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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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재

소리 나는 표가 허리께에서 흔들리고 다닌 지 이레— 이번에는 소리 없는 것이 걸렸다. 물시중 아이의 오라비가 보내던 삯이, 두 달째 끊겨 있었다.기별 시종이 저자에서 물어 온 소식이었다. 경성의 오라비는 두 달 전 일터를 옮겼다 했고, 옮긴 일터는 아무도 몰랐다. 삯이 끊긴 뒤로도 아이는 새벽마다 물을 데웠다. 대야의 온기는 한결같았다.셋이 모인 밤, 상엄이 조심스레 물었다."내치실는지요.""내치면, 저 아이는 어디로 갑니까.""그야······ 경성으로 가겠지요.""쓸모가 끝난 줄을 저쪽이 알면, 경성에서 저 아이를 거둘 까닭도 끝나지요."방 안이 조용해졌다. 열두 살짜리 쓸모의 끝이 어떤 모양인지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온보요는 사흘을 두고 판을 접었다. 아이 편에 나가던 답신 길— 혼례 전부터 쓰던, 왕부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었다. 길이 오염된 것은 겨울부터 짐작했으나, 오염된 길도 길이라 버리지 못했다. 이제 버릴 때였다. 버리되, 태우는 방식은 골라야 했다.남쪽 상단의 행수가 마침 심부름꾼 아이를 구하고 있었다. 손이 야무지고, 입이 무겁고, 글자를 아는 아이면 더 좋다 했다. 왕부의 물시중 아이가 마침 셋 다에 맞았다. 총관의 천거장이 쓰였고, 삯은 경성 오라비의 것보다 후하게 매겨졌다. 상단의 배는 물길로만 다니니, 경성의 손이 닿기는 왕부보다 오히려 멀 것이었다.아이가 떠나는 날 아침은 봄답게 흐렸다. 부엌 어멈이 새벽부터 주먹밥을 싸서 봇짐 맨 위에 얹었고, 방어멈은 제 반짇고리에서 골무 하나를 꺼내 아이 손에 쥐여 주었다. 바느질도 못하는 것이 골무는 받아 꼭 쥐었다. 그 손으로, 마지막 대야가 들어왔다."마마, 물 가져왔어요."김이 오르는 대야를 내려놓는 손이, 여느 날처럼 서툴게 요란했다. 온보요는 그 물에 손을 담갔다. 알맞게 따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온기만은 시킨 자가 없는 것이었다."남쪽은 물이 순하다더구나. 가서— 잘 지내라."아이는 영문을 반만 알아들은 낯으로 절을 하고 물러갔다. 문이 닫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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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겉봉

미끼는 서안 왼쪽 두 번째 서랍에 두었다.봉인한 서신 한 통. 겉봉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고, 안에는 봄 조운의 물목을 반쯤 지어내어 적었다. 참 일곱에 거짓 셋. 거짓은 소금 삯과 배 이름과 나루 물때로 하나씩 지었다. 각기 다른 색으로 지어, 어느 것이 새어 나가는지에 따라 새는 구멍의 임자를 가릴 수 있게 했다. 서랍은 잠그지 않았다. 잠근 서랍은 손을 부르고, 열린 서랍은 눈을 부른다.서랍에 넣기 전, 그녀는 겉봉을 손톱 반만큼 비뚤게 두었다. 반듯한 것을 좋아하는 손이라면 견디지 못할 만큼만, 비뚤게.앵아가 청소를 드는 아침이면 처소에는 물비린내가 옅게 남았다. 그 아침도 아이는 걸레 함지를 안고 문안을 왔다. 눈매가 곱게 접히는 인사였다."서안 쪽은 먼지만 걷어 내거라. 종이가 많으니.""예, 마마."대답이 물처럼 순했다. 온보요는 겉옷을 걸치고 처소를 나섰다.정원의 살구나무는 꽃이 한창이었다. 그녀는 그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한 바퀴를 돌고, 낮은 가지의 꽃송이를 올려다보고, 떨어진 꽃잎 하나를 신코로 밀어 보고, 다시 한 바퀴. 곁에서 앵무가 봄나물 얘기를 재잘거렸다. 반쯤 들으며, 그녀는 걸음으로 시간을 쟀다. 걸레질 한 번의 길이. 서랍 하나를 열어 볼 만큼의 여유. 도로 닫고 숨을 고를 만큼의 짬. 살구꽃은 향이 옅어, 오래 서 있어도 물리지 않았다.