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Chapter 11 - Chapter 20

37 Chapters

11. 가장 나다운 숨을 담아 적은 이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대신전은 성녀님의 현재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결속을 앞둔 시기에 신성력 불안이나 외부 간섭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사례가 있습니다.”“저를 검사하겠다는 말입니까?”“간단한 성흔 검사와 정신 안정 의식이면 됩니다.”이레나가 벽 쪽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푸른 망토 끝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이레나, 그대로 계세요.”“예, 엘리시아 님.”그레고르는 이레나를 한 번 본 뒤 다시 엘리시아를 향했다.“거부 의사가 성녀님의 진정한 뜻임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결속에 동의할 때도 같은 검사를 합니까?”“그 경우에는 성녀님의 의무와 기존 서명이 있으므로—”“하지 않는다는 뜻이군요.”그레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잉크가 마르기 전에 곧장 이름을 적었다. 잿빛 금발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고, 마지막 획이 종이 위에 단단히 눌렸다.전생에는 수없이 남겼던 이름이었다.성흔 검사 동의서, 결속 준비 확인서, 황후 교육 일정, 처형 직전의 최후 진술서. 그중 어떤 서명도 지금처럼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적은 적은 없었다.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았다.“검사는 거부합니다.”그레고르의 입가가 굳었다.“그렇다면 대신전은 이 서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대신전 확인이 없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습니다.”“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셨다는 사실까지 함께 기록하겠습니다.”엘리시아가 황실 법률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오늘 대화는 전부 속기되고 있습니까?”황실 법률관은 벽 쪽 책상에 앉은 서기 두 명을 확인했다.“예. 공개 기록으로 분류될 예정입니다.”“그럼 대신전이 성녀의 거부 의사를 정신 이상 가능성으로 간주했고, 동의할 때에는 요구하지 않는 검사를 거부할 때에만 요구했다는 점도 빠뜨리지 마세요.”서기들의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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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발걸음을 늦추지 않는 자리

엘리시아는 거부서를 다시 읽었다. 결속과 수반 권한을 거부한다는 문장은 있었지만, 약혼과 혼인 예정 지위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문서를 한 장 더 준비해주세요.”오스카가 펜을 집었다.“약혼 해소 요청서입니까?”“요청서가 아닙니다.”엘리시아는 열린 법령집 사이에 끼워진 황실 혼인 규정을 꺼냈다.“제가 직접 해소할 수 있는 절차를 찾으세요. 없다면 없다는 사실부터 기록하고요.”오전 열한 시를 앞둔 황궁 공개 법무청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법무청은 귀족과 관료가 청원서를 제출하고, 황실의 결정을 공개 기록으로 남기는 장소였다. 높은 천장 아래로 검은 목재 난간이 반원을 이루고 있었고, 중앙 접수대 뒤에는 황실 문장 대신 저울과 펜이 교차된 법무청 표식이 걸려 있었다.엘리시아가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차례로 잦아들었다.귀족회의 서기관, 대신전 성직자, 황실 법률관, 결속 준비위원회 관계자들이 난간 뒤에 서 있었다. 몇몇 귀족은 그녀가 지나갈 때 몸을 숙였지만, 눈은 거부서가 든 이레나의 서류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결속식 한 달 전, 성녀가 황제를 거부한다.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법적 절차보다 버림받는 황제의 얼굴일 것이다. 사랑받던 성녀가 돌연 마음을 바꾼 이유를 추측하고,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정하며, 황후 자리를 두고 벌어진 연애사로 축소하려 들 것이다.엘리시아는 중앙 접수대까지 걸어갔다.발걸음을 늦추지 않았고, 주변을 향해 미소 짓지도 않았다.오늘 제출하는 것은 연인의 변심이 아니었다.한 인간의 거부였다.법무청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로젠베르크 성녀께서 결속 거부 의사를 정식으로 접수하시겠다고 통보하셨습니다. 황실과 대신전의 입회인이 모두 도착한 뒤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대신전은 도착했습니다.”난간 오른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그레고르 팔렌이 고위 성직자 두 명과 함께 앞으로 나왔다. 테오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예상한 일이었다.“황실 입회인은 아직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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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 인간이 거부해 낸 무게

