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Chapter 21 - Chapter 30

37 Chapters

21. 죽은 성녀의 인장

성흔 검사 명령서는 복도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다.이레나는 곧장 몸을 낮췄지만 종이를 집지는 않았다. 대신 검집 끝으로 봉투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바닥에는 희미한 흙가루가 남아 있었고, 벽 쪽에는 누군가 급하게 방향을 틀며 밟은 자국이 찍혀 있었다.“서쪽 계단으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그녀가 복도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경비병 둘이 명령을 기다렸지만, 칼릭스는 즉시 추격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는 열린 접견실 문 앞에 멈춰 선 채 봉투와 계단을 번갈아 보았다.엘리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 사람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복도에 남은 서기관 하나가 손을 들었다.“성녀 관리국의 정식 신관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습니다.”“조금 전 제게 명령서를 전달한 사람과 같은 인물이었나요?”“예. 적어도 옷과 체격은 같았습니다.”이레나가 서기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머리색은요?”“갈색이었던 것 같습니다.”“눈은?”서기관의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다.“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사람들은 신관복을 보았고 대신전의 은색 자수를 확인했으며, 그가 들고 온 봉투에 찍힌 인장을 믿었다. 정작 그 안에 있던 사람의 얼굴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엘리시아는 전생의 재판장을 떠올렸다.성녀의 인장이 찍힌 문서, 이레나의 서명, 엘리시아의 신성력 파장. 사람들은 증거의 모양을 기억했지만, 누가 그것을 들고 왔고 어떤 손을 거쳤는지는 묻지 않았다.그때 칼릭스도 마찬가지였다.엘리시아는 봉투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오스카를 불렀다.“법무청의 증거 수거 절차를 적용하세요.”“대신전 명령서에도 말입니까?”“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문서입니다. 제게 전달된 뒤 사라진 사람이 두고 갔고, 죽은 성녀의 인장과 같은 문양이 찍혀 있습니다.”오스카가 법무청 서기관에게 손짓했다.서기관은 얇은 가죽 장갑을 끼고 투명한 증거판을 가져왔다. 봉투를 집기 전에 위치를 재고, 바닥 자국과 거리를 기록했으며, 입회인들의 이름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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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꽃잎 끝에 남겨진 작은 흠집

“전달자의 이름이 무엇입니까?”“성녀 관리국 소속 마틴 신관입니다.”“성은요?”“수습 신관은 성을 기록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얼굴을 확인할 자료가 있습니까?”“관리국으로 돌아가면 인사기록을”“지금 황궁에 들어온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 명령서를 보냈습니까?”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굳었다.“명령서는 정식 절차에 따라 작성됐습니다. 성녀 성하의 상태를 우려해 서둘러 전달하다 보니 신분 확인이 미흡했을 수 있습니다.”“저를 걱정하신 분이 누군지 이름을 밝혀주세요.”“대신관님과 성녀 관리국 전체의 판단입니다.”“전체는 서명할 수 없어요.”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명령을 결정한 책임자, 검사를 시행할 책임자, 표본을 보관할 책임자의 이름을 각각 제출하세요.”부국장은 대답 대신 증거판을 바라보았다.“그 문서는 대신전 소유이므로 회수하겠습니다.”이레나가 한 걸음 옆으로 이동해 증거판과 그 사이를 막았다. 검을 뽑지는 않았으나, 부국장이 손을 뻗을 수 있는 길은 사라졌다.엘리시아는 이레나를 제지하지 않았다.“이미 제게 전달된 문서입니다.”“검사가 진행되지 않았으니 효력도 없습니다.”“효력이 없는 문서라면 더더욱 돌려드릴 이유가 없군요.”“성녀 성하.”부국장의 어조가 조금 단단해졌다.“죽은 성녀의 개인 인장은 역대 성녀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용 문양으로도 사용됩니다. 아델라이드 성녀의 인장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증거처럼 다루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엘리시아는 증거판에 찍힌 문양을 바라보았다.백합과 태양이 겹쳐진 형태는 멀리서 보면 역대 성녀들의 공용 상징과 비슷했다. 그러나 백합의 오른쪽 꽃잎 끝에는 아주 작은 흠집이 있었다. 오래된 혼인국 장부의 인장과 정확히 같은 위치였다.“공용 문양에도 같은 흠집이 있습니까?”부국장의 시선이 봉투 위에서 멎었다.대답이 늦었다.그 짧은 침묵만으로도 그는 흠집을 처음 본 사람이 아니었다.엘리시아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감정 결과가 나오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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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우연이라는 말 뒤에 감춘 흠집

