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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해 뜨거든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1 21:45:23

한경이 종이를 소매에 넣고 돌아서는데 문이 안 열렸다.

육정의 손이 문틀에 있었고, 언제 일어나 왔는지 모르게 와 있었으며, 팔이 한경의 어깨 위로 지나 문틀을 잡은 자세로 내려오지 않았다.

"나리."

육정이 대답하지 않았다.

팔이 어깨 위에서 조금도 내려오지 않았고, 내려오지 않는 동안 문틀을 잡은 손등에 힘줄이 섰다.

"문 좀."

등이 서안 위에 있어서 문 쪽은 어두웠다.

어두운 데서 그의 숨소리가 아까 붓을 놓을 때보다 짧았고, 짧아진 것을 저도 아는지 한 번 크게 들이켰다가 그대로 참았다.

"나리. 저 이거 내일 새벽에—"

말이 끝나지 않았다.

끝내야 할 쪽이 끝내지 않았다.

* * *

등이 서안 위에서 오래 탔다.

심지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잦아들었고, 잦아들고 나서 방이 아까보다 어두워졌는데 아무도 그것을 고치러 가지 않았다.

한경의 소매에서 종이가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는데, 접힌 자리가 저절로 펴지면서 먹 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방 안의 다른 냄새들 사이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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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8화 둘째 칸

    낮에 육가 마당에 관원 둘과 서리 셋이 들어와 광 문을 열어 놓고 물목을 적기 시작했다.광 앞 멍석에 궤짝이 여섯 나와 있었고 뚜껑이 다 열려 있었다.노영감이 광 문턱에서 비켜서서 새 나무판을 옆구리에 끼고 서 있었다.서리 하나가 궤 안의 것을 하나씩 꺼내 마당에 늘어놓으면 다른 하나가 그것을 적었다.한경이 마루 끝에 서서 그 줄을 봤다.넷째 궤에 손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나리. 그건 맨손으로 만지지 마세요.""…이 댁 물건이 아니오?""우리 집 거 맞아요.그래서 말씀드리는 거고요.그거 종이로 집으세요.어제 여기 손 댄 분 오늘 아침에 손등 부었을 거예요.가운뎃손가락부터요."서리가 손을 궤에서 뺐다.뺀 손을 도포에 두 번 문지르고 나서 제 손등을 들여다봤다.관원 하나가 그 서리를 보다가 종이를 넘겼다.분이어멈이 마루 아래에 놋대접을 스물 남짓 내어 놓고 하나씩 엎어 놓으면서 세는데, 세다가 중간에서 한 번 걸렸다."예. 예. 스물셋입니다.아니, 스물넷이요.이 나간 걸 소인이 아까 빼 놓아서요.빼 놓은 걸 도로 넣었더니 소인이 또 헷갈리고요.""이 나간 것은 왜 뺐소.""…이 나간 것은 부인이 쓰십니다."서리가 붓을 든 채로 마루 위를 한 번 봤다가 도로 종이를 봤다.분이어멈이 회색 손톱을 앞치마 안으로 넣었다.* * *중문 안쪽에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감색 치마에 검은 겉옷을 입고, 손에 붓과 접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소하가 부엌에서 물동이를 이고 나오다 그 앞에서 멎었다.물이 전을 넘어 어깨로 흘렀다."아기…"서란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아니, 저기요.왜 저기 서 있어요.""소인은 오늘 이 댁에 불려 왔습니다.""불려 오다니요! 여기 아기씨 집이잖아요!아니 저기, 그러니까 아기씨가 살던 집이고요, 뒤채 방도 그대로 있고요, 이불도 소인이 봄에 개켜 놓은 그대로—"소하가 물동이를 마루 아래에 내려놓다가 한쪽 전을 놓쳤다.동이가 옆으로 넘어가면서 물이 섬돌을 다 적셨고,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7화 짝 없는 패