법무청 안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번졌다.귀족 몇 명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고, 결속 준비위원장은 급히 재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를 보지 않았다.엘리시아는 칼릭스의 얼굴을 살폈다.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사람들의 동정을 끌어내지도, 자신의 희생을 암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불편할 정도로 분명했다. 붙잡지 않는 태도는 전생의 그와 달랐다.그러나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그레고르가 목소리를 낮췄다.“폐하, 황실의 일방적인 접수는 제국의 결속 체계를 흔들 수 있습니다.”“접수가 결속 해제를 뜻하지 않는다고 법무청장이 방금 설명했습니다.”“그럼에도 황제 폐하께서 거부 의사에 동의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칼릭스의 시선이 그레고르에게 돌아갔다.“제가 동의해야 성녀가 거부할 수 있다는 전제부터 잘못됐습니다.”“결속은 제국의 안정과 직결됩니다.”“그러니 더 많은 기록과 심의가 필요합니다. 성녀 한 사람의 침묵으로 진행할 일이 아닙니다.”그레고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결속이 무산되면 북부 지맥과 수도 왕핵의 안정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근 로스테 외성 보수 예산이 줄어든 상황에서”엘리시아의 눈빛이 달라졌다.“로스테 예산 삭감과 결속을 연결하는 겁니까?”그레고르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칼릭스를 향했다.“결속식이 예정대로 진행돼야 성흔 증폭 장치가 가동됩니다. 그것이 지맥 불안을 줄일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그 장치의 비용이 로스테 방벽 예산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함께 설명하셔야겠군요.”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낮아졌다.화가 날수록 단어가 정확해지는 것을 아는 이레나가 반걸음 가까이 왔다. 다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그레고르는 더 이상 말을 돌리지 못했다.“예산 배정은 황실 재무실과 귀족회의의 결정입니다.”“대신전은 요청만 했고요?”“필요성을 제출했습니다.”엘리시아가 법무청장을 바라보았다.“이 발언도 기록해주십시오. 대신전은 제 결속에 사용할 장치의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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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를 놓아주는 방식이 아니라

그는 조금 전 작성한 초안을 엘리시아에게 건넸다.약혼 해소 의사 통지서.그러나 문서 맨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보류 표시가 찍혀 있었다.엘리시아가 오스카를 바라보았다.“왜 접수되지 않았죠?”오스카의 안색이 어두웠다.“황실 혼인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됐습니다.”“말씀하세요.”“성녀님의 약혼은 일반 귀족 혼약이 아닙니다. 성녀 선발 동의와 황실 계승 안정 조항에 따라 체결된 국가 약혼으로 분류돼 있습니다.”엘리시아의 손이 서류 위에 멈췄다.“그래서요?”“성녀 측의 일방 해소 절차가 없습니다.”웅성거림이 다시 일었다.법무청장이 즉시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지만, 이미 시선은 엘리시아와 칼릭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오스카는 목소리를 낮췄다.“현행법상 약혼을 해소하려면 황제 폐하께서 파혼을 선언하시거나,귀족회의가 황실 혼인의 부적합을 인정해야 합니다.”결속은 거부할 수 있어도 약혼은 스스로 끝낼 수 없다.엘리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접수대 반대편에 선 칼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그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아침부터 이 조항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직접 이 자리에 온 것인지도 몰랐다.칼릭스가 법무청장에게 물었다.“약혼 당사자인 로젠베르크 성녀에게는 해소권이 없습니까?”“현재 법령에는 없습니다.”“제게는 있고요?”“황제 폐하께서는 국가 약혼의 철회를 명할 수 있습니다.”사람들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쏠렸다.한마디면 끝났다.황제가 파혼을 선언하면 엘리시아는 자유로워진다. 법적으로도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었다.그러나 엘리시아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말했다.“폐하께서 지금 결정하지 마십시오.”법무청 안의 공기가 멎었다.칼릭스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엘리시아는 접수대 위의 문서를 정리했다.“폐하께서 저를 놓아주는 방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그녀가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약혼인데, 제가 끝낼 권리가 없다는 법부터 확인하겠습니다.”칼릭스는 한동안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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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성녀의 이름으로

