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31 - Chapter 40

328 Chapters

31화. 봄물

첫 수는 신첩이 두겠노라 아뢴 지 사흘째— 봄이 오는 냄새보다 먼저, 처소 뒷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사흘 밤을 이어 물감 냄새가 났다. 나흘째 아침에는 앵무의 손톱 열 개가 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린 시비가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앵무는 연지를 만들다 쏟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연지 만드는 법을 반 시진을 풀었다. 홍화를 어느 물에 불리는지, 기름은 몇 방울인지, 경성 여인들은 어느 볼부터 바르는지. 아이는 연지 풀이에 취해 뒷방 얘기는 까맣게 잊고 돌아갔다.방어멈은 그 사흘 내내 뒷방 문 앞에 바느질감을 들고 앉아 있었다. 바늘은 사흘 동안 한 뼘도 나아가지 않았다. 지나던 노강이 등받이라도 놓아 드릴까 여쭈었다가, 늙은 유모의 눈빛 한 번에 조용히 물러갔다.닷새째 밤, 온보요는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들고 서재에 들었다.진묵이 주머니를 받아 끈을 풀고, 안의 것을 손바닥에 부었다. 등불 아래로 붉은 것이 한 줌 쏟아졌다. 낟알이었다. 볍씨 낟알 하나하나가 저녁놀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사내는 그것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기울여 등불에 비춰도 보고, 낟알 하나를 집어 손끝으로 문질러도 보았다. 붉은 물은 손끝에 묻어나지 않았다."물에 불려도 이대로냐.""백반을 썼사옵니다.""·······쓰겠다."무엇에 쓴다는 것인지는, 두 사람만 알았다. 낟알을 도로 주머니에 흘려 담는 동안 사내의 손끝에 붉은 것 하나가 남았다. 사내는 그것을 등불에 한 번 더 비춰 보더니, 제 서안 서랍에 넣었다. 무슨 마음으로 넣는지는, 그도 말하지 않았다.주머니는 이튿날 남쪽으로 내려갔다. 저자의 남쪽 전포에서 차 상자 하나가 값 흥정 끝에 팔려 나갔고, 그 상자 바닥에 주머니가 눌려 있었다는 것은 판 사람과 산 사람만 알았다. 앵무의 손톱은 열흘 뒤에야 제 빛으로 돌아왔다.강의 얼음이 풀렸다는 파발이 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수도의 나루에서 봄 조운의 첫 배가 떴다. 조운선 여섯 척, 쌀 삼천 석. 배는 보름을 올라올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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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행렬

노강은 마중 채비를 하며 세 가지를 걱정했다.첫째, 왕야가 마중을 아니 나가실 것. 둘째, 나가시더라도 입을 여실 것. 셋째, 여신 입에서 나올 말. 스무 해 부관 노릇의 걱정이란 대개 이 셋의 되풀이였다. 오늘은 셋 다 유효했다.걱정은 절반만 맞았다. 남은 절반은 걱정보다 나쁘게 맞았다.진묵은 마중을 나갔다. 조복 대신 먹빛 융복 차림으로, 문루 아래 말을 세운 채였다. 왕비도 문루에 올랐다. 격식상 왕비까지 나올 자리는 아니었으나, 왕야가 곁을 턱짓했으니 격식이 새로 생긴 것이다. 쪽빛 대삼에 흰 너울을 반만 걷은 차림이었다. 봄바람이 너울 자락을 흔들 때마다 도열한 왕부 사람들의 등이 괜히 펴졌다. 저 마마가 우리 마마다, 하는 등들이었다. 감찰의 행렬이 남문을 들어섰다. 기치가 서른, 호위 기병이 백, 수레가 스물. 군량 장부를 보러 오는 행차치고는 창끝이 많았다. 구경 나온 저자 사람들이 기치를 세다 말고 조용해졌다. 북강 사람들은 창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라, 창끝이 어느 쪽을 향해 쉬는지부터 본다. 감찰 행렬의 눕혀 쉰 창끝은, 하나같이 성 안쪽을 향해 있었다.행렬 가운데서 은빛 갑주의 무관이 말을 몰아 나왔다.허도위였다. 갑주는 새것처럼 닦여 있었고, 닦인 갑주 위 어디에도 흠 하나 없었다. 전장을 지나온 갑주는 닦아도 흠이 남는다. 노강은 제 왕야의 목과 손등의 흉을 떠올리고, 이 마중이 벌써 걱정되기 시작했다. 허도위 뒤로는 문관 서리가 여남은, 그 뒤로 궤짝 수레가 스물이었다. 감찰의 짐이 많은 것이야 흠이 아니나, 궤짝마다 자물쇠가 둘씩 달린 것은 눈에 남았다. 장부 넣는 궤짝에 자물쇠 둘은 과했다."삭왕 전하를 뵙습니다." 허도위가 말 위에서 포권했다. 내리지 않은 채였다. 포권을 올리기 전, 감찰의 눈이 문루 위에서 한 번 길을 잃었다. 반만 걷힌 너울 아래에서였다. 길 잃은 눈을 수습하는 데 두어 호흡이 걸렸고, 노강은 그 두어 호흡을 장부에 적어 두듯 보아 두었다. "황명을 받들어 조운을 감찰하러 왔습니다. 변경의 노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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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주연(酒宴)

