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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세 사람의 글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3 22:31:51

"팔 드세요."

먹빛 관복의 마지막 고름을 묶을 때 금군이 마당에 들어왔다.

갑주도 왕의 금관도 없었다. 온보요는 붕대 감은 엄지를 소매 안에 넣고 허리띠에 검은 옥 하나만 달았다.

"오늘은 손부터 내밀지 마세요."

"저들이 먼저 칼을 뽑으면."

"한 번 참으세요."

"한 번만."

대문이 열리자 금군이 마당까지 들어왔다. 진묵은 보요가 가마에 먼저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옮겼다. 왕비의 황실 보호를 명분으로 붙인 궁인 여덟도 뒤따랐다.

가마는 수인문에서 한 번, 내궁 앞에서 다시 멎었다. 첫 문에서는 왕부 호위가 떨어져 나갔고, 둘째 문에서는 가마꾼까지 황실 사람으로 바뀌었다. 보요가 창살 사이로 본 진묵은 끝까지 가마 옆을 걸었다. 그에게 타라고 내준 말은 고삐도 잡지 않았다.

내궁 돌길은 한낮 볕을 받아 희게 달아올랐다. 궁인들이 양산을 들고 달려오자 진묵이 빼앗듯 받아 보요 쪽 창에 기울였다. 자기 어깨는 볕 아래 그대로 두었다.

"왕야께서 쓰시는 물건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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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244화. 불도장

    허 도위의 장갑 낀 손이 물결무늬 위를 세 번 문질렀다.긁어 낸 홈에서 오래 밴 먹기름이 묻어 나왔다. 허씨 집안이 배와 창고에 찍는 불도장이었다. 그는 손가락의 검은 때를 한동안 보았다."상인이 자루를 샀을 수도 있습니다.""집 문장은 장터에 내다 파나.""북강에서 나온 뒤 주인이 바뀐 쌀일 수 있습니다."진묵이 바닥의 낟알 하나를 집었다. 붉은 씨눈이 손톱 아래에서 부서졌다."남쪽 군영으로 가던 쌀이 왜 북로 역참에서 금군 밥이 됐는지부터 묻지."허 도위는 역졸을 불렀다. 역졸은 처음에는 곡상인이 팔았다 했고, 매가 한 대 떨어지자 청암나루에서 왔다고 했다. 두 번째 매 앞에서는 그곳에 허씨 창고가 있다는 말까지 토했다.진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사슬이 상 모서리를 스치며 차갑게 울렸다."간다.""압송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네 집 도둑을 등에 두고 북강에 가면, 곽문보다 네 목이 먼저 날아간다."허 도위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 겹 빠졌다. 그는 반나절을 더 잃는다는 말을 삼키고 말머리를 남동쪽으로 돌렸다.청암나루에는 해 질 녘 물비린내가 짙었다. 버드나무 아래 배들이 줄지어 묶였고, 창고 여섯 칸은 문마다 새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처마에는 허연교의 이름을 새긴 붉은 나무패가 달렸다. 귀한 딸의 혼수 창고라기에는 창끝 든 사내가 너무 많았다.강물에는 터진 쌀자루에서 나온 낟알이 흰 띠를 이루며 떠갔다. 오리 떼가 그 띠를 따라 몰렸고, 나루 아낙들은 빈 소쿠리를 든 채 먼발치에서 서성였다. 창고 담 안에는 곡식이 썩을 만큼 쌓였는데 담 밖 솥에서는 무청만 끓었다."도위마님께서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집사장이 웃으며 나왔다. 목덜미에 땀이 번들거렸고 소매에서는 탄 먹 냄새가 났다.허 도위가 병부를 꺼냈다."문을 열어라.""승상 대감의 사유 재산입니다.""황실 군량을 찾는다."집사장은 병부를 보고도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안쪽 사내들이 창고 문 앞에 기름 항아리를 굴렸다. 허 도위가 그제야 허리에 찬 칼을 뽑았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243화. 청암나루

