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몰락한 상속녀, 7년 만에 첫사랑의 전속 하우스키퍼가 되었다: Chapter 21 - Chapter 30

36 Chapters

제21화 조금 덜 차가운 보석

“예쁘다…….” 뒤에서 들린 태윤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거울 속 그를 바라봤다.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니라 목 한가운데 놓인 푸른 보석에 머물러 있었다. 태윤의 손이 쇄골 가까이 다가왔다. 손끝이 닿기 전, 그는 잠깐 멈췄다.“만져도 돼?”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손바닥이 차가운 사파이어를 감쌌다.“잘 어울려. 네 피부가 밝아서 더 눈에 띄네.”“이런 걸 제가 하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비싸 보여요.”“준다고 한 적 없어.” 태윤이 거울 너머로 나를 봤다.“오늘부터 당분간 빌려주는 거야.”“왜요?”“내가 보고 싶어서.” 너무 솔직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그리고…… 네가 내 옆에 있다는 걸, 나도 좀 확인하고 싶고.” 그 말은 여전히 위험할 만큼 강한 집착을 품고 있었다. 목걸이는 아름다웠지만 목에 얹힌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일곱 해 전,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돈으로 네 인생을 사 주겠다고. 그 오만한 말로 태윤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밤. 지금 목에 걸린 보석은 마치 그 말이 다른 모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무거워요.” 내가 작게 말하자 태윤의 손이 멈췄다.“목이 아파?”“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이게 목걸이 같지 않아서요.” 거울 속 푸른빛을 바라봤다.“목줄 같아요.” 태윤의 표정에서 희미한 웃음이 사라졌다.“그렇게 느껴지면 빼.”“네?”“내가 채웠다고 해서 계속 하고 있을 의무는 없어.” 오히려 그 한마디가 낯설었다. 태윤은 내 목덜미 뒤로 손을 가져갔다가, 잠금장치에 닿기 전에 멈췄다.“지금 뺄까?” 나는 사파이어를 손끝으로 만졌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도, 이상하리만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순간도 함께 떠올랐다.“……아니요.”“확실해?”“오늘은 하고 있을게요.” 태윤의 눈이 깊게 흔들렸다.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다시 봤다. 목줄처럼 느껴지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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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병원에서 온 전화

 거울 속 푸른빛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답고, 비싸고, 지나치게 눈에 띄는 목걸이. 태윤의 집착을 그대로 형태로 만든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계속 보고 있네.”“너무 커서요.”“싫으면 내일 다른 걸 골라.”“다른 것도 준비해 뒀어요?” 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사실상 답이었다.“무서운 사람이네, 정말.”“이제 알았어?”“옛날부터 알았어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호텔을 나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대화는 많지 않았다. 목에 닿는 사파이어의 무게가 방금 전 일을 계속 떠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얼음처럼 차가웠던 보석이 어느새 체온을 머금어 미지근해져 있었다. 성북동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현관 앞에 차가 멈추자 관리 직원 두 사람이 문을 열기 위해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걸이를 손으로 가리려 했다. 너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뻔했다. 그때 태윤이 내 손목을 잡았다. 예전처럼 거칠게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그저 손을 잡은 채 낮게 말했다.“숨길 필요 없어.”“대표님은 안 부끄럽겠죠.”“응.”“저는 부끄러워요.” 그러자 손에서 힘이 풀렸다.“그럼 가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말은 퉁명스러운데 표정은 진지했다. 결국 목걸이 위로 재킷 깃을 조금 끌어 올렸다.“오늘은 이것만 양보할게요.”“내일은?”“내일은 내일 생각하고요.” 또 불만스러운 얼굴. 그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태윤이 말했다.“네 방 준비해 뒀어.”“제 방이요?”“상주 서비스 기간 동안 쓸 방. 서비스 업체랑도 정식으로 조정해 놨어. 근무 시간, 휴식 시간은 계약대로 지켜.” 나는 걸음을 멈췄다.“엄마는요?”“간병 인력은 병원 쪽이랑 연결해 놨어. 네가 직접 확인하고 싫으면 바꿔.” 도망갈 길을 막는 게 아니라, 적어도 선택할 틈을 남겨 둔 말이었다. 그 변화가 아직은 어색했다.“……알겠어요.”“그리고.” 태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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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도움을 청한 사람

