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151 - Chapter 160

328 Chapters

151화. 열한 갈래

"싫습니다."소월백의 대답은 진묵의 선언보다 짧았다.정당에 엎드렸던 북강 문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장수 다섯은 여전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였으나, 누구도 새 황자에게 충성을 고하지 않았다. 선황의 친필을 믿는 것과 살아 있는 사람을 옥좌에 밀어 넣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진묵이 턱을 괴었다."네가 좋아하라고 하는 일 아니야.""형님을 끌어내리려고 저를 쓰시겠다는 말씀이라면 더욱 싫습니다.""그럼 죽든가. 지금 황명대로."칼날 같은 말이 떨어졌다. 온보요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묵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눈을 돌렸지만, 더 말하지는 않았다."오늘은 누구도 충성을 고하지 않습니다."온보요가 말했다."밀지를 읽은 일과 주군을 정하는 일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건너야 할 강이 있어요. 그 강을 건너라 떠밀면, 충심이 아니라 두려움만 남습니다."곽 부장의 굳은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소월백은 그녀를 보다가 진묵의 팔로 시선을 옮겼다. 먹빛 소매 아래의 손은 어느새 온보요 의자 등받이를 감싸고 있었다."그러니 먼저 길부터 살리지요."상엄이 긴 상 위에 종이 열한 장을 놓았다. 친필을 본 열 사람의 증언 열 장, 살아 있는 포로의 문초 한 장이었다. 같은 글을 베낀 종이가 아니었다. 문사 셋은 자획과 어새를, 마숙은 진규의 칼집과 봉투를, 장수들은 동루에서 본 시신과 금룡기를 저마다 제 말로 적었다.온보요는 열한 장을 한데 묶지 않았다."두 장은 서쪽 보루, 두 장은 조운선, 세 장은 경성의 서로 다른 관청으로 갑니다. 나머지는 사람을 바꾸어 육로로 보내세요. 같은 역원에서 자지 말고, 같은 성문으로 들지도 않습니다."증언을 든 자들도 서로의 행색을 몰라야 했다. 문사 하나는 약초꾼의 솜옷을 입고, 장수 하나는 한쪽 장화를 벗어 절름발이 마부가 되었다. 마숙은 제 몫을 달라 했으나 온보요는 화상 붕대 아래에 약첩만 넣어 주었다."마숙 어르신은 종이를 들지 않습니다. 선대왕의 칼집과 해검원을 기억하는 분까지 길에서 잃을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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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빈 병부

왕부 마구간에는 말이 백 두 넘게 남아 있었다.그러나 경성까지 말을 바꾸지 못하면 빠른 말도 사흘을 못 버텼다. 역원의 먹이와 잠자리까지 끊겼으니, 황제가 거둔 것은 말 몇 필이 아니라 왕부가 황명을 받들어 남하할 길이었다.곽 부장이 북강 지도를 펼쳤다."민가의 말을 사들이면 되옵니다.""왕부가 마을 말을 싹쓸이하는 순간 역모군이 됩니다. 봄갈이도 멈추고요."창밖 마구간에서는 말들이 앞발로 문을 찼다. 왕부 말만 몰아가면 경성까지 가는 동안 절반이 쓰러지고, 남겨진 말은 국경 파발도 잇지 못한다. 길을 서두를수록 북강의 눈과 귀가 먼저 멎는 판이었다.온보요가 지도의 역로를 손끝으로 짚었다. 노강이 수염을 쓸었다."조운선은 어떻사옵니까. 강물이 풀렸으니—""황제 눈에는 군량선까지 빼앗아 탔다 하겠지."진묵이 잘랐다.그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검과 검은 주머니 하나만 달려 있었다. 북강 군사를 움직이는 동호 병부였다. 조정이 가진 서호와 맞물리면 성문과 병마가 움직이는, 삭왕의 반쪽 권세였다.소월백의 눈이 그 주머니에 닿았다."형님은 병권을 놓으라 했지요.""그러더군.""놓으실 겁니까."진묵은 주머니 끈을 풀어 상 위에 던졌다.쿵.작은 동호가 내는 소리치고는 무거웠다. 곽 부장과 노강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동호의 등에는 북강 여덟 군영의 글자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진묵이 열두 살에 처음 만졌고, 스무 해 동안 전장마다 가슴 안에 품었던 물건이었다. 온보요는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그래서 무릎 꿇은 사람들의 낯이 더 참담했다."전하.""시끄러워."진묵이 온보요에게 턱짓했다."봉해. 어제 온 내관 손에 돌려보낸다."온보요도 잠시 그를 보았다. 병부를 거짓으로 바꾸거나 빈 함만 보내는 수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황제는 진짜를 본 자였다. 눈앞의 사내 역시 반쪽을 내놓고 반쪽을 감출 만큼 작은 판을 짜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녀가 붉은 비단을 폈다. 병부를 가운데 놓고 감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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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산 사람

