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경회루에서의 핏빛 선언이 있은 지 불과 하루.
조정의 공기는 완벽하게 뒤바뀌어 있었다.만조백관은 어전에서 섭정이 뽑아 들었던 시퍼런 단검과 그 서늘한 살기를 똑똑히 기억했다.‘섭정의 영혼은, 역적 가문 출신이었던 그 계집에게 완벽하게 저당 잡혀 있다.’
대신들의 머릿속에 그 사실이 기정사실로, 아니 절대적인 생존의 공식으로 박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한들, 권력의 정점에 선 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관료들의 본능이었다.권력의 향방을 기가 막히게 냄새 맡는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취선당 앞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섭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든 대신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앞다투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섭정 대감!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조선은 그야말로 완벽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성균관에서 수백 명의 유생을 율법의 논리로 굴복시킨 사건은, 이헌을 단순한 권력자나 폭군이 아닌 ‘조선 제일의 현군(賢君)’이라는 신화적 존재로 격상시켰다.“대감, 압록강 너머 여진족 부락의 추장들이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조공을 바치겠다며 국경을 넘어왔사옵니다.”“명나라 황제 또한, 우리 조선의 촘촘한 세법과 압도적인 군사력에 위협을 느낀 듯, 평화 조약을 맺자는 사신단을 파견하였사옵니다!”병조와 예조의 판서들이 벅찬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조선 건국 이래 그 어떤 왕도 이룩하지 못한 경이로운 업적.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오직 내부의 완벽한 율법적 통제와 압도적인 국가 시스템만으로 외세마저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 것이다.하지만 취선당의 화려한 서안 뒤에 앉아 이 보고를 받는 이헌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건조했다.“알았다. 예조는 명나라 사신을 맞을 준비를 하고, 병조는 여진족의 조공 물품을 빠짐없이 장부에 기록하여 호조로 넘겨라. 단 한 뢴의 횡령이라도 발각되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예! 섭정 대감!”대신들이 썰물처럼 물러가고, 집무실에는 다시 짙은 정적만이 내려앉았다.이헌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서안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 서류들을 텅 빈 눈으로 응시했다.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 비친 활자들은 조선 팔도를 호령하는 군주의 승전보였으나, 그의 머릿속은 미칠 듯한 허무함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세상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쉽군.”이헌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건조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현대 변호사의 법리적 지식과 권력을 휘
그의 거대한 신형이 다가오자, 앞줄에 앉아 있던 유생들이 본능적으로 숨을 삼키며 움찔거렸다.“그렇다면 본 섭정은 맹자(孟子)의 양혜왕편으로 답해 드리지오.”이헌의 눈동자가 대사성을 향해 흉흉하게 번뜩였다.“무항산 무항심(無恒産 毋恒心). 백성들에게 일정한 생업과 재산이 없으면, 도덕적인 마음도 유지할 수 없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셨소. 묻겠소, 대사성.”이헌의 걸음이 대사성의 코앞에서 멈췄다.“지난 십 년간, 그 잘난 훈구파 대신들이 덕(德)과 교화를 부르짖을 때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소?”“그, 그것은…….”“수만 명의 백성이 가뭄에 굶어 죽어갈 때, 당신들이 말하는 그 위대한 도덕이 백성들의 입에 쌀 한 톨이라도 넣어 주었소? 아니지. 오히려 그 잘난 도덕의 탈을 쓴 권력자들이 관아의 창고를 비우고 뒤로 은표를 챙겨 기생의 치마폭에 처박았소!”이헌의 사자후가 명륜당의 담장을 뒤흔들었다.“법이 없으니 권력자들은 부끄러움을 잊었고, 백성들은 항산(恒産)을 잃고 자식을 팔아넘겼소! 당신들이 목구멍으로 부르짖던 그 알량한 덕(德)이, 이 조선을 지옥으로 만들었단 말이오!”“……!”대사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으나, 감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달 떨었다.이헌은 수백 명의 유생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으며, 서늘하고도 명징한 논리의 칼날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내가 휘두른 율법이 가혹하다 하였느냐. 진시황의 폭정이라 하였느냐.”이헌이 발걸음을 멈추고, 명륜당 한가운데서 양팔을 넓게 벌렸다.&ld
우의정이 사약을 마시고 훈구파가 궤멸하자, 조정에는 유례없는 고요가 찾아왔다.지방 토호들의 자금줄이 끊기고 실무에 능한 젊은 관료들이 그 자리를 채우면서, 조선의 조세 시스템은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끝난 직후의 평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불씨를 잉태하기 마련이었다.“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어전 회의가 열린 편전.사간원의 대사간이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두루마리를 쫙 펼쳐 들었다.그의 뒤로는 영남과 기호 지방에서 올라온 수백 장의 연명 상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섭정 대감의 정치는 참으로 무자비하옵니다! 실적과 숫자로만 관료들을 옥죄고, 조금이라도 법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목을 치는 작금의 행태는, 조선이 수백 년간 지켜온 유교적 도덕 정치(道德政治)를 근본부터 훼손하는 짓이옵니다!”대사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젊은 관료들이 숨을 죽였다.“섭정께서는 덕(德)과 교화(敎化)로 백성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오직 가혹한 형벌(刑)과 법치(法治)로만 세상을 옭아매려 하시옵니다! 이는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진나라의 폭군 진시황(秦始皇)과 다를 바가 없사옵니다!”“……!”진시황. 폭군의 대명사.조선의 심장부에서 섭정을 향해 가장 모욕적이고도 치명적인 사상적 반기가 터져 나온 것이다.스릉-!어좌 곁을 지키던 흑위대장이 살기를 뿜으며 칼자루를 쥐었다.감히 섭정을 오랑캐의 폭군에 비유하다니, 당장 목을 쳐도 할 말이 없는 대역죄였다.하지만.“칼을 넣어라.”이헌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어전을 울렸다.그는 용상 아
