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3년의 계약, 당신을 모른채 사랑에 빠지다.: Chapter 81 - Chapter 90

126 Chapters

81화. 말할 수 없는 진실

한편.성북구의 공공임대아파트.주연은 거실 식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미국 대학 홈페이지에는 며칠 전 제출한 휴학 신청이 정상적으로 접수되었다는 안내가 떠 있었다.주연은 화면 속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휴학 신청이 승인되었습니다.이제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선택을 한 것 같았다.물론 학교는 나중에 다시 다닐 수 있었다.하지만 부모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휴학까지 결정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주연은 노트북 화면을 천천히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제는 정말 숨길 수 없겠네.”그때 지혜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어?”지혜는 주연의 맞은편에 앉으며 커피잔 하나를 내밀었다.주연은 잔을 받아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휴학 신청.”“승인 됐어.”“잘됐네.”하지만 주연의 표정이 조금도 밝아지지 않자 지혜도 웃음을 거두고 주연을 바라 보았다.“왜?”“무슨 문제 있어?”주연은 두 손으로 따뜻한 커피잔을 감싸 쥐었다.“이제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하잖아.”“휴학까지 했는데 계속 미국에 있는 척할 수는 없으니까.”지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지.”“엄마한테는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고.”주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엄마도 걱정 하시겠지만 문제는 아빠야.”“회장님?”“응.”주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빠가 내가 한국에 있다는 걸 알게 되시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연락 하시겠어?”지혜의 표정이 굳었다.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최재혁.주연은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아빠는 분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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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서로 다른 욕망

태산그룹 본사, 이진성은 손에 든 커피잔을 멍하니 쥔 채 서울 시내의 빽빽한 빌딩 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귓가에는 며칠 전 회계팀 팀장이 건네고 갔던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뇌리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번 분기 자금 집행 내역을… 회장님께 직접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부터 진성은 단 하루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 이창수 회장은 평생을 검소함과 청렴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재벌 총수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명품이나 사치스러운 생활과는 담을 쌓았고, 다른 대기업 오너들처럼 비자금을 숨기거나 자식들에게 편법으로 주식을 양도하는 일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진성은 그런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가끔 아버지의 차갑고 못마땅한 눈빛을 마주할 때면 가슴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집안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새엄마 고미혜 여사가 있었고, 자신이 악에 받쳐 밀어내도 끈질기게 ‘오빠, 오빠’하며 따라오던 이복동생 주연에게는 단 한 번도 따뜻한 정을 준 적이 없었다. 커다란 태산의 본가, 진성에게 허락된 진짜 ‘자리’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그 지독한 소외감과 공허함의 바닥에서 우연히 만난 구원이 바로 성유진이었다. 고급스러운 외모, 간드러지게 귓가를 적시는 말투,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할 때도 오직 자신만의 완벽한 편이 되어 주는 여자. 마음이 헛헛하거나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을 받는 날이면 진성은 어김없이 유진을 찾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이 뺨을 스치고, 따뜻한 가슴에 파고들 때면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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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틈이 벌어지다

창밖으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겨울 해를 바라보며, 유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몰라." 하연이 픽 소리 내며 웃었다. "설마 그 자식한테 진짜 사랑이라도 빠졌어?" 유진 역시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했다. "글쎄. 사랑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알아." "그 남자가 나 없이는 제 정신으로 버티지 못하게 만드는 거.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 하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부딪히듯 찻잔을 들었다. "그래, 맞아. 그게 원래 네 특기였지. 절대 먼저 조급해하지 마, 언니." 카페를 나와 백화점 문을 나서는 순간, 유진의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진성에게서 도착한 추가 메시지였다. [30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아.] 유진은 화면에 뜬 진성의 이름을 내려다보다가, 옅고도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화점 주차장을 빠져나와 자신이 머무는 고급 아파트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옷 매무새를 차분하게 정돈했다. 오늘 밤도 진성은 지치고 상처받은 아이처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늘 그랬듯,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헌신적인 연인의 얼굴을 한 채 그의 마음을 달래고 동시에 그의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갈 준비를 마칠 참이었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의 가면 뒤에 숨겨진, 끝을 모르는 유진의 서늘한 탐욕과 야망을 아직까지 이진성은 단 1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의 서울 하늘은 어두운 밤을 향해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둑한 야경이 내려앉은 청담동 고급 아파트 거실. 조명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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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반지를 놓지 못한 이유