돌아와서는 서두르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데운 꿀물을 반 잔 마시고, 그러고 나서야 서안 앞에 앉아 왼쪽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봉인은 그대로였다. 겉봉은— 반듯했다.손톱 반만큼 비뚤게 두었던 그 각이, 자로 잰 듯 바로잡혀 있었다. 온보요는 서랍을 소리 없이 닫았다. 남의 서랍을 뒤진 손이 아니라, 이레 전에 본 반듯함을 기억해 그대로 돌려놓은 손이었다.열흘 뒤, 저자의 향(香) 가게에서 기별 시종이 겉봉 하나를 보아 왔다.가게는 저자 서쪽 골목에 있었다. 문을 열면 백단과 침향과 말린 귤피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 나와, 코가 어지러운 집이었다. 시렁마다 향합이 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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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봄손님

제 발로 이어지러 온다더니— 온 것은 실이 아니라, 행렬이었다. 십 리 밖에서부터 소문이 먼저 도착했다.남문 저자의 아이들이 관도까지 마중을 나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져 돌아왔다. 수레마다 기름 먹인 남색 포장이 덮였고, 방울 단 노새들이 끌었으며, 맨 앞 수레에는 경성에서부터 모셔 왔다는 화분— 아직 망울도 안 맺힌 모란 화분이 비단 방석 위에 실려 있다 했다.수레가 열둘, 호위가 서른, 시비만 여덟이라 했다. 노강은 그 숫자를 받아 적으며 눈앞이 아득해졌다. 감찰의 행렬은 창끝이 백이라 무서웠는데, 이번 행렬은 수레가 열둘이라 무서웠다. 창은 세우면 그만이나, 수레 열두 대의 손님은 재워야 하고 먹여야 하고— 무엇보다, 왕야께 아뢰어야 했다."허 승상 댁 여식이 도착하였사옵니다."장계를 읽던 눈이 들리지도 않았다."별채.""예. 한데 저— 그 별채가······ 왕비마마 처소와 담 하나 사이온데.""먼 별채."먼 별채는 겨우내 비어 곰팡내가 났다. 노강은 반나절 만에 그 방을 사람 사는 방으로 만드느라 늙었고, 늙은 보람도 없이 새 손님은 방 타령을 하지 않았다. 방 타령을 할 낯이 아니었다.허연교는 가마에서 내리며 왕부의 마당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리는 발끝이 먼저 진창을 살폈고, 살피고도 물러서지 않고 디뎠다. 연분홍 신코에 잿빛 흙이 묻는 것을, 제 눈으로 보면서. 경성의 모란이 북강 진창에 피면 이런 그림일까. 연분홍 봄옷자락이 잿빛 마당에서 저 혼자 화사했고, 시비 여덟이 그 뒤로 꽃대궁처럼 늘어섰다. 걸을 때마다 옅은 향이 반 걸음 늦게 따라왔다. 경성 여인의 향이 아니라, 마른 꽃잎을 오래 재운 것 같은 조용한 향. 마구간 늙은 마부가 여물통을 든 채 반 각을 서 있다가 어멈에게 등짝을 맞았고, 등짝을 맞고도 반 각을 더 서 있었다.첫 문안 자리에서, 허연교는 격식대로 절했다."왕야를 뵈옵니다."진묵은 답례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으로 답했다. 고개가 움직였는지 촛불이 흔들렸는지 가릴 수 없는 정도였다. 스무 해를 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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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정원

무대는 미시(未時)의 정원, 볕이 하루 중 가장 고운 시각이었다.허연교가 살구나무 아래를 걷고 싶다 청했고, 왕야가 웬일로 물리치지 않았다는 소식이, 차 한 잔 식기 전에 안채까지 닿았다. 온보요는 수틀을 든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정원의 살구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라서, 앉은 것이었다. 앉으면서 그것을 알았고, 알면서도 앉았다.두 사람은 나무 아래를 반 바퀴 걸었다.살구나무는 마침 첫 망울을 벌리는 중이라, 가지 끝마다 연분홍이 점점이 앉아 있었다. 