법무청 지하 감정실에는 점심이 지난 뒤에야 봉투가 들어갔다.감정대 주위에는 세 기관의 입회인이 각각 한 명씩 섰다. 밀랍 감정관은 먼저 외형을 그렸고, 종이 감정관은 봉투 가장자리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유를 떼어냈다. 마지막으로 인장 감정관이 확대 렌즈를 조절했다.엘리시아는 감정대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았다.칼릭스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황제의 입회 권한은 레온하르트에게 넘겼고, 자신은 지상 법무청에서 출입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황제가 나타나면 감정관들이 판단보다 그의 표정을 먼저 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그 선택 역시 옳았다.엘리시아는 옳은 행동을 하나씩 세며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인장 감정관이 오래된 성녀자유헌장 승인란의 탁본과 검사 명령서의 밀랍 인장을 나란히 놓았다.“문양은 동일합니다.”오스카가 물었다.“공용 인장일 가능성은요?”“공용 문양과 기본 형태는 같습니다. 하지만 두 인장에는 같은 손상이 있습니다.”감정관은 백합 오른쪽 꽃잎을 확대했다.끝부분이 바늘로 눌린 것처럼 아주 조금 패여 있었다.“이 정도 손상은 문양을 새긴 원판 자체에 흠집이 있다는 뜻입니다. 새로 같은 도안을 만들었다면 우연히 같은 위치와 깊이로 흠집이 생길 가능성은 낮습니다.”“같은 인장이라는 뜻입니까?”“같은 원판을 사용했거나, 원판의 흠집까지 복제한 틀을 사용했습니다.”엘리시아는 손목 안쪽을 누르지 않았다.대신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밀랍의 연대는요?”다른 감정관이 답했다.“명령서의 밀랍은 최근 한 달 안에 제조된 것입니다. 대신전에서 사용하는 표준 혼합물과 조성도 같습니다.”죽은 성녀의 인장이 최근의 밀랍 위에 찍혔다.우연도, 낡은 문서를 재사용한 것도 아니었다.오스카가 오래된 기록을 넘겼다.“성녀가 사망하면 개인 인장은 어떻게 처리됩니까?”법무청 기록관이 폐기 규정을 읽었다.“사망 확인 뒤 대신전 법률원과 성녀 관리국이 공동으로 인장 원판을 세 조각으로 부숩니다. 한 조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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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비어 있었던 이십 년의 무게

오스카가 새 종이에 조건을 기록했다.“성녀 측의 공식 검사 원칙으로 만들겠습니다.”이레나가 서류 가장자리를 보다가 물었다.“검사에 동행할 사람도 성녀님께서 정하시겠습니까?”“예. 검사 중단 요청도 제가 직접 할 수 있어야 하고요.”“정신을 잃거나 말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요?”엘리시아는 잠시 생각했다.전생의 자신은 검사대 위에서 몇 번 정신을 잃었다. 깨어날 때마다 이미 필요한 절차가 끝났다는 말을 들었다.“사전에 정한 대리인이 중단할 수 있게 하세요.”그녀는 이레나를 바라보았다.“제가 따로 바꾸지 않는 한 당신이 맡아주세요.”이레나의 손이 검집에서 내려왔다.“알겠습니다.”그녀는 감격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검사 명령서를 다시 읽으며 중단 조건 옆에 표시를 남겼다.그때 황실 혼인국으로 갔던 전령이 돌아왔다.그는 빈 금속함을 들고 있었다.기록관의 얼굴이 굳었다.“조각이 없습니까?”전령은 숨을 고른 뒤 금속함을 감정대 위에 놓았다.“보관함은 봉인돼 있었습니다. 외부 손상도 없습니다.”“그런데 안이 비었다는 말입니까?”“인장 조각 대신 이것이 들어 있었습니다.”그가 금속함 바닥에서 작은 나무판을 꺼냈다.아델라이드 성녀의 인장 탁본이었다.원본 조각이 아니라, 흠집까지 똑같이 베낀 얇은 모형이었다.감정관이 그것을 집어 확대 렌즈 아래 놓았다.“밀랍에 찍는 용도는 아닙니다. 보관함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넣은 것 같습니다.”“언제 바뀌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봉인 검사 기록을 봐야 합니다.”기록관이 장부를 펼쳤다.황실 혼인국은 매년 보관함의 외부 봉인만 확인했다. 성녀 인장 조각은 최고 등급 유물이 아니었고, 함을 열려면 대신전 입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내부 검사는 이십 년 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레온하르트가 천천히 말했다.“누군가 봉인을 다시 만들 수 있었다면, 이십 년 동안 비어 있었어도 아무도 몰랐겠군요.”엘리시아는 빈 함의 안쪽을 보았다.바닥에는 오래된 밀랍 부스러기와 작은 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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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검을 든 이가 문서를 보던 낮