    새벽에 별당 앞 섬돌에 신이 두 켤레 놓여 있었고, 방 안에는 보퉁이가 셋 묶여 벽 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등잔은 꺼져 있고 창호가 희끄무레해서 방 안의 것들이 다 잿빛으로 보였다.육설이 방 가운데 앉아 골패를 한 짝씩 무명천 위에 놓고 있었다.놓을 때마다 나무가 나무에 닿는 소리가 짧게 났다.한경이 문을 밀고 들어가 그 앞에 앉았다."작은아씨. 이거 가져가시게요?""…아니요."육설이 마지막 짝을 내려놓고 무명천 네 귀를 모아 쥐었다가 도로 폈다."언니 가지세요.""나 이거 할 줄 몰라요.""할 줄 몰라도 가지세요.이거 스물아홉 짝이에요.서른둘이라야 한 벌인데 셋이 없어요.하나는 재작년에 잃어버렸고 둘은 작년에 잃어버렸고요.짝이 하나 없어서 값이 안 나가요.그러니까 아무도 안 가져가요."* * *육설이 무릎을 세워 앉았다.세우는 동안 적삼 소매가 팔뚝까지 흘러내렸는데, 반지 자국이 손가락 셋에 아직 희게 남아 있었다."언니. 나 하나 말하고 갈게요.""…""그 말요. 저잣거리에서 도는 말.그거 박씨 형님이 먼저 했어요. 여기서요.이 방에서 골패 하다가요.""…""형님이 나쁜 뜻으로 한 거 아니에요.그 형님은 원래 아무 말이나 하고 나서 제가 놀라잖아요.그날도 말해 놓고 제 입을 손으로 막았어요.근데 그 자리에 여섯이 앉아 있었고, 여섯이 다 저녁에 제 집으로 돌아갔어요."한경이 무명천 위의 골패를 손끝으로 한 짝 밀었다."작은아씨는 그때 뭐 하셨어요.""아무것도 안 했어요."육설이 고개를 들었다."내가 그때 아니라고 안 했어요.그 말 하려고 언니 기다렸어요. 어제부터요."* * *마당에서 오어멈이 함지를 들고 나오다 툇마루 끝에 놓았다.놓고 나서 허리를 두 번에 폈다.대부인이 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다.무릎에 염주가 놓여 있었고 손은 그 위에 얹혀만 있었다.육설이 마루 아래에 서서 절을 했다."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먹어라.""…예.""먹고 가."오어멈이 함지에서 종지를 꺼내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6화 아랫줄

    심가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문간에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마당 가운데 멍석이 두 닢 펴져 보리가 널려 있었는데, 널어 놓고 아무도 안 보아서 참새가 내려앉았다 날아갔다 했다.사당 문은 닫혀 있었다.닫힌 문 앞 섬돌에 신이 여덟 켤레 벗어져 있었고 안에서 사람 소리가 낮게 이어졌다.한경이 문지방을 넘어서자 회랑 끝에서 늙은 종이 비를 세우고 섰다.지난번에 사당 안에서 위패를 닦던 종이었다."…아씨.""영감. 보리에 참새 앉는데요.""…예. 예.""쫓으세요. 나 왔다고 안에 알리지 마시고요."늙은 종이 비를 눕혀 놓고 멍석 쪽으로 두어 걸음 옮겼다가 그 자리에 섰다.그 사이에 참새가 다시 내려앉았다.* * *사당 문이 열리고 심경이 먼저 나왔다.소매를 내리면서 나오다가 마당 가운데 선 사람을 보고 걸음이 한 번 짧아졌다."…조카님.""아저씨. 아침에 우리 집에 사람 보내셨죠. 어, 아니다. 어제 저녁에요."심경이 섬돌을 내려와 웃었다.웃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오늘은 조카님이 저 문 안으로 못 드십니다.""알아요.""…""아, 저 신이요.저기 신이 여덟인데 우리 집 신이 하나도 없잖아요.그럼 오늘 저 안에서 하는 게 뭔지 대문에서 알죠."심경이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폈다.접힌 자리가 아직 날카로웠다."형님 함자는 윗줄에 그대로 있습니다.그 아래 조카님 함자에 오늘 아침에 줄을 그었습니다.출가하여 육가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 집 일에 관계가 없다고 적었고요.""먹이 아직 안 말랐네요.""…예. 마르기 전에 조카님이 오셨습니다."* * *회랑 아래에서 종 둘이 마주 섰다.젊은 쪽이 먼저 소리를 냈다."아씨가 이 집 딸인데 어떻게 이름을 지웁니까!""네가 뭘 안다고 나서.""저기 저 어른들이 어제까지 아씨한테 절하던 어른들이잖아요! 어제까지—"늙은 쪽이 젊은 쪽의 소매를 잡아 끌었고, 끌리는 팔에 걸려 섬돌 위의 물동이가 밀려 넘어졌다.물이 마당 흙으로 번지면서 멍석 귀퉁이가 젖었고, 참새가 그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5화 관복

