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131 - Chapter 140

328 Chapters

131화. 첫 숙영

북쪽으로 움직인 수레바퀴는 해가 기울어서야 첫 역원 마당에서 멎었다.청수역은 낮은 담과 방 일곱 칸뿐인 작은 곳이었다. 역원을 맡은 역승은 황제의 호송패를 보자 마른 입술부터 핥았다. 죄수는 동쪽 끝방, 삭왕은 앞채, 회임한 왕비는 안채에 모시라는 궁의 배치문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역원 사람들은 죄수보다 삭왕비의 가마를 더 오래 보았다. 경성에서 황자를 사칭한 자를 품고 달아났다는 소문과, 삭왕비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이 한날 도착한 모양이었다. 물동이를 든 계집아이는 가마 발 아래 비친 비단신만 보고도 두 번이나 문턱에 발을 찧었다.진묵이 가마 문을 열었다. 온보요가 손을 내밀자 잡지 않고 안쪽으로 몸을 넣었다. 한 팔은 등 뒤로, 한 팔은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내려갈 수 있습니다.""땅이 젖었어."장화 한 켤레면 건널 진창이었다.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돌계단까지 그녀를 안고 갔다. 소월백의 죄수 수레가 바로 곁을 지날 때에도 보폭은 달라지지 않았다.진묵은 동쪽 끝방·앞채·안채라 적힌 나무패 셋을 상 위에 놓았다. 역승이 방문마다 거는 패였다. 하나를 집어 온보요에게 주는 대신 그녀 허리에 팔을 둘렀다."왕비의 처소는 안채이옵니다."역승이 조심스레 되풀이했다."내 여자는 내 방이다."말은 마당 끝 죄수 수레까지 닿았다. 창살 안에서 소월백이 눈을 들었다. 진묵은 보았으나 모른 척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온보요의 회색 망토를 제 손으로 여며 붉은 끈을 턱 아래 묶었다."왕야. 사람들이 봅니다.""보라고 한 말이지."소월백이 수레에서 내리며 포승 묶인 손을 들었다."유배 죄수가 왕비를 훔쳐 갈까 염려되십니까.""네가 도둑인지는 모르겠고."진묵의 손이 보요의 허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눈이 긴 것은 알지."역승은 남은 나무패 두 개를 도로 품에 넣었다. 웃자니 죄수의 낯이 너무 태연했고, 굳자니 삭왕의 낯이 더 무서웠다.안채 상에는 사가에서 가져온 국이 올랐다. 항아리 입구를 막았던 기름종이를 벗기자 무와 소고기 냄새가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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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등불 셋

야산의 첫 등불은 길었고, 둘째는 짧았으며, 셋째는 바람을 타듯 두 번 흔들렸다.온보요는 창호지에 손가락을 대었다. 길게 탄 불 하나, 짧게 꺼진 불 하나, 끝에서 두 번 흔들린 불. 남쪽 뱃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짐의 차례와 수를 알릴 때 쓰던 불말과 닮았다.불빛에는 기름 냄새가 없었으나 장서의 소매에는 들기름과 송진이 함께 묻어 있었다. 오래 타는 불과 빨리 죽는 불을 한 손에서 갈라 만드는 재료였다. 긴 불은 셋째 차례, 짧은 불은 둘째 차례, 마지막 두 번의 흔들림은 두 수레를 갈림길에서 떼라는 뜻이었다. 글을 남기지 않고도 어느 행렬을 칠지 전할 수 있었다.진묵이 뒤에서 회색 망토째 그녀를 감쌌다. 밤공기가 찬 것도 아니었다. 그의 턱이 머리 위에 걸리고, 손은 망토 아래 허리 앞에서 포개졌다."셋째는 죄수 수레입니다.""둘째는.""제 가마고요."말이 끝나자 그의 손가락이 한 번 굽었다. 온보요의 몸이 먹빛 옷자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문이 두 번 울렸다. 소월백이었다. 포승은 풀렸으나 문밖에 익위 둘이 붙었다."나도 봤어."그가 사석 말투로 말하다 진묵을 보고 눈썹을 들었다. 온보요가 망토에서 나오려 하자 진묵의 팔이 풀리지 않았다."그대로 말해.""불말은 사람 둘을 가리켜. 셋째 수레의 나, 둘째 가마의 아요. 갈림길에서 떼어 놓겠다는 뜻일 거야.""아요는 없다."진묵이 잘랐다.소월백의 시선이 온보요에게 잠깐 닿았다가 허리를 가린 먹빛 팔로 내려갔다."그럼 왕비마마.""그것도 길어. 내 부인이라 해."온보요가 마침내 그의 손등을 꼬집었다. 단단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월백의 입가가 아주 옅게 휘었다."삭왕 전하께서는 호칭까지 감시하십니까.""네 입에서 나오는 것은 좀."말은 거기서 끝났다. 진묵은 창을 열고 손가락으로 등불을 하나씩 가렸다. 야산의 불은 잠시 뒤 모두 꺼졌다.밤바람이 창으로 밀려들자 온보요가 짧게 숨을 삼켰다. 진묵은 창을 닫는 대신 그녀를 들어 제 앞 의자에 앉혔다. 등받이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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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한 말

