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을 그저 망령의 껍데기로 취급하며 비겁하게 안도감을 구걸했던, 스스로도 구역질 났던 이기적인 기만의 시간들.‘나 같은 쓰레기 살인마의 끝이, 이 전장의 더러운 진흙탕 바닥이라면…….’이헌은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오히려 너무도 벅찬 구원이요, 과분한 자비가 아니겠는가.’자신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기 방패가 되어 뒈지는 것.이것이 그녀가 자신에게 내리는 마지막 징벌이자, 자신이 온전히 ‘서연’이라는 한 여인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속죄였다.그녀가 나를 평생 용서하지 않고 저주한다 해도 좋았다. 그녀가 그저 따뜻한 곳에서 살아 숨 쉴 수만 있다면.“서연아…… 부디…… 나를 잊고 살아다오…….”이헌은 입가로 검붉은 피를 한 움큼 왈칵 토해내며, 마침내 지탱하던 장검을 놓쳐버렸다.그의 거대한 몸이 피투성이가 된 눈밭 위로 허물어지듯 쓰러지려 했다.“찔러라! 모가지를 베어라!”여진족 지휘관의 잔혹한 명령이 떨어졌다.수십 명의 적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이헌을 향해 시퍼런 창날을 사정없이 쑤셔 넣기 위해 달려들었다.죽음의 창끝이 이헌의 눈앞까지 다가왔다.이헌은 원통함도, 살고자 하는 발악도 없이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모든 것이 끔찍할 정도로 평온했다.그런데.그가 죽음의 심연으로 완벽하게 추락하려던 바로 그 찰나의 순간.쿠구구궁-!“크아아아아아악!”협곡 전체를 뒤흔드는, 짐승의 끔찍
Last Updated : 2026-10-08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