그 아래로 연분홍 옷자락과 먹빛 융복이 나란히— 나란하다기엔 서먹하게— 지나갔다. 담장 아래 시비 둘이 물동이를 내려놓은 채 붙박였고, 회랑 끝에서 어멈 하나가 걸레질을 같은 자리에만 오래 했다.바람이 불 때마다 연분홍 자락이 꽃잎처럼 부풀었다. 쪽 찐 머리에는 나비 모양 보요(步搖)가 걸음마다 잘게 흔들렸다. 흔들리라고 만든 물건이, 흔들리라고 배운 걸음 위에 있었다.거리는 석 자. 좁혀지지도 벌어지지도 않는, 격식이 허락하는 가장 먼 동행이었다. 허연교의 연분홍 옷자락이 바람에 날려 사내의 먹빛 소매에 닿을 듯하면, 사내의 걸음이 반 보 물러났다. 물러나는 반 보까지가 그림의 일부였다. 냉담한 사내와 애틋한 미인. 담장의 눈들이 그리기 좋은 그림으로, 정확히 그만큼만.무대다. 온보요는 바늘을 놀리며 판정을 내렸다. 저 반 보의 물러남은 결벽이고, 물러나면서도 걷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연출이다. 관객은 담장의 눈들이 아니라, 이 창이다.판정은 끝났는데, 바늘은 같은 자리를 세 번 떴다.수틀 안에서는 원앙 한 쌍이 반쯤 수놓이다 만 채 기다리고 있었다. 원앙의 목이 오늘따라 삐뚜름했다.풀 수는 알았다. 무대에는 무대. 마침 남쪽에서 온 예물이 있었다. 소월백이 배첩과 함께 두고 간 남방 다구— 백자 찻주전자와 잔 둘. 백자는 남쪽 가마의 물건다웠다. 살이 얇아 등불이 비치면 그릇 속 물그림자가 겉으로 배어 나오고, 주둥이의 선이 학의 목처럼 흘렀다. 온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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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맞불

그날 밤 침소의 등불은 여느 밤보다 오래 살아 있었다.진묵은 서안 앞의 여인을 등 뒤에서 안아 들었다. 붓이 종이 위에 점 하나를 떨어뜨렸다. 항의는 입술이 열리기 전에 막혔다. 낮의 흰 백자가, 살구나무 반 바퀴의 정원이, 서로가 서로에게 둔 수들이, 말이 되지 못한 채 숨으로만 오갔다.방 안에는 살구꽃 가지 하나가 물병에 꽂혀 있었다. 낮에 앵무가 꺾어 온 것이었다. 그 옅은 향과 등잔 기름 냄새 사이로, 사내의 숨이 섞여 들었다.입맞춤은 길고, 깊고, 어딘가 화가 나 있었다.화가 난 입맞춤이 어째서 이리 다디단지, 온보요는 생각하려 했고, 생각은 두 번째 입맞춤에서 끊겼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와 허리에서 멎었다. 멎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가— 다시 들어갔다. 힘의 오르내림이 그대로 사내의 숨이었다. 사내의 다른 손이 그녀의 머리를 받쳐, 비녀를 천천히 뽑았다. 먹빛 머리채가 소리 없이 어깨로 쏟아지고, 그 사이로 손가락이 빗처럼 지나갔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두피가 저릿하게 깨어났다. 옷고름 매듭에는 다른 손끝이 걸리고, 걸린 채로 오래 머물렀다. 풀지 않았다. 풀지 않는 것이 푸는 것보다 숨을 가쁘게 했다."자······ 잠깐, 왕야······.""잠깐이 무어냐." 목덜미에서 낮은 웃음기가 울렸다. "밤은 길다.""오늘 저녁의 그 차 말이다."귓불에 닿는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맛이 어떻더냐.""······기억나지 않사옵니다.""본왕은 난다." 입술이 귓바퀴의 선을 따라 내려왔다. "석 잔이 다, 썼다."쓴 차를 석 잔이나 비운 것은 누구의 수였는지. 따지려던 말은 목덜미에 내려앉은 입술에 눌려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서 나온 것은 따짐이 아니라—"아······."제 것 같지 않은 소리가 새어, 그녀는 손등으로 입을 눌렀다. 누른 손등을 사내의 손이 천천히 걷어 냈다."막지 마라." 귓가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그 소리도 본왕의 것이다." 등불이 흔들리고, 그림자 둘이 벽 위에서 하나로 겹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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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철장산(鐵匠山)