병부가 떠난 다음 날, 북로 안찰사가 왕부 문을 두드렸다.고을의 관원들을 살피는 자가 금룡기 군사 쉰을 데리고 왔다. 그가 내민 형부 공문에는 왕부가 잡은 포로를 조정의 옥으로 옮기라 적혀 있었다. 어명을 따르러 경성으로 가겠다는 왕부가 황제의 죄수를 붙들 명분은 없었다.진묵이 공문을 읽고 안찰사를 보았다."네 관부터 짜 왔나."안찰사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왕, 왕법에 따른 것이옵니다.""왕법 좋아하네. 사람 죽이러 쉰씩 몰고 다니는 법인가?"검집 끝이 돌바닥을 눌렀다. 온보요가 진묵의 소매를 잡았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검집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내주지요."포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는 동루에서 붙잡힌 뒤 처음으로 겁을 감추지 못했다. 장 내관의 푸른 밀랍 명을 품고 왔던 사내였다. 왕부 손에서는 살아 있었으나, 조정의 옥문을 넘으면 입이 먼저 사라질 터였다.소월백이 물었다."살려 두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그래서 산 채로 넘깁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요."온보요는 왕부 안뜰에 긴 상을 내오게 했다. 문사 열과 의원 둘, 저잣거리에서 불려 온 행수와 국숫집 주인까지 담장 아래 세웠다. 안찰사가 얼굴을 굳혔다.국숫집 주인은 밀가루 묻은 앞치마도 벗지 못하고 왔다. 행수는 한쪽 귀가 어두워 의원의 말을 두 번씩 되물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짐꾼 셋도 섞였다. 훗날 종이가 가짜라 몰려도, 목의 멍과 두 발로 걷던 모습을 말할 사람은 글 아는 자만이어서는 안 되었다."죄수 인도에 저자 사람까지 부를 까닭이 있사옵니까?""왕부가 산 사람을 내주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까요."포로의 포승을 풀었다. 의원이 혀와 손톱, 목, 맥을 살폈다. 부러진 손가락 하나 외에는 죽을 상처가 없었다. 온보요는 그 내용을 적고 안찰사에게 붓을 건넸다."받은 시각과 몸 상태를 쓰세요.""형부에서 할 일이옵니다.""그럼 왕부에서 못 데려갑니다."진묵이 덧붙였다."싫으면 쉰이 다 묻히고."안찰사는 결국 붓을 들었다. 먹이 종이 위에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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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돌아온 관

