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Chapter 111 - Chapter 120

215 Chapters

111화 휘(諱)

강목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사랑채 건넌방에 자리를 잡은 지 엿새로, 아침저녁으로 왼팔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주무르고 나머지 시간에는 문서를 옮겨 적었다.태의원에 못 나가는 동안 제 손으로 남길 것을 남겨 두려는 것이었다.한경이 물그릇을 들고 들어갔을 때 그가 종이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붓이 이미 멎어 있었다."왜요.""글자 하나가 걸립니다."한경이 옆에 앉아 종이를 가만히 봤는데, 약재 이름이 줄줄이 적힌 문서였고 중간쯤에서 멈춰 있었다."뭐가 걸리는데요."강목이 붓을 들어 한 자를 쓰다가 마지막 획을 긋지 않고, 오른쪽 아래 삐침 하나를 그대로 비워 두었다."…이렇게 씁니다.""왜 하나를 빼요?""쓰면 안 되는 글자라서요."* * *한경이 그 글자를 봤다.획이 하나 빠지니 글자가 다른 것처럼 보였고, 알아볼 수는 있는데 온전하지 않았다."안 쓰면 되잖아요.""약재 이름에 들어갑니다.안 쓸 수가 없습니다.""그럼 왜 쓰면 안 되는데요."강목이 붓을 놓았고, 놓는 손이 종이에서 멀어졌다."…폐하의 휘이옵니다."한경이 그를 봤는데, 비워 둔 획 쪽으로 눈이 한 번 갔다."휘요?""폐하께서 나시면서 받으신 이름입니다.그 글자는 온전히 쓰지 않습니다.쓰는 것도 죄이고, 입에 올리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소신이 이 문서를 온전한 획으로 올리면, 소신을 미워하는 자가 그 종이 한 장으로 소신을 벨 수 있습니다."한경이 그 종이를 오래 봤는데, 획 하나가 빠진 글자가 종이 가운데 있었다."…그럼 그분 이름이 뭔데요?"강목이 대답하지 않았고, 종이를 뒤집어 놓았다."강 나리.""…부인.""이름이 뭐냐고요."강목이 붓을 종이 위에 놓았고, 먹이 번지는 것도 보지 않았다."…소신도 소리 내어 본 적이 없습니다.""들어는 봤어요?""…""들어는 봤냐고요."강목이 고개를 젓고 나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나라에 그 소리를 들어 본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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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후사

심경이 육가에 든 것은 상복을 벗고 처음이었다.빈손으로 오지 않아서, 남방 비단 두 필과 말린 해삼 한 궤짝을 들여놓았고 곧바로 대부인 처소에 들어가 절을 두 번 했다.굳은 손을 잡고 한참 있었고, 안부를 묻는 동안 목소리가 낮고 고르게 나왔다."…형수님. 형님이 가시고 조카님이 이 댁에 있어 제가 마음이 놓입니다."대부인의 염주만 천천히 돌아갔다."다만."찻잔이 소반에 놓이는 소리가 났는데, 놓는 데 힘이 들어가 있었다."…형님 생전에 늘 마음에 걸려 하시던 것이 하나 있었지요."박씨가 부채를 접었고, 육설이 문가에서 눈을 들었다."열 해입니다, 형수님."대부인의 염주가 멎었고, 멎은 알이 손안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 *아이 이야기였고, 육가에 십 년째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심가에서 보낸 딸이 그러하니 심가가 면목이 없다는 말이 앞에 붙었고, 그래서 심가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 뒤에 붙었다."…제 여식이 열여덟입니다."방이 조용해졌다. 마루 쪽에서 누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열여덟이면 좋을 때네요."박씨였다. 말해 놓고 방 안의 얼굴을 하나씩 보더니 부채를 펴서 제 얼굴 앞을 가렸다."…아니 저는 그냥, 나이가 좋다는 뜻으로.""조카님과 사촌 간이니 촌수가 가까워 흠이 됩니다만, 첩이라면 흉이 되지 않지요.같은 심가 피니 형수님 보시기에도 남보다 낫지 않겠습니까."박씨가 소매로 입을 가렸고, 가린 손 위로 눈이 웃었다.육설이 문가에서 한경 쪽을 봤다. 웃지 않았다.대부인이 염주를 도로 돌리기 시작했다.알이 하나 굴렀다."…내 아들은 아직 젊다.""예. 젊으시니 더 늦기 전에.""…""형수님. 육가 사대에 어공이 끊긴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들었습니다.집안이 흔들릴 때 사람들이 무엇부터 보는지 아십니까."심경이 찻잔을 들고 나서 마시지 않았다."…대를 봅니다."대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굳은 손이 이불 위에서 반쯤 오므라들었다.한경은 문가에 선 채로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었고, 듣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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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비워야 할 방

