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친구인 재혁과 무거운 술자리를 마치고 헤어진 민성은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차를 돌리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는 묘한 허전함과 지혜를 향한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재혁의 충고대로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서늘한 공백을 견딜 수 없었던 민성은 결국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지금… 뭐 해?""어머, 민성 씨?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혜진의 목소리는 반가움으로 젖어 있었다. 평소 두 사람이 필요할 때만 가볍게 만나 몸을 섞던, 깊은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였다."지금 갈게."짧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민성은 곧장 혜진의 오피스텔로 향했다.도착한 민성을 맞이한 혜진은 오랜만의 방문에 기분이 좋은 듯, 평소보다 훨씬 짙은 향수를 뿌리고 아슬아슬한 슬립 차림으로 그를 반겼다.휴대전화를 든 주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몇 년 동안 단 한 통의 안부 전화조차 나누지 않았던 오빠 진성에게 먼저 연락을 건넨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전화를 주고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진성 역시 휴대전화 화면에 뜬 이름을 한동안 바라봤다.이주연.저장되어 있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잘못 걸었나 싶었다.그래서 전화를 받으면서도 조금 의아했다.그런데 정말 주연이었다.신호음이 몇 번 울린 끝에 저쪽에서 낮고 무뚝뚝한 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오빠, 나야. 주연이.”전화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진성은 주연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온 것이 얼마 만인지 가늠하려는 듯 잠시 말을 잃었다.“……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진성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주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오늘 나…… 재혁 씨 집으로 완전히 들어왔어.”주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엄마, 아빠 모시고 저녁 먹기로 했거든.”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오빠도 시간 되면 와줬으면 해서.”전화기 너머로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주연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가만히 기다렸다.진성은 곧바로 거절하려 했다.“내가 거길 왜 가냐? 나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사실 정해진 약속은 없었다.그저 가고 싶지 않았다.아버지와 마주 앉는 것도 싫었고—주연과 재혁이 행복한 신혼부부처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오빠.”주연이 그를 불렀다.평소보다 조금 더 간절한 목소리였다.진성의 손이 멈췄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재혁의 아파트는 예전의 그 차갑고 삭막했던 공간이 아니었다.그동안 주연이 틈 날 때마다 백화점이나 소품 숍에서 하나둘 사 모았던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들, 거실 한켠을 화사하게 밝히는 작은 화분들, 그리고 벽마다 걸린 따뜻한 색감의 그림 액자들까지. 집안 곳곳에 주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냉기만 돌던 모던한 인테리어는 이제 완벽하게 ‘진짜 사람이 사는 온화한 신혼집’으로 변모해 있었다.두 사람은 캐리어를 현관에 세워두고 거실에 나란히 서서 집안을 둘러보았다."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우리 집 같네."주연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둘러보자, 재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당연하지. 이제 온전히 내 아내가 채워 넣은 우리 집이니까. 앞으로 여기서 매일 눈을 뜨고 잠들 거라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심장이 뛰는데."“오늘 저녁 때 아버님, 어머님 오시라고 했어.”재혁은 현관에 놓인 주연의 캐리어를 바라봤다.“딸이 신혼집에 제대로 들어온 첫날인데 부모님도 오셔야지.”주연은 잠시 재혁을 바라보다 웃었다.말은 태연하게 했지만—그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다.주연은 집을 한 번 둘러 보았다.소파 위에는 주연이 고른 쿠션이 놓여 있었고—거실 한쪽에는 작은 화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벽에는 며칠 전 주연이 고미혜와 함께 고른 작은 그림 액자와 식탁 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용할 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그리고 주방에는 새로 산 그릇과 조리도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집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재혁이 말했다.“이제야 집 같아.”그녀는 말없이 재혁의 손을 잡았다.“앞으로 더 많이 바뀔 거예요.”“얼마든지.”“나중에 마음
토요일 아침. 평소 주말이면 조금은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하던 재혁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너무 이른가 싶어 잠시 고민했지만 다시 누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은 주연이 오는 날이었다. 재혁은 침대 옆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내일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자리에 주연이 있을 것이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이틀이 이렇게 길 줄이야.” 혼잣말을 하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재혁은 집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일찍부터 유명 베이커리에 들러 주연과 지혜를 위해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정성스럽게 포장한 재혁은 지혜의 아파트 현관문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밝은 얼굴의 주연이 그를 맞이했다. 지혜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주연이 빨리 데려가고 싶어서 아침까지 사 들고 오신 거죠?” 재혁은 잠시 지혜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대답했다. “들켰네요.” 지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정이라도 하셔야죠.” “사실인데 굳이 왜요?”
