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대신전은 성녀님의 현재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결속을 앞둔 시기에 신성력 불안이나 외부 간섭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사례가 있습니다.”
“저를 검사하겠다는 말입니까?”
“간단한 성흔 검사와 정신 안정 의식이면 됩니다.”
이레나가 벽 쪽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푸른 망토 끝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레나, 그대로 계세요.”
“예, 엘리시아 님.”
그레고르는 이레나를 한 번 본 뒤 다시 엘리시아를 향했다.
“거부 의사가 성녀님의 진정한 뜻임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결속에 동의할 때도 같은 검사를 합니까?”
“그 경우에는 성녀님의 의무와 기존 서명이 있으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그레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잉크가 마르기 전에 곧장 이름을 적었다.
잿빛 금발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고, 마지막 획이 종이 위에 단단히 눌렸다.
전생에는 수없이 남겼던 이름이었다.
성흔 검사 동의서, 결속 준비 확인서,
황후 교육 일정, 처형 직전의 최후 진술서.
그중 어떤 서명도 지금처럼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적은 적은 없었다.
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검사는 거부합니다.”
그레고르의 입가가 굳었다.
“그렇다면 대신전은 이 서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전 확인이 없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셨다는 사실까지 함께 기록하겠습니다.”
엘리시아가 황실 법률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대화는 전부 속기되고 있습니까?”
황실 법률관은 벽 쪽 책상에 앉은 서기 두 명을 확인했다.
“예. 공개 기록으로 분류될 예정입니다.”
“그럼 대신전이 성녀의 거부 의사를 정신 이상 가능성으로 간주했고,
동의할 때에는 요구하지 않는 검사를 거부할 때에만 요구했다는 점도 빠뜨리지 마세요.”
서기들의 펜이 종이 위를 달렸다.
그레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님, 공개 기록은 한번 남으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개로 제출하는 겁니다.”
“황제 폐하와 상의하지 않으신 결정 아닙니까?”
엘리시아는 문서 모서리를 정리했다.
“제 몸과 제 직위에 관한 거부를 말씀드리기 위해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가요?”
“허락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속은 두 사람의 문제이니 최소한 사전 협의가”
“결속을 진행할 때는 제 사전 협의가 필요하지 않았는데, 거부할 때만 필요하군요.”
그레고르의 손이 법령집 표지 위에서 멎었다.
엘리시아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저는 오늘 오전 열한 시, 황궁 공개 법무청에서 이 문서를 정식으로 접수하겠습니다.
대신전에서 확인하지 않겠다면 그 자리에서 거부 사유를 밝히세요.”
“고위 성직자의 참석이 필요합니다.”
“대신관께 전달해주십시오.”
그레고르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테오도르 베르단이 직접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성녀의 갑작스러운 거부에 무게를 실어주는 모양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전은 대개 가장 낮은 목소리로 가장 큰 결정을 밀어붙였다.
누가 명령했는지 보이지 않게 만들고, 이미 정해진 절차처럼 사람을 움직였다.
엘리시아는 그 방식을 알고 있었다.
‘한 번 죽고 난 뒤에야.’
그레고르가 법령집을 챙겼다.
“대신전의 입장은 공개 법무청에서 밝히겠습니다.”
“그러세요.”
그가 문을 나간 뒤에도 방 안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녀님, 거부서에 신체·거주·직위상의 권한 이전까지 포함하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결속식 뒤 제 거처가 황궁 본전으로 옮겨지고,
경호대와 서신이 황실과 대신전의 공동 관리에 들어가더군요.”
“전례에 따른 조치입니다.”
“전례가 제 의사를 대신하지는 않아요.”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결속을 거부해도 약혼과 황후 예정 지위는 별도로 남을 수 있습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그에게 멈췄다.
“별도라고요?”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어제 받은 문서에는 모두 하나의 절차처럼 묶여 있었습니다.”
“실무상 함께 진행해왔을 뿐, 혼인 계약과 천명 결속은 서로 다른 법률에 속합니다.
황후 예정자 지위도 황실 인사법의 적용을 받고요.”
이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결속을 거부해도 혼인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뜻입니까?”
“황제 폐하나 성녀님이 약혼을 별도로 해소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엘리시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결속과 결혼은 같은 날, 같은 예복을 입고, 같은 서약 아래 진행됐다.
대신전은 신성력을 연결했고, 황실 법률관은 혼인 성립을 선포했다. 그
뒤 사람들은 엘리시아를 성녀가 아니라 황후로 불렀다.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세 개의 지위가 동시에 덧씌워졌던 것이다.
결속 상대.
황제의 배우자.
황후.
그중 어느 하나도 따로 선택할 기회는 없었다.
새벽회가 0번을 직접 닫을 수는 없었다.대신 왕이 가장 익숙하게 반응하는 인공 먹이를 길 위에 다시 켜 왕의 관심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첫 번째 고정점은 무인지대.두 번째는 폐광.세 번째는 주민이 빠진 아르벤 북쪽.사람을 보내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문제는 왕이 세 점을 하나씩 지우느라 다시 며칠씩 북부 관리권 안에 머물 가능성이었다.테사는 가짜 왕핵 반응을 분석하다가 이상한 것을 찾아냈다.“세 번째만 다릅니다.”아르벤 북쪽 고정점은 가짜 왕핵 특유의 방향성 없음이 아니라아주 미약한 실제 방향성을 섞고 있었다.중앙고원에서 사용했던 왕핵 파편과 같은 종류의 반응.새벽회는 또 실제 왕핵 조각을 넣었다.
