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141 - Chapter 150

328 Chapters

141화. 숨값

왕부로 가는 길은 열렸으나, 온보요의 숨이 먼저 닫혔다.마른기침 끝에 흰 무명 위로 핏빛 한 점이 떨어졌다. 진묵의 손이 그녀 턱을 들었다. 해검원 의원은 맥을 짚다 말고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연기를 깊이 마셨사옵니다. 이틀은 수레도 타시면 아니 되옵니다. 배 속 아기까지 놀랄 수 있사옵니다.""놀라면.""피가 비칠 수도······."진묵의 눈이 서늘해졌다."왕야. 의원에게 화내지 마세요.""안 냈어."의원의 어깨가 더 낮아졌다. 온보요가 그 등을 보자 진묵이 혀를 차고 한마디를 덧붙였다."살려 준다. 일어나."그제야 의원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창밖에서 매의 날갯소리가 났다. 일영이 검은 깃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왕부 파발매의 꼬리깃이었다. 매의 발목에는 쪽지 대신 상엄이 쓰는 곳간 열쇠의 반쪽이 매여 있었다.열쇠는 가운데가 잘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칼날로 세 번 찍어 부러뜨렸다. 왕부 안에 칼 든 자가 들었다는 상엄의 옛 신호였다.일영이 무릎을 꿇었다."어젯밤 동루를 비우라는 황명이 닿았사옵니다. 총관이 문을 잠근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해검원에서 왕부까지 꼬박 이틀. 빠른 말은 하루 반. 불을 지른 자들 가운데 먼저 떠난 말이 있다면 이미 성문을 넘었을 때였다.진묵이 몸을 돌렸다."말 내라.""전하."소월백이 핏기 없는 온보요를 보았다."마마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그래서 본왕만 간다."온보요가 진묵의 소매를 잡았다."동패는 제가 읽었고, 옥패는 월백 공자가 가졌습니다. 왕야 혼자 가시면 칼부터 쓰실 테고요.""잘 아네.""그러니 함께 갑니다.""안 돼."그녀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제 배 위에 얹었다. 아직 아무 움직임도 느낄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진묵의 손가락은 닿자마자 힘을 잃었다."달리는 수레는 안 됩니다. 말 사이에 들것을 매달면 흔들림이 줄어요. 다친 이들은 서쪽 보루에 맡기고, 걸을 수 있는 사람만 데려갑니다."마숙이 붕대 감은 손을 들었다."동패도 제가 지니고 서쪽으로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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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검은 깃

말 두 필 사이에 맨 들것은 수레보다 느리고, 관보다 조용했다.진묵은 오른쪽 말의 고삐를 잡고 걸었다. 온보요가 기침할 때마다 그의 걸음이 느려졌다. 뒤따르던 익위들은 왕야의 등을 보며 속도를 맞췄다. 누구도 늦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소월백이 앞길을 살피고 돌아왔다."금룡기는 고개 너머에서 사라졌습니다. 말굽은 열둘입니다.""황제의 친위가 열둘씩 움직일 때는 둘 중 하나지. 사람을 데려가거나, 입을 없애거나."진묵의 말에 온보요가 눈을 떴다."왕야. 들것을 세워 주세요.""누워 있어.""말굽 소리가 없습니다."앞은 바위가 양쪽에서 오므라든 좁은 길이었다. 흙에는 새 발굽 자국이 선명한데 바람 속에는 말의 숨도, 재갈 소리도 없었다. 열두 필이 길을 건넜다면 고요할 수 없는 자리였다.진묵이 손을 들었다. 행렬이 멎었다.그 순간 검은 깃이 바위 위에서 떨어졌다.금실 용이 온보요 얼굴을 덮기 직전, 진묵의 검이 깃대를 두 동강 냈다. 바위 뒤에 엎드렸던 자들이 일제히 쇠뇌를 들었다.퉁. 퉁퉁.진묵이 들것을 뒤집어 제 몸으로 덮었다. 화살 셋이 나무틀에 박혔다. 소월백의 검이 흰 선을 그으며 왼쪽 비탈을 올랐다. 익위 둘이 오른쪽으로 갈라졌다."여자부터 잡아! 동패는 그 여자에게 있다!"외침이 골짜기에 부딪혀 돌아왔다.온보요는 뒤집힌 들것 아래서 손을 옷섶에 넣었다. 동패는 없었다. 떠나기 전 마숙의 붕대 안에 넣어 서쪽 보루로 보냈다. 왕부를 서두르는 자라면 보요가 지녔다고 여길 터였다.그 믿음이 지금 칼 열둘을 전부 이쪽으로 불렀다.진묵이 들것 밖으로 나갔다. 먹빛 자락이 한 번 돌아갈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흙 위에 누웠다. 살려 두라는 명을 받은 익위들이 칼등을 썼으나, 진묵의 검에는 그런 자비가 없었다."왕야, 셋은 살리세요!"검끝이 사내 목 한 치 앞에서 멎었다."셋."그 한마디에 익위들이 세 사람의 턱을 꺾어 입 안을 막았다. 나머지는 달아나지 못했다.짧은 싸움이 끝났을 때 약 수레에 불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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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남은 약

