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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장 나다운 숨을 담아 적은 이름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7-12 17:31:55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대신전은 성녀님의 현재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결속을 앞둔 시기에 신성력 불안이나 외부 간섭으로 판단이 흐려지는 사례가 있습니다.”

“저를 검사하겠다는 말입니까?”

“간단한 성흔 검사와 정신 안정 의식이면 됩니다.”

이레나가 벽 쪽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푸른 망토 끝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엘리시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이레나, 그대로 계세요.”

“예, 엘리시아 님.”

그레고르는 이레나를 한 번 본 뒤 다시 엘리시아를 향했다.

“거부 의사가 성녀님의 진정한 뜻임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결속에 동의할 때도 같은 검사를 합니까?”

“그 경우에는 성녀님의 의무와 기존 서명이 있으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그레고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잉크가 마르기 전에 곧장 이름을 적었다. 

잿빛 금발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고, 마지막 획이 종이 위에 단단히 눌렸다.

전생에는 수없이 남겼던 이름이었다.

성흔 검사 동의서, 결속 준비 확인서, 

황후 교육 일정, 처형 직전의 최후 진술서. 

그중 어떤 서명도 지금처럼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적은 적은 없었다.

엘리시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검사는 거부합니다.”

그레고르의 입가가 굳었다.

“그렇다면 대신전은 이 서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확인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전 확인이 없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셨다는 사실까지 함께 기록하겠습니다.”

엘리시아가 황실 법률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 대화는 전부 속기되고 있습니까?”

황실 법률관은 벽 쪽 책상에 앉은 서기 두 명을 확인했다.

“예. 공개 기록으로 분류될 예정입니다.”

“그럼 대신전이 성녀의 거부 의사를 정신 이상 가능성으로 간주했고, 

동의할 때에는 요구하지 않는 검사를 거부할 때에만 요구했다는 점도 빠뜨리지 마세요.”

서기들의 펜이 종이 위를 달렸다.

그레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님, 공개 기록은 한번 남으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개로 제출하는 겁니다.”

“황제 폐하와 상의하지 않으신 결정 아닙니까?”

엘리시아는 문서 모서리를 정리했다.

“제 몸과 제 직위에 관한 거부를 말씀드리기 위해 폐하의 허락이 필요한가요?”

“허락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결속은 두 사람의 문제이니 최소한 사전 협의가”

“결속을 진행할 때는 제 사전 협의가 필요하지 않았는데, 거부할 때만 필요하군요.”

그레고르의 손이 법령집 표지 위에서 멎었다.

엘리시아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저는 오늘 오전 열한 시, 황궁 공개 법무청에서 이 문서를 정식으로 접수하겠습니다. 

대신전에서 확인하지 않겠다면 그 자리에서 거부 사유를 밝히세요.”

“고위 성직자의 참석이 필요합니다.”

“대신관께 전달해주십시오.”

그레고르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테오도르 베르단이 직접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성녀의 갑작스러운 거부에 무게를 실어주는 모양새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전은 대개 가장 낮은 목소리로 가장 큰 결정을 밀어붙였다. 

누가 명령했는지 보이지 않게 만들고, 이미 정해진 절차처럼 사람을 움직였다.

엘리시아는 그 방식을 알고 있었다.

‘한 번 죽고 난 뒤에야.’

그레고르가 법령집을 챙겼다.

“대신전의 입장은 공개 법무청에서 밝히겠습니다.”

“그러세요.”

그가 문을 나간 뒤에도 방 안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스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녀님, 거부서에 신체·거주·직위상의 권한 이전까지 포함하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결속식 뒤 제 거처가 황궁 본전으로 옮겨지고, 

경호대와 서신이 황실과 대신전의 공동 관리에 들어가더군요.”

“전례에 따른 조치입니다.”

“전례가 제 의사를 대신하지는 않아요.”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결속을 거부해도 약혼과 황후 예정 지위는 별도로 남을 수 있습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그에게 멈췄다.

“별도라고요?”

“법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어제 받은 문서에는 모두 하나의 절차처럼 묶여 있었습니다.”

“실무상 함께 진행해왔을 뿐, 혼인 계약과 천명 결속은 서로 다른 법률에 속합니다. 

황후 예정자 지위도 황실 인사법의 적용을 받고요.”

이레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면 결속을 거부해도 혼인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다는 뜻입니까?”

“황제 폐하나 성녀님이 약혼을 별도로 해소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엘리시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 결속과 결혼은 같은 날, 같은 예복을 입고, 같은 서약 아래 진행됐다. 

대신전은 신성력을 연결했고, 황실 법률관은 혼인 성립을 선포했다. 그

 뒤 사람들은 엘리시아를 성녀가 아니라 황후로 불렀다.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세 개의 지위가 동시에 덧씌워졌던 것이다.

결속 상대.

황제의 배우자.

황후.

그중 어느 하나도 따로 선택할 기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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