정당에 들어서기 전부터 양 굽는 냄새가 났다.북강의 연회는 경성처럼 곱지 않았다. 통째로 구운 양이 상마다 오르고, 술은 데우지 않은 채 독했고, 악공은 셋뿐인데 북이 컸다. 등불이 서른, 상이 마흔. 왕부 무관들은 벌써 목소리가 커져 있었다. 말석에서 누군가 감찰 호위에게 잔을 내밀었다. "북강에서는 첫 잔을 사양하면 두 잔을 마시게 되오." 웃음이 터졌고, 호위는 두 잔을 마셨다.양은 겉이 바삭하게 그을고 속에서 김이 났다. 양념은 소금과 산초뿐인데, 기름이 숯에 떨어질 때마다 향이 정당을 한 바퀴 돌았다. 냄새 없는 경성의 연회와 달리, 북강의 연회는 냄새부터 먹였다.연회 전, 처소에 옷이 한 벌 내려와 있었다. 먹빛 바탕에 은실로 살구꽃을 놓은 대수삼. 왕야의 색에, 왕비의 꽃이었다. 누구의 뜻인지 물을 것도 없어 그녀는 잠자코 입었다. 정당에 들어서자 젓가락 소리가 잠깐 느려졌다가, 도로 빨라졌다.상석의 사내는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이 목덜미의 은실 위를 지나는 것이 옷 위로도 느껴져, 그녀는 공연히 잔을 당겨 쥐었다.허도위는 상석 곁에서 술을 사양하지 않았다. 사양하지 않되 취하지도 않았다. 잔이 빌 때마다 눈이 정당을 한 바퀴 돌았다. 문을 세고, 호위를 세고, 왕야와 왕비 사이의 거리를 쟀다."왕비마마." 술이 세 순배 돈 뒤, 허도위가 잔을 들었다. "경성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온부의 매화가 필 무렵인데.""북강의 살구가 곧 핍니다.""살구라." 허도위가 웃었다. "경성에서는 마마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이가 많습니다. 소식이 워낙 귀해서.""서신은 달마다 올립니다만.""서신이야 격식이지요. 격식 밖의 안부 말입니다."온보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격식 밖이라니,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규방의 안부에 격식 밖이 어디 있겠습니까."허도위의 눈이 한 번 가늘어졌다 풀렸다. 그 위로 상석의 목소리가 떨어졌다."감찰.""예, 전하.""내 사람과 말이 길다."악공이 곡을 놓쳤다. 북채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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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표식

