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Chapter 91 - Chapter 100

126 Chapters

제91화 매수된 기사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는 종이 잡지 대신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박현석이 새벽부터 정리해 보낸 기사 목록이었다. 제목만 읽어도 속이 서늘해졌다.‘현강 대표를 흔든 전직 하우스키퍼, 한명금융 후계자와의 관계는.’‘감금 피해 주장 뒤에 숨은 거래 의혹.’‘임신설까지 번진 현강의 사적 리스크.’ 기사들은 결정적인 사실을 거의 쓰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일각에서는’,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말 뒤에 추측을 쌓아 올렸다. 어젯밤 행사장에서 찍힌 내 사진도 있었다. 상대와 대화하던 순간만 잘라내 마치 말다툼을 벌인 것처럼 보이게 편집돼 있었다. 태윤이 화면을 내렸다.“법무팀에서 허위사실 부분부터 삭제 요청 넣고 있어. 포털에도 정정 자료 넘겼고.”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매체들 상대로 가처분까지 검토할 거야.”“응. 허위는 바로 대응해야 해.” 내 대답에 태윤이 잠시 나를 봤다.“다만 전부 없애려고 하지는 마.”“왜.”“우리가 기사 자체를 힘으로 지우려 든다는 인상을 주면, 사실관계보다 그 장면이 더 오래 남을 수 있어.”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상대를 무너뜨릴 방법부터 찾았을 것이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 질문이 먼저 나온 것이 조금 놀라웠다. 나는 태블릿을 다시 가져왔다.“보존부터. 기사 원문, 수정 이력, 게시 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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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화 증거로 가자

 오후가 되자 첫 번째 공식 입장이 나갔다. 수사 중인 한지후 사건과 윤서린의 회사 업무는 별개이며, 확인되지 않은 임신·친자 관련 정보와 사생활 추측에 대해서는 대응하지 않는다. 명백한 허위사실과 조작 자료는 법적 절차에 따라 정정과 삭제를 요청한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태윤은 처음 작성된 초안을 세 번이나 줄였다.“이 정도면 돼?”“응. 화난 티도 안 나.”“엄청 화났는데.”“그래서 잘했어.” 나는 기사 묶음을 다시 살폈다. 그중 병원 사진 하나가 눈에 걸렸다. 지후와 내가 병원 정원에서 마주 앉은 모습. 실제로 있었던 장면이지만 기사에는 ‘사건 직전까지 이어진 은밀한 접촉’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사진만으로는 촬영 날짜도, 대화 내용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같은 사진을 쓴 다른 매체에는 촬영 시간이 서로 다르게 적혀 있었다.“이상해.”“뭐가?”“여기는 오후 두 시라고 하고, 다른 기사는 오전이라고 해. 원본이 같은데 설명이 달라.” 태윤이 곧바로 박현석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었다.“사진 원본을 우리가 먼저 확보할 수는 없잖아. 병원 쪽 기록부터 보자.” 당시 나는 진료와 처치를 받았고, 병동 출입 기록과 간호기록이 남아 있다. 병원 보안영상이 보존 기간 안에 있다면 더 좋다. 법무팀은 즉시 병원에 관련 자료 보존을 요청했다.“사진 자체가 조작됐는지는 디지털 포렌식에 맡기고, 우리는 확실한 시간부터 맞추면 돼.” 내가 말하자 태윤이 한참 나를 바라봤다.“왜.”&l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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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로비에 나타난 서유라

