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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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청(請)

장부의 밤은 사흘째였다.서재의 서안은 이제 둘이 마주 앉기엔 좁아서, 온보요는 사내의 곁에 앉게 되었다. 곁이라야 장부 한 권 너비였다. 한 권 너비는 등불 아래서 자꾸 줄었다. 같은 줄을 짚느라 머리가 기울면 어깨가 닿았고, 장을 넘기는 손이 엇갈리면 손등이 스쳤다. 닿고 스치는 것들을 사내는 세지 않았고, 세지 않는 것을 그녀만 세고 있었다."삼 년 전 겨울부터이옵니다." 그녀는 장부 위로 마음을 눌러 앉혔다. "젖은 쌀이 처음 나온 것이. 그전에는 눈이 와도 마른 쌀이 올라왔습니다.""삼 년 전 겨울.""북쪽 물길의 세곡선이 새로 갈린 해이옵니다."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가까웠다. 등불 하나 거리였다."배가 갈리면 뱃삯이 갈리고, 뱃삯이 갈리면 뒷돈의 길도 새로 놓입니다. 길을 새로 놓은 자가······."말이 거기서 멎었다.사내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뺨에 닿은 것이다. 엄지가 광대뼈 아래를 천천히 쓸었다. 먹이 묻었던 모양이었다. 닦는 손길이었다. 닦는 손길이, 닦고 나서도 떨어지지 않았다."왕야.""먹이 묻었다.""닦으셨사옵니다.""덜 닦였다."거짓말이었다. 서로 아는 거짓말이었다. 등불이 두 사람 몫의 그림자를 하나로 뭉쳐 벽에 걸었다. 숨이 닿는 거리였다. 혼례의 밤, 광대놀음은 거기까지 하라던 그 거리였다. 그때는 겁을 시늉했고, 지금은—지금은 시늉할 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심장이 명치까지 뛰어오르는 것을, 그녀는 턱을 반듯이 든 채로 견뎠다. 물러서면 지는 것이다. 무엇에 지는 것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사내의 눈이 그녀의 눈에서 입매로 내려갔다.그리고 물러나지 않았다.입술이 겹쳤다. 놀라 벌어진 숨을 사내가 그대로 삼켰다.뺨을 쓸던 엄지가 턱선을 따라 미끄러져 턱 끝을 받쳐 들었다. 고개가 기울었다. 기울인 것은 사내인데, 기운 것은 그녀였다. 다른 한 손이 등허리를 받쳤다. 손바닥의 열이 겹옷을 지나 등뼈까지 닿았다. 깊어졌다. 숨을 나눠 쉬는 법을 가르치듯 느리게, 도망갈 길을 하나씩 지우듯 꼼꼼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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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시중

"마마, 부디······ 부디 왕야께 조복을."이른 아침부터 처소 앞에 엎드린 것은 노강이었다. 경성에서 조정의 사자가 들어 반드시 조복으로 맞으셔야 하는데, 왕야가 조복이라면 갑주보다 싫어하신다는 것이었다. 지난봄에는 조복 소매를 걷다 사자 앞에서 뜯으셨다 했다. 마흔 줄의 부관이 문턱에 이마를 대다시피 하는 것을 보다 못해, 온보요는 조복 함을 받아 들었다.침소의 사내는 속옷 바람으로 창가에 서서, 함을 열어 드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보았다."본왕은 갑주로 맞겠다.""사자가 기절하옵니다.""조용해서 좋지.""기절한 사자는 경성에 가서 입이 됩니다. 입은 붓보다 빠르옵니다."사내는 혀를 차고, 팔을 벌렸다.시중이 시작되었다. 속대를 두르고, 포를 어깨에 걸치고, 앞섶을 여미고. 그녀의 손은 빨랐다. 빨라야 했다. 느리면 그 사이로 사내의 손이 들어왔다.첫 고름을 매는데 허리에 팔이 감겼다."왕야. 가만히 계시옵소서.""가만히 있다."목소리가 귓바퀴 안쪽에서 낮게 굴렀다. 서두르는 데가 없는 사내였다. 서두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사내의 가장 나쁜 버릇이었다.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등허리를 타고 오른 손이 어깨선을 천천히 짚어 내려갔다. 매던 고름이 삐뚤어졌다. 풀고 다시 매는데, 이번에는 숙인 정수리 위로 사내의 숨이 내려앉았다. 