꽃이 반이나 벌어진 살구 가지를 물병에 남겨 두고, 사내들은 그 아침 북쪽 산으로 떠났다. 산은— 이름값을 했다.능선의 바위마다 쇠 빛이 돌았고, 골짜기의 개울물은 바닥의 돌이 붉었다. 검붉은 산흙— 돌 틈에 말라붙어 있던 그 흙이, 예서는 발밑에 지천이었다. 진묵은 말에서 내려 흙 한 줌을 쥐어 보았다. 손안에서 부서지는 결까지 같았다.산 초입의 숯가마 터에서 일행은 숯장수 노인 하나를 만났다. 노인은 왕야의 융복을 알아보지 못했고, 알아보지 못해서 말이 술술 나왔다. 겨우내 밤수레가 능선을 오르내렸다는 것, 수레꾼들이 숯도 안 사면서 불만 쬐고 갔다는 것, 그중 하나가 두고 간 술병의 술이 경성 것이더라는 것까지. 말 값으로 소월백은 숯 두 섬을 시세의 갑절로 샀다.숯장수의 말은 값을 했다. 남쪽 능선의 소로에는 겨우내 다져진 수레 자국이 아직 살아 있었다. 무거운 짐이, 여러 번, 밤에 다닌 자국. 자국은 폐광의 남쪽 갱도 앞에서 끊겼다."물이 찬 갱도는 동쪽입니다." 소월백이 말했다. "남쪽은 마릅니다. 마른 갱도는 곳간이 되지요."갱도 입구는 무너진 것처럼 보이게 막아 두었다. 보이게— 라는 것이 문제였다. 무너진 돌 틈에 낀 지렛대 자국을 진묵은 세 걸음 밖에서 읽었다. 소월백은 다섯 걸음 밖에서 읽은 낯이었다. 두 사내는 서로가 읽은 것을 알았고, 아는 것을 내색하지 않는 것으로 겨뤘다.돌을 들어내자 갱도가 입을 벌렸다. 안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겨울처럼 차고, 쇳내에 절어 있었다. 횃불이 그 공기를 만나 한 번 크게 몸을 떨었다.횃불 빛에 드러난 안은, 비어 있었다. 짐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허나 곳간은 짐이 나가도 냄새를 지니는 법이라— 기름 먹인 나무 냄새, 쇳내, 그리고 숯불의 잔향이 벽에 배어 있었다. 갱도 안쪽에 화덕 자리가 있었다. 재가 아직 푸석하게 살아 있는, 오래지 않은 화덕."대장간이군요." 소월백이 재를 헤집었다. "폐광 속의 대장간이라."진묵은 화덕 곁의 모루 자국을 보고 있었다. 병장기를 벼리는 자리 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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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인두

인두는 서안 한가운데 놓였다.산에서 내려온 지 이틀. 그 이틀 사이 왕부는 겉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봄 조운 장부가 오가고, 살구꽃이 벌어지고, 허연교의 별채에서는 거문고 소리가 담을 넘었다. 군무에서 돌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담 밖을 지나는 시각이면, 곡은 어김없이 새로 시작되었다. 말발굽 소리는 한 번도 느려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 낮들의 밑에서, 밤마다 서재의 등불만 오래 살았다.등불 넷. 문은 걸었고, 방 안에는 셋뿐이었다. 진묵과 온보요, 그리고 상 끝의 노강. 온보요는 인두를 들어 등불에 비췄다. 금군 낙인. 획 하나, 이지러진 각 하나까지, 궤짝의 것과 같았다. 같아야 했다. 한 어미에게서 난 도장이니까."위조이옵니다. 전부."말이 떨어지자, 노강의 목에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겨우내 쌓아 온 그림이 소리 없이 다시 그려졌다.금군의 병기가 북강으로 새어 들어온 줄 알았다. 무기고 임자의 수결을 좇으면 외척의 목줄이 잡히는 줄 알았다. 한데 병기는 처음부터 금군의 것이 아니었다. 북강의 폐광에서 두들겨 만든 쇠에, 북강의 화덕에서 태어난 가짜 낙인을 찍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어낸 물건이었다."어째서······." 노강이 마른 입을 뗐다. "가짜 병기에 가짜 도장을 찍습니까. 팔지도 못할 것을.""팔 물건이 아니니까요." 온보요는 인두를 내려놓았다. "찾을 물건입니다."