 태윤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휴대전화를 다시 움켜쥐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지후였다. 지금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자 몇 번의 신호음 뒤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서린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 목소리를 듣자 겨우 붙잡고 있던 마음이 무너졌다.“엄마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어. 순환기 전문센터로 옮겨야 한대. 오늘 밤 안에 받을 곳도 정해야 하고…….”“알았어. 병원 이름 보내 줘. 우리 쪽 의료 네트워크에 연결 가능한 곳이 있는지 알아볼게.” 막혔던 숨이 조금 트였다.“고마워. 나, 뭘 먼저 해야 할지…….”“서린아.” 뒤에서 태윤이 불렀다. 돌아보자 손을 내밀고 있었다.“전화, 잠깐 줘.”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전화를 가슴 쪽으로 당겼다.“왜요. 제 문제예요.” 평소라면 억지로 가져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내민 채, 내가 결정하기를 기다렸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몇 초를 망설인 끝에 휴대전화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한지후.”“……강태윤이네.”“병원 연결은 내가 할게.”“서린이 일인데 네가 멋대로 정하지 마.”“알아.” 태윤은 나를 한 번 봤다.“치료 방법이나 전원지는 서린이랑 의료진이 결정하게 할 거야. 나는 자리 알아보고 비용 문제만 정리한다.” 잠시 멈춘 뒤 덧붙였다.“그리고 치료를 서린이한테 뭘 요구하는 조건으로 쓰지 않아.”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태윤은 곧 통화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돌려줬다. 이어서 자신의 전화로 비서실장에게 연락했다. 세명의료원 순환기센터 당직 교수, 의료협력팀, 전원 차량. 필요한 부서와 사람 이름이 빠르게 오갔다. 목소리는 낮고 사무적이었지만 판단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첫 번째가 안 되면 다음 센터로. 비용 얘기는 뒤로 미뤄. 환자 받을 곳부터 잡아.” 전화가 끝날 즈음에는 전원 후보와 담당 의료진까지 정리돼 있었다.“……왜 이렇게까지 해요?” 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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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오라고 했잖아

 엄마의 전원이 시작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창밖은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이송에 동행한 간호사에게 상태가 일단 안정적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소파 건너편에서는 태윤이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혼인신고서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마음을 더 흔들었다. 나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태윤아.” 옛날 호칭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검은 눈동자가 바로 나를 향했다.“약속 하나 해.”“말해.”“엄마 일도, 돈도, 내가 당신 말을 듣게 만드는 수단으로 쓰지 마.”“그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그리고…… 내가 싫다고 하면 멈춰.” 이번에는 아주 짧은 침묵이 있었다. 태윤의 얼굴에서 감정이 걷혔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알았어.”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처음부터 잘할 거라고 장담은 못 해. 하지만 멈추라고 하면 멈춘다.”“그 약속, 기억해.”“안 잊어.” 나는 혼인신고서를 다시 봤다.“그럼 서명할게.” 태윤의 눈이 크게 뜨였다.“동정이면 필요 없어.”“아니야.” 고개를 저었다.“이게 옳은 선택인지 아직 몰라. 당신을 전부 믿는 것도 아니고.”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그래도 내가 떠날 수 있다는 걸 알고도…… 지금은 남고 싶어.”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들었다.‘윤서린.’ 내 이름을 끝까지 쓰고 나자 검은 잉크가 종이 위에서 희미하게 빛났다.“증인 두 사람 서명은 나중에 받고, 접수하기 전에 나한테 다시 보여 줘.”“같이 갈 거야.”“구청에?”“그래. 네가 마지막까지 확인해.” 그 말에 조금 안심했다. 태윤은 서류보다 나를 더 오래 보고 있었다.“후회해도 난 쉽게 포기 안 해.”“그때는 그때 가서 얘기해요.” 내가 받아치자 입가가 슬쩍 풀렸다. 태윤이 얼굴을 가까이했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굳었다. 그러자 입술이 닿기 직전, 그가 멈췄다. 기다리고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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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천둥 아래의 체온

