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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좀

작가: moominkiller
last update 게시일: 2026-07-22 20:55:37

잘 물었다— 는 치하를 받은 이튿날부터, 온보요는 사흘을 여느 때처럼 보냈다. 곳간 점고는 흠 없이 끝났다고 상엄이 소문을 냈고, 왕비는 봄맞이 살림에 바쁜 낯을 했고, 서재의 등불은 여느 밤처럼 늦게 꺼졌다.

기다림은 이번에도 밤이 데웠다. 사흘 밤 내리 이불째 감긴 채, 그녀는 낮에 못 다한 대목들을 어둠에 두고 사내와 나눴다. 곳간지기의 삯길, 술도가의 뒷문, 지붕 위의 아이가 넘긴 것들. 어둠 속의 문답은 이제 격식이 아니라 버릇이 되어 있었다. 버릇에는 값이 붙었다. 답 하나를 받을 때마다 사내의 입술이 어깨 어름 어딘가에 한 번씩 내려앉는 것이다. 값이라 우기기에는 자리가 매번 달랐고, 벌이라 우기기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 사흘 동안, 세 사람이 조용히 움직였다.

상엄은 곳간지기의 삼 년 치를 뒤졌다. 언제 왕부에 들어왔고, 삯은 어디로 보내고, 쉬는 날은 어디를 다니는지. 기별 시종은 저자에서 그자의 술값을 뒤졌다. 곳간지기의 녹봉으로는 마실 수 없는 술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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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0화. 덫

    그날 밤 침상 위에는, 한 계절 치의 밑그림이 다 올라왔다.이불 위에 펼쳐진 것은 약도 한 장과 종이 석 장. 남안 창고와 술도가와 세곡선단의 도장들. 곳간지기의 자백을 적은 문서. 그리고 무(武)와 위(衛)를 창이 가로지른 낙인의 탁본. 등잔 빛이 그 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한 계절의 수확이 이불 위에서 반짝였다 어두워졌다 했다.종이들을 침상에 편 것은 서재를 피해서였다. 감찰이 온 뒤로 왕부의 벽들이 얇아졌다. 서재의 등불이 늦게 꺼지는 것도, 늦게 꺼진 다음 날 왕비가 늦잠을 자는 것도, 이제는 셋째 입을 거치면 객관까지 갔다. 침소만은 아직 왕부의 것이었다. 침소를 지키는 것이 방어멈의 반짇고리와 호위 아이의 귀라는 것을 아는 자는, 넷뿐이었다."쌀 도둑은 이제 언제든 잡습니다." 온보요가 도장 종이를 짚었다. "행수, 술도가, 곳간의 좀, 뱃길까지. 목만 치면 끝나옵니다.""한데 치지 말자는 낯이군.""예."그녀는 탁본을 도장 종이 곁으로 끌어왔다."쌀을 치면 요란해집니다. 요란해지면 쇠뇌가 숨습니다. 쇠뇌 백이 어디로 숨는지 모른 채 쌀 도둑 목이나 치는 것은— 여우 잡자고 몰이를 하다 범을 놓치는 격이옵니다.""하면.""쌀은 미끼로 두고, 병기를 뭅니다."진묵은 이불 위의 종이들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여인의 붓끝이 약도 위를 짚어 갔다. 봄 조운의 둘째 배가 뜨는 날, 남안 창고는 다시 움직인다. 움직이는 날에는 술도가의 배가 뜨고, 그 배는 물때를 탄다. 쇠뇌를 옮기려는 자들도 같은 물때를 탈 수밖에 없다. 감찰의 눈이 조운에 쏠리는 날이야말로, 딴 짐을 옮기기 가장 좋은 날이니까."둘째 배가 뜨는 날이 곧 덫이 닫히는 날이옵니다. 쌀 배는 요란하게 오게 두고, 조용한 배만 뭅니다.""물때가 언제냐.""엿새 뒤이옵니다. 그믐 물때이니, 달도 없습니다."엿새. 사내는 그 말을 받아 잠깐 침묵했다. 침묵의 결이 여느 때와 달랐다. 온보요는 그 결을 읽었다. 엿새 뒤 그 자리에는 창끝 백을 끌고 온 감찰이 있고, 금군의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39화. 안부