주태는 관이 되어 돌아왔다.동이 트기도 전이었다. 금룡기 군사 넷이 왕부 문밖에 소나무 관 하나를 내려놓고 달아났다. 뚜껑에는 형부의 붉은 봉인이 붙어 있었다. 죄수가 밤중에 제 허리띠로 목을 맸으니 왕부가 시신을 거두라는 글도 함께였다.진묵이 봉인을 칼끝으로 갈랐다."안찰사 데려와."일영과 이영이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온보요가 관 앞에 무릎을 굽히려 하자 진묵의 팔이 먼저 허리를 감았다."서 있어.""봐야 합니다.""내가 내려놓을 테니."그는 그녀를 관에서 두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혔다. 손은 놓지 않은 채 의원에게 뚜껑을 열라 턱짓했다.주태의 목에는 가는 끈 자국이 두 겹이었다. 제 무게로 목을 맨 자국은 위로 올라가야 했으나, 검붉은 선은 수평으로 귀 아래를 돌았다. 손목에는 누군가 무릎으로 누른 멍이 있었고 손톱 밑에는 관청 옥바닥의 푸른 흙이 박혔다.어제의 인도장이 상 위에 펼쳐졌다. 혀 온전함, 맥 고름, 걸어서 수레에 오름. 안찰사의 수결과 백여 사람의 눈이 한 장에 묶였다.국숫집 주인은 관 옆에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 두 발로 오르던 사람을 보았노라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했다. 귀 어두운 행수는 의원에게 목의 검은 선을 손가락으로 짚어 달라 했다. 눈으로 본 자와 손으로 만진 자와 글로 남긴 자가 한 마당에서 서로의 기억을 맞췄다.끌려온 안찰사가 관 앞에서 주저앉았다."소, 소관은 형부 군사에게 넘겼을 뿐이옵니다.""살아서 받은 네 수결이 여기 있네."온보요가 말했다."그리고 죽여서 돌려준 형부 봉인이 저기 있고요. 둘 중 하나를 가짜라 하시겠습니까?"안찰사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진묵의 검이 반쯤 뽑혔다. 온보요가 그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단단한 맥이 손바닥 아래서 거칠게 뛰었다."살려 두세요. 이 사람 수결이 있어야 주태가 형부 손에서 죽었다는 길이 이어집니다.""말은 한 번만 해."찰칵. 검이 도로 들어갔다.온보요는 관을 왕부 마당으로 옮기게 했다. 어제 주태가 걸어 나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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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두 인장

두 명의 사자가 같은 날 왕부에 닿았다.오전에는 편전의 구름 인장을 든 내관이, 해 질 무렵에는 태후전에서 글을 맡은 여관이 붉은 봉황 인장을 들고 왔다. 두 사람은 대문에서 마주치고도 서로를 본 체하지 않았다.편전의 명은 짧았다. 죄수 소월백과 죽은 포로의 관을 형부로 보내고, 삭왕 부부는 병부를 바치는 즉시 포박하지 않은 채 입경하게 한다.태후전의 명은 더 부드러웠다. 둘째 황자의 진위를 자녕궁 별원에서 가릴 터이니 소월백과 선황의 유물을 태후에게 맡기면, 삭왕의 병권을 돌려주고 온가의 죄도 다시 묻지 않겠다는 글이었다.한쪽은 병부를 내놓으라 하면서도 돌려줄 뜻이 없었다. 다른 쪽은 제 것이 아닌 병권을 상으로 내걸었다. 편전 내관은 태후의 글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여관은 황제의 구름 인장을 본 뒤 소매 속 손을 한 번 움켜쥐었다. 두 궁이 서로 무엇을 약속했는지조차 모르는 낯이었다.소월백이 두 비단을 나란히 보았다."한 분은 저를 죄수라 부르고, 한 분은 황자라 부르십니다."진묵이 코웃음 쳤다."목이 하나라 다행이지. 양쪽에서 하나씩 달라 했으면 모자랄 뻔했네."편전 내관의 뺨이 움찔했다. 태후전 여관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온보요는 두 명을 같은 상에 앉혔다. 편전의 글은 태후전 여관 앞에, 태후전의 글은 편전 내관 앞에 펼쳤다."두 분 모두 상대의 명을 읽고 수결해 주세요. 왕부가 어느 쪽을 숨겼다는 말이 없도록요.""황실의 내명은 외인이 읽을 수 없사옵니다."여관이 거절했다."그러면 황자 진위를 가리겠다는 말씀도 들은 적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왕비마마.""죄수라 부를지 황자라 부를지부터 궁에서 정해 오셔야지요. 저희는 한 사람을 둘로 찢어 보낼 수 없습니다."진묵은 상 아래에서 온보요 허리를 끌어당겼다. 그녀 등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손은 비단을 읽는 동안에도 배 아래를 넓게 감싼 채였다."내 부인이 어려운 말을 했나?"편전 내관이 서둘러 붓을 들었다. 여관도 더 버티지 못했다. 두 사람의 수결이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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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한 가문