타 버린 약 냄새가 밤까지 옷에 붙었다.폐역의 방은 하나뿐이었다. 소월백과 익위들은 마구간에 자리를 잡았고, 진묵은 묻지도 않고 온보요를 안아 방 안으로 들였다. 문이 닫히기 전 그가 소월백에게 말했다."포로 눈 떼지 마. 죽으면 네가 대신 불어.""왕야께서 들을 만한 말은 모릅니다.""그럼 더 오래 살겠네."문이 닫혔다.방 안에는 깨진 약탕기와 마른 쑥 한 줌뿐이었다. 진묵이 솥에 물을 붓고 쑥을 던졌다. 해검원 의원이 연기를 마신 자에게 뜨거운 김을 쐬라 하던 것을 기억한 모양이었다.온보요가 웃었다."다 들으셨네요.""쓸 말만."물이 끓자 그가 그녀 겉옷의 고름을 풀었다. 손끝은 익숙하고 느렸다. 젖은 옷을 어깨에서 벗겨 내고 얇은 중의만 남긴 뒤, 제 겉옷으로 등을 감쌌다. 뜨거운 김이 목과 쇄골에 물방울로 맺혔다.진묵의 엄지가 그 물방울을 훔쳤다."숨 쉬어."온보요가 천천히 들이마셨다. 쑥 냄새가 목을 긁었다. 기침이 터지자 진묵이 등을 쓸어 내렸다. 거친 손바닥이 중의 위를 오르내릴 때마다 젖은 천이 살에 붙었다 떨어졌다."왕야도 벗으세요.""왜.""어깨에 피가 났습니다.""내 피 아니야.""거짓말은 제 앞에서 하지 마시고요."그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등을 돌렸다. 온보요가 갑주 아래 끈을 풀었다. 검은 옷이 내려가자 어깨 뒤로 화살이 스친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얕았으나 길었다."앉으세요."진묵은 침상 끝에 앉아 등을 내주었다. 그녀가 남은 쑥물을 무명에 적셔 상처를 닦았다. 문밖에서는 포로 신음과 소월백의 낮은 문초 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방 안에서는 젖은 무명이 살을 지나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났다.쓱. 다시, 쓱.진묵이 뒤로 손을 뻗어 그녀 허리를 끌었다. 온보요의 무릎이 그의 넓적다리 양옆에 닿았다. 상처를 보려 가까이 간 자세가 한순간 다른 것이 되었다."왕야.""닦아."명령은 퉁명스러웠으나 고개는 그녀가 보기 좋게 낮아졌다. 온보요가 상처 끝을 누르자 그의 숨이 짧게 새었다. 그녀 목덜미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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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닫힌 집