    무기고 임자의 수결. 그 넉 자가 서재의 밤을 차지하고 있는 사이— 안채에는 청첩이, 다과의 낯을 하고 왔다.감찰 허도위가 왕비께 문안을 청한다는 것이었다. 경성 온부의 안부를 전할 겸, 다과나 한 상 하자는 청. 물리칠 명분도 있었으나 온보요는 받았다. 저울이 달겠다는데 달리지 않으면, 저울은 더 궁금해하는 법이다.가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 진묵은 청첩을 한 번 훑고 도로 밀었다. 가라 마라 하지 않았다. 대신 나서는 그녀의 너울을 제 손으로 씌워 주며, 한 마디만 얹었다. 듣기만 해라. 답은 집에 와서 정하고.집이라는 말이, 너울 안에서 오래 울렸다.다과상은 객관 정청에 차려졌다. 시비 둘과 방어멈이 뒤에 시립하고, 감찰 쪽은 서리 하나뿐이었다. 낯익은 서리였다. 연회의 밤, 앵아와 보지 않고 비켜서던 그 어깨."온부 대감께서는 강녕하십니다." 허도위가 찻잔을 밀며 운을 뗐다. "지난달 조회에서도 뵈었지요. 다만."다만, 뒤에 반 상 차림의 침묵이 놓였다."요즘 조정이 하 수상하여. 개국공신 댁도 예전 같지는 않다는 말들이 돕니다. 충심이야 변함없으시겠으나, 충심만으로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지 않습니까.""무서운 말씀입니다.""무서우라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허도위가 웃었다. "저희 가문과 온부가 서로 도울 일이 많다는 말씀이지요. 마마께서 북강에 계시니 더욱. 이를테면— 왕부의 병비가 장계의 숫자만 한지, 그런 소소한 것들 말입니다."찻김 너머로 값이 제시되었다. 가문의 안위를 저당 잡고, 왕부의 참을 사겠다는 것. 황제의 세작 노릇 위에 외척의 세작 노릇을 겹으로 얹으라는 흥정이었다.온보요는 찻잔을 들었다. 손끝 하나 떨리지 않게. 떨 일도 없었다. 이런 자리의 격이라면 세 살 전부터 배운 것이었다.찻상 위의 다과는 경성식이었다. 연꽃 문양 유밀과. 기름에 지져 꿀을 먹인 결이 노을빛으로 반질했고, 겹겹의 잎맥까지 눌러 새긴 문양이 경성 다방(茶房) 솜씨였다. 온부의 다과상에 늘 오르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그녀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38화. 낙인

    달이 없는 밤을 골랐다.정혜암의 뒷산에 오른 것은 진묵과 호위 시종, 둘뿐이었다. 왕부의 병사는 이번에도 쓰지 않았다. 백이 움직이면 소문이 잡히고, 둘이 움직이면 실체가 잡힌다. 말없는 계집아이 하나를 데려가는 것을 노강은 끝까지 말렸으나, 진묵은 한 마디로 접었다. 발소리가 없는 것이 백 명 몫을 한다고.떠나기 전, 서재에서 온보요가 두 사람의 채비를 손수 보았다. 먹빛 두건, 숯가루, 기름 안 먹인 신. 호위 아이의 옷고름을 여며 주는 왕비의 손을 아이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왕부에 와서 처음 받아 보는 손길이라는 것을, 손길을 주는 쪽은 몰랐다.진묵의 두건은 그녀가 맸다. 매듭을 당겨 여미는 동안 사내는 얌전히 서 있었다— 손만 빼고. 허리 뒤로 돌아간 손이 매듭 짓는 동안의 값을 미리 받아 갔다. 다 매고 물러서려는 손목을 붙들어, 안쪽 맥 자리에 입술을 오래 눌렀다. 무운을 빈다는 말 대신이었다.과연 그랬다.아이는 눈 녹은 산비탈을 밟는데 낙엽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진묵은 전장에서 그런 걸음을 몇 보았다. 그런 걸음들은 대개 오래 못 살거나, 아주 오래 살았다. 아이의 걸음에는 오래 살 쪽의 결이 있었다. 능선의 밤바람이 두건 틈을 파고들었다. 골짜기 아래로 정혜암의 지붕이 먹빛 속에 웅크려 있었다. 낮에 보면 엎드린 절이, 밤에 보니 숨은 짐승이었다.뒷산 능선에서 내려다본 암자는, 절이 아니었다.법당에는 불이 꺼져 있는데 뒷마당 곳간에는 불이 살아 있었다. 곳간 앞을 오가는 그림자가 여섯. 여섯 다 승복이 아니었다. 담장 안쪽으로 개 짖는 소리 대신 쇠 부딪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비구니 암자의 밤에서 나는 소리로는, 하나같이 낯선 것들이었다. 바람이 바뀌자 기름 냄새가 실려 왔다. 병기 기름의 냄새는 등잔 기름과 다르다. 더 검고, 더 차다.곳간 앞 여섯 그림자의 교대는 반 시진마다였고, 교대마다 군호(軍號)가 오갔다. 절 마당에서 군호라니. 진묵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샐 뻔했다. 저들은 숨긴 것에 맞는 격식을 차리느라, 숨긴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37화. 문초