 태윤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다가왔다.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막 씻고 나온 체온과 익숙한 향이 짙어졌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몸은 솔직해서, 나도 모르게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태윤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떨고 있어.”“추워서 그래.”“이 방에서?”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태윤은 내 앞까지 와서 멈췄다.“무서우면 오늘은 돌아가.” 뜻밖의 말이었다.“오라고 한 건 당신이잖아.”“명령했어. 그래서 지금 취소하는 거고.”“그렇게 쉽게?”“안 쉬워.” 태윤의 시선은 내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지금 당장 안고 싶어. 그런데 네가 겁먹은 채면 아무 의미 없어.” 너무 솔직해서 뺨이 뜨거워졌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그거랑 이건 별개야.” 어제까지의 태윤에게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손끝이 내 뺨 쪽으로 다가왔다. 닿기 직전 멈춘 채, 내가 피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았다.“억지로 버티지 마.” 낮은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까웠다. 나는 눈을 내렸다.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이 사람에게 닿고 싶은 마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안 돌아가.” 태윤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나중에 내 탓 하지 마.”“싫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당신 탓 할 거야.”“너 진짜.” 어이없다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있었다. 내가 먼저 그의 가운 자락을 잡자 검은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허리에 팔이 감기고 몸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겹쳤다. 뜨거웠다. 숨이 차서 어깨를 밀자 그는 바로 떨어졌다.“괜찮아?”“……그런 얼굴로 묻지 마.”“무슨 얼굴.”“여유 하나도 없는 얼굴.” 태윤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너도 똑같아.” 시야가 흔들려 반사적으로 목에 팔을 둘렀다. 가슴에 귀가 닿았다. 빠른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나만 긴장한 게 아니었다. 태윤은 나를 침대 가장자리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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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눈을 감지 않은 밤

 천둥이 멀어지자 방 안에는 서로의 숨소리만 남았다. 태윤은 놀라울 만큼 서두르지 않았다. 내 몸이 굳으면 손을 멈추고 얼굴을 봤다. 그럴 때마다, 강태윤이 이렇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싶어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뭐야.”“아무것도.”“방금 웃었지.”“안 웃었어.” 눈을 흘기는 표정에 이번에는 정말 조금 웃고 말았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조금 전까지 애써 의식하지 않던 내 모습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반사적으로 팔을 가슴 앞에 올렸다. 태윤의 시선이 거기서 멈췄다.“가리고 싶으면 그대로 있어.”“……보고 싶은 거 아니야?”“보고 싶지.”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그래도 보여 달라고는 안 할 거야.” 너무 태윤답지 않은 말이라 오히려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참 망설이다가 내가 먼저 팔을 내렸다. 태윤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후회하지 마.”“아까부터 그 말만 해.”“내가 더 겁나니까.” 되묻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이번 입맞춤은 감정에 휩쓸려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었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고, 내 표정을 확인한 뒤 다시 가까워졌다.“태윤아.”“응.” 이름을 부르면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일곱 해 전의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일수록 삼켰다. 상대가 알아서 눈치채 주기만 바랐다. 지금이라고 갑자기 능숙해질 리 없다. 그래도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하고, 닿고 싶으면 침묵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는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더 가까이.” 태윤이 잠깐 눈을 크게 떴다.“……네가 말했다.” 다음 순간 단단한 팔이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만큼 가까운데도 이상하게 답답하지 않았다. 비 냄새가 남은 밤공기 속에서 나는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거리가 거의 사라진 뒤에도 태윤은 몇 번이나 내 얼굴을 확인했다.“아파?”“조금.”“그럼 멈출게.”“그 정도는 아니야.”“‘괜찮아’ 한마디로 넘기지 마.” 나무라는 말투와 달리 손길은 끝까지 조심스러웠다. 나도 모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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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밤이 끝난 자리