제 집으로 돌아가는 왕이 성문을 피해 개울을 건넜다.거꾸로 봉화가 북로를 타고 전해진 지 열하루째였다. 처음 이틀은 들것으로, 그 뒤에는 가마로 북쪽을 올랐다. 역원마다 말을 갈아도 온보요의 기침이 깊어지면 행렬은 멎었다. 경성 북문을 나선 지 꼭 열닷새 만이었다.왕부 정문에는 황제의 금룡기가 걸려 있었다. 갑옷 입은 낯선 군사들이 문루와 담장을 지켰다. 동루의 높은 창에는 불이 켜졌고, 왕부 사람들의 등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온보요 일행은 성 밖 물레방앗간에서 말과 들것을 버렸다. 진묵이 그녀를 업었다. 내려 달라는 말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왕야, 제 발로 갈 수 있습니다.""기침 세 번 하면 다시 안는다.""지금도 업고 계시잖아요.""그러니 세지 마."소월백이 먼저 개울 아래 수문으로 들어갔다. 왕부 부엌의 버린 물이 빠지는 좁은 돌구멍이었다. 진묵은 보요를 업은 채 허리를 숙여 뒤따랐다. 차가운 물이 장화 안으로 들었으나 그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부엌 마당은 비어 있었다. 가마솥에는 죽이 눌어붙었고, 도마 위 파는 반쯤 썰린 채 말라 있었다. 사람들이 밥을 짓다 한꺼번에 끌려간 흔적이었다.진묵의 손이 검자루로 갔다."보이는 놈부터—""안 됩니다. 식솔들이 어디 있는지 먼저 찾아야 해요.""찾아."검끝이 내려가고 명령의 방향이 바뀌었다.온보요는 부엌에서 처소까지 걸었다. 문마다 황색 봉인이 붙어 있었고, 안은 텅 비었다. 서고 앞에는 탄 종이가 젖은 흙에 들러붙었다. 적들은 장부를 마당으로 끌어내 태웠고, 상엄의 곳간 열쇠로 열리지 않은 궤는 도끼로 쪼갰다.없어진 것은 종이만이 아니었다. 시비와 노비, 부엌 어멈까지 쉰셋. 왕부 전체가 인질이 되어 사라졌다.은그릇과 비단 궤는 손대지 않은 채였다. 먹을 것조차 제 몫만 덜어 썼다. 도둑도, 성을 차지하러 온 군사도 아니었다. 동루 안의 한 물건을 얻을 때까지 왕부 사람들을 목숨줄로 쥐려는 자들이었다."밀지를 찾으면 식솔들은 필요 없어집니다."온보요의 말에 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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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세 번째

상엄의 목에 댄 칼은 동루에서 내려온 줄 하나에 매여 있었다.칼자루 끝의 고리가 가는 밧줄에 묶였고, 밧줄은 우물 기둥을 지나 동루 창으로 이어졌다. 창 안의 자가 당기기만 하면 칼이 늙은 총관의 목을 그었다.온보요는 대야를 든 채 우물가에 무릎을 꿇었다."물 갈러 왔습니다."상엄이 눈을 들었다. 피가 굳은 얼굴은 그녀를 알아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동루에서 목소리가 떨어졌다."대야 놓고 꺼져라."온보요가 대야를 기둥 곁에 놓았다. 손을 떼는 순간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비탈진 돌바닥을 탄 물이 밧줄 아래로 흘렀다.소월백은 담장 그림자에 숨어 그 물길만 보고 있었다. 물이 닿은 곳이 밧줄의 가장 낮은 자리였다.온보요가 대야 손잡이를 돌바닥에 한 번 부딪쳤다.쨍.문을 나서기 전 정한 소리였다. 소월백의 검이 나갈 때였다.흰빛이 담장을 넘었다. 밧줄이 잘렸다. 동시에 진묵이 동루 아래 문을 걷어찼다. 쾅, 하고 문짝이 안으로 날아갔다.상엄의 목에 얹힌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보요가 늙은 총관의 팔을 끌어당겼다. 익위들이 얼음광 문을 열어 식솔들을 빼냈다.동루 안에서 쇠뇌가 쏟아졌다. 진묵은 문짝을 방패 삼아 계단을 올랐다. 소월백이 반대편 처마를 타고 창으로 들었다. 아래에 남은 적 셋은 일영과 이영이 소리 없이 꺾었다.싸움은 반 각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동루 아래 돌문은 열리지 않았다. 적들은 셋째 층계의 문을 찾지 못한 채 위층에 틀어박혔다. 불을 붙이면 안의 밀지까지 탔다. 진묵은 계단 아래에 군사를 세우고 돌아왔다.상엄은 목의 피보다 먼저 온보요 배를 보았다."마마께서 어찌 이런 몸으로······.""왕야가 업고 왔습니다."진묵이 뒤에서 말했다."지금도 업는다."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보요를 들어 올렸다. 상엄과 왕부 식솔들이 보는 앞이었다. 온보요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상엄 총관부터 의원에게 보내세요.""노강. 늙은이 데려가.""걸을 수 있사옵니다.""닥치고 업혀."노강이 얼떨결에 상엄 앞에 등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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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기름비

