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121 - Chapter 130

215 Chapters

121화 닮은 사람

벽돌 구멍 안쪽, 흙 아래에서 손끝에 걸린 것은 천이었다.남색 조각이 흙을 털며 딸려 나왔다.손바닥만 했고, 은실이 물결처럼 지나간 자리가 아직 살아 있어서 만지면 미끄러지다 한 번씩 걸렸다.여덟 해를 흙 속에 묻혀 있었을 물건인데 새 비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비단 파는 여자가 달빛 아래 마당에 펼쳐 놓았던 그것과 같은 실이었다.한경은 그 천을 소매 안에서 몇 번 더 문질러 보다가, 담에 등을 붙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새벽에 마신 꿀물이 아직 뱃속 어디쯤에 따뜻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로 담의 찬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여덟 해 전에 담 아래 앉아 온종일 마당을 보던 아이가 죽고, 그 자리에 온 어른의 물건이 이 흙 속에 있었다.'…그 여자가 여기 있었네.'무릎을 세워 팔을 얹고 그 위에 이마를 묻었더니 흙냄새가 났다.열한 살짜리도 온종일 이 냄새를 맡았을 터였다.* * *소하가 마당을 건너오다 멈춰 서서 부인을 불렀는데, 한경이 고개를 들지 않았다."부인. 어디 아프세요?""아니.""근데 왜 거기 그러고 계세요.""생각 좀 하려고."소하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가, 앉은 김에 저도 담에 등을 댔다.담이 차가운 것을 그제야 알았는지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소인도 여기 앉아도 돼요?""응."담 위로 참새가 셋 앉았다가 그중 둘이 날아갔고, 남은 하나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마저 날아갔다.그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부인. 궁 못 가시니까 심심하세요?""심심하진 않은데.거기 안 가도 되니까 좀 낫기도 해."소하가 부인을 봤다.부인이 궁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부인 궁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안 좋아해.""왜요?"한경은 대답 대신 무릎에 턱을 얹고 담 위를 보다가, 한참 뒤에 다른 것을 물었다."소하야. 태후마마 뵌 적 있어?""소인이요? 어떻게 뵈어요.근데 소문은 들었어요.태후마마께서 열여섯에 궁에 드셨는데 그때 벌써 키가 크셔서 선황제께서 한 번 보시고 그날로 정하셨대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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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떨어진 붓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섰다.스무 개의 허리가 한꺼번에 굽었고, 굽은 등 위로 걸음 소리가 지나갔다. 여섯 걸음이었다.문에서 서안까지를 여섯 걸음에 오는 사람은 그 편전에 하나뿐이었다.앉을 때 안석을 쓰지 않았다.열여섯 해 동안 쓴 적이 없었다.편전의 아침 조회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시작되었다.승지가 문서를 올리고, 황제가 붉은 벼루에 붓을 적시고, 신하들은 제자리에서 숨을 낮추었다.열여섯 해 동안 하루도 어긋난 적 없는 순서였다.붓대가 미끄러진 것은 세 번째 문서에서였다.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한 번 돌더니 서안 위로 떨어졌고, 붉은 먹이 문서 한가운데에 손톱만 하게 번졌다.소리는 크지 않았다.다만 그 소리가 난 뒤로 편전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이 컸다.승지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종이를 갈려 했다."두어라."황제가 붓을 도로 집었다.집는 데 두 번이 걸렸고, 두 번째에 잡힌 붓대가 평소보다 아래쪽이었다.그대로 문서에 한 자를 쓰는데 획 끝이 흔들려 두 획이 겹쳤으며, 겹친 자리 위에 옥새가 얹혔다.옥새를 드는 손이 내려올 때 소매가 한 번 접혔다.접힌 자리가 도로 펴지는 데 걸린 시간이 평소의 그것과 달랐는데, 그 차이를 잴 수 있는 자는 편전 안에 스무 명이 넘었다.신하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든 것을 옆의 신하가 봤고, 옆의 신하가 고개를 든 것을 뒤에서 또 누가 봤다.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조회는 끝까지 갔다.얼룩진 문서는 승지가 걷어 갔다.갈지 않고 그대로 걷어 간 것을 문 밖에서 기다리던 서리가 받았으며, 서리는 그것을 편철하면서 얼룩 위에 손가락을 한 번 얹어 보았다. 마르지 않았다.그날 저녁 성 안에 도는 말이 폐하께서 손을 떠셨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폐하께서 붓을 놓으셨다.* * *육정이 돌아온 것은 해가 다 진 뒤였다.관복 그대로 마루에 앉아 신을 벗지 않았고, 벗겨 드리겠다고 나온 소하를 손짓 한 번으로 물렸다.관가의 먼지가 어깨에 얹혀 있어서 등불 아래서 옷이 실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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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같은 얼굴