 긴 밤이 겨우 잦아들 무렵에는 빗소리도 한결 약해져 있었다. 태윤은 내 옆에 누운 채 한동안 거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맞잡은 손만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잠시 뒤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후회해?” 너무 작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의 차가운 강 대표라면 절대 입에 올리지 않을 질문이었다.“무서웠어.” 솔직히 답하자 얽힌 손가락이 굳었다.“그래도 후회는 안 해.” 그가 나를 돌아봤다.“내가 여기 왔으니까.”“……그래.”“대신.”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앞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결정하지 마. 싫다고 하면 오늘처럼 멈춰.”“알았어.”“진짜?”“지킬게.” 짧은 대답이었다. 거창한 맹세보다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태윤은 몸을 조금 일으켜 내 목 가까이 얼굴을 기울였다. 사파이어에는 손을 대지 않고 그 위의 맨살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계속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명령이 아니었다. 나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그건 앞으로 태윤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엄격하네.”“그동안 내가 너무 쉽게 넘어가 줬지.” 태윤은 쓴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일곱 해 전에 멈춘 시간이 오늘 밤 하나로 다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상처도, 의심도 아직 남아 있다. 그래도 처음으로 한 사람의 뜻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말로 밤을 끝냈다. 나는 그의 가슴에 뺨을 댔다.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제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눈을 뜨자 커튼 틈으로 흰 아침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밤새 창을 때리던 비는 멈췄고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으.” 몸을 일으키자 허리 주변에 남은 묵직한 피로가 어젯밤을 떠올리게 했다. 꿈이 아니었다. 옆자리 시트는 이미 식어 있었고 태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일하러 갔나.” 잠들기 전에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싫다고 하면 멈춰. 지킬게. 하룻밤 만에 믿을 수 있을 만큼 우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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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목에 남은 흔적

 뜨거운 물로 오래 씻어도 어젯밤의 감각까지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거울에 비친 목 가까이를 만지자 옅은 붉은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눈에 띄잖아.”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태윤이 몇 번이나 내 얼굴을 확인하던 모습이 떠오르면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나는 방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전날까지 입던 하우스키퍼 유니폼이 없었다. 드레스와 속옷도 정리돼 있었고, 대신 침대 옆 의자 위에 새 옷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흰 실크 블라우스와 검은 펜슬스커트, 새 스타킹까지. 누가 봐도 집안일을 하기 위한 옷은 아니었다.“……이걸 입으라는 거야?” 이번에는 메모조차 없다. 한숨을 쉬며 옷을 입었는데 얄미울 만큼 몸에 잘 맞았다. 어깨도, 허리도, 치마 길이도 손볼 곳이 거의 없었다.“사이즈까지 이렇게 정확한 건 좀 무서운데.” 예전 같았으면 그 불쾌함만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의 태윤을 봐 버린 탓에 단순히 화만 낼 수 없는 내가 더 얄미웠다. 옷을 갈아입고 복도로 나오자 아래층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갓 내린 커피와 버터가 익는 향이었다. 직원이 아침을 준비하는 줄 알고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입구에서 멈췄다.“……뭐 해?” 아일랜드 조리대 앞에 태윤이 서 있었다.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검은 앞치마를 두른 채 능숙하게 프라이팬을 움직이고 있었다. 강태윤이 아침부터 오믈렛을 굽고 있었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 한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다.“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야.” 등을 돌린 채 말해 어깨가 움찔했다.“……깨어 있었으면 말이라도 해 주지.”“자고 있었잖아.”“그 말이 아니라.” 태윤은 완성된 오믈렛을 접시에 옮긴 뒤 그제야 나를 돌아봤다. 시선이 목 가까이에 잠깐 멈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가렸다.“보지 마.”“내가 남긴 건데.”“그래서 보지 말라고.” 태윤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어젯밤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이상하게 평온한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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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비서실이라는 제안