깃을 세우려 목 앞으로 손을 올리자, 사내가 고개를 숙여 그 손등 곁에, 귓가에서 목으로 내려가는 선 어디쯤에 입술을 스쳤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스치는 것이 누르는 것보다 나빴다."왕야.""깃이 비뚤다.""왕야께서 비뚤게 하고 계시옵니다."옥대를 채우고 패옥을 거는 데까지, 여느 시비라면 반 각이면 될 일이 한 식경이 걸렸다. 다 입고 난 사내는 거울 앞에 반듯하게 섰다. 거울 속에서 사내의 눈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짙고, 느리고, 데일 듯 무거운 눈이었다. 보는 것만으로 만지는 자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 왕부에 와서 배웠다. 조복은 흠잡을 데 없이 여며져 있었다. 흐트러진 것은 입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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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마저

사자의 행렬은 해가 지기 전에 물러갔다.배웅의 격식이 끝나고, 왕부가 조복을 벗고 제 숨을 되찾는 저녁이었다. 온보요는 침소의 등불을 정리하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돌아보았다.사내가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하루 내 조정의 격식을 견딘 낯이 지루함으로 얇게 덮여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다른 것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에 두고 간 두 마디가, 방을 건너왔다."마저."무엇을, 이라고 물을 겨를은 없었다.거리가 사라졌다. 언제 건너왔는지 모를 걸음이었다. 턱이 들리고, 숨이 겹쳐졌다. 아침의 그것이 서두르지 않는 입맞춤이었다면, 저녁의 그것은 서두를 이유를 아예 태워 버린 입맞춤이었다.등불이 번지기 시작했다.번진 것이 등불인지 눈앞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가 하나씩 멀어졌다. 화로의 숯 튀는 소리가 먼저 갔고, 창밖의 바람 소리가 그다음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숨소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제 것인지 사내의 것인지 가려지지 않았다. 가리는 일을 언제 그만두었는지도, 가려지지 않았다.허리를 받친 손은 하나인데 등이 온통 뜨거웠다. 깃이 어깨 어름까지 흘러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묻자면 답할 수 없었다. 이 방의 시간은 아까부터 앞뒤가 맞지 않았다. 등불이 심지를 얼마나 태웠는지 보면 알 일이지만, 등불은 아직 번져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숨이 가빠졌다.숨 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들이쉬는 자리와 내쉬는 자리를 매번 사내에게 물어야 했다. 묻는 값은 매번 비쌌다. 목덜미 어디쯤에서 낮은 웃음이 울렸는데, 소리라기보다 온도에 가까웠다. 무릎에 힘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알기 전에 사내가 먼저 알았다. 바닥이 사라지고, 세상이 한 번 기울고, 등에 금침의 서늘함이 닿았다.서늘함은 오래가지 못했다.이불이 어디에 있는지, 등불이 아직 켜져 있는지, 지금이 초저녁인지 밤중인지. 알아야 할 것들의 목록이 하나씩 지워져 갔다. 지워지는 것이, 이상하게 아깝지 않았다.그다음의 일들을, 그녀는 순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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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도장

