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죽인 황제가 함께 회귀했다: Chapter 21 - Chapter 30

91 Chapters

떠나는 데 드는 값

약혼 협의회가 끝난 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에버하르트의 곡물 마차 스물세 대가 황실 창고 앞에서 멈췄다.“출입 허가가 취소됐습니다.”하렌이 내민 공문에는 황후궁의 붉은 봉인이 찍혀 있었다.북부와의 혼인 및 무역 협상이 황실의 군량 체계에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에버하르트가의 창고 이용권을 재심사한다.오늘 저녁 빈민 구호소로 보내야 할 곡물이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면 천막을 씌운 마차에서도 이틀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엘로이즈는 공문 아래의 발행 시각을 확인했다.약혼 협의회가 시작되기 삼십 분 전.베아트리체는 로웬이 나타나기도 전에 보복을 준비해 두었다.“마차를 돌릴까요?”“아니요. 여기서 기다리세요.”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카시안이 황태자궁 기사들과 함께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황실 창고 이용권을 즉시 복구하는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이것을 제출하면 문이 열린다.”엘로이즈는 문서를 받지 않았다.“전하께서 열어 주신 문은 전하의 다음 명령으로 다시 닫힐 수 있습니다.”“지금은 곡물을 살리는 일이 먼저다.”“그래서 다른 문을 찾겠습니다.”카시안의 시선이 빗방울이 맺힌 마차들을 훑었다.“저녁 배급까지 시간이 많지 않아.”“알고 있습니다.”“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다.”엘로이즈의 눈빛이 차갑게 굳자 카시안이 말을 멈췄다.전생에도 그는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했다.시간이 없으니.위험하니.자신이 해결하는 편이 빠르니.그리고 모든 결정권을 가져갔다.카시안은 손에 든 복구 명령서를 천천히 내렸다. 허공을 맴돌던 커다란 손이 갈 곳을 잃고 힘없이 떨어졌다.“미안하다. 또 네 선택보다 내 해결책을 먼저 내밀었군.”엘로이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복구 명령서가 아니라 정지 공문의 원본을 주십시오.”“무엇을 확인하려고?”“황후궁이 막을 수 있는 범위를요.”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 기사에게서 원본을 받아 그녀에게 건넸다.엘로이즈는 공문의 문구를 다시 읽었다.정지된 것은 에버하르트의 곡물 운송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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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지 않은 물

카시안이 남운하 창고에 도착했을 때, 엘로이즈는 곡물 자루를 다시 내리고 있었다.밤새 옮겨 놓은 자루들이 바닥이 아니라 새로 짠 목재 받침 위에 올라갔다. 인부들은 벽 아래 배수구를 넓히고, 창문 틈에는 마른 석회와 천을 채웠다.단순히 비를 피하려는 작업이 아니었다.물을 견디기 위한 준비였다.“아래쪽 두 줄은 전부 비우세요.”엘로이즈가 창고 안쪽의 돌계단을 가리켰다.“곡물은 세 번째 계단보다 위에 쌓습니다.”하렌이 장부에서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높이면 보관량이 삼 할은 줄어듭니다.”“그래도 올리세요.”“이 정도 비로 운하가 넘치지는 않을 텐데요.”엘로이즈의 시선이 계단 세 번째 칸에 멎었다.“넘칠 수도 있으니까요.”카시안의 걸음이 멈췄다.전생의 남운하 범람은 지금으로부터 넉 달 뒤였다.사흘간 이어진 폭우로 제방이 무너졌고, 상업 지구의 창고 대부분이 잠겼다. 물은 정확히 저 계단의 세 번째 칸까지 차올랐다.그때 곡물을 살린 곳도 이 세 창고뿐이었다.엘로이즈는 범람 이후 이곳을 구호 거점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현재의 그녀가 그 수위를 알 방법은 없었다.“전하께서는 왜 오셨습니까?”엘로이즈가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카시안은 계단에서 시선을 거뒀다.“황후궁이 정오에 창고 검사를 보낸다.”인부들의 손이 잠시 멎었다.“검사 사유는요?”“식량 보관 기준 위반과 무허가 구호 물자 유통.”“예상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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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을 사람