가마가 궁 담을 끼고 도는 동안 한경은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놓고 있었다.담이 길었다. 붉은 벽이 창틈으로 끊기지 않고 흘러가는데 그 위로 얹힌 기와가 햇빛을 되쏘아서, 보고 있으면 눈 안쪽이 뻐근해졌다.소하는 중문에서 돌려 보내졌는데, 태후 처소에 드는 데 딸린 사람을 붙이지 못한다는 말을 앞선 상궁이 두 번 되풀이했고, 되풀이하는 목소리가 처음보다 부드러웠다.가마가 멎기 전에 손끝이 먼저 차가워졌다.'…또 이러네.'한경은 그 손을 소매 안에 밀어 넣고, 밀어 넣은 채로 발을 디뎠다.* * *태후는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는데, 역광이라 낯이 어두웠고 어깨선만 밝았다.지난 세 번이 다 그랬다.손만 보였고, 손이 무엇을 하는지만 보였고, 그것으로 충분했으므로 한경은 그 얼굴을 한 번도 오래 본 적이 없었다."가까이 오너라."한경이 무릎으로 두 걸음 가자 치맛자락이 자리 위에서 소리 없이 끌렸다."더."두 걸음 더 가자 거기서 얼굴이 역광에서 벗어났다.눈꼬리에서 관자놀이로 올라가는 선.웃지 않는데도 반 푼 올라가 있는 왼쪽 입꼬리.말할 때 아랫입술이 먼저 열리고 윗입술이 반 박자 늦게 따라오는 것.한경은 숨을 한 번 쉬고 나서도 그대로 있었다.태후가 손을 뻗어 그 뺨을 감쌌다.금으로 씌운 손톱 덮개가 광대뼈 아래에 닿았는데 살보다 먼저 그것이 닿아서 차가웠고, 차가운 것이 뺨을 따라 턱까지 내려갔다가 도로 올라왔다."…어여쁘구나.""…황공하옵니다.""고개를 들어라. 아니, 그대로 두어라. 그편이 낫다."턱을 받친 손이 얼굴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볕을 받는 쪽으로.'…아, 이거.'이렇게 돌려 보던 사람이 있었는데, 손톱 덮개가 아니라 반지였고, 볕이 아니라 현관 등이었고, 돌려 놓고 하던 말은 어디 좀 보자였다.* * *"네가 내 아들의 약을 끊게 하였다더구나.""…끊게 한 게 아니라, 그거 독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독이라.""예.""어떤 독이더냐."한경이 고개를 들었고,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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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기둥 뒤