    육정이 아침부터 정청 뒤 방에서 붓을 쥐고 있다가, 다 쓴 것에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두 손으로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늙은 관원이 앉은 채로 종이를 받아 첫 줄을 읽고 도로 접었다."이것을 어디에 넣으려는가.""보장이오. 내 이름으로 서는 것이니 내 방에서 나가는 것이 맞소.""자네 이름으로 무엇을 서겠다는 말인가.""내 집 안사람이 저잣에서 사람을 고친 일이 있고, 고친 일로 말이 도는 것을 내가 들었소.도는 말은 물을 데가 없으니 물을 데를 만들어 두려는 것이오.아직 아무 데서도 부르지 않았을 때 미리 서 두면—""보증은 사람이 사람을 서는 것인데, 저것은 사람 일이 아니라고들 하네."육정이 종이를 도로 받으려고 손을 냈다가 내렸다."…사람 일이 아니면 무슨 일이오.""글쎄. 나는 모르네.나도 도는 말을 옮겼을 뿐일세."늙은 관원이 종이를 상 아래로 밀어 놓았다."받는 방이 있으면 넣게.어제까지는 있었어."* * *육정이 종이를 들고 정청을 건너갔는데, 첫 방에서는 오늘부터 소관이 아니라 하였고, 두 번째 방은 안에서 문이 잠겨 있었으며, 세 번째 방 서리는 육정의 함자를 두 번 물었다."아이고. 나리 함자를 여기다 적으시겠습니까.""적겠네.""…소인이 여쭙는 것은, 적으시면 오늘 날짜로 남는데 그래도 적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지우려면 위에서 지워야 하고, 위에서 지운 것은 지웠다고 또 적힙니다.""적겠네."서리가 내민 붓대가 젖어 있어서 육정이 소매로 한 번 훑고 나서 쥐었다.* * *저녁에 같은 방 관원 하나가 육정을 붙들어 앉혔다.상에 잔이 둘 나왔고 술이 한 병이었다."자네 술 못 마시지.""…못 마시오.""오늘은 마시게."육정이 잔을 받아 반쯤 비우고는 소매로 입을 눌렀는데, 눌러 놓고도 한동안 손을 안 뗐다."오늘 내가 이름을 두 군데 적었소.""둘이나. 둘이나 적었는가.""…""하나는 안 받아 주던가."육정이 대답 대신 두 번째 잔을 받아 무릎 앞에 놓았다."자네 아래 서리 말일세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4화 비뚠 인