읽어야 할 낯이 하나 는 채로 보름이 갔다. 보름하고 이틀 만에— 첫 배가 북강 나루에 닿았다.조운선 여섯 척, 쌀 삼천 석. 물목과 석수는 자로 잰 듯 맞았다. 감찰이 지켜보는 첫 배이니 맞을 수밖에 없었다. 허도위는 부두에 감찰석을 차리고 앉아 하역을 지켜보았고, 쌀섬은 한 섬씩 저울을 지나 왕부 곳간으로 들어갔다. 젖은 쌀은 단 한 섬도 없었다.하역은 이틀이 걸렸다. 저울을 지날 때마다 서리가 석수를 외치고, 감찰 쪽 붓이 받아 적고, 왕부 쪽 붓이 겹장부를 적었다. 같은 숫자를 세 입이 말하고 두 붓이 적는 동안, 부두의 갈매기들만 격식 없이 쌀알을 훔쳤다."이번 봄은 물길이 순했나 봅니다." 감찰석의 허도위가 웃으며 말했다. "젖은 쌀이 없다니.""감찰의 눈이 무거워 물이 피해 갔나 보오."진묵의 대답에 부두의 서리들이 먹을 쏟을 뻔했다. 허도위는 웃는 낯을 지키며 장부에 수결을 두었다. 첫 배는 그렇게, 흠 하나 없이 끝났다.흠이 없는 것이 흠이었다.그날 밤 서재에서 온보요는 하역 문서를 오래 보았다. 삼 년을 거르지 않던 젖은 쌀이 하필 감찰의 봄에 뚝 그쳤다."내일 곳간을 열겠사옵니다."까닭은 말하지 않았고, 사내도 묻지 않았다. 서안 맞은편에서 시선만 길게 왔다. 요즘 저 사내는 그녀가 무언가를 정할 때마다 저런 눈을 했다. 미간을 좁히는 것도 감탄하는 것도 아닌, 배가 고파지는 눈. 그 눈이 무엇에 고픈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면 목덜미부터 데워지니까.이튿날 왕비는 봄맞이 점고를 명분으로 곳간에 들었다. 상엄이 열쇠를 들고 앞장섰다. 첫 배의 쌀은 동편 셋째 칸에 쌓여 있었다. 그녀는 다섯 섬을 골랐다. 문에서 가까운 것 하나, 먼 것 하나, 위의 것, 아래 것, 그리고 켜켜이 쌓인 한가운데 것."헤치세요."첫 섬의 볏겨 틈에서, 붉은 것이 한 알 굴러 나왔다.저녁놀빛으로 물든 볍씨였다. 상엄이 그것을 집어 들고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온보요는 소매 안에서 손끝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사흘 밤의 물감 냄새와 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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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좀

잘 물었다— 는 치하를 받은 이튿날부터, 온보요는 사흘을 여느 때처럼 보냈다. 곳간 점고는 흠 없이 끝났다고 상엄이 소문을 냈고, 왕비는 봄맞이 살림에 바쁜 낯을 했고, 서재의 등불은 여느 밤처럼 늦게 꺼졌다.기다림은 이번에도 밤이 데웠다. 사흘 밤 내리 이불째 감긴 채, 그녀는 낮에 못 다한 대목들을 어둠에 두고 사내와 나눴다. 곳간지기의 삯길, 술도가의 뒷문, 지붕 위의 아이가 넘긴 것들. 어둠 속의 문답은 이제 격식이 아니라 버릇이 되어 있었다. 버릇에는 값이 붙었다. 답 하나를 받을 때마다 사내의 입술이 어깨 어름 어딘가에 한 번씩 내려앉는 것이다. 값이라 우기기에는 자리가 매번 달랐고, 벌이라 우기기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그 사흘 동안, 세 사람이 조용히 움직였다.상엄은 곳간지기의 삼 년 치를 뒤졌다. 언제 왕부에 들어왔고, 삯은 어디로 보내고, 쉬는 날은 어디를 다니는지. 기별 시종은 저자에서 그자의 술값을 뒤졌다. 곳간지기의 녹봉으로는 마실 수 없는 술을, 그자는 외상 한 번 없이 마시고 있었다. 술버릇도 캐어졌다. 취하면 곳간 자랑을 한다는 것. 왕부 곳간 열쇠가 제 허리에 있다고, 취한 입이 저자 술청에서 떠들었다는 것. 좀이 좀인 까닭은, 배가 불러도 입이 고픈 데 있었다. 호위 시종은 밤마다 곳간 지붕에 앉았다.나흘째 밤, 지붕 위의 눈이 결실을 보았다.자시 넘어 곳간 뒷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는 것. 곳간지기가 등불 없이 들어가 반 시진을 머물다 나왔다는 것. 나올 때 진 등짐이 들어갈 때보다 무거웠다는 것. 그리고 등짐이 향한 곳이 남안 창고 뒷골목의 술도가였다는 것."술도가라." 서재의 진묵이 낮게 되뇌었다."술도가는 쌀이 드나들어도 아무도 세지 않는 집이옵니다." 온보요가 약도 위에 점을 찍었다. "쌀이 술이 되면 장물의 낯이 지워지니까요. 남안 창고, 세곡선단, 하구 객주, 그리고 술도가. 도장 셋에 이제 넷째 발이 붙었습니다.""잡을 때가 되었군.""좀은 언제든 잡습니다. 다만."그녀는 약도에서 눈을 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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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사냥