기둥은 두 아름쯤 되었고 그 뒤가 사람 하나 설 만큼 파여 있었다.등이 닿은 자리가 서늘했다.회랑 밖으로는 볕이 마당까지 가득한데 여기서는 그 볕이 한 뼘 앞에서 잘려 있어서, 밝은 데서 한경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저쪽 끝에서 태감의 신 끄는 소리가 멀어지다 멎었다.멎었다는 것은 돌아본다는 뜻이었다.팔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옷감 위가 아니라 소매 안이었다.소매가 말려 올라가 있었고 손바닥이 살에 그대로 닿아 있었으며, 그 손이 뜨거웠다.침향이 났는데, 옷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목 언저리에서 났다.한경은 눈을 들지 않았는데, 이 사람 앞에서 눈을 드는 법을 아직 몰랐고 대신 잡힌 자리로 상대를 읽는 것은 넉 달째 하고 있는 짓이었다.읽었다.'…뭐야 이거.'* * *황제의 손끝이 한경의 팔뚝을 짚은 채로 아주 얕게 떨리고 있었다.떨림에는 결이 있는데, 추워서 떠는 것은 어깨부터 오고, 겁이 나서 떠는 것은 무릎에서 올라오고, 힘을 준 뒤에 오는 떨림은 크고 느리다.이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손끝에서만 나고, 빠르고, 규칙이 없었다.한경의 손이 저도 모르게 올라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엄지를 안쪽에 대고,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얹고, 눌렀다.그 자세가 되자 두 사람 사이가 없어졌다.팔이 서로의 몸 앞에서 겹치고 어깨가 어깨에 닿고, 잡힌 팔은 잡힌 대로 잡은 팔은 잡은 대로 상대를 제 쪽으로 끌어오게 되어 있었다.이마 위에서 그의 숨이 한 번 흐트러졌다.맥이 빨랐다. 빠른데 얕았고, 얕은 것이 고르지 않았다.셋을 세는 사이에 한 번 건너뛰었고, 다시 셋을 세는 사이에 두 번 건너뛰었다.한경이 눈을 감자 숫자가 저절로 셋을 세고 있었다.실험실에서 십칠 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이제 와서 안 세는 법을 몰랐다."부인.""조용히 하세요.""…""세는 중이에요."그가 웃었는데,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났고 닿아 있어서 그것이 그대로 건너왔다.* * *회랑 저쪽에서 신 끄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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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못자리

"…모후께서 그대를 보셨기 때문이오."한경의 손이 그 손 안에 잡힌 채로 멈췄고, 걸려 있던 손가락도 그대로 있었다."예?""짐이 아는 얼굴이 하나 있소.모후께서 무엇을 오래 보시면 그것이 어찌 되는지, 짐은 열한 살에 배웠소."회랑 저쪽 끝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는데, 한 짝이 아니라 두 짝이었고 두 짝이 열리는 문은 이 궁에 몇 개 되지 않았다.손가락이 하나씩 풀렸는데, 풀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가시오.""폐하.""어서."한경이 기둥 그늘에서 볕으로 나왔다.나오자마자 눈이 부셔서 반쯤 감았는데, 감은 눈으로도 저쪽에서 이리로 오는 태감의 그림자가 보였다.기둥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 *가마 안에서 손을 폈다 접었다 하는 동안 손바닥 가운데가 아직 뜨거웠다.뜨거운 것이 살에 남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자꾸 폈다 접었고, 그러다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워 넣었다.'…미친 거 아니야, 진짜.'담이 끝나고 저잣거리 소리가 들어왔다.두부 파는 소리, 아이 울음, 어디선가 쇠 두드리는 소리.그 소리들이 들어오자 궁에서 있었던 일이 갑자기 아주 먼 데 일 같아졌다.먼 데 일 같아지는 것이 무서웠다.* * *육정이 마루 끝에 나와 서 있었는데, 관복도 아니고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였고 신도 반만 꿴 것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만했다.먹빛 웃옷 하나를 속적삼 위에 아무렇게나 걸쳤는데, 깃이 한쪽으로 눌렸고 고름 매듭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가마가 중문을 넘자마자 마당으로 내려섰다."…무슨 말을 들으셨소.""어여쁘다고요.""부인.""진짜예요. 어여쁘다고 하시고, 손 차다고 하시고.""…그리고."한경이 섬돌에서 신을 벗어 나란히 놓고 마루로 걸음을 옮기는데, 치맛자락이 섬돌 모서리를 지나 흘러내렸다."궁에 방이 많다고 하시던데요."육정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눈썹 사이가 좁아진 것도 아니고 입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낮에 관가에서 돌아왔을 때와 지금 사이에 얼굴 한 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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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먼저 온 것

