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그룹 본사, 이진성은 손에 든 커피잔을 멍하니 쥔 채 서울 시내의 빽빽한 빌딩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귓가에는 며칠 전 회계팀 팀장이 건네고 갔던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뇌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번 분기 자금 집행 내역을… 회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부터 진성은 단 하루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이창수 회장은 평생을 검소함과 청렴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재벌 총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명품이나 사치스러운 생활과는 담을 쌓았고, 다른 대기업 오너들처럼 비자금을 숨기거나 자식들에게 편법으로 주식을 양도하는 일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진성은 그런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가끔 아버지의 차갑고 못마땅한 눈빛을 마주할 때면 가슴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집안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새엄마 고미혜 여사가 있었고, 자신이 악에 받쳐 밀어내도 끈질기게 ‘오빠, 오빠’하며 따라오던 이복동생 주연에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정을 준 적이 없었다. 커다란 태산의 본가, 진성에게 허락된 진짜 ‘자리’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그 지독한 소외감과 공허함의 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구원이 바로 성유진이었다. 고급스러운 외모, 간드러지게 귓가를 적시는 말투,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할 때도 오직 자신만의 완벽한 편이 되어 주는 여자. 마음이 헛헛하거나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을 받는 날이면 진성은 어김없이 유진을 찾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이 뺨을 스치고, 따뜻한 가슴에 파고들 때면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Last Updated : 2026-08-12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