엘리시아는 서류에 인장을 찍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지겨워졌어요?”“아닙니다. 전에 왜 적게 들었는지가 조금 화가 날 뿐입니다.”이레나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기록을 읽었다.엘리시아의 입가도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사라졌다.전생에서는 이레나와 이렇게 문서를 나눠 읽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호위였고, 엘리시아는 지켜져야 할 성녀였다. 이레나가 법률이나 기록에 의견을 내면 대신전 관료들이 직무를 벗어났다고 지적했다.이번에는 검을 든 사람이 문서를 보고 있었다.그 변화는 거창한 선언보다 작았지만, 엘리시아에게는 잘린 헌장 못지않게 중요했다.응접실 문밖에서 노크가 들렸다.“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문서입니다.”이레나가 먼저 문을 열고 전달자의 출입증과 얼굴을 확인했다. 이번 전달자는 황실 기록관 소속이었고, 문서는 공동 봉인 방식으로 포장돼 있었다.엘리시아는 봉인 번호를 대조한 뒤 열었다.칼릭스의 개인 서신은 없었다.황실 혼인국의 인장 보관함 관련 조사 명령, 출입 권한자 목록, 과거 봉인 담당자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황제의 짧은 지시가 적혀 있었다.성녀 측 기록인에게 동일한 사본을 제공한다.수사 결과는 황실 단독으로 확정하지 않는다.엘리시아는 문장을 두 번 읽지 않았다.의미는 분명했다.“답신은 보내지 마세요.”이레나가 문서를 보관함에 넣었다.“확인했다는 통보도 필요 없습니까?”“접수 기록이면 충분해요.”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해가 서쪽 담장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밤이 오면 다시 그 방이 열릴지도 몰랐다. 칼릭스가 문밖에 나타나고,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갇힐 수 있었다.낮에는 제도를 고치기 위해 문을 열어야 했고, 밤에는 한 사람을 막기 위해 문을 닫아야 했다.엘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침실 문 앞의 경비를 세 명으로 늘리지 마세요.”이레나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엘리시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천명몽에서 칼릭스를 만났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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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내 선택은 아니었군요

방 안의 공기가 흔들렸다.그러나 문밖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어제와 달랐다.엘리시아가 다시 말했다.“이곳에서 나가십시오.”문 아래로 금빛 빛이 가느다랗게 번졌다가 꺼졌다. 칼릭스의 숨소리가 아주 짧게 흐트러졌다.“나갈 수 없습니다.”“어제는 가능했습니다.”“어제는 로젠베르크 성녀께서 저를 이곳에서 밀어냈습니다. 오늘은 이 공간이 버티는 것 같습니다.”그의 설명에는 꾸밈이 없었다.엘리시아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 앞 세 걸음 거리까지 다가갔다. 손잡이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폐하께서는 이 공간을 알고 계십니까?”“아닙니다.”“회귀와 관련됐다고 생각합니까?”문밖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칼릭스가 거짓말할 때 생기는 침묵과 비슷했지만, 뒤따른 답은 지나치게 매끈하지 않았다.“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누가 시간을 돌렸습니까?”이번에는 침묵이 더 길었다.엘리시아는 재촉하지 않았다.그가 답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기록할 수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숨기는 방식이 전생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마침내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제가 돌렸습니다.”엘리시아의 손가락이 잠시 굽었다.침실의 어둠은 변하지 않았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목덜미에 차가운 날이 닿았던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그가 시간을 돌렸다.자신이 죽은 뒤, 자신에게 묻지 않은 채.엘리시아는 문과 거리를 한 걸음 더 벌렸다.“왜요?”칼릭스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그 질문에는 전부 답할 수 없습니다.”“답할 수 없는 겁니까, 하지 않으려는 겁니까?”문밖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지금 말씀드리면 로젠베르크 성녀께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까지 제 설명으로 덮게 됩니다.”엘리시아는 입술을 다물었다.전생의 칼릭스라면 가장 완전한 대답을 준비했을 것이다. 자신이 왜 옳았는지, 어떤 위험을 막았는지, 무엇을 희생했는지 빠짐없이 말했을 것이다. 듣는 사람이 반박할 틈이 없을 만큼 정교하게.지금 그는 답하지 않는 이유까지 기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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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문의 이름으로

