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오른손.불규칙한 압력.필체는 게르하르트와 달랐다.마르셀 기록과도 달랐다.레나르트의 현재 필체와 비교하려면 그의 별도 동의가 필요했다.엘리시아가 원격으로 말했다.“지금 비교 요청은 하지 마세요.”“왜죠?”“그 사람이 썼다는 근거가 아직 없으니까요.”레나르트가 그 방을 발견한 것은 칠 년 전.글은 그 전부터 있었을 수 있다.필체 비교부터 들어가면 그가 자연스럽게 중심 용의자가 된다.증거가 그 방향을 가리킬 때 해도 늦지 않았다.시설 기술자가 무너진 돌 하나를 조심스럽게 치웠다.문장의 나머지가 드러났다.‘갑주를 벗으면 표본이 식는다.’‘표본이 식으면 왕의 맛이 사라진다.’그 아래.‘그러므로 이동 중에는 벗지 않는다.’흑갑이 단지 신분을 숨기는 갑옷이 아니었다.성녀 표본과 왕핵 잔류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운반장치일 가능성이 커졌다.테사가 말했다.“갑주의 체온 보존 구조가 설명됩니다.”레나르트가 갑옷을 벗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알려진 내부 고정대.갈비뼈를 지지하는 구조는 후대에 개조됐을 수 있다.하지만 안쪽에 열을 오래 유지하는 금속층이 처음부터 있었다.사람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갑옷에 먹인 잔류를 차갑게 식히지 않으려는 목적일 수도 있었다.“누가 성녀 표본을 직접 들고 이동한 게 아니라.”오스카가 중얼거렸다.“사람이 갑옷을 입고 표본의 흔적이 된 겁니까?”엘리시아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가능성.”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아직은요.”그 순간 관측기 끝에서 작은 반응이 나타났다.지하방 바닥 아래.왕핵 잔류.아주 약했다.테사가 위치를 옮겼다.한 점.두 점.세 점.사람이 누웠던 검은 자국을 중심으로 원처럼 퍼져 있었다.그리고 그 원 중앙에서만 다른 것이 잡혔다.신성력.현재 엘리시아와는 다르다.아델라이드와도 완전히 같지 않다.“누구 겁니까?”법무관이 물었다.테사는 기존 자료를 대조했다.아델라이드.불일치.엘리시아.부분 유사.다른 후보 인증판 열일곱
레나르트가 자기 목 쪽을 만지려다 손을 내렸다.“오늘 성녀 묘역 사진을 보고 기억났습니다.”“무엇이요?”“병 밑바닥.”서쪽 보관함 안 빈 받침대.두 병이 들어갔던 자리.당시 표본병은 일반 혈액병과 달리 밑면에 후보 번호를 새겼다.“번호를 봤습니까?”“17이었던 것 같습니다.”“확실합니까?”“아닙니다.”그는 그 말을 먼저 붙였다.“7은 확실합니다. 앞 숫자는 1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병은 어떻게 했습니까?”“두고 왔습니다.”“두 달 뒤 다시 갔을 때는?”“시신과 같이 없어졌습니다.”엘리시아에게 이 진술을 전달할지 묻자 레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전달하십시오.”“직접 말하지 않겠습니까?”“제가 빠뜨린 이야기입니다.”그의 얼굴이 굳었다.“성녀님이 제 얼굴을 보면서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법무관은 그 판단을 대신 따르지 않았다.“그건 성녀님이 결정할 일입니다.”레나르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맞군요.”“직접 들을지 기록으로 받을지 선택하게 하겠습니다.”엘리시아는 기록으로 받는 쪽을 택했다.레나르트를 다시 불러 세워 같은 말을 반복시키지 않았다.“위치가 옛 기사 주둔지였죠.”“예.”오스카가 지도를 펼쳤다.칠 년 전 레나르트가 시신을 발견한 지하방.현재 조사 중인 갑주 창고와는 다른 위치였다.건물 서쪽 아래.지난번에는 천장 붕괴 위험 때문에 들어가지 않은 구간.하겐이 말했다.“내일 가보겠습니다.”엘리시아가 그를 봤다.“하겐 경이 꼭 가야 합니까?”하겐이 입을 다물었다.최근 며칠 동안 익숙해진 질문이었다.그는 지도와 인원표를 확인했다.“아닙니다.”“그럼?”“테사랑 시설팀이 먼저 구조 확인하면 됩니다.”“경비는요?”“외곽만.”하겐은 자신이 빠지는 것을 무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내일 북벽 보조선 조정이 있습니다. 난 그쪽에 있는 게 낫습니다.”“좋습니다.”결정은 빨랐다.옛 기사 주둔지 서쪽 지하방.구조 확인 우선.시신 흔적이 있다면 법의관 호출.표본병 발