며칠 전. 이경환은 중요한 손님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서울의 유명 한정식집을 찾았다. 지인과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그는 복도 끝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아들 민성이었다. 이경환의 걸음이 멈췄다. 민성은 혼자가 아니었다. 한 여자와 함께였다. 아들이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야 낯설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평소 거만하고 냉소적이기만 하던 아들이었다. 세상을 비뚤어진 채 살아오며 여자에게 마음을 담아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이라곤 생판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민성은 평생 처음 보는 눈빛으로, 한 여자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듯 룸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을 다루듯, 지극히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이경환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평소의 민성이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를 만나면서도 단 한 번도 저런 눈으로 여자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누구지? 박지민은 아니었다. 민성이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아침. 오랫동안 사채업을 하며 수많은 사람의 뒷조사와 정보 분석을 손쉽게 주물러 온 이창수였다. 여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여자 하나 알아봐.” 그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한정식집을 나서며 사람을 시켜 확인해 둔 사진이었다. “어디까지 알
조금 전까지 환하던 표정도 미세하게 굳었다.고미혜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아직 공부 남았잖아.”“……응.”“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주연은 포크를 내려놓았다.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오히려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다만—일부러 마음 한쪽에 밀어두고 있었을 뿐이었다.“내년에는…….”주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남은 공부는 끝내고 싶어요.”고미혜는 놀라지 않았다.주연이 건축가라는 꿈을 얼마나 오래 품어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다 주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재혁 씨한테 아직 말 못 했어요.”“학교 얘기를?”“응.”주연은 시선을 내렸다.“말해야 하는데…….”손가락이 물잔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재혁 씨 얼굴 보면 말 못 하겠어요.”“…….”주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다시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어떻게 해요.”고미혜는 아무 말 없이 딸을 바라봤다.“주연아.”“그리고 나도 싫어요.”주연이 고개를 들었다.“이제는 나도 재혁 씨랑 떨어져 있기 싫어.”그 말에는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그런데 공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고미혜는 천천히 딸의 손을 잡았다.“그럼 포기하지 마.”주연이 엄마를 바라봤다.“엄마…….”“결혼했다고 네 꿈을 포기할 필요는 없어.”“하지만 재혁 씨가…….”“그건 네가 먼저 결정할 일이 아니야.”주연이 눈을 깜빡였다.고미혜가 부드럽게 말했다.“재혁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재혁이한테 물어봐야지.”“…….”“네가 혼자
요즘 주연의 휴대전화에는 유난히 ‘엄마’라는 이름이 자주 떴다. 본가에 다녀온 이후, 주연과 어머니 고미혜 여사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애틋하고 각별해졌다. 마치 지난 2년 동안 훌쩍 지나쳐버린 시간이라도 보상받으려는 듯, 두 사람은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았고 자주 얼굴을 마주했다. 미국에 있는 2년 동안에도 고미혜와 연락을 완전히 끊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연이 먼저 거리를 두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집이 그리웠고— 집이 그리워지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그러다 보면 자신이 도망치듯 떠나왔다는 사실까지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게 안부만 주고받았다. 재혁이 바쁘게 회사를 돌보는 낮 시간, 주연은 주로 엄마와 함께 백화점을 찾았다. 텅 비어 있던 재혁의 아파트를 진짜 온기가 감도는 ‘신혼집’으로 채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식기부터 아기자기한 소품, 침구류까지 고미혜 여사의 세심한 조언을 받아가며 하나둘씩 장만했고, 그 과정에서 서툴기만 하던 살림 노하우도 엄마로부터 조금씩 배워나가는 중이었다. “주연아, 이건 어때?” 고미혜가 흰색 접시를 들어 보였다. 주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쁘긴 한데 너무 얌전하지 않아요?” “매일 쓰는 건 이런 게 제일 안 질려.” “그래요?” “응. 화려한 건 몇 번 쓰면 손이 잘 안 가.” 주연은 진지한 얼굴로 접시를 바라봤다. “그럼 이걸로 할까?” “네가 마음에 들어야지. 엄마 집 아니고 네 집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