 오후 두 시가 조금 지난 시각, 현강홀딩스 본사 로비에서 연락이 올라왔다.“서유라 씨가 대표님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박현석이 태윤에게 태블릿을 내밀었다. 로비 CCTV 화면에는 베이지색 수트 차림의 서유라가 보였다. 옆에는 변호사로 보이는 남자와 수행직원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출입 게이트 앞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약속은?” 태윤이 물었다.“없습니다. 본인은 대표님의 약혼자라며 즉시 면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회의실 안 공기가 묘하게 굳었다. 최근 기사에서 반복된 ‘원래 정해진 약혼녀’라는 프레임을 본인이 직접 확인시키러 온 셈이었다. 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내려가서 끝내지.”“잠깐.” 내가 말했다. 그가 나를 봤다.“대표가 직접 내려가면 저쪽이 원하는 그림이 될 수도 있어. 약혼 여부를 놓고 대표와 협상하는 사람처럼.”“그럼 계속 로비에 세워 둬?”“방문 절차대로 처리하면 돼.” 나는 목에 걸린 사원증을 확인했다.‘현강홀딩스 비서실 윤서린.’ 처음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이제 그 카드가 누구에게 받은 임시 장식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일정 조정도, 해외 파트너 응대도, 오늘 같은 위기 대응도 내 업무였다.“내가 내려갈게.” 태윤의 표정이 즉시 굳었다.“몸은?”“괜찮아. 박 실장하고 보안팀 같이 내려가면 돼.”“내가 같이 가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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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궁지에 몰린 다음 수

“기록?” 서유라가 낮게 웃었다.“윤서린 씨, 회사 명함 하나 달았다고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나 봐.”“명함 때문에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지금 직원들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고, 승인 없이 통제 구역 출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시면 보안 절차에 따라 퇴실을 요청하고, 필요하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유라의 수행직원이 주변을 살폈다.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몇몇 직원은 보안 안내를 받고 카메라를 내리고 있었다.“감히 나를 경찰에 넘기겠다고?”“누구든 같은 절차를 적용합니다.”“나는 서진물산 회장 딸이야.”“알고 있습니다.”“아버지가 마음만 먹으면 현강 거래처 몇 군데쯤은 하루 만에 돌릴 수 있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옆에 있던 변호사의 얼굴이 굳었다. 나도 놓치지 않았다.“방금 말씀하신 내용도 공식적인 의사 표시로 이해하면 될까요?”“뭐?”“최근 현강 거래처에 동일한 계약 재검토 요구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서진물산과 관계가 있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거라면, 법무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정확히 남기겠습니다.” 유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내가 언제 그런 뜻으로…….”“그렇다면 더 말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처음으로 그녀 옆 변호사가 앞으로 나섰다.“서유라 씨, 오늘은 돌아가시죠.”“놔요.”&ldqu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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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떠나는 사람의 착각

 금요일 저녁, 퇴근 준비를 하던 중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한 번 끊겼다가 다시 걸려왔다. 나는 바로 받지 않고 박현석에게 화면을 보여 줬다.“녹취 기능 켜고 받으시죠. 필요하면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회의실 문을 닫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윤서린입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기계로 변조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철벽 비서님. 회사 하나 지키는 게 생각보다 쉽죠?’ 말투는 바뀌어도 조롱하는 호흡은 익숙했다. 서유라.“용건만 말씀하세요.”‘당신 때문에 현강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궁금해서. 곧 알게 될 거예요.’ 통화는 짧게 끊겼다. 그리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경제 매체 여러 곳에서 알림이 쏟아졌다.‘현강홀딩스 일부 투자 건 회계처리 적정성 논란.’‘기관투자자, 현강 지배구조 리스크 재검토.’‘서진물산, 현강과의 모든 협력 논의 중단.’ 기사 대부분은 익명 제보와 ‘업계 관계자’를 근거로 했다. 그러나 시장은 사실이 확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태윤은 곧바로 재무·법무·IR 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자료를 정리하며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았다. 집에 돌아온 건 새벽이 가까워서였다. 태윤은 넥타이도 풀지 못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감사법인에서 다시 검토 들어갔어. 문제 될 건 없어.”“거래처는?”“세 곳이 신규 발주 결정을 미뤘고. 내일 설명하러 간다.” 그는 담담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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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서울역에서 돌아오다