온보요의 암위는 아버지를 빼낼 길을 네 개 가져왔다.첫째는 자녕궁 물 긷는 수레, 둘째는 온가 사당 뒤 물길, 셋째는 병든 죄인을 옮기는 약방 가마, 마지막은 황성 남벽의 오래된 배수구였다. 어느 길을 쓰든 류씨 넷의 얼굴과 온가의 숨은 별채 둘이 드러났다.온보요는 기별을 화로에 넣었다.종이가 말리며 검게 오그라들었다.불꽃 사이로 북문에서 본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봄인데도 북쪽 밤은 차다며 회색 망토를 어깨에 둘러 주던 손. 딸이 나라의 옥좌를 겨누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먼 길 감기나 걱정하던 손이었다. 온보요는 타지 않은 종이 귀퉁이를 젓가락으로 눌러 끝까지 재로 만들었다."움직이지 말라 하셨습니까?"방어멈이 물었다."아버지를 빼내는 순간 온가는 달아난 역적 집안이 됩니다. 태후가 원하는 길이에요.""그래도 대감마님께서—""살아 계시니까 기다리는 겁니다."끝이 조금 메말랐으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회색 실을 감은 백옥 인장이 손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온보요는 새 종이를 폈다. 선황의 친필을 찾아 사람을 모으고, 소월백을 황자라 주장한 일은 모두 삭왕비 온보요 한 사람의 뜻이었다. 온가는 알지 못했고 돕지 않았으니 죄를 묻지 말라. 그녀는 문장 끝에서 온가 인장을 치우고 제 왕비 인장을 눌렀다.먹이 마르기 전 문이 열렸다.진묵이 들어와 화로의 재와 상 위 글을 차례로 보았다. 묻지 않고 그녀 뒤에 섰다. 머리에서 비녀를 빼자 팽팽히 틀어 올렸던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흘렀다."왕야, 아직 낮입니다.""그래서?"그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천천히 풀어 내렸다. 하루 종일 당겨 아팠던 머리 밑이 느슨해졌다. 손끝이 귀 뒤를 지나 목덜미에 닿자 온보요의 숨이 짧아졌다.진묵은 그 숨을 듣고서야 글을 집었다."너 하나 죄인 되고 온가는 빠지겠다?""제가 한 일이 맞으니까요.""내 왕부에서, 내 사람 데리고, 내 칼 써서 했는데."진묵은 화로 곁에 떨어진 재를 발끝으로 비볐다. 네 길 가운데 어느 길인지 묻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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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스스로

소월백은 부부의 상소를 반으로 찢었다.종이 찢기는 소리가 정당을 갈랐다. 진묵의 눈이 서늘해졌고, 노강은 슬그머니 문에서 멀어졌다."죽고 싶나.""두 분이 제 이름 때문에 가문과 아이까지 거실 필요는 없습니다."소월백은 찢은 종이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나는 황제가 되지 않습니다. 둘째 황자도 아니고요. 소월백으로 살다 소월백으로 죽겠습니다."온보요가 찻물을 따랐다. 잔 가장자리에서 물이 조금 넘쳤다. 진묵의 손이 그녀 손목을 받쳐 주전자를 세웠다. 흐른 물은 그가 제 소매로 닦았다."어머니가 지어 준 이름이라면서요."소월백의 손이 멎었다."그 이름을 지키는 일과 황자가 되는 일은 다릅니다.""현 황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태를 죽였고, 제 아버지를 궁에 들였어요. 공자께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저 손들이 멎지는 않습니다.""그러니 제가 없어지면 됩니다."진묵이 웃었다. 온기 없는 짧은 소리였다."그 쉬운 수를 네 형이 왜 못 뒀겠어. 시신이 나오면 선황의 글이 참이 되니까 살려 둔 거지."소월백은 대꾸하지 못했다.그의 품에는 동루에서 찾은 선귀비의 이름 글이 있었다. 달 흰 밤에 아이를 월백이라 부르겠다고 적은 짧은 비단. 버려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얻은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제 몸을 없애는 수부터 입에 올렸다.온보요가 그 비단 끝을 상 위로 끌어냈다."공자께서 사라지면 이 글은 아들을 살리지 못한 어머니의 유서가 됩니다. 살아서 받으세요. 이름도, 그 이름 때문에 생긴 값도."소월백의 손이 비단을 덮었다. 손등의 핏줄이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온보요가 새 종이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옥좌를 받으라는 글이 아닙니다. 선황의 둘째 아들로서 종묘와 조정 앞에서 친필의 진위를 가려 달라 청하세요. 살아서 이름을 말하는 것까지 거부하면, 죽은 사람들만 공자 몫을 대신 지게 됩니다.""내가 입을 여는 순간 전쟁이 날 수도 있습니다.""입을 닫아도 이미 사람은 죽었습니다.""아요는 언제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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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벗은 갑주