육정이 그 말을 들은 것은 관가에서였다.성 안에 하루면 도는 말이었고, 관가에는 반나절이면 왔다.육 대인 댁에 심가 아씨가 들어온다더라는 말이 서리들 사이에서 오갔고, 오가는 것을 그가 등 뒤에서 들었다.돌아온 것은 해가 지고서였고, 말에서 내려 중문을 들어서는데 마당에 아무도 없었고 안채에도 불이 없었고 행랑에도 없었다.서하당에만 하나 있었다. 그리로 갔다.* * *문을 열자 한경이 등불 하나만 켜 놓고 무릎 위에 무언가를 펴 놓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거간 장부였다."부인.""오셨어요."한경이 장부를 접어 옆으로 밀어 놓았고, 육정이 문을 닫고 그 앞에 앉았다."들으셨소?""뭘요.""…""심가 아저씨가 딸 보내겠다는 거요? 들었어요."한경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육정이 봤다."아니 될 일이오.""왜요.""…""열여덟이라던데요.그 나이면 애 잘 낳을 거예요."육정의 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으로 쥐어졌다."부인.""진짜예요. 열여덟이면 몸도 좋고, 사촌이라 집안도 알고.나리 어머니도 심가 피면 마음이 놓이실 거고요.""그만하시오.""의원으로 말하는 건데요."육정이 고개를 들었는데, 드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부인은 지금 의원으로 말하고 있지 않소."* * *방이 조용해졌다. 한경이 치마 위의 손을 폈다가 도로 접었다."나리.""…""나 열 해 동안 이 집에서 애를 못 낳았대요."육정이 무어라 말하려다 못 하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오늘 그 말 듣는데, 나는 열 해가 없잖아요.나는 여름부터인데.""…부인.""그런데 그 열 해가 내 거래요.내가 못 낳은 거래요."한경이 등불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불빛이 얼굴 옆으로 들어왔다."웃긴 게 뭔지 아세요?나 오늘 그 말 듣고 아무 말도 안 했어요.화도 안 났어요.""…""근데 저녁을 못 먹겠더라고요."육정이 그 앞으로 무릎을 옮겼는데, 한 자였던 것이 반 자가 됐다."부인.""…""열 해 동안 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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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아침