 서울역 대합실은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전광판에 부산행 첫 열차가 떠 있었다. 나는 표를 사지 못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조차 정하지 않았다. 멀리 가면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태윤의 이름이 여러 번 떴다. 받지 못했다. 대신 메시지를 보냈다.‘안전해. 병원 일정도 지킬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곧 답이 왔다.‘어디야.’ 나는 화면을 껐다. 그 순간,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연락은 하겠다고 써 놓고 정작 필요한 정보는 숨기고 있다. 내 선택을 존중해 달라고 하면서, 상대에게 선택할 정보는 주지 않고 있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놓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서린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태윤이 뛰어왔다. 검은 스웨트 셔츠에 운동화, 머리는 제대로 말리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는 내 앞까지 와서 숨을 고르며 멈췄다. 손부터 뻗지 않았다.“……괜찮아?”“응.”“어디 아픈 데 없어?”“없어.” 그제야 태윤이 눈을 감았다 뜨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내가 네 위치를 뒤진 건 아니야. 박 실장한테 연락했고, 네가 택시 결제 내역을 회사 복지카드로 잘못 찍었더라.”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나 정말 바보네.”“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태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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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증거까지 닦지 마

 택시 뒷좌석에서 빗물이 옷자락을 타고 떨어졌다. 태윤은 내 손을 잡았다가 곧 힘을 풀었다.“세게 잡았어?”“아니.”“습관이 남아 있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네가 사라질까 봐 손에 힘부터 들어가.”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손바닥을 가볍게 눌렀다.“이제 안 사라져. 적어도 말도 없이 가는 건 안 할게.”“그 말이면 됐어.” 창밖으로 젖은 서울이 흘렀다. 성북동 집에 도착했을 때 둘 다 몸이 차가워져 있었다. 태윤이 먼저 욕실 쪽을 가리켰다.“씻어. 감기 걸리면 안 돼.”“너부터.”“서린아.”“대표님 내일 아침 재무회의 있죠?” 내가 일부러 업무 말투를 쓰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대표가 쓰러지면 회사가 더 위험해집니다.” 태윤이 나를 몇 초 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이럴 때만 비서야.”“평소에도 비서거든.” 그가 욕실로 들어간 뒤 나는 주방에 물을 올렸다. 생강차를 만들며 테이블 위 태블릿을 켰다. 기사들은 여전히 현강을 물어뜯고 있었다. 확정되지 않은 회계 의혹, 거래처 이탈 가능성, 대표의 사생활 리스크. 예전 같았으면 태윤은 모든 기사에 반박하려 했을 것이다. 지금은 법무팀이 허위 부분만 표시하고, IR팀이 투자자 질문을 분류하고 있었다. 나는 화면을 내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청소를 오래 하면 이상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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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사실과 소문을 가르는 법

 다음 날 아침, 현강 법무팀 회의실 벽 한쪽이 시간표로 가득 찼다. 유라가 현강 로비에 나타난 날. 홍보대행사 계약 체결일. 동일 문구 계정들의 최초 게시 시각. 서진물산 계열사에서 대행사로 지급된 비용 집행일. 그리고 정미숙이 보관하고 있던 업무 일정 중, 유라와 대행사 임원이 만난 날짜. 각각 하나만 놓고 보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서대로 놓으니 흐름이 보였다. 박현석이 말했다.“외부 변호사가 정미숙 씨 자료의 취득 경위와 원본성을 확인 중입니다. 대행사 내부 자료는 별도 법적 절차로 확보해야 하고요.”“그럼 아직 결론은 내리지 않는 게 맞네요.” 내가 말하자 법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 다만 대응 방향은 잡을 수 있습니다. 허위 기사 정정, 광고성 콘텐츠 표시 누락 여부 확인, 거래처에 유통된 자료의 발신 주체 확인.” 태윤이 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유라 개인을 공격하는 자료는 만들지 마. 회사가 피해 본 부분만 정리해.”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나는 그를 봤다.“왜?”“이번엔 이겨도 남는 방식으로 끝내고 싶어.” 태윤이 내 시선을 받았다.“상대가 더럽게 싸웠다고 우리까지 더러워질 필요는 없잖아.” 가슴 한쪽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그 말을 예전의 강태윤에게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뒤 나는 혼자 벽의 메모를 정리했다. 불필요한 추측에는 회색 표시. 확인된 기록에는 파란 표시. 추가 확인이 필요한 것은 노란 표시. 박현석이 지나가다 멈췄다.&l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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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혼자 가지 않는 약속