곽 부장은 끝내 소월백에게 절하지 않았다.그는 소월백이 제 손으로 쓴 황자 청원과 선황 친필 사본을 다 읽은 뒤 종이를 접었다. 북강 장수 넷도 그의 입만 보았다."소인은 국경에 남겠사옵니다."소월백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이 옳습니다.""전하께서 누구를 옥좌에 앉히시든 북강군은 남쪽으로 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북쪽 기마족이 봄 목장을 넘보고 있습니다. 성을 비우면 백성이 먼저 죽습니다."곽 부장은 진묵을 향해 이마를 숙였다. 충성을 버리는 절도, 새 주인을 받드는 절도 아니었다. 왕이 없어도 왕이 지키던 땅을 지키겠다는 인사였다.진묵이 말했다."그래. 병부 오면 글자부터 읽고. 네 목 내놓으라는 명이면 버려."곽 부장의 입술이 잠깐 떨렸다.다른 장수들은 선택이 달랐다. 한 사람은 서쪽 보루의 증언 둘을 맡겠다고 했고, 한 사람은 왕부에 남아 식솔을 지키겠다고 했다. 늙은 장수 하나는 황자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다며 수결을 도로 달라 했다. 온보요는 붙잡지 않고 그의 종이를 돌려주었다.그가 정당 앞 화로에 제 증언을 넣었다.종이 한 장이 재가 되었다. 열한 길이 열 길로 줄었다.마숙이 불을 끄려 한 걸음 나섰다가 멈췄다. 억지로 남긴 수결은 경성에서 한마디 문초도 버티지 못한다. 온보요도 화로를 보지 않았다. 사람 하나의 두려움까지 빼앗아 만든 증언이라면 없는 편이 나았다.소월백은 그를 벌하지 않았다.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늙은 장수는 문을 나서기 전 처음으로 소월백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충성을 고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예였다.노강은 갑옷을 벗었다.철편이 마룻바닥에 차례로 놓였다. 그는 부장 패도, 군도도 풀었다. 안에 입은 낡은 회색 융복만 남자 덩치 큰 사내가 갑자기 평범한 마부처럼 보였다."소인은 군사로 가지 않겠사옵니다. 왕야의 마부로 가겠사옵니다.""말이나 잘 몰아.""전하 말은 스무 해 몰았사옵니다.""내 부인 가마 말."노강이 입을 다물었다. 장수들 사이에 웃음이 낮게 번졌다.역원의 말 대신 쓸 것도 정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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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빈 주머니