    찻잔 밑에 눌린 붉은 진주 술이 물을 먹어 짙어졌다.보요는 혼수 장부의 배 이름 열일곱을 얇은 종이에 옮겨 적었다. 붓은 서두르지 않았으나 먹이 마르기 전에 다음 이름이 놓였다. 소월백은 세 걸음 밖에서 나루 지도를 펼쳤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보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더 자주 오갔다."청암에서 갈린다.""서쪽은 군영, 동쪽은 허씨 창고.""배가 바뀌었어.""사공도."허연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주어도 까닭도 빠진 말이었으나 손가락은 같은 줄에서 만났다. 청암나루에 닿은 배 열일곱 척 가운데 열두 척은 이름이 바뀌었고, 바뀐 날마다 사공의 삯이 두 배로 올랐다.소월백이 보요에게 물었다."믿어?""아니.""쓰기는 하게.""쓸 만하니까."허연교의 눈썹이 가늘게 올라갔다. 보요는 붓을 놓고 다시 공적인 말투로 돌아왔다."아가씨께서 직접 본 창고는 몇 곳입니까.""한 곳도 없습니다. 제 것이라 적힌 곳에 제가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허연교는 웃으며 대답했으나 잔을 든 손가락이 희게 질렸다.보요는 창호 아래 놓인 향합을 열었다. 향 대신 쌀 세 알이 들어 있었다. 왕부 군량을 처음 뒤졌던 봄, 붉은 씨눈이 박힌 북강 조숙벼를 남겨 둔 것이었다. 물에 불리면 붉은 껍질이 먼저 벌어지고 속은 희게 남았다.허리를 오래 굽히자 배 안에서 작은 물결이 한 번 스쳤다. 보요는 향합을 든 채 숨을 골랐다. 소월백의 손이 반사적으로 들렸다가 세 걸음 밖에서 멎었다. 그는 말없이 높은 방석을 발끝으로 밀었고, 보요는 역시 말없이 그 위에 앉았다.소월백이 쌀을 보았다."네 오래된 버릇이군.""버렸어야 했나?""아니. 오늘 쓰잖아."그 말 뒤에는 아무것도 붙지 않았다.보요는 별원 부엌에 쌀죽을 쑤라 했다. 흰 죽 위에 붉은 씨눈 세 개가 꽃술처럼 떠올랐다. 허연교의 장부와 같은 배에서 내린 곡식이라면 청암나루 빈민 시주솥에도 같은 붉은 점이 뜰 터였다.문밖 금군에게는 황손을 위한 여름 쌀을 찾는다 말했다. 황실 의원이 보요의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242화. 혼수 장부

    붉은 치맛자락이 문지방을 넘자 소월백이 세 걸음 더 물러났다.보요가 머무는 서쪽 별원에는 왕비를 시중들던 궁인도, 삭왕부에서 따라온 사람도 없었다. 창호 밖에 금군 둘이 섰고 안에는 식은 차와 얇은 방석뿐이었다. 허연교는 그런 방을 둘러보고도 비웃지 않았다.그녀가 쓰고 온 붉은 보요관에는 진주가 일곱 줄이나 흘렀다. 북강 정원에서 진묵의 눈길 한 번을 얻겠다며 걸었던 것보다 더 화려했다. 그러나 귀밑에 찍힌 분은 반쯤 지워져 있었다. 가마 안에서 손등으로 문지른 자국이 선명했다."두 분만 계셨으면 합니다."허연교가 소월백을 보며 말했다."황자 전하는 들으셔도 됩니다.""허씨 집안의 더러운 살림을요?"소월백이 대답했다."이미 그 집안이 죽이려 한 사람입니다. 새삼 가릴 낯은 없지요."그는 공석의 높임말을 지킨 채 세 걸음 밖 작은 상에 앉았다. 찻잔을 들지 않았고, 시선도 허연교에게 오래 두지 않았다.허연교가 웃었다. 입술은 올라갔으나 진주 술만 잘게 떨렸다.그녀는 품에서 붉은 비단 장부 두 권을 꺼냈다. 첫 권에는 비녀와 비단, 전답과 창고가 줄마다 적혀 있었다. 딸이 혼인할 때 가져갈 살림을 기록한 장부였다. 두 번째 권에는 같은 창고에서 지난 두 달 동안 나간 쌀의 수량과 배 이름이 적혀 있었다.첫 장에는 자개장을 채울 겨울 비단의 빛까지 적혀 있었다. 살구빛 서른 필, 푸른 공단 스무 필, 북방에서도 쓸 수 있다는 두꺼운 모피 열 장. 허연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한 줄도 없었다. 어느 집 대문을 통과할 때 허씨의 위세가 작아 보이지 않을지만 빼곡했다.보요가 첫 장을 넘겼다. 청암나루 창고 여섯 칸. 서쪽 수로 배 열일곱 척. 주인은 허연교였다."아직 혼처도 정하지 않으셨는데 살림이 크군요.""삭왕비가 될 줄 알았으니까요."예전 같으면 칼끝처럼 빛났을 말이었다. 이번에는 허연교가 제 진주 술을 뽑아 장부 사이에 눌렀다."그분은 한 번도 저를 보지 않았습니다. 다과를 받았을 때도, 정원을 걸었을 때도."보요의 손끝이 장부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241화. 붉은 낟알