소월백의 흰 말은 물을 탔지만, 진묵은 온보요를 그 말에 태울 생각이 없었다.석교 가운데는 두 장가량 무너져 있었다. 봄물이 돌기둥을 때릴 때마다 누런 포말이 튀었다. 수레는 건널 수 없고, 말도 한 필씩 낡은 나무다리를 돌아야 했다.소월백이 고삐를 당겨 흰 말을 낮췄다."내 말이 가장 얌전합니다. 아요를 먼저—"진묵이 가마 문을 열었다. 온보요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허리와 무릎 뒤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내 여인을 왜 네 말에 태우지.""다리를 건너자고 했지, 훔치겠다고는 안 했습니다.""내 눈에는 비슷해."진묵은 제 흑마에 올라 온보요를 안장 앞으로 올렸다. 먹빛 겉옷이 그녀의 회색 치맛자락을 양옆에서 덮었다.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다른 팔로 허리 전체를 감았다.말이 몸을 떨자 온보요의 등이 그의 가슴에 붙었다. 갑옷을 입지 않은 날인데도 단단했다. 고삐를 쥔 손의 핏줄과 목을 스치는 낮은 숨이 동시에 가까웠다. 다리 앞에서 겁먹은 말들이 투레질했으나 흑마는 주인의 무릎 한 번에 잠잠해졌다."왕야, 모두 보고 있습니다.""어제도 들었지."그가 관자놀이에 입술을 눌렀다. 짧았으나 감추지 않았다. 익위들은 강물만 보았고, 역졸들은 말발굽만 보았다. 소월백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진묵이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눈이 있으면 봐. 이쪽이다."온보요의 손이 고삐 위 그의 손등을 세게 눌렀다. 말이 출발하자 더는 떼어 낼 수도 없었다.나무다리는 물을 먹어 검게 번들거렸다. 흑마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판자가 낮게 울었다. 온보요는 장서의 기름 자국과 빈 가마의 흰 표식을 떠올렸다."멈추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묵이 고삐를 당겼다.다리 건너 갈대밭에서 새가 한꺼번에 날았다. 바람이 오지 않은 쪽이었다. 소월백의 칼이 먼저 뽑혔다.쇠뇌살이 갈대를 찢고 날아왔다. 진묵은 몸을 틀어 온보요를 가슴과 팔 사이에 묻었다. 화살이 그의 어깨 뒤 겉옷을 꿰고 지나가 나무 난간에 박혔다.둘째 화살은 말의 앞다리를 노렸다. 온보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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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옛 인장