출발 전날 밤, 온보요는 진묵의 허리끈을 풀었다.그가 병부를 달았던 검은 주머니를 상 위에 놓았다. 낮까지는 텅 비어 있던 것이었다. 온보요는 동루에서 찾은 선황의 작은 어새를 비단으로 두 번 감아 그 안에 넣었다."병부를 바쳤으니 이 주머니를 뒤질 사람은 없을 겁니다."진묵이 내려다보았다."황제 도장을 내 허리에 달겠다고?""본래 황실로 가야 할 물건이니까요.""그럼 네가 달아."온보요가 주머니 끈을 그의 허리에 돌렸다. 손등이 단단한 배를 스칠 때마다 먹빛 중의가 얇게 움직였다. 매듭을 짓기도 전에 진묵이 그녀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의복 사이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등잔에는 솔기름 대신 매화 기름을 썼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돈한 침소라 방 안에는 오래된 원앙 금침과 남쪽 나무 냄새가 남았다. 진묵이 움직일 때마다 허리의 빈 주머니가 그녀 손등을 스쳤다. 권세를 떼어 낸 자리가 이렇게 뜨거울 줄은 몰랐다."왕야. 매듭이 아직입니다.""내 것도 풀어 놓고 네 일만 끝내겠다고?"낮게 구르는 목소리가 귓불에 닿았다. 온보요의 손끝이 허리끈 위에서 오므라들었다. 진묵은 그 손을 펴 제 옷자락 안으로 다시 눌렀다. 뛰는 맥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읽혔다.그의 다른 손은 온보요의 겉옷 고름을 천천히 풀었다. 하나. 그리고 그 아래 하나. 서두르지 않는 손이 오히려 숨을 더 빨리 만들었다. 매실 향이 밴 옷깃 사이로 뜨거운 숨이 스몄다.사락.풀린 비단이 침상 끝으로 미끄러졌다. 온보요가 주우려 허리를 숙이자 그가 먼저 손을 뻗었다. 옷을 돌려주는 대신 손목에 감아 제 쪽으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천 아래 맥이 빠르게 뛰었다."놓으시지요.""말과 손이 다르네."그녀 손가락은 이미 그의 옷깃을 쥐고 있었다. 온보요가 뒤늦게 펴려 하자 진묵이 그 위를 덮었다. 놓지 말라는 말도, 더 오라는 말도 없이 손 하나만 가두었다."내일 길이 멉니다.""알아.""의원은 무리하지 말라 했고요.""그것도."대답은 고분고분했으나 입술은 물러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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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내려간 깃발

첫 관이 새벽 안개 속으로 떠났다.주태의 관 앞에는 갈라진 형부 봉인과 안찰사의 새 봉인이 나란히 붙었고, 그를 검시한 의원 둘이 따랐다. 관 밑에 선황의 친필이 든 줄 아는 사람은 온보요와 진묵, 소월백뿐이었다.한 시진 뒤에는 서쪽 보루로 갈 문사 둘이 서문을 나갔다. 조운선으로 향하는 장수는 생선 장수 수레에 섞였다. 나머지 증언은 약재 행상, 순례객, 비단 상단의 짐이 되어 각기 다른 문으로 흩어졌다.상엄은 나가는 사람마다 이름 대신 신발을 보았다. 새 짚신, 닳은 군화, 진흙 묻은 가죽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길이었다. 그는 목의 붕대를 누른 채 한 사람에게도 잘 다녀오라 말하지 않았다. 인사가 길면 이별이 눈에 띄었다.마지막이 소월백의 죄수 수레였다.그는 흰 옷 위에 굵은 포승을 둘렀다. 매듭은 온보요가 직접 묶었다. 황제의 유배 교지를 받들어 삭왕이 감시한다는 모양을 지키되, 손목 안쪽에는 손가락 하나가 드나들 틈을 남겼다.진묵이 그 틈을 보고 매듭을 한 번 더 당겼다."왕야."온보요가 부르자 도로 느슨하게 했다.소월백이 헛웃음을 흘렸다."부군의 질투가 포승 굵기까지 미칩니까?""입도 묶어 줄까.""그러면 종묘에서 누가 친필을 읽습니까.""내 부인이. 너보다 잘 읽어."진묵은 소월백을 더 보지 않고 온보요 가마로 돌아왔다. 회색 망토 깃을 턱 아래까지 여미고, 발판이 흔들리지 않는지 제 발로 두 번 눌렀다. 갑주도 군패도 없는 검은 융복이었으나 가마꾼들은 그가 가까이 올 때마다 숨부터 삼켰다."안으로 들어가세요.""내 말 타면 돼.""어젯밤 약조와 다릅니다."그녀가 눈을 들자 진묵은 말없이 가마 안으로 몸을 굽혔다. 무릎이 좁은 바닥에 닿았다. 왕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온보요 옆에 앉아 그녀 다리를 제 무릎 위로 올렸다."누우면 됐지.""왕야께서 왜 같이 눕습니까?""내 가마니까."노강이 고삐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상엄의 목 붕대 아래에서 웃음 같은 숨이 샜다.그때 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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