엘리시아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새벽빛이 커튼 가장자리를 희게 물들이고 있었고, 복도에서는 야간 경비가 교대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실의 침실은 전날 밤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잠기지 않았고, 침대 옆 탁자에는 잠들기 전 놓아둔 물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달라진 것은 머릿속에 남은 문장 하나뿐이었다.로젠베르크가의 사람이었습니다.엘리시아는 그 말을 여러 번 되씹지 않았다. 칼릭스의 기억은 증언일 뿐이었다. 전생의 재판에서 무엇을 보았든, 그가 누구를 로젠베르크가의 사람이라고 판단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가문의 제복을 입은 사람일 수도 있었고, 위조된 출입패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었다.그녀는 이불을 걷은 뒤 책상으로 갔다.어제까지 세 묶음으로 나누어두었던 기록 옆에 새 종이를 놓았다.첫 줄에는 ‘확인된 사실’이라고 적었다.죽은 아델라이드 성녀의 인장과 같은 흠집이 최근 검사 명령서에 존재한다.황실 혼인국에 보관됐어야 할 인장 조각이 사라졌다.대신전은 아직 인장 폐기 기록을 제출하지 않았다.그 아래에는 ‘타인의 기억에 근거한 주장’이라고 썼다.전생의 재판 증거를 처음 황실에 전달한 자가 로젠베르크가 소속이었다는 칼릭스의 증언.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았다.그 문장을 확인된 사실 쪽으로 옮기는 날이 오더라도, 칼릭스의 말만으로 움직였다는 기록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죽게 만든 것도 누군가의 확신이었다. 그 확신이 이번에는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같은 방식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문밖에서 세 번의 노크가 들렸다.“엘리시아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들어오세요.”이레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뒤 곧장 침대가 아니라 책상 위의 기록을 보았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정리된 종이를 보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잠을 거의 못 주무셨습니까?”“필요한 만큼은 잤어요.”“그 대답은 의원이 싫어할 것 같습니다.”“마티아스 경은 제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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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통상적인 절차라는 말 뒤의 맹점

로젠베르크 후작저는 황궁 북서쪽 귀족구역에 있었다.높은 담장이나 위압적인 조각상 대신 회색 석벽과 오래된 나무가 둘러싼 집이었다. 어린 시절 엘리시아는 이곳의 서쪽 정원에서 어머니와 약초를 말렸고, 성녀로 선발된 뒤에는 일 년에 몇 번 손님처럼 돌아왔다.마차가 현관 앞에 멈추자 빅토르 로젠베르크가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그는 예복이 아닌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희끗한 금발은 단정하게 묶였고, 손에는 지팡이나 장갑도 없었다. 딸을 맞으러 나온 아버지의 얼굴과 성녀를 영접하는 후작의 태도가 어색하게 겹쳐 있었다.“성녀님을 뵙습니다.”빅토르가 먼저 허리를 숙였다.엘리시아는 마차에서 내린 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섰다.“후작 각하.”아버지의 눈가가 아주 조금 굳었다.전생의 엘리시아는 공적인 자리에서도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성녀로 선발된 뒤 가족에게까지 직위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가족으로 안부를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빅토르는 서운함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요청하신 기록은 서고에 준비했습니다.”“펠릭스는요?”“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엘리시아는 그를 앞세워 집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는 어머니 아델라가 골랐던 푸른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가족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열네 살의 엘리시아는 어머니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성녀 선발을 앞두고 그린 그림이었다.그때의 자신은 대신전으로 가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가족도 그렇게 믿었다.빅토르는 딸을 신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면서도 성녀가 되는 일을 막지 않았다. 제국의 의무였고, 엘리시아가 원했으며, 거부할 방법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세 가지 중 사실인 것은 하나뿐이었다.엘리시아는 사람을 살리고 싶었다.서고 문 앞에는 펠릭스가 서 있었다.스물두 살의 그는 누이와 같은 금발이었지만 잿빛이 적었고, 눈동자는 아버지의 푸른색에 가까웠다. 평소라면 먼저 다가와 “누님”이라고 불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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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명 하나를 어디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

