 맞아야지. 내일 당장 혜연네 집으로 가자. 가서 무릎을 꿇든 빌든, 우리가 저지른 오물은 우리가 치워야지."소영 아빠의 단호한 선언이 거실의 정적을 갈랐다. 그 소리에 소영 엄마는 마치 뜨거운 물에 데인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못해요! 나 절대 못 해! 내가 거길 어떻게 가요, 당신 제정신이야?"소영 엄마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롭게 거실 천장을 때렸다. 그녀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내가 그 여자한테 시장 바닥에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당신도 알잖아! 동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상간녀네 뭐네 삿대질을 해댔는데... 이제 와서 내가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내가 그럴 낯짝이 어디 있어! 나보고 그냥 죽으라는 소리랑 뭐가 달라!""소영 엄마!""그리고, 내가 가서 빌면... 그러면 우리 소영이는 뭐가 되는데! 동네 사람들이 우리 소영이 불쌍하다고, 그 남자 때문에 정신 놓은 가련한 애라고 다들 편들어주고 있는데... 내가 거기 가서 비는 순간 우리 딸은 거짓말쟁이에 남의 인생 망치려 든 미친년 되는 거잖아! 당신은 딸자식 장래보다 그깟 정직이 더 중요해?"소영 엄마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20년을 언니 동생 하며 지낸 세월이 도리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미안함이 너무 커서, 그 미안함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릴 것 같은 공포. 그리고 딸을 지켜야 한다는 왜곡된 모성애가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소영 엄마는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꺽꺽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자존심과 미안함, 그리고 딸에 대한 집착이 뒤엉킨 처절한 오열이었다.하지만 소영 아빠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울고 있는 아내의 어깨 너머로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4
Mehr lesen

198화 : 멍울진 계절의 끝 #1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싱그럽지만, 차 안의 공기는 납덩이를 매단 듯 무겁다. 혜연 엄마는 창틀에 머리를 기댄 채 연신 한숨을 내뱉는다."아니, 이 난리에 어딜 자꾸 가자는 거야? 마음이 지옥인데 바깥바람 쐬면 뭐가 달라져? 당신 정말 속도 좋다."혜연 아빠는 대답 대신 묵묵히 핸들만 꽉 쥐고 정면을 주시했다. 그의 눈가엔 가시지 않은 피로가 눅눅하게 내려앉아 있었다."이럴 때일수록 햇볕도 좀 쬐고 그래야지. 집에만 있으면 사람 병나. 숨통이 좀 트여야 생각도 고쳐먹는 법이야.""숨통은 무슨... 난 귀찮아 죽겠어. 그냥 집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고 싶다고."귀찮다며 고개를 돌리는 혜연 엄마의 발치에는 큼직한 아이스박스와 보자기로 싼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혜연 아빠가 슬쩍 곁눈질하며 헛기침을 했다."귀찮다는 사람이 아침부터 뭘 저렇게 바리바리 쌌대? 새벽부터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더니, 음식 냄새가 차 안에 진동을 하네.""사 먹으면 다 돈인데, 이럴 때일수록 아껴야지! 속 시끄러울수록 배라도 든든해야 버티는 거 아냐? 거참, 사람 무안하게..."혜연 엄마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지만, 보따리 안에는 평소 혜연 아빠가 좋아하던 칼칼한 밑반찬들과 정성껏 준비한 쌈밥이 가득했다. 자식 일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어도, 남편 끼니만큼은 제 손으로 챙겨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의 고집이었다.차가 멈춰 선 곳은 혜연이가 초등학교 시절, 두 집안이 매년 여름마다 텐트를 치고 놀던 한적한 바닷가 캠핑장이었다. 파도 소리가 밀려오자 혜연 엄마의 표정도 아주 찰나, 느슨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익숙한 나무 평상에 짐을 풀며 작게 읊조렸다."여기가 몇 년 만이야... 그때 소영네랑 여기서 조개 잡고..."말을 내뱉던 혜연 엄마가 아차 싶은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즐거웠던 추억조차 이제는 가시 돋친 독이 되어 돌아오는 현실이 서글펐다. 혜연 아빠는 못 들은 척 묵묵히 아이스박스를 평상 위로 올렸다.그때였다. 주차장 쪽으로 익숙한 흰색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5
Mehr lesen