이튿날 아침, 데인 것은 그녀뿐이었다.조반상 앞의 사내는 어제와 같았다. 같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걷어 무릎에 앉혔고, 같은 눈으로 탕 한 술을 받아먹었다. 벼랑 끝의 숨을 쉬던 자는 간밤 눈길 어디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억울한 것은, 그 태연함 앞에서 저 혼자 귀가 데워지는 쪽이었다."잘 잤느냐.""······예.""거짓말이 늘었구나."말하며, 탕 한 술을 받아먹던 사내의 엄지가 그녀의 입가를 스윽 닦고 지나갔다. 묻은 것이 없는 입가였다.늘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따지자면 목소리부터 고르게 만들어야 했는데, 자신이 없었다.낮 동안 그녀는 장부에 파묻혔다.파묻히는 편이 나았다. 숫자는 데워지지 않으니까. 삼 년 치 조운 장부에서 젖은 쌀의 나루 셋을 골라내고, 나루마다 물목에 찍힌 도장을 종이에 옮겨 그렸다. 세 도장은 상호가 제각각이었다. 남안의 창고, 중류의 세곡선단, 하구의 객주.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흩어져 있었다.한데 도장이라는 물건은, 글자보다 흠집이 정직하다.남안 도장의 왼쪽 귀퉁이가 이지러져 있었다. 세곡선단 도장의 같은 자리가, 같은 모양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하구 객주의 것도. 세 상호는 한 뿌리에서 새로 판 도장들이었다. 같은 장인의 손, 같은 결의 나무, 같은 자리의 흠. 도장을 새로 파면서 흠까지 같게 팔 장인은 없다. 흠은 세월이 파는 것이라, 세 도장은 흠이 생긴 뒤의 것을 본떠 판 것들이었다. 갈라놓은 세 손이 실은 한 소매에서 나온 것이다.그리고 그 소매의 무늬를,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남쪽 물길의 세곡선이 갈린 것이 삼 년 전. 그 선단을 거둔 가문의 배 다섯 척이 지금 북쪽 물길을 오르고 있다는 것. 그 서재의 밤, 길목까지만 아뢰고 삼킨 이름. 혀 밑에 눌러 둔 지 오래인 두 글자.그녀는 옮겨 그린 도장 종이를 오래 내려다보았다.반쪽을 내놓는 일은 셈이 아니라 결단이었다. 내놓는 순간 물릴 수 없고, 물릴 수 없는 것부터가 책사의 금기였다. 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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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미끼

밤의 서재는 이제 두 사람 몫으로 밝혀졌다. 등불 둘, 서안 하나, 찻잔 둘. 상엄은 묻지 않고 화로의 숯을 넉넉히 들였고, 노강은 야식상을 두 몫으로 올리는 데 익숙해졌다. 서재의 등불 아래서 온보요는 봄 조운의 물목 초안을 짰다. 참인 물목이 아니었다. 도둑이 읽으라고 짓는 물목이었다."봄 군량의 첫 배에 무엇을 실을지, 미리 정해 흘리는 것이옵니다." 그녀는 붓끝으로 종이 위 한 줄을 짚었다. "기름진 물목 하나를 크게 적어 두면, 젖은 쌀은 반드시 그 배에서 나옵니다. 도둑질할 자리를 이쪽이 정해 주는 것이지요.""도둑질도 판 위에서 하게 하겠다는 것이군.""판 밖의 도둑질은 잡아도 반쪽이옵니다. 판 위의 도둑질은, 자리와 날짜와 손까지 통째로 잡힙니다."진묵이 물목 초안을 훑었다. 훑는 눈이 한 줄에서 멎었다."소금이 과하다.""과해야 뭅니다. 북강의 겨울 끝 소금값은 쌀의 세 곱— 도둑의 눈에는 이 줄이 등불처럼 밝을 것이옵니다."미끼는 지어졌다.흘리는 길은 이미 나 있었다. 그녀의 처소를 드나드는, 김 오르는 대야의 길. 이튿날부터 서안 위에는 봄 조운 물목의 초안이, 왕비의 서툰 살림 글씨로 곱게 놓이기 시작했다. 소금 줄이 잘 보이는 자리에 펼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는 여느 날처럼 물을 내려놓고, 무명을 개고, 화로의 재를 치고 나갔다. 눈이 종이 위에서 두 번 멎었다 가는 것도, 여느 날과 같았다. 달라진 것은 보는 속뿐이었다. 아이가 종이를 훔쳐 읽는 것을 알고도 웃는 아침이 이제는 아프지 않았고, 아프지 않은 것이 가끔 아팠다."저 아이 편으로 나간 것은 오라비에게 가고, 오라비의 것은 위로 갑니다." 저녁에 기별 시종이 아뢰었다. "위가 어디인지는 아직 끊겨 있사옵니다.""끊긴 길은 도둑이 이어 줄 거다."그날 밤 침상에서, 이불째 감긴 채로 그녀는 물었다."물리겠사옵니까.""물겠지." 어둠 속의 목소리는 확신이 아니라 지루함에 가까웠다. "삼 년을 굶지 않고 먹은 입이다. 기름진 것을 보고 참는 법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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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다섯 척