정오가 되자 남운하 창고 앞에는 검사관보다 구호소 사람들이 먼저 도착했다.노인과 아이들이 배급표를 쥔 채 줄을 섰다. 상업조합 검사관 두 명과 구호소 의사들도 창고 앞의 긴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카시안은 기사들을 뒤로 물린 채 가장 바깥에 섰다.엘로이즈가 만든 자리였다.황후의 권력과 싸우기 위해 황태자의 권력을 빌리지 않는 자리.붉은 휘장을 단 검사관이 마차에서 내렸다.“황후 폐하의 명에 따라 창고를 폐쇄하고 곡물을 압류하겠습니다.”엘로이즈가 곧바로 물었다.“검사는 하지 않습니까?”“보관 기준 위반 가능성이 확인됐습니다.”“가능성만으로 저 사람들의 식량을 가져가시겠다는 뜻이군요.”검사관의 시선이 배급 줄로 향했다. 굶주린 얼굴들이 한꺼번에 그를 바라봤다.그는 헛기침하며 서류를 펼쳤다.“바닥 습기, 환기 불량, 배수 시설 미비를 확인하겠습니다.”검사가 시작됐다.목재 받침 아래에는 마른 석회가 깔려 있었다. 창문은 양쪽으로 열려 있었고, 넓힌 배수구에는 물이 막힘없이 흘렀다. 무작위로 연 곡물 자루에서도 곰팡이나 벌레는 나오지 않았다.상업조합 검사관이 판정서에 적었다.보관 적합.황후궁 검사관의 얼굴이 굳었다.“임시 시설은 언제든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압류한 뒤 재심사하겠습니다.”엘로이즈가 손을 내밀었다.“압류 명령서를 공개해 주십시오.”“황후궁 문서입니다.”“공개된 검사 결과를 뒤집는 근거라면 당사자들이 확인해야 합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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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없는 수위

황실 기록원의 마지막 등불이 꺼질 무렵, 데미안이 수위 장부를 덮었다.“남운하가 건설된 이후 칠십삼 년간의 기록입니다.”탁자 위에는 토목 보고서와 강우량 장부, 제방 보수 내역이 연도별로 쌓여 있었다.“가장 높은 수위는 이십일 년 전입니다. 구 방직 창고의 두 번째 계단 중간까지 차올랐습니다.”세 번째 계단에는 닿지 않았다.카시안은 마지막 장부까지 직접 확인했다.엘로이즈가 그은 분필선을 설명할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예측 보고서는?”“토목국에는 없습니다. 다만 폐기 문서 목록에서 이상한 번호를 찾았습니다.”데미안이 낡은 철제 함을 내밀었다. 황제와 황태자의 인장을 동시에 사용해야 열리는 봉인함이었다.안에는 건국 초기의 남운하 모형 실험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북부 제4수문의 평형 사슬이 폭우 중 끊어질 경우.수위 예상선은 구 방직 창고의 세 번째 계단.분필선과 정확히 같은 높이였다.카시안의 손이 보고서 위에서 멎었다.전생의 범람도 제4수문에서 시작됐다. 사흘째 밤, 녹슨 평형 사슬이 끊어지며 닫힌 수문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그러나 이 보고서는 실무 부서에도 배포되지 않았다.열람 기록에는 선대 황제와 당시 토목대신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에버하르트가에서 이 문서에 접근한 흔적은?”“없습니다.”“사본은?”“세 부뿐입니다. 한 부는 화재로 소실됐고, 한 부는 대신전 토목고로 이관됐습니다. 나머지가 이것입니다.”대신전.카시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엘로이즈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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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보다 먼저 준비된 구호

가짜 사슬이 제4수문에 들어온 경로는 정식 납품 장부가 아니라 남운하의 통행세 기록에서 발견됐다.사슬을 실은 마차는 토목국 표식을 달고 있었지만 통행료를 내지 않았다.면제 사유는 신전 구호 물자 운송.도착지는 강 하류의 석조 창고였다.카시안과 엘로이즈가 창고에 들어간 것은 교체 작업이 끝난 뒤였다. 황실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구호 시설이라 감사 권한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기사들은 바깥 골목에만 남겨 두었다.아직 대신전이 사슬의 파손을 알아서는 안 됐다.“구호 창고라기에는 경비가 없군요.”엘로이즈가 낮게 말했다.“보여서는 안 되는 물건은 사람보다 자물쇠로 지키는 편이 조용하니까.”카시안은 봉인을 자르지 않고 잠금쇠만 풀었다. 문을 다시 닫으면 침입 흔적은 남지 않을 것이다.창고 안에는 침상과 담요, 말린 약초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모두 새것이었다.이상한 것은 수량이었다.“삼백 명분입니다.”엘로이즈가 물자표를 확인했다.“수도에서 이 정도 규모의 재난이 예상된다는 발표는 없었습니다.”카시안은 가장 안쪽 벽에 걸린 지도를 발견했다.남운하 일대가 푸른 잉크로 칠해져 있었다. 침수 구역과 대피 경로, 임시 구호소의 위치까지 표시된 지도였다.푸른 선은 구 방직 창고의 세 번째 계단 높이에서 멈췄다.봉인 보고서의 예상 수위와 같았다.하지만 지도 한쪽에는 토목 표식이 아닌 작은 은빛 별이 찍혀 있었다.별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일흔넷.여든하나.여든일곱.엘로이즈의 손이 멎었다.구출한 아이의 목에 걸려 있던 은패와 같은 숫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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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도 순서가 있다