봄 산은 겨울 산보다 시끄럽다. 시끄러운 산은 쫓는 자의 편이다.눈 녹은 물이 골짜기마다 소리를 내고, 언 땅이 풀리며 발밑이 무른다. 도망치는 자에게는 나쁜 산이었다. 무른 땅은 발자국을 받아 적고, 물소리는 제 발소리를 못 듣게 한다.진묵은 북문 밖 세 갈래 길에서 말을 세웠다.동은 관도, 서는 나루, 북은 산길. 관도는 감찰의 행렬이 오간 뒤라 이목이 많고, 나루는 물이 갓 풀려 배편이 뜸했다. 이목을 피해 밤에 담을 넘은 자가 고를 길은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북쪽 산길 끝에는,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캐묻지 않는 암자가 있다."산길이다."말머리가 북으로 돌았다. 노강이 뒤에서 손짓 하나로 여섯을 불렀다.뒤따른 것은 노강과 기병 여섯. 왕부를 뒤집지 않고 조용히 나선 것은 그래서였다. 백 명이 뒤지면 소문이 잡히고, 일곱이 쫓으면 사람이 잡힌다. 노강은 말 위에서 왕야의 등을 보며 속이 묘했다. 겨울 내내 빈손이던 사냥길의 등과 같은 등인데, 오늘은 살기가 아니라 신명이 읽혔다. 신명 난 왕야는, 노강의 걱정 목록에서 넷째 항목이었다.진창에 발자국이 있었다. 봄 산이 밤새 받아 적어 둔 것이었다.밤새 걸은 자의 발자국이었다. 처음에는 보폭이 넓다가, 십 리를 가며 좁아지고, 이십 리부터 끌렸다. 등짐 진 자의 지친 걸음. 진묵은 말 위에서 그 걸음을 읽으며 속도를 늦추지도 높이지도 않았다. 쫓는 것이 아니라 거두러 가는 걸음이었다. 산길 이십 리 사이 흔적이 둘 더 나왔다. 개울가에 웅크려 물을 마신 자리. 바위 뒤에 등짐을 내렸다 도로 진 자리. 짐을 버리지 못하는 도둑이었다.정혜암 어귀 갈림에서, 발자국이 멎어 있었다.멎은 자리에 사내 하나가 주저앉아 있었다. 곳간지기였다. 등짐을 진 채 바위에 기대어, 오도 가도 못하고 산문 쪽만 보고 있었다. 밤새 이십 리를 지고 온 등짐이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다. 산문은 닫혀 있었다. 문고리에 낀 성에가, 아침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일러 주었다. 산문 앞에는 낯선 장정 둘이 지게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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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문초

시주패의 낙인이 서재 등불 아래에서 밤을 나는 동안, 곳간지기는 산길을 제 발로 걸어 내려왔다. 날이 밝자— 그가 든 곳은 왕부 뒤채의 빈 방이었다.옥이 아니라, 빈 방이었다. 옥에 가두면 감찰의 귀에 들어가고, 감찰의 귀에 들어가면 윗선이 먼저 손을 쓴다. 좀 하나 없어진 것은 왕부 살림의 일이고, 살림의 일은 안주인의 소관이었다.문초는 온보요가 맡았다. 진묵은 곁방에 있었다. 있겠다는 것을 그녀가 말리지 않은 것은, 곁방의 침묵이 문초의 반이기 때문이었다. 벽 하나 너머에 삭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혀는, 매를 대지 않아도 절로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진다.매도 형틀도 없었다. 방에는 상 하나와 더운 국밥 한 그릇이 놓였을 뿐이었다. 뚝배기에 무와 파를 넣고 오래 끓인 장국이 뽀얗게 우러났고, 보리 섞인 밥 위에 수육 두 점이 얹혀 있었다. 굶은 자의 코에는, 그 김이 매보다 아팠다. 이틀을 굶고 밤새 산길을 걸은 자 앞에 김 오르는 국밥을 놓고,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기다렸다. 사내는 국밥과 왕비를 번갈아 보다가, 끝내 울음부터 터뜨렸다."소인은····· 소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압니다.""예······?""시키는 대로 한 것을 압니다. 그러니 묻는 것도 그것뿐입니다. 누가, 무엇을 시켰는지."당근과 채찍이 아니라, 당근과 저울이었다. 그녀는 사내 앞에 두 가지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 입을 다물면 왕부는 그를 감찰에게 넘긴다. 윗선이 손을 쓸 것이고, 그 손이 어떤 손인지는 산문 앞에서 이미 보았을 것이다. 둘. 입을 열면 그와 늙은 어미는 왕부의 사람이 된다. 좀이 아니라 증인으로.말을 마치고 그녀는 국밥을 새 그릇으로 바꾸게 했다. 식은 밥 앞에서 받는 자백과 더운 밥 앞에서 하는 자백은, 값이 다르다."산문이 어찌 닫혔는지, 알겠습니까.""·······.""쓸모가 끝난 좀은 구멍이 먼저 버립니다. 그대의 구멍은 어젯밤에 그대를 버렸어요."사내는 식은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수저를 들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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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낙인