위임장 앞부분에는 빅토르가 말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성녀의 구호 활동, 생활비 집행, 치료소 계약, 호위대 물품 조달.하지만 마지막 장에 붙은 부속 조항은 잉크 색이 달랐다.‘성녀의 신성 의무와 국가 결속에 수반되는 문서 행위를 포함한다.’빅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저 문장을 본 적이 없다.”펠릭스가 종이를 창가로 가져가 빛에 비췄다.“뒤에 추가된 겁니다. 앞장의 접힌 자국과 맞지 않습니다.”엘리시아는 문서에 손대지 않았다.“서명은요?”“아버지의 서명이 맞습니다. 다만 마지막 장에 따로 서명한 게 아니라 앞장 서명을 전체 위임에 적용한 형식입니다.”빅토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그는 문서를 낚아채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의자를 뒤로 밀고 서고 구석의 보관함으로 갔다. 열쇠를 꺼내 안쪽 칸을 열자 작은 은제 인장함이 나왔다.“가문 보관본을 확인하겠다.”인장함에는 대리 인장 하나가 들어 있었다.백합 줄기 아래 로젠베르크의 방패가 새겨진 형태였다. 빅토르는 인장을 들어 위임장에 찍힌 문양과 비교했다.기본 도안은 같았으나, 위임장 인장의 방패 왼쪽에는 가는 선이 하나 더 있었다.펠릭스가 확대 렌즈를 가져왔다.“같은 인장이 아닙니다.”빅토르의 손이 굳었다.“대신전 보관본에는 구분을 위해 작은 선을 추가했다고 했다.”“아버지는 그 인장을 회수한 적이 있습니까?”“없다.”“사용대장을 받은 적은요?”빅토르는 대답하지 못했다.펠릭스가 입술을 눌렀다.“그럼 대신전은 로젠베르크가 명의의 인장을 이십 년 가까이 자체적으로 사용한 겁니까?”“엘리시아의 업무를 위해서라고 믿었다.”“무엇에 썼는지 확인하지도 않고요?”펠릭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엘리시아가 그를 불렀다.“펠릭스.”그가 입을 다물었다.엘리시아는 아버지를 감싸지도, 동생의 분노를 제지하기 위해 부드러운 말을 고르지도 않았다.“후작 각하께서 직접 답하셔야 해.”빅토르는 탁자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손등의 혈관이 도드라졌지만 목소리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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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가문의 문장을 그대로 달아둔 채로

문서관장은 잠옷 위에 급히 외투를 걸친 사람처럼 흐트러진 차림으로 서고에 들어왔다.호출을 받은 시각이 오전인데도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엘리시아를 보자마자 허리를 깊이 숙였다.“성녀님을 뵙습니다.”“이름을 말씀하세요.”“테오발트 크란츠입니다. 로젠베르크 후작가에서 십칠 년째 문서를 관리하고 있습니다.”“대신전에 맡긴 대리 인장의 사용 기록은 누가 받았습니까?”테오발트의 눈이 빅토르에게 향했다.후작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성녀님께서 성녀로 선발되신 초기에 몇 차례 정기 보고가 왔습니다. 이후에는 통상 업무로 분류돼 별도 대조를 하지 않았습니다.”“마지막으로 보고를 받은 날짜는요?”“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펠릭스가 이미 관련 장부를 꺼내놓았다.“십이 년 전입니다.”테오발트의 입술이 굳었다.엘리시아가 물었다.“그 뒤에도 가문 명의의 문서가 계속 사용됐습니까?”“대신전에서 사본을 보내오면 보관만 했습니다.”“대조하지 않고요?”“성녀 업무는 대신전이 주관했고, 가문은 비용을 부담하는 역할이었으므로….”“어제는요?”테오발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펠릭스가 탁자 위에 출입장부를 펼쳤다.“어제 새벽, 후작가 문서 운반 마차가 대신전에 들어갔습니다. 가문 출입패와 대리 인장을 사용했고요.”빅토르가 고개를 들었다.“나는 마차를 보낸 적이 없다.”“저도 없습니다.”펠릭스가 테오발트를 바라보았다.“문서관장께서 승인했습니까?”“아닙니다.”“그럼 누가 가문 마차와 출입패를 사용했죠?”테오발트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눌렀다.“오래된 마차 한 대를 성녀 관리국에 상시 대여한 적이 있습니다.”서고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엘리시아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언제부터요?”“성녀님께서 대신전에 들어가신 뒤부터입니다.”“가문 문장을 그대로 달아둔 채로요?”“대신전에서 성녀님의 물품과 구호 문서를 옮기는 데 필요하다고 했습니다.”펠릭스가 헛웃음을 삼켰다.“그 마차를 누가 타든 로젠베르크가 사람으로 보였겠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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