    시주패의 낙인이 서재 등불 아래에서 밤을 나는 동안, 곳간지기는 산길을 제 발로 걸어 내려왔다. 날이 밝자— 그가 든 곳은 왕부 뒤채의 빈 방이었다.옥이 아니라, 빈 방이었다. 옥에 가두면 감찰의 귀에 들어가고, 감찰의 귀에 들어가면 윗선이 먼저 손을 쓴다. 좀 하나 없어진 것은 왕부 살림의 일이고, 살림의 일은 안주인의 소관이었다.문초는 온보요가 맡았다. 진묵은 곁방에 있었다. 있겠다는 것을 그녀가 말리지 않은 것은, 곁방의 침묵이 문초의 반이기 때문이었다. 벽 하나 너머에 삭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혀는, 매를 대지 않아도 절로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진다.매도 형틀도 없었다. 방에는 상 하나와 더운 국밥 한 그릇이 놓였을 뿐이었다. 뚝배기에 무와 파를 넣고 오래 끓인 장국이 뽀얗게 우러났고, 보리 섞인 밥 위에 수육 두 점이 얹혀 있었다. 굶은 자의 코에는, 그 김이 매보다 아팠다. 이틀을 굶고 밤새 산길을 걸은 자 앞에 김 오르는 국밥을 놓고,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기다렸다. 사내는 국밥과 왕비를 번갈아 보다가, 끝내 울음부터 터뜨렸다."소인은····· 소인은 그저 시키는 대로······.""압니다.""예······?""시키는 대로 한 것을 압니다. 그러니 묻는 것도 그것뿐입니다. 누가, 무엇을 시켰는지."당근과 채찍이 아니라, 당근과 저울이었다. 그녀는 사내 앞에 두 가지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 입을 다물면 왕부는 그를 감찰에게 넘긴다. 윗선이 손을 쓸 것이고, 그 손이 어떤 손인지는 산문 앞에서 이미 보았을 것이다. 둘. 입을 열면 그와 늙은 어미는 왕부의 사람이 된다. 좀이 아니라 증인으로.말을 마치고 그녀는 국밥을 새 그릇으로 바꾸게 했다. 식은 밥 앞에서 받는 자백과 더운 밥 앞에서 하는 자백은, 값이 다르다."산문이 어찌 닫혔는지, 알겠습니까.""·······.""쓸모가 끝난 좀은 구멍이 먼저 버립니다. 그대의 구멍은 어젯밤에 그대를 버렸어요."사내는 식은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수저를 들지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5화. 무명(無名)