달이 없는 밤을 골랐다.정혜암의 뒷산에 오른 것은 진묵과 호위 시종, 둘뿐이었다. 왕부의 병사는 이번에도 쓰지 않았다. 백이 움직이면 소문이 잡히고, 둘이 움직이면 실체가 잡힌다. 말없는 계집아이 하나를 데려가는 것을 노강은 끝까지 말렸으나, 진묵은 한 마디로 접었다. 발소리가 없는 것이 백 명 몫을 한다고.떠나기 전, 서재에서 온보요가 두 사람의 채비를 손수 보았다. 먹빛 두건, 숯가루, 기름 안 먹인 신. 호위 아이의 옷고름을 여며 주는 왕비의 손을 아이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왕부에 와서 처음 받아 보는 손길이라는 것을, 손길을 주는 쪽은 몰랐다.진묵의 두건은 그녀가 맸다. 매듭을 당겨 여미는 동안 사내는 얌전히 서 있었다— 손만 빼고. 허리 뒤로 돌아간 손이 매듭 짓는 동안의 값을 미리 받아 갔다. 다 매고 물러서려는 손목을 붙들어, 안쪽 맥 자리에 입술을 오래 눌렀다. 무운을 빈다는 말 대신이었다.과연 그랬다.아이는 눈 녹은 산비탈을 밟는데 낙엽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진묵은 전장에서 그런 걸음을 몇 보았다. 그런 걸음들은 대개 오래 못 살거나, 아주 오래 살았다. 아이의 걸음에는 오래 살 쪽의 결이 있었다. 능선의 밤바람이 두건 틈을 파고들었다. 골짜기 아래로 정혜암의 지붕이 먹빛 속에 웅크려 있었다. 낮에 보면 엎드린 절이, 밤에 보니 숨은 짐승이었다.뒷산 능선에서 내려다본 암자는, 절이 아니었다.법당에는 불이 꺼져 있는데 뒷마당 곳간에는 불이 살아 있었다. 곳간 앞을 오가는 그림자가 여섯. 여섯 다 승복이 아니었다. 담장 안쪽으로 개 짖는 소리 대신 쇠 부딪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비구니 암자의 밤에서 나는 소리로는, 하나같이 낯선 것들이었다. 바람이 바뀌자 기름 냄새가 실려 왔다. 병기 기름의 냄새는 등잔 기름과 다르다. 더 검고, 더 차다.곳간 앞 여섯 그림자의 교대는 반 시진마다였고, 교대마다 군호(軍號)가 오갔다. 절 마당에서 군호라니. 진묵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샐 뻔했다. 저들은 숨긴 것에 맞는 격식을 차리느라, 숨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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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안부

