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21화
지빌라는 궁으로 찾아온 대공의 마차를 타고 델보 후작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먼저 연회에 동행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마치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를 벌처럼 여기는 듯했다.
지빌라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해도 그 무게만은 전해졌다.
샤를로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연회는 일황자를 지지하는 말라르메 후작을 따르는 신진 귀족들의 부인들이 대거 참석하는 자리였다.
델보 후작성은 주로 작품 전시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신비로운 대륙의 보석들을 전시한다고 했다.
축복연회가 끝난 지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 돌아가지 않은 사신들도 대거 초대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델보 후작성에 마차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지빌라는 그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온기 하나 없는 사람 같잖아.’
성문 앞에는 마차들이 줄지어 있었고, 귀족들은 황녀와 대공을 향해 수군거렸다.
두 사람은 그런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담담히 성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불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두 사람의 등장에, 홀은 한동안 정적에 잠겼다.
오늘따라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황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귀족 부인들은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황녀와 대공에 대한 총평을 늘어놓았다.
“저 드레스는 값으로 매기기도 어려울 것 같네요. 달린 보석들이 무엇인지 아세요?”
“일반 백성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값이겠죠.”
그녀들은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눈길로 황녀를 바라보았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던 대공이 약혼을 하더니 보란 듯이 연회에 동반 참석하자, 귀족 남성들은 혀를 찼다.
“이유가 있어서겠거니 했는데… 황녀 정도는 돼야 결혼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저 정도 미모라면 누구라도 했겠지. 나라도 했을 걸세.”
“결국은 입장을 바꿨군.”
“허허, 입장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마음이 바뀐 건지 그 속은 모르는 걸세.”
귀족들은 황녀와 대공을 두고 저급한 품평을 이어갔다.
지빌라는 이런 귀족 연회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대외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자리라면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북부로 가게 되면, 조금은 편해질까.’
이런 자리, 이 위선적인 연회들.
회귀한 뒤 줄곧 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사치를 즐기고, 기행으로 시선을 모으고.
‘그 모든 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어.’
“스트라톤 왕 카이사르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다른 곳에 시선을 주었던 지빌라는, 대공의 팔에 제 손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가 멈칫했다.
‘카이사르.’
순간, 목덜미부터 서늘하게 굳었다. 지빌라의 손이 저도 모르게 가슴께의 펜던트를 찾았다. 익숙한 이름, 그러나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그 이름이었다.
“카이사르 경…… 아직 대륙으로 돌아가지 않으셨군요.”
지빌라는 축복연회가 끝나 한숨 돌리던 참이었다. 회귀 전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을, 이번에는 무사히 수습해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상 밖이었다.
카이사르는 붉은 머리칼을 제국의 격식대로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있었다. 평소에는 사자 갈기처럼 흩날리던 머리였다. 길들지 않은 짐승 같은 붉은 눈동자까지 더해져, 그는 존재만으로도 상대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회귀 전— 카이사르는 전리품처럼 얻은 황녀였음에도, 지빌라를 정식 왕후로 맞아들였다. 왕비가 여럿인 궁에서, 두 번 결혼한 황녀를 위한 예우치고는 파격적이었다. 두 번의 결혼을 문제 삼은 다른 왕비들에게 갖은 투기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독을 먹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이 남자는 그녀를 싸고돌아 오히려 화를 키웠고, 집요하게 집착했다.
지빌라는 끝없는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그를 보았다. 그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움찔한 것을 보았을 때, 카이사르는 잠시 말을 잃었다. 무엇이 그렇게 그녀를 긴장하게 만든 걸까. 축복연회에서 본 그녀는 당당하고 거침없었다.
그런데 지금, 왜…….
당황하는 황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황실 사냥대회의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누가… 초대장을 주었나요?”
그는 황녀가 그것을 알고자 하는 연유가 궁금하여 솔직하게 답했다.
“말라르메 후작입니다.”
“…그랬군요. 일황자가 실수한 것을 만회하려는 것 같네요. 부디 사냥대회에 참석해 주신다면 황실을 대신해 감사드리겠습니다.”
말라르메 후작.
역시 일황자는 어떻게든 카이사르를 이용할 모양이었다.
‘또 어떤 일을 꾸밀 셈일까.’
그가 이곳에 오래 머문다면, 그들의 손에 또다시 휘말릴지도 몰랐다.
102화프레데리크의 손이 먼저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부드러움 속에 느껴지는 힘, 놓칠 생각이 없는 사람의 손이었다.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낯익은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몸이 먼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빌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는 이미 좁힐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그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그녀의 마음이 지금, 자신과 같은 곳에 있다는 걸. 그저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틈을, 잠시 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지빌라는 대답 대신 스스로 그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프레데리크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대로 걸려 멈춘 사람처럼.그의 손이 지빌라의 허리로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천을 쓸어내리듯 조용했지만 확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맞닿은 가슴 사이로,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빌라는 그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숨기려 해도, 이미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프레데리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 이 순간을 만든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니까. 다만 그녀 역시 순순히 이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확신하게 만들었다.“지빌라…….”이번에는 이름을 완전히 품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 끝에는, 그마저도 다 내려놓지 못한 작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지빌라는 그 틈을 알아챘다. 먼저,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가볍지만 확실하게.