문풍지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들려오는 가녀린 숨소리.그 소리가 이헌의 귓가에 닿는 순간, 바위처럼 굳어 있던 그의 어깨가 그제야 미세하게 떨리며 억눌렀던 숨을 토해냈다.‘살아 계시는구나.’이헌은 툇마루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두 눈을 꾹 감았다.방 안의 그녀가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쉴 때마다, 이헌 역시 그 호흡에 자신의 숨결을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게 맞춰 쉬기 시작했다.그녀가 숨을 들이마시면 자신도 숨을 들이마셨고, 그녀가 숨을 내쉬면 자신도 숨을 내쉬었다.그것은 마치 자신의 생명줄이 그녀의 호흡 하나에 완벽하게 종속되어버린 짐승의 맹목적인 의식과도 같았다.“…….”자신이 건넨 자유의 서류를 뜯어보지도 않은 채, 대군저에 남아 숨죽이고 있는 여인.그녀는 단 한 번도 문을 열고 나와 이헌을 마주하지 않았다.끼니도 최소한의 것만 넘겼고, 방 안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내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스스로를 완벽한 고립 속에 가두고 있었다.자신을 향한 앙심.자신이라는 괴물의 파멸을 지켜보겠다는 그 서늘한 증오.이헌은 툇마루를 짚은 두 손에 미친 듯이 힘을 주었다.그녀의 그 끔찍한 묵언과 저주가 뼛속까지 시리도록 아팠지만,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곁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그 단 하나의 사실이 미칠 듯한 안도감으로 다가왔다.‘제가 지옥에 떨어지는 꼴이 보고 싶어 떠나지 않으신 것이라면.’이헌의 창백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기꺼이…… 매일 밤 이 문밖에서 아가씨의 숨소리만 핥으며 말라 죽어가는 꼴을 보여드리겠습니다.’그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겨울의 추위조차 느끼지
이 구역질 나는 세상 속에서, 오직 단 한 사람.그녀만이 이 더러운 섭리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었다.자신이 완벽한 자유를 선언하고 거대한 부를 안겨주었음에도, 그녀는 결코 고개를 숙이거나 타협하지 않았다.자신을 향해 거짓으로 미소 짓지도 않았고, 권력에 기대어 안락을 구걸하지도 않았다.그녀는 그저 그 차가운 방 안에서, 살을 에는 듯한 고통과 자신의 존엄을 묵묵히 끌어안은 채 가장 무겁고 굳건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아가씨야말로……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결한 존재이십니다.’이헌의 흔들리던 눈동자에, 맹목적이고도 광적인 신앙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그녀의 그 끔찍한 침묵과 증오조차, 이제 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의 완벽한 증거로 다가왔다.그녀가 자신을 혐오하여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마저도, 그녀가 이 더러운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하고 투명한 증명이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이헌은 겉옷을 걸칠 생각도 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겨울밤의 찬 바람이 살갗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지만, 그는 뼛속까지 시린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다.그의 무거운 발걸음이 멈춘 곳은, 서연이 머무는 안채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외곽 담벼락 앞이었다.감히 처소 문앞까지 다가갈 용기조차 잃어버린 이헌은, 그저 짐승처럼 어둠 속에서 담벼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거칠고 차가운 돌담의 감촉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을 타고 서늘하게 전해졌다.“…….”이헌은 돌담에 이마를 기댄 채, 느리고 처절한 숨을 내쉬었다.담장 너머의 어딘가에는 그녀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숨 쉬고 있을 터였다.‘이 얄팍하고 역겨운 세상의 권력자
경회루에서의 핏빛 선언이 있은 지 불과 하루.조정의 공기는 완벽하게 뒤바뀌어 있었다.만조백관은 어전에서 섭정이 뽑아 들었던 시퍼런 단검과 그 서늘한 살기를 똑똑히 기억했다.‘섭정의 영혼은, 역적 가문 출신이었던 그 계집에게 완벽하게 저당 잡혀 있다.’대신들의 머릿속에 그 사실이 기정사실로, 아니 절대적인 생존의 공식으로 박혀버린 것이다.아무리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한들, 권력의 정점에 선 자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관료들의 본능이었다.권력의 향방을 기가 막히게 냄새 맡는 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취선당 앞은 진풍경이 벌어졌다.섭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든 대신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며 앞다투어 무릎을 꿇고 있었다.“섭정 대감!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집무실 한가운데 엎드린 이조 참판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목놓아 울부짖었다.그의 목소리는 과장되게 떨리고 있었으며, 억지로 쥐어짜 낸 눈물이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소신,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피눈물을 흘렸사옵니다! 십 년 전, 고(故) 서 판서 대감께서 그토록 억울하게 모함을 받으실 때, 감히 바른말을 올리지 못했던 이 비겁한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사옵니다!”그의 곁에 엎드린 예조 판서도 질 세라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그러하옵니다! 서 판서 대감이야말로 조선의 진정한 충신이자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빛이셨사옵니다! 이제라도 그 숭고한 명예가 섭정 대감의 율법으로 회복되었으니, 국가에서 사당을 지어 그 넋을 기려야 마땅하옵니다!”“또한, 그 모진 고초를 견뎌내신 영애 낭자의 정절과 효심을 기려, 조정에서 정려문(旌閭門)을 내려주심이 가할 줄로 아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