 유라의 시선이 내 손의 봉투로 떨어졌다.“협박하러 왔어요?”“아니요. 사실을 분리하러 왔습니다.” 통지서 첫 장만 꺼내 그녀에게 보여 줬다. 현강홀딩스의 사명과 로고를 자본 제휴가 성립된 것처럼 외부 자료에 사용하지 말 것. 미체결 조건을 확정 사항처럼 거래처와 투자자에게 설명하지 말 것. 현강이 요구한 것은 그 두 가지였다.“여기 계신 분들도 투자와 거래 판단을 합니다. 확정되지 않은 정보를 확정된 것처럼 전달하면 양쪽 모두에게 불이익입니다.” 유라가 코웃음을 쳤다.“하우스키퍼 출신이 경영을 말하네요.” 예전 같았으면 그 한마디가 피부 안쪽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 나는 명함을 고쳐 잡았다.“네. 하우스키퍼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지금은 대표이사 비서실에서 회의자료와 계약 조건을 확인합니다.”“그 정도 가지고.”“지난달 유럽 파트너 계약서의 환율 기준일 오류를 잡은 것도 저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협력사 임원이 나를 바라봤다.“그 건이 윤 비서였습니까?”“팀에서 같이 확인했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지금도 제 경력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라의 입가가 굳었다. 그때 다른 협찬사 임원이 다가왔다.“서 이사님. 조금 전에는 현강 측 동의도 끝났다고 들었는데요.”“실질적으로는 같은 얘기예요.”“실질적이라는 말로는 곤란합니다. 우리도 공동사업 검토에 반영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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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정미숙의 증언

 정미숙을 만난 곳은 외부 법률사무소의 작은 회의실이었다. 그녀 혼자 오지 않았다. 현강과 이해관계가 없는 변호사가 먼저 자료의 성격과 제출 범위를 설명했다.“정미숙 씨 본인이 업무 수행 과정에서 받은 메시지, 본인이 작성한 근무일지, 본인 계정으로 받은 일정표만 확인합니다. 제3자의 사적인 자료는 제외하겠습니다.”“그렇게 해 주세요.” 정미숙은 오래된 휴대전화와 얇은 파일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서진댁에서 일할 때 유라 씨가 외부 홍보회사 사람들을 집으로 몇 번 불렀어요. 회의 내용은 몰라요. 다만 차를 들이고 방을 잡는 건 제 일이었으니까 날짜가 남아 있죠.” 일정은 홍보대행사 계약 체결 직전과 정확히 겹쳤다. 또 한 장에는 운전기사에게 전달된 지시가 있었다.‘여의도 H빌딩 방문. 외부 노출 주의.’ H빌딩에는 해당 대행사 본사가 입주해 있었다.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하지만 계약서와 집행 내역을 연결해 줄 확인점은 될 수 있었다.“이걸 왜 남겨 두셨어요?” 내 질문에 정미숙이 씁쓸하게 웃었다.“나중에 일이 틀어지면 늘 우리한테 책임을 떠넘겼거든요. 그래서 내가 받은 지시는 내가 남겨 놨어요.” 나중에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면 기록이 필요했다는 뜻이었다. 면담이 끝난 뒤 자료는 변호사가 직접 보관했다. 나는 빈손으로 건물을 나왔다. 태윤이 보낸 차가 지하주차장 출구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걸음 남겨 두고, 검은 밴 한 대가 통로를 막듯 들어왔다. 문이 열리며 모자를 눌러쓴 남자 둘이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윤서린 씨죠?” 목소리가 이상하게 낮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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