법무청장은 잘려나간 헌장을 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종이의 윗부분에는 건국 초기의 황실 인장이 남아 있었고, 문장 사이로 여러 차례 보존 약품을 덧바른 흔적이 보였다. 오래된 양피지는 가장자리부터 갈색으로 굳어 있었지만, 성녀의 권리를 적은 중앙 부분만큼은 잉크가 또렷했다.성녀는 결속과 혼인, 거주와 직위를 각각 거부할 수 있다.그 아래는 반듯하지 않았다. 급하게 찢긴 자국도 아니었다. 날이 얇은 칼로 문장을 따라 여러 번 긁어낸 뒤, 섬유가 일어나지 않도록 약품을 바른 흔적이었다. 누군가 우연히 훼손한 것이 아니라 읽히지 않도록 손을 댄 문서였다.칼릭스가 법무청장에게서 헌장을 빼앗지 않은 채 물었다.“발견된 문서함의 등록번호를 확인하십시오.”법무청장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문서 뒷면을 살폈다.“구왕조 법령 복원함 제십이 호입니다.”“현재 반출 담당자는 누구입니까?”서기관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펼쳤다.“복원실 소속 서기관 셋이 공동으로 맡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창고 누수 점검 때문에 임시로 이곳에 옮겼습니다.”그레고르가 앞으로 나왔다.“건국기 성녀 헌장은 오래전에 폐기된 법령입니다. 일부 문장만으로 현재의 권리를 주장하기에는”“폐기 기록을 보셨습니까?”엘리시아가 묻자 그의 말이 끊겼다.그녀는 접수대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결속 거부서를 올려놓았던 자리와 잘린 헌장이 떨어진 자리는 불과 몇 걸음 차이였다. 대신전 법률관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핏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그레고르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현행 법령집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수록되지 않은 것과 적법하게 폐기된 것은 다릅니다.”“건국 이후 여러 차례 법률 개정이 있었습니다. 모든 구법의 폐기 절차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엘리시아는 그를 더 추궁하지 않았다.대신 법무청장에게 시선을 돌렸다.“문서 발견 시각과 장소, 문서함을 옮긴 사람, 오늘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을 모두 기록해주세요.”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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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가 듣고 싶은 답과 사실이 다를지라도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마지막 문장에서만 조금 낮아졌다.엘리시아는 그 이유를 짐작하지 않았다. 칼릭스가 전생의 처형 기록을 얼마나 보았는지, 그녀가 죽은 뒤 어떤 문서를 찾아다녔는지 알지 못했다. 설령 그가 모든 기록을 뒤집어보고 회귀했더라도, 그 시간은 엘리시아의 것이 아니었다.법무청장은 공개 절차를 잠시 중단하고 현장 보존을 명했다.경비병들이 출입문을 닫되 잠금쇠는 걸지 않았다.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름과 소지품을 확인받아야 했고, 서기관들은 방금까지 탁자에 놓여 있던 모든 문서를 번호순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레나는 엘리시아 오른편에서 작업을 지켜보다가 낮게 말했다.“성녀 측 기록인으로 누구를 지명하시겠습니까?”엘리시아는 자신의 거부서를 작성했던 오스카를 보았다. 그는 로젠베르크가의 법률대리인이었지만, 후작가의 이해와 엘리시아 개인의 이해가 언제나 같다고 볼 수는 없었다.“당장은 오스카 경과 이레나가 함께 입회하세요.”“저는 법률 기록인이 아닙니다.”“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문장을 해석하는 사람과 누가 문서를 만졌는지 보는 사람을 나누겠습니다.”이레나는 잠시 헌장을 바라본 뒤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엘리시아는 문서 위로 몸을 기울이지 않았다.눈앞에 놓인 문장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곧장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원본인지, 이후 폐기됐는지, 어떤 절차를 규정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잘려나간 아랫부분에 지금 보이는 권리를 제한하는 조건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그녀는 원하는 문장만 믿다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칼릭스가 원하는 증거만 믿었기 때문에 죽었다.그 잘못을 자신이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저 문서가 제 거부를 인정해주는 증거라고 발표하지 마세요.”서기들에게 지시하던 법무청장이 돌아보았다.“그러면 공개 기록에는 어떻게 남길까요?”“성녀의 개별 거부권을 명시한 건국기 문서 일부가 발견됐고, 훼손과 폐기 여부를 감정 중이라고만 적으세요.”엘리시아는 잘린 단면을 바라보았다.“제가 듣고 싶은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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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과 밖의 경계선에 서서