동루 처마에서 기름이 비처럼 쏟아졌다.검은 물줄기가 동쪽 회랑 기와를 타고 안채 쪽으로 흘렀다. 불화살 하나면 서고와 침소가 한 줄로 탔다. 왕부 식솔들은 얼음광에서 빠져나왔으나 아직 서쪽 담 안에 모여 있었다.진묵이 검을 들었다."올라가서 목부터 따.""회랑을 자르세요."온보요가 말했다."동루와 안채 사이 지붕 셋을 무너뜨리면 불이 건너지 못합니다."노강의 얼굴이 굳었다. 첫 지붕 아래는 선대 삭왕의 전공을 새긴 군공패를 둔 전각이었고, 둘째 아래는 진묵이 세자 때 쓰던 병서가 쌓여 있었다."마마, 저곳은 선대왕의—""사람은 다시 지을 수 없습니다."진묵은 제 아버지의 전각을 한 번 보았다."베어."도끼가 기둥에 박혔다. 왕부 군사들이 회랑 두 곳을 뜯어냈다. 오래된 현판과 병서가 진흙 위로 쏟아졌다. 세 번째 기둥이 넘어갈 때 동루에서 불화살이 날았다.화르륵.기름 먹은 첫 지붕이 솟구쳤다. 불은 끊어진 회랑 끝에서 더 가지 못했다. 대신 선대 삭왕의 군공패가 걸린 전각이 붉은 불 속에 잠겼다.온보요는 식솔들을 우물과 서쪽 담 사이에 세웠다. 빈 항아리는 흙을 담아 지붕 끝으로 옮기고, 젖은 이불은 불길과 맞닿은 창을 덮었다. 조금 전까지 인질이던 시비와 노비들이 제 집을 살리려고 한 줄로 달렸다. 김 오르는 대야를 남기던 어린 시비도 치맛자락에 진흙을 묻힌 채 물동이를 날랐다."마마는 뒤로 가 계세요!""제가 보이는 곳에 있어야 줄이 안 끊깁니다."기침이 목까지 올랐으나 온보요는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목 안에서 피 맛이 났고 눈가에는 절로 물기가 고였다. 그래도 제가 보이지 않으면 물동이 줄부터 흐트러질 터였다.상엄이 노강의 등에 업힌 채 눈을 감았다. 진묵은 돌아보지 않았다."소월백. 서쪽 창."소월백이 처마를 밟아 올랐다. 흰 옷이 불빛을 받아 붉어졌다. 익위들이 아래에서 쇠뇌를 쏘아 창 안의 고개를 눌렀다. 소월백은 열린 창틀에 몸을 걸고 안으로 사라졌다.곧 비명 하나가 떨어졌다. 이어 기름항아리 둘이 창밖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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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월백

셋째 돌계단은 위로 들리지 않고 아래로 꺼졌다.돌 밑에서 찬 공기가 올라왔다. 계단 속에 숨은 쇠문에는 홈이 셋이었다. 온보요가 동패를 왼쪽에, 백동 조각을 가운데에 끼웠다. 소월백은 백옥 패를 마지막 홈 앞에 든 채 멈췄다."이것을 넣으면, 돌아갈 수 없겠지요."진묵이 짧게 답했다."넣지 않아도 이미 못 가."소월백은 웃지 않았다. 백옥 패를 밀어 넣었다.세 물건이 쇠문 안에서 맞물렸다. 둥근 매 문양이 한 바퀴 돌고, 두꺼운 문이 안으로 열렸다.숨은 방은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만큼 좁았다. 안에는 쇠로 감싼 긴 함 하나와 작은 옥함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먼지는 쌓였으나 습기는 없었다. 진규가 왕부 돌벽 속에 마른 겨울 하나를 가둬 둔 듯했다.온보요는 손을 뻗다 멈췄다. 진묵이 먼저 제 겉소매를 찢어 그녀 손가락에 감아 주었다."만져."함의 걸쇠에는 봉랍 대신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선귀비 향갑 안 비단을 묶었던 것과 같은 세 겹 매듭이었다. 소월백이 그것을 알아보고 숨을 삼켰다.온보요가 매듭을 풀었다.함 안에는 누렇게 삭은 비단 두 폭이 말려 있었다. 첫 폭에는 전 황제의 친필과 작은 어새가 온전히 남았다. 둘째 황자. 선귀비 소생. 사흘 만에 죽었다 적은 것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거짓이며, 진규에게 북문 호송을 명했다는 글이었다.그 아래에는 황후가 선귀비의 탕약에 독을 넣었고, 황실을 삼킨 외척 때문에 죄를 밝히지 못했다는 자복이 이어졌다.마지막 줄은 짧았다.아이가 제 발로 이 글 앞에 서거든, 빼앗긴 이름을 돌려주라.소월백의 손이 비단 위에서 멎었다."이름이 없습니다."목소리는 고요했으나 손끝이 떨렸다.온보요가 작은 옥함을 열었다. 안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흰 명주가 접혀 있었다. 황제의 글씨보다 가늘고 부드러운 글씨였다.달이 유난히 흰 밤에 낳았습니다. 이 아이를 월백이라 불러 주세요.끝에는 선귀비의 꽃 도장이 찍혀 있었다.월백. 어머니가 남긴 두 글자였다.소월백은 그 글을 오래 읽었다. 스무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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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두 손