"…아직 이 집에 있다."한경이 몸을 더 숙이자 이불에서 마른 쑥 냄새가 났다."누군데요."대부인이 눈을 감았는데, 성한 손이 며느리의 손목을 쥔 채였고 쥔 힘이 아까보다 세지도 약해지지도 않았다."어머니.""…명주야.""예.""궁에서 물건을 내릴 때는, 물건만 내리지 않는다."방문 밖에서 마루 널이 한 번 울고 그치자, 대부인의 눈이 며느리에게로 갔다가 도로 돌아왔다."…사람이 먼저 오고, 물건이 뒤에 온다."한경의 손이 이불 위에서 굳었고, 굳은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먼저요?""그 아이가 이 집에 든 것이 봄이었다.옥패는 그해 가을에 왔다.""그리고 겨울에."대부인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는데, 굳은 쪽 목이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 *서하당까지 오는 데 마당을 두 번 돌았다.한 번은 길을 잘못 들어서였고 한 번은 일부러였다.마당이 넓지도 않은데 두 바퀴를 도는 동안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돌다가 한 번 서서 행랑 쪽을 봤다.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봄에 사람이 오고, 가을에 물건이 오고, 겨울에 죽는다.'…나는 지금 가을이네.'여름에 서란이 왔는데, 젖은 신을 신고 중문을 넘어 들어왔고 그날 밤 육정이 그 아이를 데리고 마루 앞에 섰다.그리고 가을이 오기 전에 궁에서 옥패가 왔다.한경이 걸음을 멈췄는데, 마당 가운데였고 발밑에 아무 그림자도 없었다.'…아니야. 서란이는 아니야.'서란은 걸어서 돌아왔는데, 한 달을 어디 있었는지 말하지 않으면서 뒷문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려 돌아왔다.태후 사람이라고 제 입으로 말했고, 그러고도 이 집 뒷문 빗장을 열어 달라고 했다.그러니까 서란은 지웠다.그러면 남는 것이 문제였다.* * *서하당으로 돌아와 장 아래 칸 서랍을 열자 향낭이 가지런했다.옥색, 자색, 남색, 연둣빛, 다시 옥색, 흰 것.그 위에 서란이 나중에 지어 올린 것 하나가 얹혀 있었다.여섯이 일곱이 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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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서른일곱

방은 좁았다. 한 사람 눕고 한 사람 앉으면 그만인 자리에 소반이 하나 있었고, 소반 위에 비단 조각과 실과 마른 꽃이 종류별로 나뉘어 있었다.백단은 오른쪽, 매화는 가운데, 왼쪽 종지에 담긴 것은 색이 옅고 부스러기가 고왔다.지어 놓은 향낭이 열둘쯤 되었다."…앉으십시오. 자리가 이런데.""어멈이 앉아."여자가 문가에 무릎을 접으면서 소반을 제 뒤로 반 뼘 밀었는데, 밀고 나서 그 손을 앞섶으로 가져갔다.마당에서도 그랬고 지난여름에도 그랬다.이 사람은 겁이 나면 옷깃을 쥔다."…이거 누구 거야?""…예?""내가 안 쓴다고 한 지 넉 달 됐잖아.근데 열두 개가 있네."여자가 대답하지 못했고, 종지 쪽으로 손이 반쯤 갔다가 돌아왔다."누가 시켰어?""…아무도 안 시키셨습니다.""그럼 왜 만들어.""…""어멈.""…소인이 스무 해를 이걸 해서요.아침에 눈 뜨면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부인께서 안 쓰신다 하신 날에도 소인 손은 그날 아침에 하나를 지어 놨습니다.지어 놓고 나서야 아, 오늘부터 안 쓰시지, 했고요.…손이 심심해서요."한경이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등을 소반 옆에 내려놓고, 앉은 자리에서 방 안을 한 바퀴 봤다.이부자리가 개켜져 있었고 개킨 모양이 반듯했다.벽에 못이 하나 박혀 있는데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 *"어멈.""예.""손 좀 줘 봐."여자가 앞섶에서 손을 떼지 못했는데, 쥔 자리가 이미 구겨져 있었다."…소인 손은 더럽습니다.""줘 봐."내미는 데 시간이 걸렸는데, 손바닥이 위로 오게 놓고 그 위에 제 손을 얹어 받쳤고, 받치자마자 알았다.손톱이었다. 열 개가 다 뿌리 쪽부터 회색이 얕게 올라와 있었고, 그 위로 가로줄이 두어 개씩 나 있었다.손끝을 눌렀다 놓으니 붉은 것이 돌아오는 데 셋을 셌다."입 벌려 봐.""…부인.""벌려."등을 가까이 가져가자 잇몸 가장자리를 따라 색이 앉아 있었다. 진하지 않았다.진하지 않은데 스무 해였다.한경이 등을 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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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이레