죽은 선대왕의 군호가 쇠뇌살 끝에서 흔들렸다.동패는 손바닥 반만 했다. 앞면에는 진규가 중군을 지휘하던 시절의 검은 매 문양, 뒷면에는 병기고 셋째 문을 뜻하는 세로 금이 있었다. 진묵은 한 번 본 뒤 온보요에게 건넸다."진짜입니까.""겉은."온보요가 비녀 끝으로 녹을 긁었다. 검은 가루 아래 붉은 구리빛이 너무 선명했다. 스무 해 묵은 패라면 손때가 홈을 둥글게 닳게 했을 터였다. 이 패의 글자 모서리는 칼날처럼 살아 있었다.그녀는 동패를 강물에 한 번 담갔다. 겉에 칠한 먹이 퍼지며 손바닥에 검은 물이 고였다. 오래된 녹은 물만으로 벗겨지지 않는다. 사내들은 새 구리 위에 먹과 식초를 발라 하룻밤 만에 스무 해를 만들었다.진묵이 제 소매로 그녀 손바닥을 닦았다. 비싼 먹빛 비단에 검은 얼룩이 번졌으나 보지도 않았다."무명 있습니다.""늦었어."그가 손가락 사이까지 닦는 동안 소월백은 낡은 동패보다 그 손길을 더 오래 보았다.소월백이 포박한 사내를 갈대 밖으로 끌고 왔다. 어깨가 내려앉았으나 입은 다물려 있었다. 진묵은 온보요를 제 뒤로 보내지 않았다. 대신 허리에 손을 두고 나란히 세웠다."네가 물어."그녀가 고개를 들자 손바닥이 허리 옆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소월백의 시선이 그 손을 스쳤다.온보요는 사내 앞에 동패를 내밀었다."누가 새로 깎았지요."사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선대왕의 패다.""선대왕은 죽은 사람에게 새 구리를 주지 않습니다."소월백이 사내의 손을 뒤집었다. 손톱 밑에 푸른 돌가루가 끼어 있었다. 갈대밭 흙에서는 나오지 않는 빛이었다."해검원의 담돌."그가 말했다.진묵의 엄지가 온보요의 허리에서 멎었다."아십니까.""북행 장수들이 성 안에 들기 전 칼을 풀어 걸던 곳이라 들었어. 왕부 옛길에 있다고."온보요가 진묵을 보았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포박한 사내가 웃었다. 피가 이 사이로 번졌다."칼을 돌려받으라 했다. 죽은 왕의 아들과, 죽은 황제의 아들이 함께.""누가."진묵의 한마디에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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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남은 방

빈 칼집을 멘 늙은 사내는 이름보다 먼저 진묵의 옛 흉터를 알아보았다."어깨를 또 맞으셨습니까, 전하."쇠뇌살은 겉옷만 꿰었으나 사내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그 자리부터 보았다. 마숙이라 했다. 해검원에서 장수들의 칼을 닦고 이름을 새기던 늙은 장인이었다.진묵은 반기지 않았다."죽었다 들었는데.""선대왕께서 죽은 것으로 두라 하셨지요."마숙이 등에 멘 칼집을 내렸다. 검은 가죽은 갈라졌고 입구에는 매 문양이 반쯤 닳아 있었다."해검원의 진짜 패입니다. 길에서 나누실 이야기가 아닙니다."해가 지고 있었다. 일행은 다리 북쪽의 폐관사로 들어갔다. 지붕이 온전한 방은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문이 떨어졌거나 빗물이 고여 있었다.익위가 하나 남은 방 앞에서 난처한 낯을 했다."왕비마마께 드리고 전하와 죄수는 대청에서—"진묵이 방 안 이불을 손등으로 눌렀다. 눅눅하지 않은 것을 보고 온보요를 문턱 안으로 들였다."왕비는 나와 잔다."소월백이 젖은 대청을 둘러보았다."그 말은 이제 역참마다 하시겠습니까.""네가 따라오는 동안은.""제가 돌아가면 그만두시고요?"진묵이 문짝을 세웠다."그때는 볼 놈이 없어도 한다."문이 닫히기 직전 온보요는 소월백의 흰 소매가 대청 기둥에 기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진묵이 문을 닫고 빗장을 걸지 않았다. 잠긴 문으로 숨길 사이는 아니라는 듯 나무 막대는 벽에 세워 두었다. 대신 벗어 둔 검을 문턱 바로 안쪽에 놓았다. 들어오는 자는 누구든 그 칼부터 넘어야 했다.방 안에는 작은 화로와 등잔 하나가 있었다. 진묵은 그녀의 회색 망토를 벗겨 줄에 걸었다. 젖은 머리끝을 무명으로 훑고, 턱을 들어 얼굴을 살폈다.그는 제 겉옷 고름을 잡아 온보요 손에 쥐여 주었다."벗겨.""말을 곱게 하시면요."문밖 익위에게는 눈빛만으로 무릎을 꿇리던 사내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벗겨 줘."온보요가 고름을 풀자 진묵은 흡족한 낯을 숨기지도 않았다.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그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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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수발

