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신촌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온 상수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기괴할 정도로 낯설었다.
8년이라는 시간은 추억을 보존하는 대신 잔인하게 지워나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골목 안 PC방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엔 차가운 기계음만 가득한 무인 사진관이 들어서 있었다.
소영과 처음 만나 설렘에 잔을 부딪쳤던 호프집도 간판조차 남지 않은 채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수는 그 낯선 간판들을 보며 서늘한 비극을 느꼈다.
소영과 함께했던 공간들이 하나둘 소멸할 때마다, 그들의 8년 또한 갈 곳 없는 유령이 되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
추억은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철거된 건물 잔해처럼 발끝에 채이는 거추장스러운 파편일 뿐이었다.
'모든 게 변했구나. 나를 포함해서.'
로비의 중심,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뻗은 그림자의 끝에 상수가 서 있었다.그는 수백 개의 날 선 시선들을 방패 하나 없이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주변에서 들려오는 "저 사람이야?", "세상에, 저기가 어디라고..." 하는 독설 섞인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상수를 덮치고 있었지만, 상수의 시선은 오직 한 곳,혜연의 젖은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그 순간, 혜연의 세계에서 모든 소음이 음소거되었다.수군대던 사람들의 입모양도, 바쁘게 움직이던 회전문 소리도 사라졌다.오직 상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구두 소리만이 심장 박동처럼 크게 울렸다.디즈니 동화 속, 저주받은 성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기사처럼, 혹은 유령으로 살던 그녀에게 다시 '이름'을 돌려주러 온 창조주처럼 그가 눈앞에 섰다."상수 씨..."혜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상수는 대답 대신 혜연의 차가운 손을 낚아채듯 꽉 잡았다.앗, 하는 짧은 신음이 나올 새도 없이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 아래 딱풀 독에 올라 뻣뻣하게 굳어 있던 혜연의 손이, 상수의 단단한 손바닥 안에서 눈 녹듯 풀어졌다.그의 손은 너무나 뜨거워 화상을 입을 것 같았고, 동시에 세상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했다."데리러 왔어요. 가요, 우리."상수의 짧은 한마디는 선언이었다.이제 더 이상 혼자서 이 비난의 화살을 맞게 두지 않겠다는, 비겁함을 씻어낸 남자의 결연한 맹세.상수는 수많은 구경꾼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대신 혜연을
상수는 핸드폰에서 혜연을 누르려다 말았다.카페를 뛰쳐 나온 상수는 신촌역을 향해 뛰어갔다.지금 홀로 싸우고 있을 나의 여자,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오늘 따라 지하철은 왜이리 안오는건지, 왜이리 달리지 못하고 거북이 같은건지,스크린 도어가 열리자마자 지하철에서 뛰쳐나온 상수는 한달음에 역을 뛰어 올라왔다.그런 상수의 앞에는 차가운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거대한 빌딩이 솟아 있었다.혜연의 직장.그곳은 혜연에게 꿈의 터전이 아니라, 매일 아침 비릿한 딱풀 냄새와 영수증 더미에 질식해야 하는 거대한 감옥이었다.상수는 로비의 회전문을 밀고 들어섰다.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탁, 탁' 하고 건조한 파열음이 일었다.퇴근 시간의 로비는 전쟁터였다.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사원증을 목에 걸고 바쁘게 개찰구를 통과하는 사람들,거대한 유리 빌딩의 로비는 썰물처럼 밀려 나오는 직장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그 무채색의 인파 속에서 상수는 멈춰 섰다.그가 로비 중앙의 원형 기둥 옆에 자리를 잡자마자,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바뀌었다."야, 저 사람 아냐? 어제 블라인드에 올라온...""진짜네? 와, 얼굴 두껍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발걸음 소리에 섞여 전염병처럼 번지는 수군거림.사람들은 대놓고 손가락질하진 않았지만, 곁을 지나며 힐끔거리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경멸과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상수는 그 시선들을 정면
슬퍼서가 아니었다. 5년 전 이별 후 줄곧 자신을 괴롭히던 '버려진 시간'들이 비로소 '찬란했던 기록'으로 복구되는 순간의 해방감이었다."너랑 만날 때 혜연 씨를 알았지만... 결단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절친. 그 이상으로 생각한 적 없어.정말 나에게 처음으로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요청왔고 놓칠 수 없는 기회에 하필이면 혜연 씨를 만난 거고, 불편하더라도 내 경력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어."상수는 이제 가장 깊은 진심을 꺼내 놓았다.그의 눈빛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을 찾지 않았다."그런데 혜연 씨와 일을 하고, 조금씩 친해지면서 내가 스스로 바뀌어 가는 걸 느꼈어.늘 뒤에 따라가기만 하던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에 숨기에 바빴던 내가, 어느새 나 스스로 혼자 앞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었어. 그런 사람이야 나에게는."소영은 묘한 안도감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결국 혜연이가 오빠를 깨웠네. 내가 8년을 쏟아부어도 안 되던 게... 쓰라리지만, 이제야 오빠가 진짜 강상수처럼 보여.'상수가 말을 이어갔다."너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온전히 강상수라는 사람이 된 거 같아. 그래서 놓을 수가 없어.우리가 어떤 지옥에 빠진다 하더라도 난 그녀를 놓을 수가 없어. 비난의 화살이든 소나기든, 불구덩이에 빠진다 하더라도 같이 있으려고 그 사람이랑."상수의 고백이 끝나자, 카페 안은 지독한 정적에 휩싸였다.상수는 더 이상 미련 없는 눈빛으로 소영을 바라보며, 그녀의 8년을 지켜주었던 그 무거운 숙제를 마