등불이 언제 꺼졌는지는 둘 다 몰랐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창호지가 희끗했으며 방 안 물건들이 윤곽만 있었다.소반이 한쪽으로 밀려 있었고, 그 위에 놓였던 거간 장부가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떨어진 채로 아무도 줍지 않았다.옷고름 하나가 문지방 가까이 가 있었다.어떻게 거기까지 갔는지 알 수 없었다.한경이 몸을 조금 움직였다. 등이 따뜻했다.뒤에서 팔이 와 있었고, 그 팔이 허리를 지나 반대쪽 손목까지 가 있었으며 자면서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숨이 목덜미에 닿았는데, 고르고 깊었다.열 해 동안 벽 너머로만 듣던 숨이었다.한경이 그 팔에 손을 얹자 팔이 조금 조여들었다. 깨지는 않았다.* * *날이 밝기까지 오래 걸렸다.밝아 오는 동안 방 안의 것들이 하나씩 색을 얻었는데, 흐트러진 이불의 남색, 방바닥에 떨어진 장부의 누런빛, 소반 다리에 걸린 옥색 치맛자락.한경이 방 안의 것들을 하나씩 봤다.몸 어디가 아픈지도 하나씩 알았는데, 어깨 뒤가 당겼고 손목에 자국이 있었고 목 아래가 아직 얼얼했다.아픈 데를 세는 것이 이 사람의 버릇이었으므로 세다가, 세면서 웃었다.웃는 소리에 뒤에서 숨이 바뀌어, 얕아졌다가 도로 깊어졌다."부인."목소리가 잠겨 있었는데, 자다 깬 목이었다."깨셨어요?""…""왜 대답을 안 하세요."팔이 조여들었고, 등이 그의 가슴에 붙었다."무섭소."한경이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가 못 돌리게 했다."부인 얼굴을 보면 이것이 정말 있었던 일이 되오.""있었던 일 맞는데요.""…""나리. 나 지금 어깨 아파요.""…""그것도 나리 때문이고요."뒤에서 소리가 났는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다.팔이 풀렸다. 한경이 돌아누웠다.가까이서 그 얼굴을 봤는데, 새벽빛에 눈 밑 그늘이 옅어져 있었다.열 해를 곤두서 있던 얼굴이 거기 없었다."나리.""예.""잘생겼어요, 오늘도."육정이 이불을 끌어올려 제 얼굴 반을 가렸다.* * *해가 다 뜨고서야 일어났다.한경이 방바닥의 장부를 주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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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물에서 나온 여자

개천 하류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멍석이 깔려 있고 그 위에 덮개가 덮여 있었으며, 관가 서리 둘이 옆에 섰고 구경꾼이 담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한경이 가마에서 내리자 서리가 앞을 막으면서, 부인이 볼 것이 아니라 했다."육가 안주인이오."육정이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나섰다."…대인. 그래도 이런 것은.""물러서게."서리가 물러섰고, 한경이 덮개를 걷었다.* * *덮개 아래는 여자였다.이틀쯤 물에 있었고, 얼굴이 부풀었고 입술이 벗겨져 있었으며 머리가 물풀에 엉켜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옷이 좋은 것이었는데, 남색 바탕에 은실이 지나간 비단이었고 물에 젖어 색이 죽었는데도 실이 살아 있었다.한경이 그 옷을 알았는데, 달빛 아래 마당에 펼쳐 놓았던 그 비단이었고 궁에서 쓰는 것과 같은 실이라고 했었다."비단 파는 여자예요."육정이 아내를 봤고, 한경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 *한경이 그 손목을 봤다.두 줄 자국이 없었다.손톱 밑을 들여다봤는데 개흙이 없었고, 그 손톱이 깨끗하다는 것이 이제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목을 봤는데, 눌린 자국이 없었다.한경이 그 얼굴을 봤는데, 부어 있어서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턱이 이상하게 벌어져 있었다.물에 뜬 사람의 턱이 그렇게 벌어지지 않았다."입을 벌려 주세요."서리가 못 알아들었는데, 되묻지도 못했다."턱을 잡고 벌리시라고요.""…부인, 그것은."한경이 제 손으로 턱을 잡아 벌리자 물이 조금 흘러나왔다.안쪽을 봤는데, 혀가 뒤로 말려 있었고 그 아래에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손가락을 넣었다. 구경꾼 쪽에서 소리가 났는데, 누가 헛구역질을 했고 누가 부인이 미쳤다고 했다.한경이 그 걸린 것을 손끝으로 꺼냈다. 기름종이였다.여러 겹으로 접혀 밀랍을 먹인 것이었고 손가락 두 마디만 했는데, 물에 이틀 있었는데도 겉이 젖지 않았다.* * *"…이게 뭡니까."서리가 물었고, 한경이 기름종이를 손수건에 싸서 소매에 넣었다."뭐가요.""방금 꺼내신 것 말입니다.""물풀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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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값이 매겨진 아이