무기고 임자의 수결. 그 넉 자가 서재의 밤을 차지하고 있는 사이— 안채에는 청첩이, 다과의 낯을 하고 왔다.감찰 허도위가 왕비께 문안을 청한다는 것이었다. 경성 온부의 안부를 전할 겸, 다과나 한 상 하자는 청. 물리칠 명분도 있었으나 온보요는 받았다. 저울이 달겠다는데 달리지 않으면, 저울은 더 궁금해하는 법이다.가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 진묵은 청첩을 한 번 훑고 도로 밀었다. 가라 마라 하지 않았다. 대신 나서는 그녀의 너울을 제 손으로 씌워 주며, 한 마디만 얹었다. 듣기만 해라. 답은 집에 와서 정하고.집이라는 말이, 너울 안에서 오래 울렸다.다과상은 객관 정청에 차려졌다. 시비 둘과 방어멈이 뒤에 시립하고, 감찰 쪽은 서리 하나뿐이었다. 낯익은 서리였다. 연회의 밤, 앵아와 보지 않고 비켜서던 그 어깨."온부 대감께서는 강녕하십니다." 허도위가 찻잔을 밀며 운을 뗐다. "지난달 조회에서도 뵈었지요. 다만."다만, 뒤에 반 상 차림의 침묵이 놓였다."요즘 조정이 하 수상하여. 개국공신 댁도 예전 같지는 않다는 말들이 돕니다. 충심이야 변함없으시겠으나, 충심만으로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지 않습니까.""무서운 말씀입니다.""무서우라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허도위가 웃었다. "저희 가문과 온부가 서로 도울 일이 많다는 말씀이지요. 마마께서 북강에 계시니 더욱. 이를테면— 왕부의 병비가 장계의 숫자만 한지, 그런 소소한 것들 말입니다."찻김 너머로 값이 제시되었다. 가문의 안위를 저당 잡고, 왕부의 참을 사겠다는 것. 황제의 세작 노릇 위에 외척의 세작 노릇을 겹으로 얹으라는 흥정이었다.온보요는 찻잔을 들었다. 손끝 하나 떨리지 않게. 떨 일도 없었다. 이런 자리의 격이라면 세 살 전부터 배운 것이었다.찻상 위의 다과는 경성식이었다. 연꽃 문양 유밀과. 기름에 지져 꿀을 먹인 결이 노을빛으로 반질했고, 겹겹의 잎맥까지 눌러 새긴 문양이 경성 다방(茶房) 솜씨였다. 온부의 다과상에 늘 오르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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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덫

그날 밤 침상 위에는, 한 계절 치의 밑그림이 다 올라왔다.이불 위에 펼쳐진 것은 약도 한 장과 종이 석 장. 남안 창고와 술도가와 세곡선단의 도장들. 곳간지기의 자백을 적은 문서. 그리고 무(武)와 위(衛)를 창이 가로지른 낙인의 탁본. 등잔 빛이 그 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한 계절의 수확이 이불 위에서 반짝였다 어두워졌다 했다.종이들을 침상에 편 것은 서재를 피해서였다. 감찰이 온 뒤로 왕부의 벽들이 얇아졌다. 서재의 등불이 늦게 꺼지는 것도, 늦게 꺼진 다음 날 왕비가 늦잠을 자는 것도, 이제는 셋째 입을 거치면 객관까지 갔다. 침소만은 아직 왕부의 것이었다. 침소를 지키는 것이 방어멈의 반짇고리와 호위 아이의 귀라는 것을 아는 자는, 넷뿐이었다."쌀 도둑은 이제 언제든 잡습니다." 온보요가 도장 종이를 짚었다. "행수, 술도가, 곳간의 좀, 뱃길까지. 목만 치면 끝나옵니다.""한데 치지 말자는 낯이군.""예."그녀는 탁본을 도장 종이 곁으로 끌어왔다."쌀을 치면 요란해집니다. 요란해지면 쇠뇌가 숨습니다. 쇠뇌 백이 어디로 숨는지 모른 채 쌀 도둑 목이나 치는 것은— 여우 잡자고 몰이를 하다 범을 놓치는 격이옵니다.""하면.""쌀은 미끼로 두고, 병기를 뭅니다."진묵은 이불 위의 종이들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여인의 붓끝이 약도 위를 짚어 갔다. 봄 조운의 둘째 배가 뜨는 날, 남안 창고는 다시 움직인다. 움직이는 날에는 술도가의 배가 뜨고, 그 배는 물때를 탄다. 쇠뇌를 옮기려는 자들도 같은 물때를 탈 수밖에 없다. 감찰의 눈이 조운에 쏠리는 날이야말로, 딴 짐을 옮기기 가장 좋은 날이니까."둘째 배가 뜨는 날이 곧 덫이 닫히는 날이옵니다. 쌀 배는 요란하게 오게 두고, 조용한 배만 뭅니다.""물때가 언제냐.""엿새 뒤이옵니다. 그믐 물때이니, 달도 없습니다."엿새. 사내는 그 말을 받아 잠깐 침묵했다. 침묵의 결이 여느 때와 달랐다. 온보요는 그 결을 읽었다. 엿새 뒤 그 자리에는 창끝 백을 끌고 온 감찰이 있고, 금군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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