주인 없는 해검원에 켜진 불은 새벽밥보다 먼저 일행을 깨웠다.폐관사 대청에 마른 장작이 쌓이고 작은 솥이 걸렸다. 마숙은 보리죽이 끓는 동안 낡은 칼집을 무릎 위에 놓았다. 검을 뺀 빈 속에서 종이 대신 가느다란 철편 하나가 나왔다. 해검원 동문을 여는 열쇠였다."그곳에는 북강으로 돌아온 장수들이 칼을 풀어 걸었습니다. 피 묻은 채 성에 들지 않는다는 선대왕의 영이었지요. 칼을 닦은 뒤 주인이 다시 찾아갔습니다."마숙의 손가락이 칼집 입구의 매 문양을 쓸었다."딱 한 자루만 스무 해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선대왕의 칼입니다."장수들은 칼을 맡길 때 이름표와 피 묻은 천을 함께 걸었다. 살아 돌아온 자는 제 손으로 천을 태우고 칼을 찾아갔고, 돌아오지 못한 자의 칼은 해마다 동짓날 한 번씩 닦였다. 마숙은 진규의 이름표 아래 걸린 칼만 열아홉 번 닦았다. 스무 번째 겨울에는 해검원이 닫혔다."선대왕께서는 왜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온보요가 물었다."칼이 아직 할 일을 못 끝냈다 하셨습니다."진묵은 보리죽만 보았다. 소월백은 빈 칼집 안쪽의 오래된 기름 자국을 손끝으로 만졌다.소월백이 죽그릇을 내려놓았다."그 칼 안에 밀지가 있습니까.""나는 칼만 닦던 자입니다. 안을 열라는 명은 받지 못했습니다."진묵은 호송관 장서를 대청 아래 꿇려 두었다. 장서가 추위에 떨며 입을 열자 눈도 주지 않았다."시끄러워. 재갈 물려."익위가 곧 천을 꺼냈다. 온보요가 진묵 앞에 약그릇을 놓았다."왕야, 먼저 이것부터 드세요.""써.""그래도요."그는 더 말하지 않고 약을 들이켰다. 사람을 묶으라는 명은 칼처럼 내리면서 그녀의 말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소월백의 시선이 빈 약그릇에 잠깐 머물렀다.진묵은 팔을 내밀었다."갑주."온보요가 가죽끈을 받아 어깨판을 묶었다. 쇠뇌살에 스친 곳을 피해 끈이 눌리지 않게 손가락 하나를 넣었다. 진묵은 큰 몸을 낮춰 그녀 손이 닿기 쉽게 고개까지 숙였다."너무 조입니다.""풀어.""전하께서 팔에 힘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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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보란 듯이

가마로 간다는 한마디에 북행 길은 온보요가 견딜 만큼만 서둘렀다.수레 넷을 버리고 짐을 말에 나누자 행렬은 절반으로 줄었다. 죄수 수레도 사라졌다. 소월백은 손목에 붉은 포승만 두른 채 흰 말을 탔다. 겉으로는 유배 죄수였으나 칼도 돌려받았다. 해검원에 먼저 든 자를 상대하려면 익위의 창보다 그의 검이 빨랐다.진묵은 선두에서 말이 처지는 자를 가차 없이 뒤로 뺐다. "속도 못 맞추면 버려." 한마디에 젊은 익위들의 등이 펴졌다. 뒤 가마에서 온보요가 발끝으로 바닥을 두 번 울리자 그는 곧 말을 세웠다."왜.""마숙 옹의 손에서 피가 납니다. 천천히 가세요.""속도 반으로."방금 전 버린다던 입으로 명이 바뀌었다. 소월백은 흰 말 위에서 두 사람 사이를 보았다. 진묵은 설명하지 않았고, 부하들도 이제 놀라지 않았다.정오 무렵 찬비가 내렸다. 일행은 봉화를 지키던 빈 막사 안으로 들었다. 지붕은 낮고 의자는 셋뿐이었다. 온보요가 젖은 길그림을 상 위에 펼치려 하자 진묵이 허리를 잡아 제 무릎에 앉혔다.그는 젖은 장갑을 벗어 온보요 손에 놓았다."말려.""불가에 두시면 됩니다.""네가 두면 더 빨라."온보요가 장갑을 화로 곁에 가지런히 놓고 찻물을 따랐다. 진묵은 그녀가 건넨 잔만 받고, 소월백 앞의 빈 잔은 보지도 않았다. 소월백은 스스로 차를 따랐다."의자가 있습니다.""차가워.""세 개나 있습니다.""내 자리는 여기야."그의 턱이 어깨 위로 내려왔다. 한 팔은 허리를 두르고, 다른 손은 온보요 손등 위에서 길그림 모서리를 눌렀다. 소월백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빈 의자 하나가 세 사람 사이에 멀쩡히 남았다."왕야는 제 앞에서 유난히 보란 듯이 하십니다."진묵이 길그림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네 앞이라 숨길 이유가 없지.""천하가 이미 왕비마마가 전하의 부인임을 압니다.""네가 자꾸 아요라 부르니 모르나 싶어서."소월백의 시선이 온보요에게 닿았다."모를 수가 있겠습니까."비 내리는 봉수막 안에서 그 말만 오래 남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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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빈 칼집