서란이 그 종이를 받아 든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등불 아래에서 곁방 문을 닫아 두었고, 아이는 잠들어 있었으며, 소하는 마루에서 문을 등지고 앉아 있게 했다.종이는 손바닥 반만 한 크기였는데, 가장자리에 밀랍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서란의 손이 떨렸다.종이를 든 손이 아니라 무릎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부인. 이걸 어디서.""물에서 나온 여자 입에서."서란이 고개를 들었는데 드는 것이 빨랐다."…비단 파는 그 여자요?""응."서란이 그 종이를 도로 소반에 내려놓고서 두 손을 무릎에 붙였다."…부인. 이건 명부가 아닙니다.""그럼 뭐야.""…들여보낼 사람 표입니다."* * *창고에 사람을 들이기 전에 하나씩 만든다고 했다.이름과 나이를 적고 값이 정해지면 그 아래에 값을 적는다고, 값을 적기 전에는 종이만 있고 값을 적으면 그때부터 사람이 물건이 된다고."…소인 것도 있었습니다."서란이 제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는데, 트고 갈라진 자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열두 해 전에요.소인 표에는 값이 적혀 있었습니다."한경이 소반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봤다.심명주(沈明珠) 십 세,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이건 값이 없네.""예.""값이 없으면?"서란이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입술을 두 번 축였다."…이런 표는 셋을 적습니다.이름, 나이, 값이요.이름을 먼저 적고 나이를 적고, 값은 나중에 적습니다.값은 사는 쪽이 정하니까요.값을 못 적은 표는 소인이 두 장 봤는데, 둘 다 그 애가 그날 밤에 안 실려 나갔습니다.표는 만들어졌는데, 값이 정해지기 전에 멈춘 것입니다."방이 조용해진 가운데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다."…누가 멈춰.""…들이려던 자가 그만두거나.""…""…아니면, 누가 값을 못 매기게 했거나요."* * *한경이 그 종이를 등불에 가까이 대자 종이 뒤쪽이 비쳤다.뒤에 아무것도 없었다.옆으로 눕혀 보니 빛이 비스듬히 들면서 눌린 자국이 드러났는데, 이 종이 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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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두 그림

사랑채 건넌방에서 강목이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놓았는데, 오른손으로 그린 것이라 획이 굵고 성글었지만 옮겨 그린 것은 정확했다.왼쪽은 개천에서 건진 시약장 관원의 손목이었다.두 줄, 간격 손가락 두 마디.오른쪽은 서란의 등이었는데, 어제 한경이 다시 보고 강목에게 자로 재어 일러 준 것이었다.두 줄, 같은 간격."같은 손입니다."한경이 그 두 장을 앞에 두고 물끄러미 보다가, 왼쪽을 보고 오른쪽을 보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갔다."손이 아니라 물건이겠죠.""예. 사람 손으로는 이렇게 안 됩니다."강목이 오른손으로 제 왼팔 손목을 잡아 보였다."손으로 쥐면 자국이 다섯 개 납니다.손가락 자국이지요.두 줄이 나려면 쇠붙이가 물려야 합니다.""서란이가 쇠 부딪는 소리를 들었대요.한 번 물리면 스스로는 못 풀고, 푸는 데 사람이 둘 있어야 한다고."강목이 붓을 놓았는데, 놓는 소리가 방 안에서 크게 났다."그런 물건이 관에 있습니다."한경이 고개를 들었고, 든 얼굴이 등불 쪽으로 반쯤 돌아갔다."형구(刑具)입니다.죄인을 옮길 때 씁니다."방이 조용해지고, 조용해진 자리에 등불 심지 타는 소리만 남았다."관에서만 씁니까.""관에서만 만듭니다.만들 때 관인이 들어갑니다."* * *강목이 세 번째 종이를 꺼냈는데, 작은 종이가 접혀 있었다."…소신이 그 창고에서 나올 적에, 소신 손목에 물렸던 것을 보았습니다."폈다.쇠고리 두 개가 짧은 사슬로 서로 이어져 있는 그림이었는데, 그 고리 안쪽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이것이 안쪽에 찍혀 있었습니다."한경이 등불을 가까이 댔다. 인이었다.반쯤 뭉개졌는데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이거 어디 인이에요?""소신이 태의원 문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어디서요."강목이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그동안 등불이 두 번 흔들렸다."…어공 궤짝 봉함에 찍히는 인과 같습니다."* * *한경이 그 그림을 오래 보면서, 등불을 옮겨 가며 보는 각도를 두 번 바꿨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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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붉은 붓