101화지빌라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위해 놓아둔 술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잔에 나누어 따르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스며들었다.두세 잔을 연달아 비운 지빌라는 금세 볼이 붉게 물들었다.“하르트라라고 얕보면 안 돼.”“달콤해서 그만…….”프레데리크는 조용히 웃었다.사슴 젖으로 빚은 하르트라는 북부 사람들에게 익숙한 토속술이지만 지빌라에게는 생소했다. 그래서인지 은근한 단맛에 취기가 더 빠르게 올랐다.평소엔 보기 어려운, 유난히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쳤다.“오늘 정도는 괜찮겠지.”그 말이 술보다 더 뜨겁게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그는 술잔을 기울이기보다 지빌라 곁에 조용히 앉았다. 평소라면 흐트러짐 하나 없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볼이 발갛게 물든 채 눈매가 살짝 풀려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풍경도, 축제도, 불꽃도―지금의 그는 단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피곤하면 말해.”“아니에요. 괜찮아요.”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불꽃은 더 까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도는 그보다도 더 솔직했다.
100화연날리기가 끝나고 마지막 춤까지 지나자, 축제는 서서히 밤의 정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잔불처럼 흩어진 연의 불빛이 남아 있었고, 광장은 춤이 끝났다는 여운으로 들뜬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오늘 축제의 진짜 마지막은 불꽃축제였다. 랑베르를 주축으로 일행은 하튼 백작성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 성은 대공 부부의 방문 소식으로 분주했다.사람들은 성의 가장 높은 곳, 불꽃을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를 꾸미느라 분주히 오르내렸고, 곳곳에서 바람에 실린 흙냄새와 횃불의 열기가 섞여 흘렀다.랑베르는 성문 앞에서 인파를 정리하며 마지막 준비를 챙기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밤이 내려앉았다. 곧 시작될 절정을 앞두고, 성 전체가 긴장을 모으는 듯했다.그때, 레오노라는 누군가를 발견하자마자 숨을 삼켰다.‘왜 하필… 지금?’어둠 속에서 끌려 들어간 그녀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마주했다.하인 복장이었지만, 어둠에서도 드러나는 표식은 단 하나, 허리끈 안쪽에 숨긴 아주 작은 금빛 인장.황가의 비밀을 뜻하는 일황자의 인장.사내는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레오노라에게 접근했다.“레오노라 양.”목소리는 낮고 절제돼 있었다.“일황자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그는 허리를 숙여 작은 검은 상자를 그녀의 손
99화프레데리크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니, 낯설었다. 축제는 짧고, 대공성은 바로 코앞인데… 왜인지 오늘만큼은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그는 말없이 랑베르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가볍게 턱짓했다.“짐은 하튼 백작성에 풀도록.”랑베르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지금… 말씀이십니까? 대공성까지는—”“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낸다.”결정이 내려지자, 곁에 있던 피엘은 잠시 굳은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부임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대공의 성품을 파악하려 애써온 사람이었다.‘대공께서 이렇게까지 표정이 밝았던 적이 있었던가…?’랑베르 또한 거의 감동에 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성에서 대공이 쉬겠다니 영광이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사실이 있었다.프레데리크의 시선이 자꾸, 너무 자주, 대공비를 따라갔다. 풍경을 바라보듯 부드럽고, 오랫동안 씌워졌던 어둠이 벗겨진 사람처럼 가벼워 보였다.랑베르는 그 모습을 오래 보지도 못하고 곧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준비해두겠습니다, 각하.”프레데리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행렬은 여전히 움직였고, 축제의 열기와 노을빛이 뒤섞여 퍼지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 속에서도 그는 지빌라의 숨결만 또렷하
98화레오노라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프레데리크는 지금, 너무도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너무 명확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구었다.피엘이 낮게 말했다.“전하께서… 저렇게 누군가에게 맞춰 움직이시는 걸 처음 봅니다.”레오노라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러게요. 아주… 철저하게 맞추셨네요.”살짝 눌린 목소리 속에는 놀람과 인정, 그리고 어쩌지 못하는 작은 서운함이 섞여 있었다.광장에 다시 아이들 웃음이 크게 터졌다. 하지만 레오노라의 귓가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 맴돌았다.‘정말로… 지빌라 전하를 위해 온 걸까? 아니면…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어진 걸까.’그 깨달음이 겨울 바람보다 더 서늘하게 스쳤다.축제는 무르익어갔다. 인파 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군가 뒤에서 밀치는 바람에 지빌라가 휘청였다.프레데리크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안정시켰다. 손가락이 감기는 순간 둘 사이의 거리도 자연스레 좁혀졌다.“사람이 많군.”그의 짧은 말이 의외로 진정 효과를 냈다.“…고마워요.”지빌라는 잡힌 손에 신경이 쓰여 시선을 피했다.
97화의식이 끝나자 아이들 무리가 광장을 뛰어다니며 작은 부적을 나눠주기 시작했다.흰 실과 파란 실을 엮어 만든 ‘생명의 매듭’.한 아이가 지빌라 앞에 다가와 매듭을 내밀었다. 작고 단단한 매듭은 손 위에 놓이자마자 따뜻한 숨결을 품은 듯했다.“요람에 걸어두면 복이 온대요!”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지빌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프레데리크가 손을 내밀어 대신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그의 손가락이 지빌라의 손등을 스쳤다. 의도치 않은 접촉이었는데, 왜인지 지빌라는 숨을 들이켰다.프레데리크는 부적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대대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한 거지.”말이 끝나자, 그의 표정에 옅게 금이 갔다. 지빌라는 그 금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득 떠올랐다.북부를 지배해온 오래된 저주, 베라트 가문의 가주는 스물다섯이 되면 죽는다는 전승.프레데리크의 아버지는 스물다섯이 되던 해, 마치 사슬이 끊어지듯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대공비의 운명은 더 잔혹했다. 프레데리크가 다섯 살이던 해, 한 잔의 독이 모든 것을 끝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결국 어린 프레데리크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고, 그를 지켜낸 건 혈육이 아닌 북부 그 자체였다. 레오노라의 아버지, 동부의 클레브 백작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그는 황실의 견제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