"…오늘 아침에요."한경이 일어서는데 무릎이 저려서 소반을 한 번 짚어야 했다."어멈. 오늘 아침에 그거 어디서 가져왔어.""뒤채 문 앞이라 말씀드렸잖습니까.""거기 지금 가 보자.""지금요?""응.""부인. 지금 자시가 다 됐습니다.""그러니까 지금 가야지.낮에 가면 뭐가 보여.""소인은 낮에도 안 보이던데요."한경이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어멈의 등을 한 번 두드렸다."어멈이 안 보이는 걸 내가 보면 되지."여자가 등을 들고 나서 한경 뒤로 반 걸음 물러섰는데, 스무 해를 그 자리에서 걸은 사람이라 앞장서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 *뒤채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댓돌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물 빠지는 홈이 있었으며, 홈 안쪽에 흙이 말라붙었는데 댓돌 오른쪽 귀퉁이만 그 흙이 닳아 있었다.무언가가 이레에 한 번씩 놓였다 들렸다 한 자리의 닳음이었다.한경이 쪼그려 앉아 손끝으로 그 자리를 문질렀다."어멈. 여기 놓인 게 어떻게 생겼어.""기름종이에 싸서, 실로 두 번 감아 놓습니다.""실 색깔은.""흽니다. 늘 흰 실입니다."방문이 열렸다. 서란이 문지방 안쪽에 서 있었는데, 자다 나온 얼굴이었고 머리를 묶지 않아 한쪽이 눌려 있었다.눈이 댓돌로 갔다가 분이어멈에게 갔다가 부인에게 왔다."…부인. 이 시각에.""서란아. 너 여기 문 앞에 뭐 놓인 거 본 적 있어?"서란의 얼굴에서 잠이 걷혔는데, 걷히는 것이 한 번에였다."…기름종이요?""응.""…봤습니다.""몇 번.""…이 집에 온 뒤로 늘 있었습니다.아침에 나오면 있고, 낮에 나오면 없고요.소인은 그것이 이 집 약방 것인 줄 알았습니다.""밟고 다녔어?""…넘어 다녔습니다." 한경이 그 말에 잠깐 눈을 감았다.'…이 집은 진짜.'* * *한경이 눈을 뜨고 분이어멈 쪽으로 돌아섰다.여자가 든 등이 그때까지 같은 높이에 있었다."어멈. 하던 대로 해."여자가 못 알아들은 얼굴을 했고, 등을 든 손이 내려가 있었다."…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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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인(印)