황제가 편전에서 붓을 들었다.어필(御筆)은 붉은 먹으로 쓰는 것이라 신하의 먹은 검고 임금의 먹은 붉다.올라온 문서에 가부를 적을 때, 사람을 올리고 내릴 때, 죄를 정할 때 다 그 붉은 붓이다.벼루가 둘 놓여 있었다.검은 것과 붉은 것.황제가 붉은 벼루에 붓을 적셔 한 자를 쓰자 획 끝이 갈라졌고, 갈라진 붓끝을 입술에 슬며시 대고 한 번 다듬었다.오래된 버릇이었다.열한 살에 보위에 앉아 붓을 처음 잡을 적에 늙은 사부가, 붓끝이 갈라지거든 침으로 모으라고 그리 가르쳤다.그날도 문서가 서른 장이 넘었고, 붓끝을 여러 번 다듬었다.* * *강목이 그 버릇을 본 것은 사흘 뒤였는데, 어공 문책 문서를 올리러 편전 밖에서 대기하던 참에 문이 열리고 승지가 나오는 사이 안쪽이 반쯤 보였다.황제가 붓을 입에 대고 있었다.강목이 그 자리에 섰고, 승지가 무어라 말을 걸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문이 닫혔다.강목이 회랑을 걸어 나오면서 소매 안에서 종이를 꺼냈는데, 한경이 준 처방 목록이었고 거기 넉 줄이 적혀 있었다.향, 그릇, 사람, 식혀서.넉 줄을 다 지켰는데 나빠졌다.강목이 걸음을 멈추자 회랑 끝에서 바람이 들어와 종이가 손안에서 떨렸다.넉 줄에 없는 것이 있었다.* * *태의원으로 가지 않고 내섬시로 갔다.붉은 먹을 대는 데가 어디냐고 묻자 서리가, 어필에 쓰는 주묵(朱墨)은 내섬시에서 만들어 올린다고 대답했다.무엇으로 만드느냐고 묻자 서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주사(朱砂)를 곱게 갈아 아교에 개어 굳힙니다."강목이 선 자리에서 발을 옮기지 못했고, 다음 물음이 저절로 나왔다."인주(印朱)는.""그것도 주사이지요.기름에 개어 쓰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옥새는 하루에 몇 번이나 찍습니까."서리가 웃었는데, 웃어도 되는 자리라고 여긴 사람의 웃음이었다."심약 나리. 그건 세는 것이 아닙니다.문서가 오는 대로 찍으시니까요."강목이 물러 나와 회랑 기둥을 짚었는데, 짚은 손이 한참 떨어지지 않았다.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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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대신 쓰는 손