얼음이 풀리기도 전에, 배가 먼저 왔다.허씨의 상단 다섯 척이 북강 하구에 든 것은 정월 보름을 갓 넘긴 날이었다. 겨울 물길을 억지로 거슬러 온 배들이었다. 뱃전에 얼음을 매단 채, 상단기를 높이 올리고, 북강에 전을 열겠다는 청을 앞세우고.정월의 하구는 얼음장 부딪는 소리로 요란했다. 앞물을 깨며 길을 낸 쇄빙 삯꾼들의 삯이 배 한 척 값이라는 말이 부두에 돌았다. 장사치가 그런 삯을 치르고 오는 장사는, 세상에 없다.그 아침 진묵은 왕비의 손에서 융복 고름을 받고 있었다. 조복이 아니면 시중을 마다하던 사내가 요즘은 융복까지 내밀었다. 매듭을 짓는 흰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사내는 그 손목을 들어 올려 안쪽 맥 자리에 입술을 눌렀다. 오래. 자국이 남을까 싶게."다녀오지."손목을 놓으며 사내는 여인의 귀 끝이 붉어지는 것을 보았고, 아침 몫은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노강이 문서를 받들고 서재에 들었다."경성 허부의 상단이옵니다. 남쪽 물산을 북강에 대겠다고······ 물리칠 명분은 차고 넘치옵니다. 겨울 물길을 뚫고 온 것부터가 수상하고.""들여라.""······왕야.""장사치가 드나들어야 성이 산다 하지 않았나."노강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번 남쪽 상단을 들일 때와 같은 말이었는데, 같은 말이 이번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그때는 지나가는 처분 같았고, 이번에는 그물을 치는 소리 같았다. 어느 쪽이 참인지 노강은 묻지 않았다. 물어도 답이 없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배가 부두에 닿는 날, 저자 사람들이 구경을 나갔다.경성 물건이 온다는 소문에 아낙들은 비단 이야기를 했고, 늙은이들은 남쪽 약재 이야기를 했다. 부두의 아이들은 큰 배 다섯 척을 처음 보고 입을 벌렸다. 짐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비단 궤짝, 약재 상자, 소금섬, 기름통. 물목을 읽는 서리의 목소리가 바람에 끊겼다 이어졌다. 곳간지기는 소금섬 수를 두 번 세었고, 아이 하나는 뱃전의 얼음 조각을 주워 입에 넣었다가 어미에게 등짝을 맞았다.진묵은 문루에서 그것을 보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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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물잔

침상 위의 군막이 열린 것은 그날 밤이었다.등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불 위에 부두의 약도가 펼쳐졌다. 왕부의 침소가 군막이 되는 밤이 이제 낯설지 않았다. 밀지를 논하던 밤처럼, 미끼를 짓던 밤처럼.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의 약도 위에는 배 다섯 척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등잔 빛이 약도의 물길을 따라 흘렀다. 이불 위의 군막이란 우스운 물건이라, 베개가 진을 치고 먹그릇이 망루 노릇을 했다."다섯째 배이옵니다." 그녀는 붓끝으로 하구 쪽 배 한 척을 짚었다. "짐을 다 부리고도 가라앉아 있다 하셨지요.""무엇이 실렸겠느냐."시험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이제 이 사내는 답을 아는 것을 묻지 않고, 모르는 것을 물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새 격식이었다."은이면 작게 실어도 되니 배가 저리 무겁지 않사옵니다. 병장기면 북강 관문을 넘을 만큼 간이 크지 않을 것이고." 그녀는 약도 위에서 붓을 멈췄다. "무겁고, 값나가고, 내려놓을 곳이 마땅치 않은 것. 신첩은 짐이 아니라 내리는 곳이 답이라 보옵니다.""내리는 곳.""무엇이든, 내리는 곳이 그 물건의 이름을 말해 줍니다. 은이 절로 가면 시주가 되고, 관아로 가면 뇌물이 되고, 산채로 가면 군자금이 되지요."진묵이 약도에서 눈을 들었다. 