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사건의 전말. 회의실 ]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이 글을 본인이 올리고 난 뒤 태도였다.
그 글이 사내에 파장을 일으키자마자, 김 팀장은 가장 먼저 혜연을 불렀다.
민지는 열린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김 팀장은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혜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박 과장, 지금 회사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이럴 땐 좀 쉬어가는 게 본인한테도 좋아. 울산 지점에 자리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는건 어때?
아니면 잠시 휴직하는 것도 좋고. 내가 널 보호하려고 그러는 거야. 알지?"
보호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업무 배제'.
혜연이 밤새워 그린 도면들을 빼앗아 후배들에게 넘기며, 그는 혜연을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동료들 앞에서 "박 과장이 마음이 많이 상
소영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소파 모서리를 잡고 주저앉았다."나라고 마음이 편해서 이래요? 미안해서 그래요, 너무 미안해서... 그 여자 얼굴을 보면 내가 죄인이라 고개도 못 들 것 같아서...""욕을 먹으면 먹고, 뺨을 때리면 맞아야지. 내일 당장 혜연네 집으로 가자. 가서 무릎을 꿇든 빌든, 우리가 저지른 오물은 우리가 치워야지."소영 아빠의 단호한 선언이 거실의 정적을 갈랐다.그 소리에 소영 엄마는 마치 뜨거운 물에 데인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녀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못해요! 나 절대 못 해! 내가 거길 어떻게 가요, 당신 제정신이야?"소영 엄마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롭게 거실 천장을 때렸다.그녀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내가 그 여자한테 시장 바닥에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당신도 알잖아! 동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상간녀네 뭐네 삿대질을 해댔는데...이제 와서 내가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릎을 꿇으라고? 내가 그럴 낯짝이 어디 있어! 나보고 그냥 죽으라는 소리랑 뭐가 달라!""소영 엄마!""그리고, 내가 가서 빌면... 그러면 우리 소영이는 뭐가 되는데!동네 사람들이 우리 소영이 불쌍하다고, 그 남자 때문에 정신 놓은 가련한 애라고 다들 편들어주고 있는데...내가 거기 가서 비는 순간 우리 딸은 거짓말쟁이에 남의 인생 망치려 든 미친년 되는 거잖아! 당신은 딸자식 장래보다 그깟 정직이 더 중요해?"소영 엄마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
후끈한 열기가 가득한 찜질방 소금방 안.노란 수건을 양머리 모양으로 말아 쓴 동네 여자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식혜와 구운 계란이 놓인 자리보다 더 뜨거운 것은 단연 혜연에 대한 '뒷담화'였다."아니, 진짜 상종 못 할 물건이라니까? 어떻게 이 좁은 동네에 버젓이 얼굴을 들고 나타날 수가 있어? 보통 낯짝이 아니고서야 그게 가능하냐고."선혜 엄마가 부채질을 해대며 열을 올렸다.그 곁에 앉은 다른 엄마들도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그러니까 소영이 남친을 홀라당 채갔지. 선혜 말로는 회사에도 소문이 쫙 났다는데, 여전히 뻔뻔하게 출근한다며?사장인지 뭔지 하는 거물 배경 믿고 기세등등하다는 소문도 있더라고.""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나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벌써 짐 싸서 야반도주했을 거야. 소영 엄마, 안 그래?시장에서 그 혜연네 모녀 하는 꼴 봤잖아. 진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 향하자,소영 엄마는 움찔하며 쥐고 있던 식혜 컵을 꽉 쥐었다.평소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혜연네를 비난했을 그녀였다.하지만 지금 소영 엄마의 입술은 본드로 붙여놓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아니, 차마 열 수가 없었다.'사실은... 우리 소영이가... 그놈 때문에 힘든 게 아니래...'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비참한 진실이 뜨거운 열기보다 더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며칠 전, 울며불며 매달리는 딸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소영
그날 저녁, 민지의 주도로 혜연과 상수, 그리고 민지와 재현, 이 넷의 저녁 식사 자리가 만들어졌다."자, 자! 다들 주목! 오늘 이 자리는 누가 만든 거다? 바로 나, 김민지 되시겠다! 박혜연, 너 오늘 진짜 나한테 절해야 돼.내 손가락이 캡처 버튼 누르느라 지문이 닳아 없어질 뻔했다고!"민지가 맥주잔을 높이 들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평소 사무실에서의 차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옆에 앉은 재현은 그런 민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고기를 구워 그녀의 앞접시에 수북이 쌓아주며 거들었다."당연하지. 우리 민지가 아니었으면 그 뱀 같은 김진우가 아직도 팀장 노릇 하고 있었을걸? 상수 너도 인마, 형수님한테 감사하다고 해.형수님이 정의 구현 안 하셨으면 혜연씨가 아직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만해도.. 어휴..아찔하다.""형수님은 무슨... 오빠, 아직 김칫국 마시지 마요."민지가 새침하게 대꾸하면서도 재현이 먹여주는 쌈을 넙죽 받아먹었다.둘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진 듯 서로의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아주며 달달한 분위기를 풍겼다."혜연아, 나 오늘 성게알 초밥 먹고 싶었는데 참은 거야. 그러니까 오늘 고깃값은 네가 내는 거다? 아니, 차기 박팀장님이 쏘는건가?"민지의 쾌활한 농담에 혜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에 앉은 상수 역시 잔을 만지작거릴 뿐, 평소처럼 재현의 농담을 받아치지 못했다.두 사람의 얼굴에는 승리의 고양감 대신, 짙은 안개 같은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