황실 혼인국.대신전 성녀관리관.결속 예정자 측 책임자.상황마다 보호책임자가 달라졌다.결국 성녀가 살아 있어도 다른 사람이 대신 동의할 길이 있었다.엘리시아는 입술을 다물었다.같은 문장을 너무 여러 번 보고 있었다.거부하지 않았으니 동의.과거에 한 번 서명했으니 현재도 동의.보호자가 동의했으니 본인도 동의.죽었으니 더 이상 동의가 필요 없음.장치는 사람의 현재 의사를 피할 길을 언제나 하나씩 마련해두었다.“폐하께서는 저 규정을 알고 계셨습니까?”엘리시아가 통신판을 바라봤다.칼릭스는 오늘도 같은 높이에 있었다.“일부만 알고 있었습니다.”“어느 부분요?”“국가위기 시 성녀 표본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당사자가 거부해도 가능한 부분은?”“확인하지 못했습니다.”“폐하 재위 중 사용된 적 있습니까?”짧은 침묵.“확인 중입니다.”“모르시는군요.”“예.”엘리시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확인되면 제게 먼저 말씀하지 마세요.”칼릭스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어디에 먼저?”“법무청 기록에 먼저 올리세요.”“알겠습니다.”“그 뒤 제가 봅니다.”그녀는 칼릭스의 죄책감을 직접 전달받는 자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사실은 공적 기록을 먼저 거쳐야 했다.칼릭스가 자신의 기억이나 감정으로 그 사이를 채우지 않게.그도 받아들였다.“그렇게 하겠습니다.”“그리고 폐하.”“예.”“오늘 의료기록은 받았습니다.”칼릭스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아침에 미리 전송된 기록.오른손 감각 변화 없음.왕핵 사용 없음.휴식 첫 회 완료.그녀가 묻기 전 보내온 자료였다.“두 번째 휴식은?”“회의 뒤 삼십 분.”“그럼 회의가 늘어나면?”“제가 끝냅니다.”엘리시아는 더 묻지 않았다.그날 저녁 로스테 평의회는 ‘성녀 묘역’에 관한 임시 관리안을 표결했다.어느 기관의 소유권도 인정하지 않는다.현재는 증거보존 시설로만 취급.사람의 유해가 확인되면 묘역법 적용.표본은 별도 증거로 취급하되 사용 금지.원본 외
흑갑 기사들이 성녀 표본을 운반했다.왕핵 정제분을 갑옷에 발랐다.북부 길에도 같은 정제분과 성녀 잔류가 섞여 있다.한 번 더 선이 이어졌다.그런데 이번에는 레나르트가 먼저 요청했다.“저 시료를 볼 수 있습니까?”로스테 법무관이 물었다.“이유는요?”“저런 혼합물을 본 적 있습니다.”“어디서?”레나르트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갑주 7번을 처음 발견한 지하방에서.”회의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왜 지금 말합니까?”하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레나르트가 불편한 듯 턱을 눌렀다.“그땐 그냥 기름때인 줄 알았습니다.”“지금은?”“냄새를 기억합니다.”“냄새?”“동물성 기름과 오래된 철.”하겐이 코웃음을 치려 했지만 레나르트는 말을 이었다.“그리고 약간 단 냄새가 났습니다.”대신전 감정인이 얼굴을 들었다.“성유 보존제일 수 있습니다.”“무슨 보존제?”“옛 신성 표본을 금속에 고정할 때 쓰던 수지입니다.”엘리시아의 표정이 굳었다.“현재도 씁니까?”“아닙니다.”“언제 폐기됐습니까?”“대략 이십 년 전.”“왜요?”감정인이 잠시 망설였다.“표본과 금속을 분리하기 어려워집니다.”“그게 문제였습니까?”“더 큰 문제는 장비가 표본 잔류를 계속 가진다는 점이었습니다.”성녀의 피를 바른 검.성녀의 파장이 밴 갑옷.한 번 처리하면 씻어도 완전히 빠지지 않는다.“사람이 바뀌어도?”엘리시아가 물었다.“장비에는 남습니다.”답이 떨어지는 순간 모두가 갑주 7번을 떠올렸다.착용자는 바뀐다.걸음걸이도 통일된다.검증권도 이어진다.그리고 갑옷 자체에는 죽은 성녀의 파장까지 남길 수 있다.사람보다 오래 살아남는 역할.그 역할에 왕핵과 성녀의 흔적을 함께 먹였다.오후 공개 심리에서 가장 먼저 다툰 것은 ‘성녀 표본’의 소유권이었다.대신전 본부는 아델라이드 보관함과 옛 성녀 표본에 대해 종교유산 관리권을 주장했다.황실 옛 의무국 기록에는 국가재난 대응용 보존물로 적혀 있었다.성녀선발원 옛 규정에는 후보 연구자료.