“성녀님의 명령권은 신성 의식과 구호 활동에 한정됩니다.”“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요청했고, 거절을 기록하겠다고 했습니다.”“대신전은 내부 기밀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습니다.”“저도 외부인입니까?”질문은 조용했지만 방 안에 남았다.그레고르는 곧 답하지 못했다.대신전은 엘리시아를 성녀라 부르며 의무를 요구했다. 그러나 기록을 보여달라고 할 때에는 외부인으로 취급했다. 안과 밖의 경계는 언제나 대신전이 필요할 때마다 움직였다.칼릭스는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그가 황제의 권한으로 대신전 기록고를 열면 빠르게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엘리시아의 요청은 황제의 명령에 딸린 부속 절차가 된다.칼릭스는 레온하르트에게 시선을 주었고, 재상은 대신전의 답변 시한만 확인했다.“공식 요청서를 오늘 안에 보내겠습니다. 답변은 사흘 이내로 요구하겠습니다.”그레고르가 말했다.“사흘은 지나치게 짧습니다.”엘리시아가 곧장 받았다.“제 결속식은 이십구 일 뒤입니다. 대신전은 지금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일정을 전부 중단하면 성흔과 왕핵의 조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그러면 준비를 계속하면서 기록을 찾을 시간은 있고, 제 요청에 답할 시간은 없다는 뜻이군요.”그레고르는 더 이상 기간을 문제 삼지 않았다.두 번째 감정관이 헌장 뒷면에 약한 빛을 비췄다.양피지를 통과한 빛 아래로 희미한 압인이 드러났다. 잉크는 지워졌지만 무언가 적혔던 자국이었다. 감정관이 광석판의 각도를 조절하자 여러 줄의 글씨가 종이 표면에 그림자처럼 떠올랐다.“뒷면에 복원 기록이 있습니다.”사람들이 감정대 가까이 다가갔다.엘리시아만은 원래 자리를 지켰다.감정관이 한 글자씩 읽었다.“제국력 이백팔십구 년… 성녀 관련 구법 정리… 현행 법령집과 중복되는 조항 제거….”레온하르트가 개정 연도를 계산했다.“이십삼 년 전입니다.”엘리시아가 태어나기 전이었다.“작성자는요?”감정관이 마지막 부분에 빛을 모았다.“대신전 법률원과 황실 혼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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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누가 결정했는지 숨지 못하도록

“공개 접견실이나 법무청 회의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공개 접견실로 하겠습니다. 입회인은 양측 두 명씩, 속기 기록을 남겨주세요.”“시간은 언제가 좋으십니까?”“헌장 1차 감정 결과가 나온 뒤로 정하세요.”의전관은 들고 있던 봉투를 다시 품에 넣었다.“요청서를 수정해 전달하겠습니다.”그가 물러나자 대신전 신관이 앞으로 나왔다.황실 의전관보다 젊은 남자였다. 신관복 소매에는 성녀 관리국의 은색 자수가 놓여 있었다.“성녀 성하께 대신관님의 명을 전달합니다. 결속 전 신성력 불안이 의심되므로 오늘 해가 지기 전 대신전으로 돌아와 성흔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이레나의 턱이 조금 굳었다.엘리시아는 신관이 내민 봉투를 바라보았다.“검사 동의서가 들어 있습니까?”“의무 검사이므로 별도 동의서는 없습니다.”“거부할 경우의 절차는요?”“결속 안정 조치에 불응한 것으로 기록됩니다.”“검사 항목과 위험, 사용되는 유물, 표본 보관 기간은 적혀 있습니까?”신관이 잠시 말을 잃었다.“통상적인 성흔 검사입니다.”“통상적이라는 말로 제 질문을 대신하지 마세요.”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다.“항목과 위험을 문서로 보내세요. 표본을 채취한다면 보관 장소와 폐기 절차도 포함하고요. 검사는 그 뒤에 결정하겠습니다.”“대신관님의 명입니다.”“저는 대신관님의 명령을 받기 위해 성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복도를 지나던 서기관들의 걸음이 느려졌다.신관은 주위 시선을 의식해 봉투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성녀 성하께서 검사를 거부하시면 정신적 외부 간섭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그 문장도 서면으로 제출하세요.”“성하.”“그리고 앞으로 제게 검사 명령을 보낼 때에는 법적 근거를 함께 붙이십시오.”엘리시아는 그의 은색 소매 문장을 바라보았다.“성녀 관리국이라는 명칭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네요. 누가 누구를 관리한다는 뜻인지.”신관의 얼굴이 붉어졌다.그는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두 요구는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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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허락했다는 기록으로 남기지 마세요