카시안은 문을 막지 않았다.대신 지도와 장부 앞에 서서 세라피나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철문이 열리자 흰 예복 자락이 어두운 창고 바닥을 스쳤다. 성녀의 뒤에는 구호회 사제 둘과 황태자궁 기사들이 서 있었다.“감사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기사가 굳은 얼굴로 보고했다.“알아요.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왔습니다.”세라피나는 부드럽게 답한 뒤 손짓으로 수행원들을 물렸다.“안에서는 전하와 이야기하겠습니다.”문이 닫혔다.세라피나의 시선이 카시안을 지나 엘로이즈에게 닿았다.“에버하르트 영애까지 계실 줄은 몰랐군요.”“저도 성녀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제 이름으로 운영되는 창고니까요.”세라피나는 흐트러진 물건부터 살폈다. 지도도, 장부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오히려 발견되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평온했다.카시안이 물었다.“아직 예고되지 않은 홍수에 대비해 삼백 명분의 물자를 준비했더군.”“계시를 받았습니다.”“어떤 계시지?”“남운하에 큰물이 들고, 많은 아이가 가족을 잃는다는 계시요.”엘로이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재난을 계획한 자들이 그것을 신의 계시라고 발표한다면, 홍수 뒤의 혼란까지 모두 신전의 권위가 된다.“이 숫자들은 무엇입니까?”엘로이즈가 지도 위의 은빛 별을 가리켰다.일흔넷.여든하나.여든일곱.세라피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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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로 끝낼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이라니, 무슨 뜻입니까?”엘로이즈가 물었다.세라피나는 지도 위의 숫자 ‘87’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공명 수치가 여든다섯을 넘는 아이는 결계의 문이 될 수 있어요.”“제물이 아니라 문이라고 부르면 달라집니까?”“그 아이는 죽지 않습니다.”세라피나의 대답은 흔들리지 않았다.“성녀가 대부분의 부담을 대신 짊어지고, 아이는 신력을 연결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 아이 하나만 확보하면 나머지 선별 명단은 폐기할 수 있어요.”한 아이로 수백 명을 살린다.듣기에는 자비로운 거래였다.“대가는요?”세라피나의 손끝이 멈췄다.“대신전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신력의 흐름을 유지하는 동안 감각과 기억 일부가 손상될 가능성도 있어요.”“죽지 않는다는 말만 하셨군요.”“살아 있습니다.”“살아남는 것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엘로이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갈라졌다.평생 신전의 벽 안에 갇힌 채 이름과 기억을 잃어 가는 삶. 죽음보다 길다는 이유로 자비가 되는 형벌이었다.세라피나는 엘로이즈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아이를 넘겨주세요.”카시안의 시선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그러면?”“다른 아이들을 선별 명단에서 지우겠습니다. 결계의 부담은 제가 감당할게요.”처음으로 세라피나의 말에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을 생각이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스스로 희생할 각오가 있다는 이유로, 타인의 희생까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그 아이는 물건이 아닙니다.”엘로이즈가 말했다.“제가 넘기거나 성녀께서 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아이가 이 선택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이해하지 못한다면 더욱 대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그 아이가 거부해서 수백 명이 죽더라도요?”세라피나의 질문이 창고 안을 갈랐다.엘로이즈가 대답하기 전, 카시안이 입을 열었다.“거부할 권리까지 지키는 것이 어른의 책임이다.”세라피나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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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밤종이 울리기 전에

세라피나가 떠나자 엘로이즈는 곧바로 장부를 덮었다.“여든일곱 번째 아이를 옮겨야 합니다.”카시안은 철문 밖으로 사라지는 흰 예복을 바라봤다.“어디로?”“황실과 대신전 양쪽의 보호 명단에 없는 곳으로요.”“언제까지?”엘로이즈의 대답은 지나치게 빨랐다.“두 번째 밤종이 울리기 전.”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멎었다.전생에서 대신전이 첫 번째 보호소를 습격한 시각도 두 번째 밤종 직후였다.구호회 마차가 흰 등불을 달고 도착했고, 보호 이송 명령서를 제시한 뒤 향 연기로 경비들을 재웠다. 카시안이 그 기록을 확인한 것은 엘로이즈가 죽고 열흘이 지나서였다.지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근거를 물어도 되나?”엘로이즈는 잠시 침묵했다.“출처 미공개입니다.”둘 사이에 정해진 규칙이었다.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필요한 것을 말해.”아이를 긴급히 빼돌린 곳은 에버하르트가가 장부에 남기지 않고 임차해 둔 옛 수도원 별관이었다.나머지 아이들은 서로 다른 구호소로 분산했고, 여든일곱 번째 아이만 별관 지하의 작은 방으로 옮겼다. 대신전이 기존 보호소를 찾아가더라도 빈 침상만 보게 될 터였다.엘로이즈는 도착하자마자 경비 배치를 바꿨다.정문에는 사람을 남기지 않았다.황실 기사 네 명은 평복으로 갈아입혀 골목 바깥에 세웠고, 에버하르트의 사람들은 지붕과 뒷문을 맡았다.“정문을 비우면 쉽게 들어올 겁니다.”데미안이 말했다.“들어오게 해야 합니다.”엘로이즈는 빈 치료실 침대 위에 이불을 사람 모양으로 부풀렸다.“하지만 아이를 두고 기다리지는 않습니다.”그녀는 미끼로 쓸 은패도, 아이의 옷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창틀과 문손잡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석회 가루를 얇게 발랐다.침입자의 손과 신발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향을 피우는 자가 나타나도 불부터 끄지 마세요.”엘로이즈가 젖은 천을 나눠 주었다.“창문을 열고 얼굴을 가립니다. 연기를 피해 밖으로 빠져나가면 골목의 매복조가 붙잡을 겁니다.”향 연기.카시안의 손끝이 차갑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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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밤의 증명