    태의원 서쪽 방에 자리가 셋 펴져 있었고 문이 닫혀 있었다.새벽에 비가 지나간 자리라 문지방 아래가 아직 젖어 있었다.강목이 문서 상자를 두 번에 나눠 들여놓았다.먼저 문지방 안에 내려놓고, 성한 손으로 밀어 넣은 다음 제가 들어가 도로 안았다.관원이 둘 앉아 있었고 나이 든 쪽이 상 위의 종이를 손끝으로 돌려놓았다."이 물목을 자네가 고쳤는가.""소신이 고쳤습니다.""누구 말을 듣고 고쳤는가.""달걀. 마늘. 콩. 파.넷을 더했고 뺀 것은 없습니다.""묻는 것은 낱말이 아니라 사람일세.""…사람 말씀이십니까.""그렇지.""예. 예."강목이 상자 뚜껑을 열고 등록을 넘겼다.넘기는 손가락 둘이 반만 굽어서 장마다 한 번씩 걸렸다."사월 초닷새. 사월 초여드레. 오월 초하루.""…무엇인가 그게.""어전에 오른 상을 소신이 물목으로 받아 적은 날입니다.셋 다 소신의 글씨이고 셋 다 아래에 소신의 인이 있습니다.그 사이에 소신이 만난 사람은 모두 태의원 안에 있고, 그 사람들 이름도 여기 적혀 있습니다."* * *나이 든 관원이 종이를 넘기지 않고 강목의 손을 봤다."육가 부인이 자네한테 무엇을 일렀는가.""소신이 이미 아뢰었습니다마는, 물목은 태의원에서 가려 올리고 가려 올리는 자리에 소신이 앉아 있습니다.앉은 사람이 적고, 적은 사람이 인을 찍습니다.""그러니까 그 말을 오늘 세 번째 듣네.""소신이 세 번 아뢰었습니다."젊은 쪽 관원이 인주 갑을 상 가운데로 끌어 놓다가 뚜껑을 놓쳤다.뚜껑이 자리 밖으로 굴러가면서 붉은 것이 자리 전에 한 줄 묻었다."아이고. 소인이 닦겠습니다.""그냥 두게."나이 든 관원이 종이 아래쪽의 붉은 자국을 손톱으로 짚었다."이 인이 자네 것인가.""소신 것입니다.""테가 기울었네. 여기 이것도 기울었고 여기 이것도 같은 쪽으로 기울었어.손으로 눌러 찍은 것이 열 장 스무 장 다 이렇게 똑같이 기울겠는가.판을 새로 새겨 두고 찍는 자들이 그렇게 하네."* * *강

  • 연옥화(軟玉花) — 향이 없는 꽃   183화 요술

    부엌 문지방에 아침 볕이 한 뼘 들어와 있었고, 오어멈이 그 자리로 도마를 끌어다 놓고 순무를 썰었다.소하가 광주리를 안고 들어오다 문지방에 걸려 비틀거렸다."어멈! 저 오늘 안 넘어졌어요!""비틀거린 건 안 치나 보지."소하가 광주리를 내려놓고 그 안에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이거 무예요? 아주머니가 무래요.""…그건 순무다.""어유. 그러니까 값이 쌌구나."오어멈이 칼을 놓고 어깨를 흔들며 웃었고, 분이어멈이 마루 끝에서 놋대접을 안은 채 따라 웃었다.소하가 순무를 도로 광주리에 넣고 문지방에 앉았다."근데 어멈. 아까 골목에서 애들이 이상한 놀이를 하던데요.술래가 손을 대면 잡힌 애가 도로 살아나요.그러면서 이러던데요."소하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아이들이 하던 대로 소리를 냈다."손만 대면 낫는대. 요술이래."오어멈의 칼이 도마에서 멎었고, 마루 끝에서 분이어멈이 안고 있던 놋대접을 내려놓는 소리가 마당을 건너왔다.* * *한경이 마루 끝에서 그 말을 들었다.아침에 뜬 반 그릇이 명치께에 그대로 있다가 속이 한 번 뒤집혔고, 한경이 기둥에 등을 붙이고 침을 삼켰다.행랑 앞에서 류가가 붓을 든 채로 걸어 나왔는데, 소맷부리에 먹이 한 줄 묻어 있었고 그것을 닦지 않은 채였다."부인.""뭐가요.""소인이 궁에서 하던 일 가운데 하나가 그것입니다.밖에서 도는 말을 적어 올리는 것입니다.소인이 지은 것이 아니고 소인이 시킨 것도 아닙니다.저잣에서 돌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스물여덟 해 동안요.""…""적어 올린 말 가운데 아이들 놀이에서 나온 것이 둘 있었습니다.둘 다 이듬해에 문서로 갔습니다."류가가 붓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소인은 한 번도 지어낸 적이 없습니다.지어낼 것도 없었고요.""그 붓 소맷부리에 묻었어요.먹은 마르기 전에 닦아야 지워지거든요."* * *분이어멈이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 문지방 앞에 섰다."어멈. 저 아이 오늘부터 밖에 내보내지 마세요.""…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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