“일부는요.”엘리시아는 바로 승인하지 않았다.“사람이 들어가야 합니까?”“예.”“흰 뿔의 왕 관측 반경과 겹치는 곳은?”“다섯 곳.”“그 다섯 곳은 미룹니다.”하겐이 즉시 반응했다.“성녀님.”“네.”“그쪽이 제일 중요한 지점일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더 미룹니다.”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낮고 정확해졌다.“중요한 증거가 있는 곳이라고 사람을 먼저 넣지 않습니다.”하겐은 반박하려다가 멈췄다.지난 회차에 자신이 한 말과 같은 원칙이었다.증거보다 사람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그럼 나머지 열두 곳?”“주민 동선과 겹치지 않는 곳부터 두 군데만.”“두 군데로 충분합니까?”“첫 비교에는요.”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두 지점에서 층위가 다르면 조사 범위를 다시 정할 수 있습니다.”작게 시작한다.정보가 부족하다고 사람과 장비를 한꺼번에 북쪽으로 밀어넣지 않는다.첫 표본 채취는 다음 날 오전으로 정해졌다.아침 첫 번째 현장은 옛 왕실 관측소였다.지금은 무너진 돌탑의 기초만 남은 곳이었다.마을에서 한 시각 이상 떨어져 있었고, 최근 사람의 출입 흔적도 거의 없었다.현장팀은 다섯 명.테사.시설 기술자 둘.법무관 보조 한 명.경비병 한 명.하겐은 가지 않았다.엘리시아도 마찬가지였다.돌탑 기초의 동쪽 벽에서 희미한 왕핵 잔류가 잡혔다.표면만 보면 오래된 것이었다.테사는 석분을 크게 떼지 않았다.바늘 끝보다 작은 조각 세 개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채취했다.첫 번째 층.팔십 년 안팎.두 번째.약 삼십 년 전.세 번째.십 년에서 십이 년 전.같은 돌에 세 번 이상 다른 시기의 잔류가 덧입혀져 있었다.“아델라이드 생전 흔적만은 아닙니다.”테사의 보고가 로스테로 들어왔다.엘리시아가 물었다.“신성력 층도 같습니까?”“첫 번째에는 강합니다.”“두 번째?”“약합니다.”“세 번째는?”테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다시 강합니다.”팔십 년 전.아델라이드가 생존해 있던 시기.강한 신성력.삼십 년 전
성녀 묘역의 서쪽 보관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다시 봉인됐다.열려 있던 제17호 함은 닫았지만 원래 봉인을 복원하지 않았다. 누군가 새 봉인을 만들어 ‘처음부터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돌려놓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신 로스테 법무관, 대신전 감정인, 주민 관찰인이 각자 다른 색의 임시 봉인 세 개를 걸었다.함 안의 인증판과 문서는 꺼내지 않았다.아델라이드의 보관함도 열지 않았다.죽은 성녀들의 표본이 실제로 무엇인지, 사람의 유해가 섞여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증거 확보’라는 이유로 전부 들고 나올 수는 없었다.현장팀이 철수한 뒤에도 묘역 외곽에는 로스테 경비병 네 명이 남았다.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묘역 입구에서 접근자만 기록했다.그리고 그날 밤부터 묘역으로 향하는 기존 산길은 주민 통행이 금지됐다.하겐은 통행금지 범위를 넓히자는 제안을 거절했다.“벌목길까지 닫으면 서쪽 마을이 사흘은 돌아갑니다.”한 평의원이 물었다.“흰 뿔의 왕이 움직일 수도 있는데?”“지금 확인된 건 묘역에서 북쪽으로 신호가 나갔다는 겁니다.”하겐은 지도 위에 손가락을 댔다.“마물이 왔다는 게 아닙니다.”“미리 막는 게 안전하지 않나?”“안전하다고 다 막기 시작하면 도시 밖으로 나갈 길이 없어집니다.”대신 묘역 주변 한 시각 거리의 산길에는 표식을 세웠다.‘왕핵·신성 잔류 조사 중.’‘경비선 안 진입 금지.’‘우회로 사용.’‘금지 기간 삼 일, 이후 재검토.’영구 봉쇄가 아니었다.사흘 뒤 다시 열지, 더 막을지 표결한다.엘리시아는 그 결정을 새 사무실에서 보고받았다.책상 위에는 성녀 묘역 현장기록이 여전히 펼쳐져 있었다.서쪽 열.아델라이드.여러 죽은 성녀의 이름.비어 있는 제17호 혈액 자리.그리고 북부 곳곳에서 동시에 반응한 왕핵 잔류점.오스카가 지도에 금빛 표시를 옮겼다.“열일곱 곳입니다.”“확실합니까?”“처음 잡힌 건 열둘이었는데, 야간 관측 자료를 다시 보니 다섯 곳이 더 있었습니다.”“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