현 황제는 한 손으로 동생을 북강에 보냈고, 다른 손으로 그 이름을 태우려 했다.포로의 속옷 솔기에서 푸른 밀랍으로 봉한 얇은 비단이 나왔다. 장 내관의 글씨였다. 황자는 상처 없이 데려오고, 동루 안 친필과 어새는 불 속에 없애라. 마지막에는 황제가 사사로이 쓰는 구름 인장이 눌려 있었다.날짜는 북강 유배 교지와 같은 날이었다.먹도, 접은 자리도 아직 새것이었다.소월백은 두 글을 나란히 보았다. 겉으로는 형제가 함께 살 길을 열어 주고, 뒤로는 동생이 영원히 이름 없는 죄수로 남게 한 명이었다.진묵이 포로의 머리채를 잡았다."장 내관은 어디 있지.""경성에서 다음 불을 기다리겠지요.""그럼 네가 먼저 타.""왕야. 살려 두세요."온보요의 말에 진묵의 손이 멎었다. 포로의 머리가 돌바닥에 떨어졌다."월백 공자를 살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다리에서는 쇠뇌를 쐈습니다. 명이 둘이거나, 중간에서 바꾼 손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입으로 갈라야 해요.""살려. 혀는 남기고 손가락부터 물어."노강이 한숨을 삼키며 포로를 끌고 나갔다. 온보요가 진묵을 보았다."손가락도 그대로 두세요.""다 두면 뭘 물어.""말로요.""번거롭네."그는 투덜거리면서도 노강을 다시 불러 명을 거두었다.밤이 되자 불탄 동쪽 회랑에는 비가 내렸다. 온보요는 진묵의 서재에서 밀지 사본을 만들었다. 원본의 어새와 비단 결까지 옮길 수는 없었으나 글은 여러 곳에 남겨야 했다. 한 장이 타도 문장이 살아남도록.진묵은 상의를 벗은 채 침상 끝에 앉아 있었다. 낮에 그녀를 감싸다 기둥에 부딪힌 등이 검푸르게 멍들었다."약."그가 손을 내밀었다."말씨가 그게 뭡니까.""약 줘.""조금 낫네요."온보요가 약함을 들고 다가갔다. 진묵은 그녀를 무릎 사이에 세우고 허리끈부터 풀게 했다.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맡기는 버릇은 둘만 있을 때도 달라지지 않았다."더 가까이. 안 닿아.""팔이 기시면서요.""네 손이 낫지."그녀 손끝이 멍 위에 약을 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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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이름