    흰 신 한 켤레가 정확히 세 걸음 뒤에서 멎었다.북문 앞에는 새벽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황실은 굵은 포승 대신 은빛이 도는 가는 쇠사슬을 골랐다. 사슬은 얌전해 보였고,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살을 더 깊이 물었다.보요가 검은 겉옷의 여밈을 다시 맞춰 주었다. 장식 하나 없는 옷깃이 그녀의 손끝 아래에서 반듯해졌다. 향주머니도 옥패도 달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소매 안에서 가느다란 침향 매듭을 풀어 그의 허리끈 안쪽에 감았다."풀지 마세요.""네가 없는데 누가 푸나."무뚝뚝한 답이 너무 당연해서 보요의 손이 잠깐 멎었다. 진묵은 그 틈에 그녀의 손등을 입술로 눌렀다. 금군의 갑옷이 둘레에서 철컥거렸으나 고개를 드는 자는 없었다.허 도위가 말 위에서 재촉했다."때가 되었습니다."진묵이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허 도위는 더 말하지 않았다.보요의 뒤에는 소월백이 서 있었다. 세 걸음. 한 걸음도 줄지 않았다. 진묵은 그 거리를 한 번 훑고서야 말에 올랐다."잘 세고 있군.""삭왕 전하께서 돌아오셔서 다시 세신다 하셨으니까요.""그때 모자라면 손가락부터 센다.""왕야."보요가 나직이 부르자 진묵은 고삐를 당기던 손을 순순히 내렸다. 입가에 남은 거친 웃음만은 거두지 않았다.압송대 맨 뒤에는 덮개 씌운 수레 넷이 붙었다. 첫 굽이를 돌 때 바퀴 하나가 돌에 걸려 덮개가 미끄러졌다. 짚 사이로 네모난 나무함이 드러났다. 사람 머리 하나씩 들어갈 크기였다. 뚜껑에는 곽문과 삼영 장수 둘의 이름이 먹으로 적혀 있었다.넷째 뚜껑은 비어 있었다.진묵이 말머리를 돌렸다."빈 것은 누구 몫이지.""저항하는 자의 몫입니다."허 도위의 대답은 매끈했다.진묵은 빈 뚜껑을 손끝으로 한 번 두드렸다."이름은 돌아올 때 쓰겠군."그가 누구를 보며 한 말인지 묻는 자는 없었다.해가 오른 뒤 압송대는 첫 역참에 들었다. 금군에게는 흰 쌀밥과 소금에 절인 오리가 나왔다. 담장 밖에서는 마을 아이 셋이 쌀 씻은 물을 받으려고 빈 항아리를 안고 기다렸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240화. 세 걸음