등잔 빛 아래서 사내의 입가가 비틀렸다."미행을 붙이자는 말을 참 곱게 돌려 하는군.""신첩의 사람이 맞춤하옵니다. 낯이 알려지지 않았고, 발소리가 없습니다."말없는 호위 시종. 열세 번째의 낙오자. 북강에 온 뒤로 그림자처럼 곁만 지키던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단독의 일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진묵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왕부의 병사가 아니라 왕비의 사람을 쓰는 일을, 사내는 토 달지 않고 허락했다. 그 허락의 무게를 그녀는 약도를 접으며 함께 접어 두었다. 왕부의 일에 왕비의 사람이 쓰이고, 왕비의 일에 왕부의 눈이 감기는 것. 한 계절 전에는 없던 일들이, 소리 없이 격식이 되어 가고 있었다.약도가 치워진 이불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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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향불

절은 산자락에 낮게 엎드려 있었다.정혜암(靜慧庵). 북강 성에서 북으로 삼십 리, 비구니들의 암자였다. 왕비의 첫 불공은 명분이 넘쳤다. 시집온 지 한 계절, 선왕과 선왕비의 명복을 비는 것은 법도에도 맞고 인정에도 맞았다. 상엄은 이례적으로 흔쾌히 채비를 도왔고, 방어멈은 시주 봇짐을 제 등에 지겠다고 고집했다.산길 삼십 리는 가마가 절반, 걸음이 절반이었다. 눈 녹은 진창에 가마꾼들이 애를 먹자 그녀는 절 어귀부터 걸었다. 걷겠다는 왕비와 말리는 시비들의 실랑이를 방어멈이 한 마디로 끝냈다. 우리 마마 다리가 성하다고.나들이 차림은 일부러 수수하게 했다. 흰 바탕에 쪽빛 깃, 장신구는 귀밑의 은비녀 하나. 한데 수수한 것이 도리어 일을 냈다. 꾸밈을 걷어 낸 낯은 걷어 낸 만큼 훤해서, 가마를 세우고 쉴 때마다 가마꾼들이 눈 둘 곳을 못 찾았다. 산바람이 너울 자락과 귀밑머리를 한꺼번에 흩트리자, 절로 오르던 촌로들은 관음보살이 나들이 나오셨나 하고 합장부터 했다.산문을 오르며 온보요는 절을 읽었다.작은 암자치고 기와가 새것이었다. 눈 쌓인 마당은 넓게 쓸려 있었고, 쓸린 폭이 예불 다니는 발들의 폭보다 넓었다. 뒷마당으로 도는 길목에는 발자국이 얼어붙어 겹겹이 딱딱했다. 무거운 것을 여럿이 나른 발자국들이었다. 향불 냄새 아래로, 아주 옅게, 기름 먹인 새끼줄 냄새가 깔려 있었다.법당의 예는 흠 없이 올렸다.향을 사르고, 절을 올리고, 시주를 놓았다. 주지라는 노비구니는 합장이 깊고, 말이 곱고, 눈이 빨랐다. 셋 중 둘은 수행이고 하나는 아니었다. 온보요는 시선을 부처께만 두었다. 볼 것은 이미 산문에서 다 보았다. 불전의 향 연기가 곧게 오르다, 바람 없는 법당에서 문 쪽으로 한 번 휘었다.시주 명부에 이름을 적을 때였다.먹을 가는 동승 곁에서 명부를 훑는 척, 앞장의 이름들을 읽었다. 북강의 이름들 사이에 낯선 결의 글씨가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북강 사람은 시주에 제 이름을 적고, 경성 사람은 남의 이름을 적는다. 지어낸 티가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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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답신

경성의 답신은 얼음이 풀리는 것보다 빨리 왔다.역참의 말이 사흘을 달려 온 공문이었다. 진묵은 서재에서 그것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적힌 것을 읽었고, 한 번은 적히지 않은 것을 읽었다.공문이란 두 벌로 읽는 것이라고,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배웠다. 세자 시절의 겨울, 아버지는 조정 공문을 아들에게 먼저 읽히고 물으셨다. 무엇이 무서우냐. 어린 그는 치하가 무섭다 답했고, 아버지는 그날 처음으로 웃으셨다.적힌 것은 격식이었다. 북강의 병비(兵備)가 장하다는 치하. 변경을 지키는 노고에 대한 위로. 봄 군량을 넉넉히 올려보내겠다는 약조. 문장마다 비단을 둘렀는데, 비단 아래로 칼자루가 만져졌다.적히지 않은 것은 마지막 단락에 있었다.봄 조운의 감찰을 위해 금군의 무관을 보내니, 왕부는 편의를 제공하라. 