강목이 육가에 돌아온 것은 자시였는데, 들어오자마자 서하당 문을 두드렸다.이 집에 든 뒤로 처음이었다.한경이 문을 열었는데, 자다 깬 얼굴이었고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은 채였다."강 나리? 이 시각에.""부인. 지금 아뢸 것이 있습니다."강목이 들어와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말했다.주묵과 인주와 붓끝과 네 해를.한경이 그 말을 다 들은 다음 문지방에 슬며시 앉아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나 지금 좀 앉을게요.""부인. 앉아 계십니다.""그러네요."* * *소하가 등을 들고 나왔는데, 등불이 흔들리는 바람에 마루 기둥의 그림자가 한 번 길어졌다가 이내 줄었다."부인, 무슨 일—""소하야. 잘 왔어.너 이리 앉아 봐."소하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 앞에 앉았고, 앉으면서 들고 온 등을 제 무릎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다.한경이 손바닥을 펴서 소하 앞으로 내밀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이었다."자, 봐. 여기 붉은 가루가 있어. 이게 독이야. 먹으면 죽어.근데 한 번에 안 죽고, 몇 해 걸려서 손 떨리고 잠 못 자고 그러다 죽어.""예.""그 붉은 가루를 약이라고 속여서 먹였어.그건 우리가 알았고, 그래서 끊게 했어.여기까지 알겠어?""예.""그런데 그 사람이 안 나아."소하가 눈을 크게 떴는데, 뜨고 나서 등을 짚고 있던 손이 저도 모르게 슬며시 오므라들었다."왜냐면 그 붉은 가루가 약에만 있는 게 아니었거든.먹으로도 만들고 도장밥으로도 만들어. 같은 가루야.갈아서 아교에 개면 먹, 기름에 개면 도장밥.""그럼.""그 사람 하루에 문서를 서른 장씩 봐.붉은 먹으로 쓰고, 붉은 도장밥으로 찍고, 붓끝 갈라지면 입에 대서 모으고.그걸 네 해 했어."소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것이 등불 아래서도 보였다."그럼 그 사람은.""응."한경이 손을 접었고, 접은 주먹을 무릎 위에 놓고 거기서 더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니까 그 사람, 일을 하면 할수록 죽는 거예요."강목이 그 자리에 그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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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꿀물

새벽에 눈이 떠지자마자 손부터 폈다.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데 열 손가락을 쫙 벌렸다가 하나씩 접었다.이 몸으로 깬 첫날부터 넉 달째 하는 짓이었는데, 왜 하는지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안 떨렸다.'…멀쩡하네.'이불을 걷으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육정은 사흘째 관가에서 자고 있었고, 빈자리가 식은 지 오래라 손을 대 보아도 아무 온기가 없었다.창호지가 아직 어두운 것이 잘 시각도 일어날 시각도 아닌 어중간한 때였다.한경은 그 어중간한 때에 부엌으로 갔다.* * *불씨를 살려 물을 데우는 동안 시렁 위의 꿀단지를 올려다봤다.발돋움을 해도 손끝이 단지 배에나 겨우 닿아서, 결국 소반을 끌어다 딛고 올라서서야 내릴 수 있었다.'…이 몸은 왜 이렇게 작아.'꿀을 두 술 떠서 뜨거운 물에 풀고, 저으면서 잔 가장자리에 묻은 것을 손끝으로 훑어 입에 넣었다.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는데도 뜨거웠다."…아 뜨거."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는데, 웃는 소리가 빈 부엌 안에서 크게 들렸다.전생에 밤일이 길어지면 이렇게 마셨다.그때는 꿀이 아니라 봉지에 든 단 가루였고 종이컵에 타서 계단에 앉아 마셨는데, 계단이 늘 차가워서 한쪽 발을 다른 발 위에 올리고 앉는 버릇이 있었다.여기서는 아궁이 앞이 따뜻해서 발을 포갤 필요가 없었다.'…이건 여기가 낫네.'두 번째 모금은 안 뜨거웠다.* * *부엌에 불이 있는 것을 보고 나온 소하가 아궁이 앞에 앉은 부인을 보고 놀랐다."부인! 이 시각에 여기서 뭐 하세요.""꿀물.""꿀물이요?""응. 너도 마실래?두 술 더 넣으면 돼.""소인이 어떻게."한경이 대답 대신 잔을 하나 더 꺼내 놓자, 소하가 잠깐 망설이다 옆에 앉아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둘이 아궁이 앞에서 나란히 후후 불며 마시는 동안 불씨가 두어 번 튀었다."부인. 어제 강 심약 나리랑 하신 얘기요.""응.""그 사람, 진짜 죽어요?"한경이 잔을 무릎에 내려놓았는데, 내려놓고 나서 한참을 들지 않았다."…모르지. 근데 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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