북쪽.로스테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리가 흘렀지만 누구도 승리라고 선언하지 않았다.왕은 걸음을 두 번 옮긴 뒤 다시 멈췄고, 폐병원 쪽에 남은 중형 가짜 왕핵 반응을 한 차례 돌아봤다.테사가 그 지점을 확인했다.원격 정지는 불가능했다.사람을 보내면 왕 이동선과 겹친다.하겐이 입술을 굳혔다.“저거 하나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있겠군.”엘리시아가 물었다.“그 가짜 왕핵이 주민을 위협합니까?”“현재는 아닙니다. 폐구역 안입니다.”“그럼 놔두죠.”“왕이 갈 수도 있습니다.”
0번 차단문을 여는 작업은 사람을 북쪽 검은 원 안까지 보낼 필요가 없었다.지맥 수압을 조절하는 구형 수문이 훨씬 남쪽에 있었고,로스테 시설팀은 황실에서 받은 옛 도면과 마르텐의 회수지도를 겹쳐 외부 조절구 두 곳을 찾아냈다. 문제는 하나가 회각충 활동구역과 가까웠다는 점이었다.하겐은 경비대가 벌레를 전부 죽이고 들어가는 방식 대신,회각충이 왕핵 소거 부산물이 없는 길을 오래 따라오지 않는 특성을 이용했다.조절구까지 가는 작업자 장비에서 왕핵 관련 물품을 전부 빼고,철제 대신 목재와 일반 합금을 사용했으며,길 주변에 남은 왕핵 잔류도 원격 세척으로 최대한 낮췄다.현장 인원은 시설기사 넷과 경비병 넷.엘리시아는 행정동에서 오염과 철수기준만 관리했다.하겐은 군사선.
0번 개방안은 평의회에 바로 올라갔지만, 표결 전에 반대의견이 먼저 쏟아졌다.가장 큰 문제는 북쪽 검은 원 안에 있는 대형 백각종들이었다.귀환회랑을 열 경우 흰 뿔의 왕이 북쪽으로 들어가는 대신,동면 중인 다른 성체들이 남쪽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자연 지맥통로라는 사실은 양방향이라는 뜻이기도 했다.테사는 그 위험을 숨기지 않았다.현재 북쪽 개체들은 동면 상태에 가깝고 0번 안쪽 지맥 반응도 낮기 때문에당장 남하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차단문이 열리면 환경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두 번째 문제는 흰 뿔의 왕이 아예 가지 않을 가능성이었다.가짜 왕핵과 오래된 왕핵 잔류가 계속 남아 있으면 열린 길보다 먹이가 강한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세 번째는 새벽회였다.0번의 존재를 그들이 모르고
왕을 죽이는 것과 가두는 것 사이에 처음으로 세 번째 전술적 선택이 생겼다.신이 보장해준 길도 아니고, 성공이 확정된 기적도 아니었다.사람이 만들어놓은 장애물을 걷어내고, 그 뒤의 결과를 감당하는 선택이었다.0번 귀환회랑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는 일은 황실 기록과 로스테 자료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북쪽 산맥 안쪽은 지도 자체가 오래됐고,사람이 직접 들어가 확인하는 데 며칠이 걸릴 수 있었다.압축된 시간 안에서 가장 먼저 쓸 수 있는 것은 백각종의 이동 흔적이었다.테사는 13번 역할이 풀린 뒤 흩어진 백각수 유생 가운데 북쪽으로 향한개체들의 경로를 다시 불러왔다. 대부분은 흰 뿔의 왕과 가짜 왕핵 주변을 맴돌았지만,네 마리만 다른 길을 골랐다. 그들은 먹이점이나 수확기 쪽으로 가지 않고북동쪽 능선을 넘은 뒤, 0번 지도와 겹치는 지맥 홈을 따라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0번 지도 끝에서 잡힌 여러 백각 대형종 반응이 처음부터 ‘또 다른 왕들’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테사는 새벽까지 세 차례나 생체값을 비교한 뒤, 현재 로스테 서쪽에서 움직이는 흰 뿔의 왕과 북쪽 검은 원 안의 반응들이 겉보기에는 비슷해도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고했다. 로스테의 왕은 지맥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 왕핵 잔류를 크게 흔들었고, 뿔과 체내에서 소거 작용이 동시에 나타났지만, 검은 원 안의 생체들은 왕핵 잔류를 지우는 반응이 거의 없었다. 몸집은 일반 백각수보다 훨씬 컸고 성체임은 분명했지만, 왕이라 부를 만한 소거 중심체가 아니라 장기간 동면에 가까운 상태로 머물러 있는 대형 백각종 무리에 가까웠다.엘리시아는 테사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뒤 지도에 붙어 있던 임시 명칭부터 수정하게 했다. “다른 왕이라고 쓰지 마세요. 지금 확인된 건 대형 백각종 세 마리 이상, 그리고 현재 활동 없음 정도죠?”“예. 개체 수는 더 있을 수도 있지만 깊이가 너무 멀어서 정확하지 않습니다.”“그럼 그것만 남기죠.”하겐은 0번과 로스테 사이의 거리를 재며 물었다. “마르텐 메모대로라면 지금 왕을 저쪽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뜻인가?”테사는 그 질문에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0번이 길인지 시설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 지도에서 검은 원 안쪽은 산맥과 지맥단층이 겹쳐서 일반 사람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7번 전용지도에는 로스테에서 북부 관측지, 중앙고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0번까지 하나의 선이 이어져 있습니다. 회수선과 반대방향입니다.”“7번은 가져오기 위한 것, 0은 돌려보내기 위한 것.”베른하르트가 마르텐의 메모를 읽었다.그 문장만 보면 역할은 단순했다. 백각종을 관측지로 데려오는 회수선이 7번이라면, 관측이 끝난 개체를 다시 북부 깊은 곳으로 보내는 길이 0번이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팔십 년 동안 그 복귀선이 실제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오스카가 백각 관측사업 초기 문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