온보요는 인두를 노강 쪽으로 돌려놓았다."노 부관. 어느 날 감찰이 북강 땅에서, 이 낙인이 찍힌 병기 무더기를 찾아냈다 치지요.""금군 병기가 나왔으니······ 도둑을 잡겠지요.""낙인이 가짜인 것까지 함께 밝혀지면요."노강의 입이 벌어진 채 멎었다. 훔친 것이 아니라, 지어낸 것. 금군을 사칭해 병기를 지어낸 자가 북강에 있다— 는 그림이, 그의 낯 위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완성된 낯이 잿빛이 되었다."사병······." 갈라진 목소리가 셋을 다 세지 못했다. "금군 사칭에······.""그 다음 글자는 입에 담지 마세요.""쌀 도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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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쇳물

흐릿한 각인을 읽는 데 이틀이 걸렸다.이틀 사이 왕비의 오전은 두 번, 반 시진씩 늦게 열렸다. 늦는 까닭은 왕부의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입에 올리지 않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왕비의 깃은 봄이 깊어도 목까지 여며졌다. 여며도— 목욕 시중까지 여밀 수는 없어서, 어깨며 쇄골의 붉은 자국들은 탕에 뜬 꽃잎처럼 시비들의 눈에 낱낱이 떠올랐다. 보는 눈들은 입을 다물었고, 다문 입들 사이에서 왕야 혼자— 감쪽같이 감춰진 줄 알고 흡족해했다.첫날은 실패했다. 먹을 짙게 먹였더니 획이 뭉개졌다. 이튿날 온보요는 먹 대신 주사(朱砂)를 기름에 개어 얇게 먹이고, 매미 날개 같은 남지(南紙)를 눌렀다. 종이를 들어내자 붉은 바탕에 흰 획이 떠올랐다. 음각의 골에 남은 것이 글자가 되는 이치였다.붉은 탁본 위에서, 마모된 획이 마침내 자리를 드러냈다. 위(魏). 서안 앞의 세 사람이 그 한 자를 오래 내려다보았다."위씨 성의 대장장이야 천지에 널렸사옵니다." 노강이 조심스레 말했다."널렸지요. 한데 낙관 곁의 이 문양은 널리지 않았습니다."각인 곁에 바늘 끝만 한 꽃문양이 함께 파여 있었다. 온보요가 맑고 볼록한 수정 조각을 그 위에 댔다. 좁쌀만 하던 꽃이 손톱만큼 부풀었다. 잎은 다섯이었다. 매화. 장인이 제 손을 밝히는 낙관에 꽃을 곁들이는 것은 관물(官物)을 지어 본 손의 버릇이었다. 그리고 다섯 잎 매화를 물표로 쓰는 곳을, 온보요는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태후전의 내탕(內帑). 태후 친정— 위씨 가문이 대대로 맡아 온, 궁 안의 곳간. 궁의 향을 사르고 궁의 초를 굽고 궁의 그릇을 굽는 돈이, 전부 그 곳간을 지난다."겉봉이 이어졌사옵니다."향 가게로 흘러들던 앵아의 실. 초하루마다 온다던 궁의 향 심부름꾼. 허도위를 지나쳐 더 위로 뻗어 있던 실 끝이, 폐광의 인두와 한 매듭에서 만났다. 실의 임자도, 인두의 임자도, 같은 문을 드나드는 손이었다.서안 위의 나무패가 다시 놓였다. 황상의 패, 허가의 패, 왕부의 패—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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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벗

문을 연 것은 온보요 자신이었다.시비를 깨우지 않은 것은 손님의 격식에 맞춘 것이었다. 자정에 담장을 타 넘듯 온 손님에게는, 자정의 격식이 있는 법이니.달이 반쯤 나온 밤이었다. 마당의 살구나무 그림자가 문 앞까지 길게 누워 있었다.허연교는 겉옷도 없이 서 있었다. 연분홍 침의 위에 얇은 배자 하나. 등롱도 시비도 없이, 밤바람에 반쯤 흐트러진 머리로. 경성의 모란이 이 꼴로 남의 처소 앞에 선 그림은, 어떤 화공도 그려 본 적 없을 것이었다."차는 못 드려요. 불 피우는 소리가 나니.""찬물이면 됩니다."들어와 앉은 허연교는 찬물을 정말로 받아 마셨다. 두 손으로 잔을 쥐고, 소리 나지 않게 한 모금. 그 손이 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오래 쥐고 있었다."마마.