흰 등불을 단 마차가 별관 앞에 멈췄다.두 번째 밤종이 울렸다.사제 셋이 내렸다. 선두의 두 사람은 정문으로 향했고, 마지막 사제는 마차 문을 닫는 척 뒤편 어둠으로 사라졌다.정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긴급 보호 이송입니다.”선두의 사제가 아무도 없는 복도를 향해 낮게 말했다.대답은 없었다.두 사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방의 위치를 이미 아는 듯 곧장 빈 치료실로 향했다.창문 아래에 몸을 숨긴 엘로이즈가 손가락을 접었다.하나.두 번째 사제가 품에서 향로를 꺼냈다.둘.푸른 연기가 피어오르자 그들은 침대 위의 이불을 거칠게 걷어냈다.그 순간 지붕과 뒷문에서 에버하르트의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골목을 막고 있던 황실 기사들도 동시에 정문을 닫았다.“움직이지 마라!”사제 하나가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손바닥과 장화 밑창에 묻은 석회 가루가 어둠 속에서 희게 번졌다. 기다리던 매복조가 그 흔적을 따라 사제를 넘어뜨렸다.두 번째 사제는 향로를 바닥에 내던졌다.푸른 연기가 순식간에 복도를 삼켰다.“창문부터 여세요!”엘로이즈의 명령에 젖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양쪽 창을 열었다. 밤바람이 독한 연기를 바깥으로 밀어냈다.함정은 정확히 작동했다.그런데 카시안은 검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둘뿐이었다.마차에서 내린 사제는 셋이었다.바닥 아래에서 아주 작은 긁힘 소리가 났다.엘로이즈가 몸을 돌렸다.“지하 배수로.”그녀는 확인하지도 않고 아이가 숨은 방을 가리켰다.“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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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않기로 한 진실

붙잡힌 사제의 턱에는 가죽 고정구가 채워졌다.오른쪽 아래 어금니에서 꺼낸 독은 유리병 안에서도 검게 빛났다. 카시안은 그것을 보면서도 심문을 서두르지 않았다.“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계셨다는 사실도 기록합니까?”중립 공증관의 질문에 카시안이 답했다.“기록해라. 대신 아이의 이름과 위치는 지운다.”사제의 입가가 비틀렸다.“숨겨 봐야 소용없습니다. 여든일곱은 결국 문이 될 겁니다.”카시안은 검을 뽑지 않았다.“누구의 명령이지?”“에버하르트 영애의 명령입니다.”사제가 웃었다.데미안이 그의 소매 안쪽을 갈랐다. 천 사이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보호 대상 긴급 이송 명령서.수신인은 루미나르 대신전 구호회였고, 발신인은 엘로이즈 에버하르트였다. 문서 아래에는 에버하르트가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하지만 카시안은 곧바로 알아봤다.인장 가장자리의 작은 초승달 모양 흠집.베른이 빼돌린, 미리 인장이 찍힌 빈 명령서 가운데 하나였다.습격에 성공하면 아이는 엘로이즈의 명령으로 사라진다.실패하면 독을 깨문 사제의 품에서 이 문서가 발견된다.어느 쪽이든 그녀가 아이를 신전에 넘긴 사람이 된다.전생에도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진실보다 먼저 그녀의 이름이 증거 위에 올라갔고, 자신은 그 이름을 의심하는 쪽을 택했다.이토록 얄팍한 종이 한 장에 눈이 멀어, 가장 믿어야 했던 사람의 목을 쳤다.걷잡을 수 없는 자기혐오가 핏줄을 타고 번졌다.카시안은 종이를 내려다본 채 물었다.“누가 빈 문서를 건넸지?&rdq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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