신촌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온 상수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기괴할 정도로 낯설었다.8년이라는 시간은 추억을 보존하는 대신 잔인하게 지워나가고 있었다.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골목 안 PC방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엔 차가운 기계음만 가득한 무인 사진관이 들어서 있었다.소영과 처음 만나 설렘에 잔을 부딪쳤던 호프집도 간판조차 남지 않은 채 다른 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상수는 그 낯선 간판들을 보며 서늘한 비극을 느꼈다.소영과 함께했던 공간들이 하나둘 소멸할 때마다, 그들의 8년 또한 갈 곳 없는 유령이 되어 허공을 떠도는 것 같았다.추억은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철거된 건물 잔해처럼 발끝에 채이는 거추장스러운 파편일 뿐이었다.'모든 게 변했구나. 나를 포함해서.'상수는 소멸된 세계 위로 솟아오른 차가운 건물들 사이를 지나 약속 장소로 향했다.문을 열자, 익숙한 원두 탄 냄새와 소영의 서늘한 시선이 동시에 그를 덮쳤다. 상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과거의 늪에 깊숙이 발을 담근 기분이었다."왔어?"소영의 첫마디는 차가운 얼음 송곳이었다.상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일그러진 눈매를 보았다.안 그래도 심란한 기색이 역력한 소영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뾰족한 날을 세운 채 상수를 쏘아보고 있었다.카페의 세련된 조명조차 그녀의 날 선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싸지 못했다."오늘은 또 나에게 어떤 모욕을 주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야?""아냐. 내가 왜 그런..."
그것은 '걱정마'라는 신호이자,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였다.하지만 이내 팀장을 향해 돌아선 민지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하고 건조하게 굳어버렸다.독설을 퍼붓고 화를 내던 평소의 민지가 아니었다.그 이중적인 표정 변화는 더 거대한 반격을 준비하는 노련한 사냥꾼의 묵직한 약속이었다.혜연은 멀어지는 민지의 뒷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립된 진공 상태의 사무실에서 민지가 남긴 온기는 혜연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재현을 통해 들려온 혜연의 처참한 상황은 상수의 세계를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었다.작업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던 아름답고 뜨거운 오후의 햇살은 더 이상 예술적 영감을 주는 축복이 아니었다.그것은 혜연의 등을 지지는 지옥의 불길이었고, 그녀의 자존심을 낱낱이 태워버리는 잔인한 고문 기구였다.상수는 작업대 위에 놓인 고가의 유리병들을 움켜쥐었다가 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향기를 탐닉하며 보냈던 고결한 시간들이 모두 위선적인 연극처럼 느껴졌고,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지독한 모멸감이 차올랐다.그는 작업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혜연을 향한 미안함과 자신을 향한 증오를 토해내고 싶었다.상수는 들끓는 분노를 삼켜내기 위해 거칠게 눈을 감았다.망막 위로 번지는 붉은 잔상들은 혜연이 지금 이 순간 견뎌내고 있을 모욕의 선명한 색채 같았다.조향사로서 향기를 탐닉하며 보냈던 평화로운 시간들이 이제는 구역질 나는 기만처럼 느껴졌다.자신이 고결한 향의 배합을 고민하며 정적의 사치를 누릴 때, 혜연은 비릿한 딱풀 냄새와 동료들의 멸시 섞인 발소리
사무실의 공기는 무거운 정적보다 한층 더 차갑고 예리해졌다.공식적인 인사 발령이나 투명한 징계 위원회는 없었다.하지만 혜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김진우 팀장이 설계한 형벌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존재의 지우기'라는 가장 잔인한 정신적 고립이라는 것을.서른세살, 10년 차 공간 인테리어 디자이너 박혜연.그녀는 공간의 동선을 짜고, 조명의 조도를 맞추며, 마감재 하나에도 자신만의 철학을 담아내던 부서의 에이스였다.그녀가 손을 댄 공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담긴 예술이 되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책상 위에는 정교한 캐드(CAD) 도면이나 질감 넘치는 자재 샘플 대신,싸구려 딱풀과 가위, 그리고 먼지 낀 수백 장의 법인카드 영수증 뭉치가 흉물스럽게 놓여 있었다."박 과장, 바쁜 일 없으면 이것 좀 도와주지? 신입들이 하기엔 좀 꼼꼼함이 필요해서 말이야. 숫자가 하나라도 틀리면 골치 아프니까."김 팀장이 툭 던지고 간 것은 부서 전체의 지출결의서 증빙 작업이었다.10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 코 끝에 단내가 나도록 하던 단순 노동.혜연은 멍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현장의 거친 먼지를 묻히며 거침없이 자재를 고르고 도면을 그리던 그 당당한 손이,이제는 영수증 모서리에 풀칠이나 하며 종이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팀장님, 저 이번에 들어가는 '아트센터 리모델링' 컨셉 회의... 제가 짠 초안이 있어서 공유드리고 싶습니다.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한 동선이라...""박 과장,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