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오라버니가 무슨 일로 북강에 왔는지, 아세요?""감찰의 일이라 들었습니다만.""저는 몰라요." 허연교는 웃었다. 모란 같은 웃음이 아니었다. "알려 주지를 않으니까. 알려 주지 않는 일에 쓰이는 것이— 저희 집 여식의 소임이거든요."방 안의 화로는 재만 남아 미지근했다. 온보요는 제 무릎덮개를 밀어 건넸고, 허연교는 사양하다가 받았다. 받은 덮개 밑에서 언 발끝을 녹이며, 경성의 이야기가 나왔다.혼담이 세 번 오갔다 했다. 한 번은 황자에게, 한 번은 늙은 상서에게, 한 번은— 북강의 삭왕에게. 세 번 다 저울에 올랐다가 세 번 다 저울에서 내려졌고, 이번에는 벗이 되라는 명을 받았다 했다. 왕비의 벗. 명을 내린 것은 아비였고, 명의 출처는 아비가 아니라 했다."누구의 뜻입니까.""그건 말할 수 없어요. 말하면— 저는 돌아가서 살 수가 없으니."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반은 말한 것이었다. 아비 위의 뜻. 온보요는 찬물 잔을 채워 주며, 저울질을 계속했다. 진심인가, 수인가. 눈물 없이 하는 하소연은 눈물로 하는 것보다 가리기 어려웠다. 잔 속의 찬물이 등불을 받아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것이 물인지, 쥔 손인지부터 가려야 했다."한데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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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기별

아버지보다 더 무서워해요— 그 떨리던 목소리가 사흘째 귓가에 남아 있던 낮이었다. 낮것상을 물리기도 전에, 상엄이 저자에서 주운 소문 하나를 문밖에서 아뢰었다.소금과 비단을 부린 남쪽 배가 하구에 닿았고, 뱃사람들의 입이 국밥집에서 풀렸다. 관보다 소문이 언제나 사흘 빨랐다.온 시랑이 조회에서 탄핵을 받았다더라. 시랑은 인수를 반납하고 집에 들었고, 큰아들은 금부에 불려가 사흘째 나오지 못했다더라.온보요는 수저를 놓지 않았다. 국을 마저 뜨고, 상을 물리고, 시비들을 내보내고— 문이 닫힌 뒤에야, 서안 모서리를 짚은 손끝이 희어졌다.아버지. 오라버니.겨울 전 마지막 서신에서 아버지는 매화 화분을, 오라버니는 조카의 백일 잔치를 길게 적었다. 태평하던 문장들이 지금 와서 목에 걸렸다.죄목은 남방 물길의 세— 우스웠다. 온가의 물길 연은 이십 년 전에 끊긴 것을, 끊은 자들이 더 잘 알 것이었다. 죄목이 우스울수록 뜻은 무거웠다. 죄가 있어 치는 것이 아니라, 칠 때가 되어 죄를 지어낸 것이니.칠 때. 어째서 지금인가. 돌 궤짝이 돌아가고 철장산이 파헤쳐진 다음— 북강의 판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자, 판 밖의 말을 잡은 것이다. 왕비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아픈 말을.문이 열렸다. 진묵이었다. 갑주도 벗지 않은 채였고, 어깨에 조련장의 흙먼지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군무 중일 시각이었다. 누가 알렸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았고, 알리라고 시킨 적 없는 것도 알았다."들었느냐.""들었사옵니다.""낯이 그 모양인데, 상은 다 물렸다더구나."사내는 서안 앞에 앉은 그녀 곁에 서서, 희어진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위로의 말을 고르는 낯이 아니었다. 위로를 골라 본 적 없는 사내가, 고르는 법을 몰라서 그냥 서 있는 낯이었다."여인이 울면 소매를 내주라— 책에는 그리 나오던데. 여인들은 어째서 그 대목에서 낯을 붉히는 것이냐." 이윽고 그가 말했다. "본왕은 소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이 품을, 전부 내어주마. 이리 오거라.""······책도 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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