밀지는 왕좌보다 먼저 사람의 이름을 돌려주었다.왕부 정당에 상엄과 마숙, 북강 장수 다섯, 성 안 문사 셋이 모였다. 모두 선대 삭왕의 수결이나 전 황제의 어새를 실제로 본 적 있는 자들이었다. 문은 열어 두고 익위가 지켰다. 이제 은밀히 읽되,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는 수의 눈이 모였다.온보요가 친필 비단을 흰 천 위에 펼쳤다. 마숙은 진규의 칼집 끝 핏자국을 밀지 봉투의 매 문양 곁에 댔다. 상엄은 무릎을 꿇고 선대왕 수결의 마지막 삐침이 같다고 말했다. 늙은 문사는 온전한 어새를 보고 세 번이나 눈을 씻었다."선황의 사사로운 어새가 맞사옵니다. 폐위되신 선귀비의 꽃 도장도 틀림없습니다."사람들의 눈이 소월백에게 향했다.그는 흰 옷 대신 북강의 검은 융복을 입고 있었다. 이름을 되찾는 자리가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빛을 눌러 입은 옷이었다.온보요가 선귀비의 명주를 읽었다."달이 유난히 흰 밤에 낳았습니다. 이 아이를 월백이라 불러 주세요."정당 안이 고요해졌다.마숙이 가장 먼저 이마를 바닥에 댔다."둘째 전하를 뵙습니다."상엄과 장수들이 뒤따랐다. 검은 융복 앞에 북강의 무릎이 하나씩 꺾였다. 소월백은 받으라 말하지도, 일어나라 말하지도 못했다. 평생 쓰던 이름이 갑자기 무거워져 어깨에 올라앉은 낯이었다.온보요가 먼저 문사들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한 사람이 절하는 것은 충심이지만, 열 사람이 같은 글을 읽고 제 이름을 적는 것은 훗날의 증언이었다. 문사들은 각자 본 것 세 가지를 적었다. 전 황제의 자획, 온전한 어새, 선귀비의 꽃 도장. 장수들은 그 아래에 제 수결을 남겼다."오늘부터 이 글을 본 눈은 서로의 목숨입니다. 한 사람이 잡히면 아홉이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소월백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제 이름 때문에 목숨을 걸라 청하지 않겠습니다.""청하지 않으셔도 이미 보았습니다. 본 것을 지우려는 쪽이 먼저 목숨을 겨눌 겁니다."그는 온보요를 오래 보다가 문사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황자의 첫 인사는 절을 받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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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세 번째 손

황명은 소월백의 이름을 다시 죄인으로 덮으려 했다.내관이 두루마리를 든 채 떨었다. 정당 안에는 선황의 친필을 본 증인 열과 북강 장수들이 있었다. 바깥에는 왕부를 점거했던 금룡기 군사들의 시신과 포로가 남아 있었다.진묵이 찻잔을 내려놓았다."읽었으면 꺼져.""전, 전하께서는 병부와 삭왕의 인장을 내놓으시고 죄인을—""목부터 내놓을래?"내관의 무릎이 풀렸다."왕야."온보요가 부르자 진묵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붉은 두루마리를 받아 먼저 날짜를 보았다. 해검원으로 떠난 뒤 사흘째. 장 내관의 비밀 명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경성에 닿기도 전이었다.황제는 처음부터 셋을 마련했다. 겉으로는 북강 유배, 뒤로는 밀지 소각, 둘 다 어그러지면 소월백을 죽이고 진묵의 병권을 거두는 명."이 교지를 받들겠습니다."온보요가 말했다.정당 안에서 칼집 부딪는 소리가 일제히 났다. 진묵의 눈이 그녀에게 돌아왔다."뭘 받들어.""왕야께서 죄인을 빼돌렸는지 밝히러 경성에 들라는 명입니다. 소월백 공자는 지금껏 황제의 유배 교지 아래 왕야 감시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달아난 죄인부터 존재하지 않아요."그녀는 첫 유배 교지를 새 황명 곁에 놓았다."새 황명은 감시를 벗어나 달아난 죄인을 참하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달아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앞선 교지대로 산 채로 호송해, 폐하 앞에서 어느 명을 따를지 다시 묻겠습니다."내관이 고개를 들었다."하오나 즉시—""황자 사칭죄를 물으려면 사칭한 이름이 무엇인지 조정에서 먼저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온보요가 선황 친필을 손으로 덮었다.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당 안 열 명의 증인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글을 태워도 입 열 개를 한꺼번에 태울 수는 없었다."내관께서는 왕부가 교지를 받들어 죄인을 호송한다고 적어 가세요. 오늘 본 금룡기 시신과 불탄 동루도 빠뜨리지 마시고요."내관은 대답하지 못했다.진묵이 말했다."들었으면 써. 내 부인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그 한마디에 북강 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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