“비서실에서…… 정말 제가 할 수 있을까요?”“처음부터 대표 비서 전부 맡기겠다는 뜻은 아니야.” 태윤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비서실장 밑에서 일정, 회의 자료, 대외 응대부터 배워. 네가 할 수 있는 업무는 정식으로 맡기고, 못 하는 건 교육받아.” 생각보다 현실적인 말이라 오히려 당황했다.“저를 옆에 두려고 갑자기 만든 자리 아니에요?”“그 이유도 있어.” 태윤은 뻔뻔하게 인정했다.“한지후가 네 주변을 맴도는 게 마음에 안 드니까.”“역시.”“그렇다고 빈 책상에 앉혀 두고 하루 종일 나만 보게 할 생각은 없어.” 나는 가만히 그를 봤다. 이 남자가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가사서비스 제공기관에는 오늘 배정 종료를 요청할 거야. 현강에서는 별도 채용 절차를 밟아. 급여도 회사 기준으로 받고.”“제가 거절하면요?”“거절하면 안 하면 돼.” 태윤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말했다.“다만 난 네가 해 봤으면 좋겠어.”“왜요?”“네가 사람 상대하는 거, 행사장에서 봤으니까.” 잠깐 전날 갈라가 떠올랐다. 내가 무너진 순간만 본 줄 알았는데, 다른 것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생각보다 제대로 보고 있었네요.”“난 원래 사람 보는 눈 좋아.”“서유라 씨랑 오래 알고 지낸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태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목가로 향했다. 붉은 흔적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태윤의 손도 따라 올라오다 중간에서 멈췄다.“아직 아파?”“아니. 그냥…… 회사에서는 가려야겠지.”“그래.” 의외의 대답에 눈을 깜빡였다.“왜 그런 얼굴이야.”“대표님이면 보여 주라고 할 줄 알았어요.”“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네가 회사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만들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공사 구분도 못 하는 인간이 되는 거잖아.” 말은 거칠었지만 뜻은 분명했다. 태윤이 턱으로 내 목을 가리켰다.“스카프든 컨실러든 네가 편한 대로 해.” 조금 늦게, 그 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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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샴페인 골드 드레스

 거울 속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은은한 샴페인 골드 실크가 몸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졌다. 노출은 많지 않았지만 소재가 고급스러워 움직임 하나까지 눈에 들어오는 옷이었다. 청담동의 예약제 부티크. 태윤이 후보로 고른 여러 벌 가운데, 마지막 두 벌을 놓고 내가 고민하고 있었다.“이건 조금 화려하지 않아요?” 거울 너머로 묻자 뒤에 선 태윤이 고개를 기울였다.“네가 입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옷 자체는 과하지 않아.”“그게 칭찬이에요?”“당연하지.” 태윤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시선으로 먼저 물었다. 내가 피하지 않자 가볍게 천을 정리했다.“이게 더 잘 어울려.”“그래도 회사에서는 검은 쪽이 낫지 않을까요.”“그건 네가 결정해.”“……오늘 왜 이렇게 말 잘 들어요?”“아침부터 계속 비꼴 거야?”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곳이 익숙했다. 윤성가의 딸로 살던 시절에는 옷을 고르는 일에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원들의 시선 하나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몰락한 오너가의 딸이, 신흥 그룹 대표 옆에서 비싼 옷을 고르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조용한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어머. 누가 매장을 통째로 예약했나 했더니.” 가슴이 순간 내려앉았다.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은 서유라였다. 윤성홀딩스가 건재하던 시절에는 웃으며 내 옆을 따라다녔고, 집안이 무너진 뒤에는 가장 빠르게 등을 돌렸던 여자. 유라는 태윤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천천히 웃었다.“정말 재미있는 조합이네.” 유라의 시선이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갔다.“강 대표님, 취향이 많이 바뀌셨네요.” 말은 태윤에게 했지만 눈은 나에게 박혀 있었다.“윤서린 씨가 이런 옷을 입는 날이 다시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나는 등을 곧게 폈다.“오랜만이네요, 서유라 씨.”“오랜만?” 유라가 웃었다.“예전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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