아침 햇살이 창문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었다.주연은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그녀의 손끝에는 오래된 은빛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목걸이 끝에서 작게 흔들리는 반지 하나.그 반지를 바라보던 주연은 천천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차갑게 식은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벌써 2년이네."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그 반지는 결혼식 날, 재혁이 직접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던 결혼반지였다.화려한 예식도 아니었다.사랑을 약속하는 눈물도 없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계약서에 이름을 적었고, 그날 재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그때만 해도 주연에게 그 반지는 그저 계약의 상징일 뿐이었다.며칠 뒤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날.짐을 정리하던 주연은 반지를 작은 상자 안에 넣어 두려 했다.그 순간, 고미혜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주연아.""미안해, 그리고 사랑한다."“우리 딸 유학 가서라도 몸 잘 챙기고…”주연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고미혜는 아무 말 없이 반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더니 가느다란 체인을 꺼냈다.그리고 직접 반지를 체인에 끼워 목걸이를 만들었다."유학 가서는 손에 끼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잖니.""고민되면...""목걸이로라도 가지고 있어."주연은 웃으며 말했다."엄마.""이거 그냥 계약결혼 반지예요.""3년후면 끝날 결혼이예요."고미혜는 잠시 딸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인연은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란다."그날 주연은 별다른 의미 없이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처음에는 정말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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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같은 책을 고르는 사람

오전.주연은 어젯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재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여보세요."주연은 괜히 긴장한 마음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재혁 씨."잠시 침묵이 흘렀다.이제는 "대표님"이 아니라 "재혁 씨."그 호칭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았다."무슨 일 있습니까?"주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이번 주말에 행복나무 아이에게 책을 선물하려고 하는데...""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책 사러 가실래요?"말을 마친 순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데이트를 신청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았을까.잠시 정적이 흘렀다.재혁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주연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결국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내일 오후라면 가능합니다."주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요?""네.""그럼 내일 뵐게요."전화를 끊은 뒤에도 주연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가슴에 안고 웃고 있었다.다음 날 오후.서울의 한 대형 서점.재혁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짙은 네이비 코트 차림의 그는 한 권의 경제서를 들고 있었지만 페이지는 거의 넘어가지 않았다.그때."재혁 씨."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그는 고개를 들었다.아이보리 니트와 롱스커트를 입은 주연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기다리셨어요?""아니요.""...방금 왔습니다."거짓말이었다.그는 20분이나 먼저 와 있었다.두 사람은 아이들 코너로 향했다.주연은 책을 한 권씩 펼쳐 보며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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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그의 어린 시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창밖으로는 겨울밤의 불빛이 강물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고, 레스토랑 안에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주연은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조용히 재혁을 바라보았다.조금 전 서점에서 아이들 책을 고르던 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외우려 애쓰던 모습.어떤 책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그리고 아이들을 생각하며 미소 짓던 모습.그런 사람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지금의 사람이 되었는지 문득 알고 싶어졌다.주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재혁 씨."재혁이 고개를 들었다."아까...""예전 이야기는 재미없는 이야기라고 하셨잖아요.""...네.""그래도 듣고 싶어요.""재혁 씨가 어떤 사람인지."잠시 침묵이 흘렀다.재혁은 컵에 담긴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세히 들려준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달랐다.그녀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판단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이상한 믿음이 들었다.재혁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육원에 들어갔습니다."주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희망 보육원이었습니다.""그날도 겨울이었어요.""눈은 오지 않았지만...""지금처럼 많이 추운 날이었습니다."재혁의 시선이 천천히 과거를 향했다."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그 한마디에 주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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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당신에게 주는 위로

한강의 야경이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재혁의 검은 세단은 조용한 도로를 따라 성북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뒷좌석에는 오늘 두 사람이 함께 고른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주연은 뒤를 돌아보다가 미소를 지었다."오늘 책을 정말 많이 샀네요."재혁도 백미러로 책들을 한번 바라봤다."생각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 많더군요."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책은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주연이 고개를 돌렸다."네?""무겁기도 하고.""이번 주말 행복나무에 갈 예정이니 제가 직접 가져가겠습니다."주연은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그 짧은 대화 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전보다 훨씬 편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어느새 차는 주연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재혁은 언제나처럼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조심해서 들어가세요."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재혁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주연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시 걸어왔다.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재혁의 눈을 바라봤다.그 눈빛에는 오늘 들었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혼자 견뎌 온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주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재혁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주연 씨..."주연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오늘은...""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그녀는 아주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리고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짧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긴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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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친구의 충고