감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허도위.진묵은 공문을 서안에 내려놓고, 창밖의 눈 녹는 소리를 들었다.부풀린 병력의 숫자가 경성에 닿은 결과가 이것이었다. 겁먹은 자는 큰 숫자를 믿는다. 그리고 믿은 다음에는, 제 눈으로 재러 온다. 군량 감찰은 명분이고, 올 것은 저울이었다. 북강의 병비를 제 눈으로 달아 보려는 저울. 그것도 하필, 외척의 차기 가주가 직접."노강.""예, 왕야.""허도위라는 자, 어떤 물건이냐.""승상의 장자이옵니다. 금군 도위를 지내며······." 노강이 말을 골랐다. 고르는 것이 답이었다. "전장에는 나간 적이 없사옵니다. 한데 무명(武名)은 높습니다. 경성의 무명이란 것이, 본래 전장 밖에서 자라는 것이라.""비단 무관이군.""왕야의 낭설을 부풀린 입들 중 하나가 그 댁 문객들이라는 말도 있사옵니다."진묵의 입가가 얇게 비틀렸다. 제 소문을 길러 준 자가 제 발로 소문의 땅에 들어온다. 낭설을 믿고 자랐을 자가, 낭설의 주인을 재러 온다.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노강은 왕야의 낯에서 그 재미를 읽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왕야가 재미있어하는 일치고, 조용히 끝난 일이 없었다.다만, 판이 갑자기 붐볐다.부두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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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첫 수

봄 조운의 물목이 확정되어 경성으로 올라간 날, 왕부의 살구나무에 첫 망울이 잡혔다.물목의 소금 줄은 그대로였다. 미끼는 조정의 도장을 받아 참이 되었고, 참이 된 미끼는 이제 거둘 일만 남았다. 남안의 창고는 소금섬을 쌓았고, 다섯째 배는 여전히 하구에 무겁게 떠 있고, 정혜암의 뒷마당 발자국은 눈이 녹으며 진창으로 바뀌었다. 판 위의 말들이 전부 제자리에 앉았다.왕부도 겨울을 벗고 있었다. 안채 세숫물에서는 늘 김이 올랐고, 하인들은 왕비의 살구나무 아래를 먼저 쓸었고, 노강의 통변 초벌에는 새 항목이 늘었다. 그래(살구나무 쪽을 보심): 마마와 산보하시겠다는 뜻.그 저녁, 서재의 등불 아래서 온보요는 오래 묵은 물음 하나를 꺼냈다."왕야. 신첩이 여쭙지 않은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드디어." 사내가 붓을 놓았다. 입가에 웃음기가 얹혀 있었다. "언제 오나 했다. 여쭈어라.""어찌하여 세작을 들이셨사옵니까."혼례의 밤부터 한 계절을 묵힌 물음이었다. 알고도 들인다는 것까지는 첫날밤에 들었다. 역정보의 통로로 쓴다는 것도 몸으로 배웠다. 허나 통로가 필요했다면 세작을 문밖에 두고도 쓸 수 있었다. 침상까지 들일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물음을 한 계절 미뤄 온 것은 답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답을 듣고 나면 물릴 수 없는 것이 생길 듯해서였다. 시렁에 얹어 두는 버릇은, 어느새 저에게도 옮아 있었다.진묵은 장부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황상이 심은 귀라면, 본왕이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듣게 하면 된다.""그것은 문밖에서도 되옵니다.""가까울수록 잘 들린다.""왕야.""·····.""이불째 감아 재우는 것도, 잘 들리라고 하시는 것이옵니까."장부 넘어가던 손이 멎었다.등불 심지가 타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사내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짙고, 느리고, 데일 듯 무거운 눈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 눈이 닿는 자리에는 순서가 있었다. 눈. 입매. 목. 그리고 도로 눈. 보는 것만으로 만지는 자의 순서였다. 답 대신 사내는 서안을 돌아 나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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