    "한 번만 더."밤이 깊어도 진묵은 낮에 들은 말을 놓지 않았다.황제는 그를 새벽에 북강으로 압송하라 명했다. 곽문과 삼영의 군사를 해산시키고 군량창을 돌려놓으면 죽은 황군의 죄만 따로 묻겠다 했다. 보요는 태중의 아이와 함께 경성에 남겨 두었다. 진묵이 북쪽에서 칼을 돌리면 아내가 먼저 값을 치르는 명이었다.떠나기 전 한 시진, 두 사람은 편전 곁 불기운이 든 작은 방에 들었다. 문밖에는 금군이 섰고 창호에는 사람 그림자가 붙었다. 그래도 문은 닫혀 있었다.방에는 낮은 침상 하나와 세숫대야, 식어 가는 등잔뿐이었다. 황실은 왕호 벗은 죄인에게 붉은 초도 향도 주지 않았다. 보요의 향주머니에서만 침향 한 줄기가 났다.진묵의 새 옷은 장식 없는 검은 중의였다. 금실도 옥매듭도 없으니 넓은 어깨와 허리선이 오히려 더 선명했다. 보요는 옷을 펼쳐 침상 끝에 놓고 소매 길이부터 손으로 쟀다.보요는 진묵의 젖은 중의를 벗기고 옆구리의 무명을 풀었다. 말라붙은 피가 천과 함께 떨어지자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아프십니까.""견딜 만하다.""그러면 얌전히 계세요.""낮의 말은 다시 들려줘."따뜻한 물에 적신 무명이 상처를 훑었다. 피와 재가 씻기며 살 위로 오래된 흉터들이 드러났다. 보요의 손끝이 새 상처 가장자리에서 멎자 진묵이 그 손을 잡아 입술에 눌렀다.사락. 넓은 소매가 팔꿈치 아래로 흘렀다.입맞춤은 손바닥에서 손목 안쪽으로 천천히 옮겨 갔다. 보요의 숨이 한 마디씩 짧아졌다. 진묵은 속눈썹이 떨릴 때마다 입술을 멎었다가, 그녀가 손을 빼지 않으면 더 위로 올라왔다."왕야, 상처부터.""왕호는 벗었다.""신첩에게는 아직 왕야입니다.""낮에는 다르게 불렀지."보요가 새 무명을 그의 허리에 둘렀다. 매듭을 지으려 숙인 얼굴을 진묵이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엄지가 아랫입술을 느리게 눌렀다."부군."이번에는 밤이었다. 나긋이 풀린 숨이 두 사람 사이에 채 닿기도 전에 입술이 겹쳤다.진묵의 손이 보요의 턱 아래를 받쳤다. 낮에 끝내 다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239화. 부군의 이름

    끌이 금책의 ‘삭왕’ 두 글자 위에 놓였다.긁는 소리가 편전을 길게 갈랐다. 금가루가 상 위로 떨어지고, 스무 해 북강을 지킨 왕호가 한 획씩 희어졌다.첫 획이 지워질 때 노강이 편전 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상엄과 왕부 식솔들도 북문 앞에 남아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숙였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으나 거친 무릎이 돌에 닿는 소리가 문틈으로 들어왔다.두 번째 획이 벗겨질 때 허 도위 허리의 동호 병부가 흔들렸다. 이제 금책과 병부가 한 사람의 몸에 함께 있지 않았다.진묵은 보지 않았다. 허리에는 병부도 검도 없었고, 금관은 궁문에서 빼앗긴 채였다. 불에 그은 먹빛 중의와 보요가 매 준 무명만 몸에 남았다.황제가 읽었다."진묵을 종친 명부에서 내리고 북강 봉지를 거둔다. 왕부는 황실에 귀속하며 그 안의 식솔은 궁 안 살림을 다스리는 관청이 거둔다."내관이 종친 명부에서 진묵의 이름표를 뽑았다. 옻칠한 나무패가 빈 쟁반 위로 떨어졌다. 딱. 왕호보다 먼저 사람의 이름이 소리를 냈다.진묵은 고개를 들었다. 제 이름이 아니라 왕부 식솔을 궁에서 거둔다는 줄에서였다."왕부 식솔은 이 일과 무관하다.""이제 네 사람이 아니다.""그들은 스스로 정한다."노강과 상엄, 왕부 사람 쉰셋의 삶까지 글 한 줄에 묶였다. 보요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눌렀다.소월백이 앞으로 나섰다."삭왕 전하의 군령은 백성을 버리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왕호를 거두었다.""신이 받은 은혜와 본 이름은 폐하의 끌로 벗겨지지 않습니다."진묵의 시선이 소월백에게 낮게 닿았다."편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말했습니다.""왕비 앞이라 말이 곱지."보요의 입술 끝이 잠깐 흔들렸다. 진묵은 다만 그녀와 소월백 사이에 한 걸음 비껴 서며 소매 끝을 제 손 안에 가렸다. 보요가 손등을 한 번 누르자 그 손마저 얌전히 멎었다.황제가 다른 문서를 펼쳤다."왕호가 없으니 삭왕비도 없다. 온씨는 혼인을 물리고 친정으로 돌아가라. 태중의 아이는 황실 피이니 태어나는 날 족보를 가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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