“성흔 증폭 장치의 건설은 즉시 중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로스테에서 옮겨온 마석과 인력이 있으므로 반환 비용과 이동 시기를 정해야 합니다. 결속식 경비대 재배치도 중단할 수 있지만, 국경에서 차출한 병력이 복귀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엘리시아는 목록을 받아 항목별로 살폈다.‘취소’라는 단어 하나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없었다.로스테의 예산은 이미 삭감됐고, 마석은 수도로 옮겨졌으며, 국경 병력은 이동을 시작했다. 결속식이 멈춰도 그 과정에서 생긴 빈자리는 그대로 남았다.“로스테에서 옮겨온 마석은 바로 반환해주세요.”“운송비가 추가로 필요합니다.”“결속식 예산에서 사용하세요.”레온하르트가 계산서를 확인했다.“가능합니다.”“차출 병력은 원소속지로 복귀시키되, 이동 중 발생하는 공백은 황실 근위대가 한시적으로 맡으세요. 지역 지휘관 동의도 먼저 받고요.”칼릭스가 말했다.“그렇게 하겠습니다.”엘리시아는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성녀 거처 이전은 전면 중단합니다. 제 경호대와 서신 관리도 현재 체계를 유지하고요.”“동의합니다.”대답이 너무 빨랐다.엘리시아는 목록에서 눈을 들었다.“폐하께서 동의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칼릭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말씀하십시오.”“거처와 경호는 제 권한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다는 기록으로 남기지 마세요.”속기 서기의 펜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칼릭스는 정정했다.“로젠베르크 성녀가 거처 이전과 경호 변경을 거부했습니다. 황실은 그 결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그렇게 기록해주세요.”엘리시아는 다시 문서를 읽었다.회의는 감정적인 말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두 사람은 결속식 의복 제작, 사절단 통보, 공개 행렬, 성녀 전용 마차, 황후 예정자 교육을 하나씩 분리했다.엘리시아가 황후 교육 항목에 선을 그었다.“중단이 아니라 취소해주세요.”“결속 거부와 별도로 약혼 지위가 남아 있습니다.”칼릭스의 말에 방 안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그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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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죽은 이의 손끝이 남긴 획

서기의 펜이 움직였다.회의가 끝나자 칼릭스는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시아가 문에 더 가까이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가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엘리시아는 서류를 이레나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칼릭스가 공식적인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로젠베르크 성녀.”“폐하.”그녀는 문으로 향했다.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황실 기록관 하나가 봉인된 장부를 안고 공개 접견실 앞에 멈췄다.“폐하, 혼인국의 구법 정리 장부를 찾았습니다.”엘리시아는 문을 열어둔 채 돌아보았다.기록관은 방 안에 들어와 레온하르트에게 장부를 건넸다. 재상이 봉인을 확인한 뒤 마지막 부분을 펼쳤다.“건국기 성녀자유헌장의 정리 기록입니다.”그레고르가 없는 자리였다.칼릭스는 장부를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다.“로젠베르크 성녀 측에서 먼저 확인하도록 하십시오.”레온하르트가 장부를 오스카에게 넘겼다.오스카는 몇 장을 빠르게 읽다가 눈을 좁혔다.“이상합니다.”“무엇이죠?”엘리시아가 묻자 그가 장부를 탁자 위에 펼쳤다.헌장 정리 사유는 ‘현행 성녀법과 중복’이라고 적혀 있었다.하지만 중복된 조항이 옮겨졌다는 법령 번호는 빈칸이었다.그 아래에는 잘라낸 문서의 보관을 승인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성녀의 개인 인장이었다.엘리시아는 흐릿한 문양을 바라보았다.백합과 태양이 겹친 오래된 인장. 역대 성녀가 개인 문서를 승인할 때 사용했던 형태였다.“당시 성녀가 직접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처리돼 있습니다.”오스카가 승인자 이름을 읽었다.“아델라이드 성녀.”레온하르트가 곧장 당시 기록을 대조했다.그의 손이 페이지 중간에서 멎었다.“이 날짜에는 아델라이드 성녀가 살아 있지 않았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언제 사망했습니까?”엘리시아의 질문에 레온하르트가 장부 두 권을 나란히 놓았다.“헌장이 정리됐다는 날짜보다 석 달 전입니다.”죽은 성녀의 인장이 그녀의 권리를 지우는 데 사용됐다.엘리시아는 승인란을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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