주연을 집 앞까지 다정하게 데려다준 뒤, 재혁은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고층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 문이 닫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에도 재혁의 입술 끝에는 여전히 아스라이 묻어나는 온기가 가시지 않고 있었다.‘이건… 당신에게 드리는 저의 위로예요.’조심스럽지만 진심을 담아 건네던 주연의 목소리와 눈빛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며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아직 결혼이라는 계약에 묶여 있었지만, 그 속에 피어난 감정은 이제 완벽한 진심으로 스며들고 있었다.재혁은 긴 숨을 내쉬며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찰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화면에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민성.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성의 목소리는 평소의 여유롭고 능청스러운 톤과 달리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야.""시간 있냐?"재혁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물었다."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어?""술 한잔하자.""이 밤중에 갑자기?"잠시 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그냥.""오늘은 네 얼굴이 좀 보고 싶다."친구의 목소리에 담긴 미세한 피로와 헛헛함을 알아챈 재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알겠다.""삼십 분 뒤.""늘 가던 그곳에서 보자."청담동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한 프라이빗 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구석진 부스 자리에 앉아 있는 민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혁이 다가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민성 앞의 테이블 위에는 이미 독한 위스키 잔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꽤 늦었네, 최 대표.""차가 좀 막혔어. 미안하다."재혁은 민성의 맞은편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며 바텐더를 향해 가벼운 칵테일을 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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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지우려는 온도

친구인 재혁과 무거운 술자리를 마치고 헤어진 민성은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차를 돌리지 않았다.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묘한 허전함과 지혜를 향한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재혁의 충고대로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서늘한 공백을 견딜 수 없었던 민성은 결국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지금… 뭐 해?""어머, 민성 씨?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혜진의 목소리는 반가움으로 젖어 있었다. 평소 두 사람이 필요할 때만 가볍게 만나 몸을 섞던, 깊은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였다."지금 갈게."짧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민성은 곧장 혜진의 오피스텔로 향했다.도착한 민성을 맞이한 혜진은 오랜만의 방문에 기분이 좋은 듯, 평소보다 훨씬 짙은 향수를 뿌리고 아슬아슬한 슬립 차림으로 그를 반겼다."오늘따라 연락도 없이 웬일이에요? 얼굴이 왜 이렇게 굳어 있어…"혜진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민성의 목에 두 팔을 감싸 안으며 몸을 밀착해 왔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체온과 자극적인 손길은 민성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그냥… 생각이 좀 많아서."민성은 혜진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두 사람의 몸은 곧장 침실로 이어졌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학, 하아……!침대 위에서 혜진은 민성을 완전히 사로잡겠다는 듯 더욱 적극적으로 몸을 얽어맸다. 그의 귓가에 야릇한 속삭임을 뱉어내고, 손톱으로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자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도록 강하게 매달렸다.하지만 민성의 몸은 혜진과 엉켜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혜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자신의 몸짓 하나에 눈이 멀어 광기 어린 시선을 보내던 민성이었지만, 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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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깊어지는 밤의 여운

혜진과의 잠자리에서도 지혜를 떠올린 민성은 평소와 달리 그녀의 집에서 밤을 지내지 않고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민성은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허전함을 덮기 위해 찾아갔던 곳이었다. 언제나처럼 자극적인 쾌락과 온기로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려 했지만, 오늘 밤은 어쩐 일인지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혜진의 품 안에서 격렬하게 얽혀 있던 순간조차, 그의 시선 끝에는 엉뚱하게도 행복나무에서 환하게 웃던 지혜의 맑은 미소가 아른거렸다.차가운 핸들 위에 손을 올린 채, 민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양손으로 핸들을 감싼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오늘도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밤을 보냈다.맛있는 음식.술.그리고 서로의 외로움을 잠시 잊기 위한 혜진과의 섹스.예전 같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달랐다.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에도 마음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오히려 더 깊은 허전함만 남아 있었다.민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왜 이러는 거지."눈을 감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혜진이 아니었다.행복나무 보육원 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던 지혜였다.아이의 운동화 끈을 묶어 주며 환하게 웃던 얼굴.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등을 다독이던 따뜻한 손길.그 평범한 장면들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민성은 피식 웃었다."...미치겠네."그녀는 화려하지 않았다.짙은 화장도,비싼 명품도,남자를 유혹하는 기술도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 앞에만 서면 마음이 조용해졌다.그 평온함이 낯설었다.그리고 조금 두려웠다.민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동안 그는 사람에게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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