    네 글씨를 저자가 처음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직 귓가에 남은 낮— 앵아가 운 것은 회랑 모퉁이, 해가 잘 드는 자리에서였다.우물가 물확에는 새벽 얼음이 아직 남아 있었고, 소쿠리 속 무명들은 언 채로 각이 서 있었다. 앵아는 그것을 안은 채 주저앉아, 소매로 눈가를 누르고 있었다. 죽은 어미의 기일이라 했다. 시비 둘이 곁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우물가의 늙은 어멈은 혀를 찼다. 볕이 눈물 자국 위에 고왔다. 울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아서, 더 멀리까지 들렸다.진묵이 그 앞을 지난 것은 군무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지나갔어야 할 걸음이, 멎었다."이름이 무엇이냐."회랑이 통째로 조용해졌다. 앵아가 젖은 낯을 들었다. 왕야가 시비의 이름을 물은 것은, 왕부 사람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었다."앵, 앵아라 하옵니다."진묵은 잠깐 그 눈물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노강을 돌아보았다."무명을 주어라."그는 다시 걸었다. 닿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두 마디와, 무명 한 장. 그뿐인 것이 회랑을 지나 부엌을 지나 반나절 만에 왕부를 한 바퀴 돌았다. 왕야가 변하셨다더라. 눈물에 약해지셨다더라. 부엌에서는 저녁쌀을 씻다 말고 셋이 머리를 모았고, 마구간의 늙은 마부는 콧방귀를 뀌었다가 이튿날 제일 먼저 회랑 쪽을 기웃거렸다. 고참 시비 하나만 아득한 낯으로 젊은 것들의 술렁임을 듣고 있었다.온보요는 그 모든 것을 제 창에서 보았다.보였다. 앵아가 앉은 자리는 볕의 자리이기 전에, 안채 창이 한눈에 걸리는 자리였다. 눈물은 소매에 눌리면서도 낯을 가리지 않는 각도로 흘렀다. 그리고 그 사람의 걸음이 멎은 자리— 마당의 눈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제 창에서 가장 잘 보이는, 정확히 그 자리였다.무대였다. 그것도 두 겹의 무대. 우는 쪽도 무대를 알았고, 멎어 준 쪽도 무대를 알았다. 극과 극이 서로를 관객 삼는 판을, 그녀는 바둑 두 수 앞처럼 훤히 읽었다.읽었는데.수틀 위에서 바늘이 두 번 헛디뎠다. 오후에는 갈 일도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35화. 좀

    잘 물었다— 는 치하를 받은 이튿날부터, 온보요는 사흘을 여느 때처럼 보냈다. 곳간 점고는 흠 없이 끝났다고 상엄이 소문을 냈고, 왕비는 봄맞이 살림에 바쁜 낯을 했고, 서재의 등불은 여느 밤처럼 늦게 꺼졌다.기다림은 이번에도 밤이 데웠다. 사흘 밤 내리 이불째 감긴 채, 그녀는 낮에 못 다한 대목들을 어둠에 두고 사내와 나눴다. 곳간지기의 삯길, 술도가의 뒷문, 지붕 위의 아이가 넘긴 것들. 어둠 속의 문답은 이제 격식이 아니라 버릇이 되어 있었다. 버릇에는 값이 붙었다. 답 하나를 받을 때마다 사내의 입술이 어깨 어름 어딘가에 한 번씩 내려앉는 것이다. 값이라 우기기에는 자리가 매번 달랐고, 벌이라 우기기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그 사흘 동안, 세 사람이 조용히 움직였다.상엄은 곳간지기의 삼 년 치를 뒤졌다. 언제 왕부에 들어왔고, 삯은 어디로 보내고, 쉬는 날은 어디를 다니는지. 기별 시종은 저자에서 그자의 술값을 뒤졌다. 곳간지기의 녹봉으로는 마실 수 없는 술을, 그자는 외상 한 번 없이 마시고 있었다. 술버릇도 캐어졌다. 취하면 곳간 자랑을 한다는 것. 왕부 곳간 열쇠가 제 허리에 있다고, 취한 입이 저자 술청에서 떠들었다는 것. 좀이 좀인 까닭은, 배가 불러도 입이 고픈 데 있었다. 호위 시종은 밤마다 곳간 지붕에 앉았다.나흘째 밤, 지붕 위의 눈이 결실을 보았다.자시 넘어 곳간 뒷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는 것. 곳간지기가 등불 없이 들어가 반 시진을 머물다 나왔다는 것. 나올 때 진 등짐이 들어갈 때보다 무거웠다는 것. 그리고 등짐이 향한 곳이 남안 창고 뒷골목의 술도가였다는 것."술도가라." 서재의 진묵이 낮게 되뇌었다."술도가는 쌀이 드나들어도 아무도 세지 않는 집이옵니다." 온보요가 약도 위에 점을 찍었다. "쌀이 술이 되면 장물의 낯이 지워지니까요. 남안 창고, 세곡선단, 하구 객주, 그리고 술도가. 도장 셋에 이제 넷째 발이 붙었습니다.""잡을 때가 되었군.""좀은 언제든 잡습니다. 다만."그녀는 약도에서 눈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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