199화 : 멍울진 계절의 끝 #2

[며칠전]그는 마치 단두대에 서는 심정으로, 목구멍에 걸려있던 비릿한 진실을 뱉어냈다."혜연 아빠. 미안하네.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사실은... 우리 소영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게, 그놈한테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었더군."혜연 아빠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소영 아빠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그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겁이 났던 거야. 혜연이가 자기만 쏙 빼놓고 그놈이랑 다시 만난다는 게, 평생 단짝이었던 친구가 자기만 버리고 떠나버릴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애가 그렇게 실성을 했던 모양이야. 혜연이를 잃기 싫어서 부린 심술이 이 사달을 냈어. 내가 자식을 그렇게 괴물로 키웠네."혜연 아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5년 전 끝난 인연인 걸 알면서도, 제 새끼 상처받을까 봐 앞뒤 안 가리고 혜연네를 몰아세웠던 소영네 부부의 광기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건 증오가 아니라, 지독하게 뒤틀린 '상실의 공포'였다."소영 엄마는... 아직 모르나?""알지. 알아서 더 저러는 거야. 미안해서 얼굴을 못 들겠으니까, 도리어 더 악을 쓰고 사과 못 한다고 버티는 거지. 자기 딸이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벌인 미친 짓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그게 너무 부끄러운 거야. 그 여자도 지금 제 속이 제 속이 아닐 걸세."혜연 아빠가 소영 아빠의 투박하고 거친 손등을 툭 쳤다."이해하네. 나라고 달랐겠나. 내 새끼가 저 모양 저 꼴로 망가져 가는데, 제정신으로 버틸 부모가 어딨겠어. 소영 엄마 마음... 우리 집사람도 아마 알 거야. 그래서 더 배신감이 큰 거겠지."두 남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식들의 뒤틀린 애정과 아내들의 비겁한 자존심 싸움으로 엉망진창이 된 20년 우정. 이대로 두면 두 집안 모두 파멸뿐이라는 것을 두 가장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이렇게 계속 둘 수는 없네. 애들도 애들이지만, 우리 마누라들 저러다 병나겠어. 혜연 아빠, 나랑 작당 하나 하지 않겠나?"소영 아빠의 결연한 눈빛에 혜연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5
Mehr lesen

200화 : 멍울진 계절의 끝 #3

그러다 소영 엄마의 눈에 평상 한구석, 혜연 엄마가 가져온 분홍색 퀼트 보따리가 들어왔다. 십수 년 전,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동대문 시장에서 같이 천을 떼어다 수선집에 맡겨 똑같이 나눠 가졌던 그 보따리였다. 모서리가 다 해지고 색이 바랜 채로, 그 안에는 혜연 엄마 특유의 손때 묻은 반찬 통들이 옹기종기 담겨 있었다.틈새로 새어 나오는 알싸하고 짭조름한 깻잎 냄새. 소영 엄마가 유독 좋아한다며 혜연 엄마가 김장철마다 따로 삭혀 건네주던 그 집 반찬 냄새였다.'아직도 저걸 쓰는구나...'그 낡은 보따리 하나가 소영 엄마의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자식들이 사고를 치고, 부모들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이 지옥 같은 현실 너머에, 깻잎 한 장에 깔깔대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년의 세월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억지로 세우고 있던 날선 자존심이 그 익숙한 냄새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소영 엄마는 마른침을 삼키며, 타들어 가는 고기 연기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비로소 어렵게 입술을 뗐다."......그렇게까지 하려 한 건 아냐."혜연 엄마는 대꾸가 없었다."내가 좀 오버했어. 소영이가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울어대는데, 나라고 속이 안 상해? 어딘가 하소연이라도 해야 살 것 같더라고. 근데 내가 뱉은 말에 남들이 살을 붙이고 또 붙이더니... 정신 차려 보니까 혜연이가 아주 몹쓸 년이 되어 있더라. 사실, 솔직히 말하면...... 좀 쌤통이다 싶기도 했어."소영 엄마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바다 먼 곳을 향해 있었다."내 딸 눈에 피눈물 나게 했으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그런 못된 마음이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나만 원망해. 소영이는 뭐라 하지 말고...... 걔도 지 제일 친한 친구가 자기 전남친이랑 잘 돼 버리니까, 20년 지기 친구가 아예 없어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그렇게 울고불고한 거더라고. 지도 지 맘을 몰라서 그놈한테 미련이 있네 마네...... 으휴, 멍청한 것."
last updateZuletzt aktualisiert : 2026-09-15
Mehr lesen
ZURÜCK
1
...
171819202122
CODE SCANNEN, UM IN DER APP ZU LESEN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