푸른 돌담 안에는 불만 남고 사람은 없었다.해검원 동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마숙의 철편을 넣기도 전이었다. 마당에는 젖은 말똥 여섯 덩이와 밟힌 횃불 하나가 흩어져 있었다. 검은 연기는 동쪽 전각 굴뚝에서 곧게 올랐다.말들은 없었지만 고삐를 맨 기둥 여섯 곳이 젖어 있었다. 한 자리에는 흰 말총, 다른 자리에는 금군이 쓰는 붉은 안장실이 걸렸다. 옛 군호를 든 자들만 온 것이 아니었다. 태후의 눈도 같은 담 안까지 따라왔다.전각 앞 화로에는 숯이 아직 붉었다. 찻잔 여섯 개 가운데 하나만 입술 자국이 없었다. 누군가는 차를 마실 틈도 없이 급히 일어났고, 누군가는 그 뒤를 살피며 남았다.진묵이 익위들에게 턱짓했다."문마다 둘. 숨은 놈은 다리부터 잘라."거친 명이 떨어지자 창 든 자들이 흩어졌다. 온보요가 전각 문살의 가는 실을 보았다."문은 건드리지 마세요."진묵의 검끝이 자물쇠 앞에서 멎었다."왜.""열면 안에서 불이 붙습니다."그는 묻지 않고 검을 넣었다. 방금 전 다리를 자르라던 사내가 그녀의 한마디에는 칼부터 거두었다. 소월백이 마른 웃음을 삼켰다.문살에는 말총이 묶였고 끝은 안쪽 등잔 심지로 이어졌다. 온보요가 비녀로 매듭을 풀었다. 진묵은 제 검집을 그녀 무릎 아래 받쳐 흙이 치맛자락에 닿지 않게 했다."왕야의 검은 받침입니까."소월백이 물었다."내 부인 치마 지키는 데 쓰면 되지.""선대왕께서 들으시면 우시겠습니다.""돌아가신 분은 말이 없어."온보요가 돌아보았다."고인께 그러시면 안 됩니다.""알았다."진묵은 입을 다물었다. 마숙이 이번에는 국자 대신 철편을 떨어뜨렸다.말총이 끊어지자 문 안에서 작은 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딸각. 등잔 심지와 이어진 기름 그릇이 기울다 멎었다. 온보요가 한 번만 늦었어도 전각은 문을 여는 순간 탔을 터였다."잘했어."진묵이 그녀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소월백이 바로 뒤에 있었으나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등잔 심지를 끊고 문을 열었다. 안쪽 벽 네 면에 칼집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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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불속