내관은 신을 벗지 않고 마루 아래에 섰다.검붉은 옷에 흙 한 점 없었는데, 오는 길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중문 앞에서 털고 들어왔고, 터는 것을 소하가 봤다고 나중에 말했다.발을 세 번 굴렀고 굴리는 동안 마당 쪽은 보지도 않았다더라고."육 부인. 궁 출입패를 거두어 오라 하셨습니다."마당 끝에서 앞치마 떨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줍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한경이 소매에 손을 넣었다가, 넣기만 하고 꺼내지 않았다."지난번 오셨던 분은 오늘 안 오셨네요.""그자는 어제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어디요.""부인." 내관이 처음으로 눈을 들었다."소인이 오늘 이 댁이 세 번째입니다.아침에 서편에서 하나 거두고, 낮에 남문 안에서 하나 거두고, 여기가 세 번째요.신이 이래 봬도 오늘 십 리를 걸었습니다."말해 놓고 저도 제 말이 길었던 걸 아는 얼굴이 되어, 도로 눈을 내렸다."해가 지기 전에 궁에 들어야 합니다." 한경이 패를 꺼냈다.* * *"문서 좀 보여 주세요.""…부인께서 보실 것이 아닙니다.""내 거 가져가시는 건데, 뭘 보고 가져가시는지는 봐야죠.""소인은 종이만 나릅니다.""그럼 종이 좀 보여 주세요."내관의 아랫니가 한 번 보였다가 들어갔다.웃은 것도 아니고 화를 낸 것도 아닌, 오늘 십 리를 걸은 사람이 열한 번째로 같은 실랑이를 하는 얼굴이었다.소매에서 접힌 것을 꺼내 펴서, 펴기만 하고 한경 쪽으로 내밀지는 않았다.한경이 두 걸음 다가가서 보니 글자는 짧았다.거두어들이라는 것과 날짜와 패의 번호.그 아래에 인이 찍혀 있었고, 붉었다.'…태후마마 것 왔네.'거기까지 생각하고 눈을 돌리려다가, 돌리지 못했다.테두리가 네모였다.넉 달 동안 어공 궤짝 봉함을 스물아홉 번 뜯었다.봉함 인은 둥근 테였는데, 가장자리를 따라 실선이 한 바퀴 돌고 그 안에 획이 들어앉는 모양이었고 아래쪽이 늘 조금 흐렸다.궤짝이 젖어서였다.이건 네모였고, 아래쪽 모서리가 반쯤 뭉개져 있었다.뭉개진 자리가 왼쪽으로 밀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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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궁문

궁문 앞에 선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고, 들어가려고 간 것이 아니었다.문지기 넷이 창을 세우고 서 있는데 그중 둘은 넉 달 동안 아침마다 얼굴을 본 자들이라, 그 둘이 한경을 보고 슬며시 눈을 내렸다.내리는 것이 빨랐다.명부 붙는 자리에 오늘 들 사람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있었고, 넉 달 동안 넷째 줄에 있던 것이 없었다.한경이 그 종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다 읽고 나서 반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문을 봤다.크고 붉은 문이 아침볕을 정면으로 받아 아래쪽 반이 밝았고, 넉 달 동안 이 문을 스물아홉 번 넘었는데 한 번도 올려다본 적이 없었다.'…이렇게 생겼었네.'* * *강목이 나온 것은 사시가 못 되어서였는데, 관복 위에 삿갓을 쓰지 않았고 성한 손에 문서 상자를 들고 왼손은 소매 안에 넣은 채였다.문지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사람은 아직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이었다."부인.""…나리.""들으셨습니다.""들으셨겠죠."강목이 상자를 옆으로 옮겨 드는 데 두 번이 걸렸다."소신이 아뢰겠습니다. 폐하께—""아뢰지 마세요.""…부인.""아뢰면 폐하가 도로 여실 거예요.여시면 태후마마가 그걸 보시고요."강목이 입을 다문 채로 상자만 고쳐 들었다.한경이 소매에서 꺼낸 종이는 두껍게 접힌 데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밤새 폈다 접었다 한 종이였다."이거 나리 거예요.""무엇입니까.""내가 넉 달 동안 본 거 다 적었어요.물목 여덟 짝, 짝마다 어디서 온 거, 냄새 다른 거 골라내는 법, 뿌리 꺾어서 소리 듣는 법.그리고 뒤쪽에 폐하 거요.향, 그릇, 사람, 식혀서, 붉은 붓 다섯 조.날짜별로 뭘 언제 바꿨는지도 다 있어요."강목이 그 종이를 받지 않은 채 성한 손을 상자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부인. 이것은 부인이 하시던 일입니다.""이제 못 하잖아요.""…""나리."한경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왼쪽이었다.소매 안의 손이 반만 굽어 있는 것이 천 너머로 잡혔다.여름 끝에 창고 바닥에서 끌어올린 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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