법무팀 지 과장에게 아이디가 발각된 직후, 김진우 팀장은 사죄도 변명도 없이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입사 이후 늘 모셔온 사수의 마지막 뒷모습은 비참할 정도로 작았다.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자리는 비어있지 않았다.그가 혜연에게 심어놓은 '신뢰'라는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날카로운 파편들이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었다.혜연은 제 자리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책상 상판을 쓸어내렸다.매끄러운 인조 대리석의 감촉이 오늘따라 유독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이 책상은 혜연의 전장이자 성소였다.수천 장의 도면을 수정하고, 현장의 먼지를 마시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왔던 곳.하지만 오늘, 그 성벽은 고작 이름 모를 커뮤니티의 익명 게시글 하나에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내 10년이 고작 이거였나.’허탈했다.10년이다.누군가는 '겨우'라 말할지 모르나 혜연에게는 청춘을 다 바친 시간이었다.수천 장의 도면을 수정하고, 현장의 먼지를 마시며 증명해왔던 자신의 '능력'이 고작 익명의 가십 하나에 이토록 처참하게 난도질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무너진 커리어를 다시 세운 것조차 자신의 실력이 아니었다는 점이다.오 사장의 변덕 섞인 호의, 상수의 고집스러운 강단.그 우연들이 겹쳐 만들어낸 '면죄부'.사무실의 풍경은 여전히 잔인했다.김진우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혜연을 향한 시선은 '응원'으로 바뀌지 않았다.오히려
[사건의 전말. 회의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이 글을 본인이 올리고 난 뒤 태도였다.그 글이 사내에 파장을 일으키자마자, 김 팀장은 가장 먼저 혜연을 불렀다.민지는 열린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김 팀장은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혜연의 어깨를 두드렸다."박 과장, 지금 회사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이럴 땐 좀 쉬어가는 게 본인한테도 좋아. 울산 지점에 자리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는건 어때?아니면 잠시 휴직하는 것도 좋고. 내가 널 보호하려고 그러는 거야. 알지?"보호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업무 배제'.혜연이 밤새워 그린 도면들을 빼앗아 후배들에게 넘기며, 그는 혜연을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동료들 앞에서 "박 과장이 마음이 많이 상해서 당분간 업무는 어려울 것 같네"라며 그녀를 나약하고 문제 있는 낙인자로 확정 지은 것도 그였다.혜연이 실무에서 멀어져 고립될수록, 김 팀장의 입지는 '문제 인력을 단호히 정리하는 유능한 상사'로 굳어져 갔다.'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민지는 구역질이 올라왔다.민지는 결심했다. 본능적으로 휴대폰의 화면들을 미친 듯이 캡처해 자신의 메신저로 전송했다.문이 열리고 들어온 김 팀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민지야,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얘? 어디 아프니?"그 오만한 확신이 민지의 가슴 속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아뇨, 팀장님. 그냥... 우리팀이 앞으로 어떻게 잘 될지 문득 궁금해져
혜연이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인사팀의 호출을 받고 20층으로 향하던 그 시각. 사무실의 공기는 혜연의 부재와 동시에 기묘하게 일렁였다. 혜연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 김진우 팀장은 마치 승전고를 울리러 나가는 장수처럼 여유로운 걸음으로 팀원들 사이를 가로질러 나타났다.그는 혜연의 빈 책상을 한 번 훑고는, 짐짓 안타까운 척 혀를 찼다. 하지만 입가에 미세하게 걸린 만족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이제야 회사가 좀 제대로 돌아가려나 보네."혜연이 20층 회의실로 가기 위해 타는 엘레베이에서 끝에서 검은 정장의 무리들이 내려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김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렇죠. 정의는 항상 승리하죠."그걸 들은 김진우는 민지의 말이 자신을 향한 응원이자, 박혜연이라는 '오물'을 치워낸 것에 대한 찬사라고 착각한 듯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 정의구현 해야지. 회사 기강이 말이야."그 직후였다. 혜연과 엇갈려(크로스되어) 들어온 법무팀 지성국 과장 일행이 김 팀장을 에워쌌다."김진우 팀장님. 법무팀 지성국 과장입니다. 이야기 좀 하시죠.""네? 저요? 지금 박 과장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뭐 박혜연 과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일단 회의실에서 같이 이야기 하시죠."김 팀장의 얼굴이 의기양양했다. 그동안 팀에서 유령취급하면서 박혜연을 배제하던 것이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싶어 보람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회의실 안에는 법무팀 실무자들과 그리고 민지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회의실 정면 스크린에는 커다란 캡처 화면 하나가 띄워졌다. 블라인드 앱 특유의 인터페이스, 그리고 박혜연 과장을 악의적으로 저격했던 바로 그 폭로글이었다.지 과장이 레이저 포인터로 화면을 가리키며 무미건조하게 물었다."김 팀장님, 이 글 아시죠?"김진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짐짓 여유롭게 대꾸했다."아... 네, 알죠. 요즘 이거 모르는 우리 회사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