문턱을 핥은 불이 네 벽의 칼기름 냄새를 깨웠다.화르륵.검은 천에 싸인 칼들이 한꺼번에 타올랐다. 오래 잠든 장수들의 이름표가 붉은 불 속에서 뒤틀렸다. 진묵이 문을 걷어찼으나 바깥 빗장이 버텼다."물러나. 벽을 깬다."소월백이 마숙을 끌어 남쪽 벽으로 옮겼다. 온보요는 젖은 소매로 입을 가리고 바닥을 보았다. 기름은 문에서 서쪽 벽으로만 흘렀다. 동쪽 일곱째 자리는 아직 불이 닿지 않았다."동쪽부터 살펴야 합니다.""너부터 나가.""단서가 탑니다."진묵의 낯이 불빛 속에서 서늘하게 굳었다."단서는 다시 찾는다. 너는 하나야."그가 검자루로 남쪽 돌벽을 내리쳤다. 한 번, 둘. 돌가루가 쏟아지고 금이 벌어졌다. 익위들이 밖에서 같은 자리를 찍는 소리가 들렸다.서쪽 선반이 무너졌다. 마숙이 몸을 돌려 이름표 꾸러미를 감쌌고, 불붙은 나무가 등으로 떨어졌다. 소월백이 맨손으로 나무를 걷어 냈다. 흰 소매에 불이 옮겨붙자 바닥을 굴러 껐다."마숙 옹부터 보내."진묵이 소월백에게 명했다. 그는 온보요를 안아 들려 했다."왕야. 저 아이도요."동쪽 구석에 어린 등지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온몸에 기름 냄새가 뱄고 손목에는 밧줄에 끌린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진묵의 팔이 멎었다. 곧 몸을 돌려 아이부터 집어 소월백 쪽으로 던지듯 안겼다."받아. 뛰어."진묵은 보요의 말에 구출 순서를 바꿨다. 소월백은 아이를 품고 벽의 틈으로 빠져나갔다. 이어 마숙이 익위들 손에 끌려 나갔다.연기가 낮게 내려앉았다. 온보요가 기침하며 무릎을 짚었다. 진묵은 더 묻지 않았다. 망토로 그녀 머리까지 감싸 품에 안았다. 돌벽이 완전히 무너지기도 전에 어깨로 틈을 넓혀 밖으로 나왔다.찬비가 얼굴을 때렸다. 그는 마당에 무릎을 꿇고 온보요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망토를 걷어 이마와 입술을 손바닥으로 쓸었다."숨."온보요가 기침 끝에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제야 그의 어깨가 내려갔다. 소월백과 익위들이 보는 앞에서 진묵은 그녀의 그을린 입가에 입술을 눌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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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동쪽 계단

불 속에서 두 번 살아남은 동칠은 해검원 동쪽 돌계단의 일곱째 칸이었다.비가 그친 새벽, 푸른 돌은 씻긴 듯 차가웠다. 온보요가 탄 나무패를 계단 옆에 대었다. 뒷면의 긁힌 선 일곱 개와 돌 가장자리의 홈이 맞았다.진묵은 이미 일곱째 계단 앞에 서 있었다.온보요가 그 장화를 보았다. 다른 이들이 글자를 헤아리기도 전에 멈춘 자리였다. 그는 시선을 느끼고도 비키지 않았다."왕야는 우연도 빠르십니다.""네가 느려.""그러시겠지요."그녀가 더 묻지 않자 진묵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소월백과 익위들이 쇠지렛대를 끼웠다. 일곱째 돌이 들리자 안쪽에서 검은 물이 흘렀다. 돌 아래에는 기름 먹인 나무함 하나가 들어 있었다. 마숙은 화상 입은 손으로 함의 매 문양을 쓸었다."선대왕께서 직접 맡기신 것입니다."함 안에는 칼이 아니라 칼집 하나가 누워 있었다. 마숙이 메고 온 것은 길을 여는 빈 껍데기였고, 이것이 진규의 진짜 칼집이었다. 검은 가죽 안쪽에 얇은 동패가 끼워져 있었다.칼집 끝에는 마른 핏자국이 손가락 길이만큼 남아 있었다. 마숙은 닦으려다 손을 거두었다. 진규가 마지막으로 칼을 넣던 날의 피라 했다. 소월백은 무릎을 굽혀 칼집에 한 번 절했다. 자신을 살려 보낸 무장의 남은 물건 앞에서였다.진묵은 절하지 않았다. 다만 칼집이 젖은 돌에 닿지 않도록 제 겉옷 자락을 아래에 깔았다.온보요가 손을 넣으려 하자 진묵이 먼저 칼집 입구를 넓혀 주었다. 그녀 손가락이 동패를 꺼낼 때까지 손등 아래에 제 손바닥을 받쳤다.동패 앞면에는 왕부 동쪽 성루, 뒷면에는 셋째 계단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자리의 작은 홈은 소월백의 백옥 패와 맞을 만한 반달 모양이었다."밀지는 왕부에 있어."소월백이 낮게 말했다.마숙이 고개를 저었다."길 하나만 더 남은 겁니다. 동패와 옥패를 함께 써야 문이 열릴 테지요."소월백이 백옥 패를 동패 곁에 댔다. 반달 홈은 정확히 맞았지만 두 물건 사이에는 손톱 하나 들어갈 틈이 남았다. 셋째 조각이 더 있어야 완전한 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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