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241 - Chapter 250

420 Chapters

241화. 목소리만

240화 이후 도현은 정말 숫자를 없앴다.그런데 숫자가 사라지자 더 위험한 게 생겼다.목소리였다.출장 중인 도현이 밤 열한 시에 전화를 걸었다.“지금 혼자입니까?”“네.”“문 잠갔습니까?”“네.”잠시 정적이 흘렀다.“오늘은 얼굴 안 봅니다.”“영상통화 안 해요?”“네.”“왜?”“당신이 제 표정을 보지 않고도 제 말을 원하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낮아진 목소리에 손끝이 괜히 긴장했다.“싫으면 끊으십시오.”“안 끊어요.”“그럼 침대 끝에 앉으십시오.”나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움직였다.“앉았어요.”“손은 무릎 위.”“네.”“등 기대지 마십시오.”보이지도 않는데 자세가 저절로 바로잡혔다.“주인님.”“네.”“지금 웃고 있죠?”“조금.”“진짜 얄미워.”“그 말은 허락합니다.”도현의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가까웠다.“눈을 감으십시오.”“안대도 없는데?”“그래서 더 중요합니다.”나는 눈을 감았다.“오늘의 명령은 하나입니다.”“뭔데요?”“제가 없는 방에서도 제가 있다고 상상하지 마십시오.”뜻밖이었다.“그럼?”“제가 없는 건 없는 겁니다.”잠시 뒤 그가 덧붙였다.“대신 제가 필요하면 직접 말하십시오.”나는 침묵했다.“서윤.”“…필요해요.”“무엇이?”“주인님 목소리.”전화기 너머로 낮은 숨이 섞였다.“그럼 오늘은 여기 있습니다.”그날 밤 가장 강한 건 손이 아니라,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거리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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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화. 끊어진 통화

다음 날 같은 시간.이번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어젯밤 도현의 목소리만 듣고 잠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오늘도 자연스럽게 같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하다 밤 열한 시가 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연결음이 세 번 울렸다.그리고 끊겼다.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실수인가 싶어 다시 걸었다.이번에도 세 번.또 끊겼다.순간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어제는 자기가 먼저 전화해서 자세까지 정해 놓고, 오늘은 내가 전화하니까 받지도 않는다고?그 생각을 하는 순간 메시지가 왔다.[회의 중.]딱 세 글자.설명도 없었다.언제 끝나는지도,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도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지웠다.[알겠어요.]썼다가 지우고.[끝나면 연락해요.]그것도 지웠다.결국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던졌다.“됐어.”혼잣말을 하고도 계속 화면이 신경 쓰였다.십 분.이십 분.아무 연락도 없었다.괜히 더 화가 났다.그러면서도 한쪽에서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도현이 전화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회의 중이라고 말했고, 지금은 업무 시간이었다.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 기분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삼십 분쯤 지나 휴대전화가 울렸다.차도현.나는 두 번 울릴 때까지 일부러 받지 않았다.세 번째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화났습니까?”첫마디부터 그거였다.“아니요.”“거짓말.”“…조금.”도현이 잠시 조용했다.“제가 전화를 끊어서?”“두 번이나요.”“회의 중이었습니다.”“알아요.”“그런데도 화났습니까?”말투에 비난은 없었다.정말 이유를 알고 싶은 목소리였다.나는 베개를 끌어안았다.“어제는 주인님이 원할 때 전화했잖아요.”“네.”“그래서 오늘도…”말끝이 흐려졌다.도현이 대신 말했다.“제가 바로 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정곡이었다.나는 입술을 삐죽였다.“그럴 수도 있죠.”“그럴 수 있습니다.”뜻밖에 바로 인정했다.“하지만 저도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그 말이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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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화. 두 번 두드리기

서울 집에 돌아온 날, 도현은 침실 문을 닫았다. 잠그지는 않았다. 그런데 평소에는 활짝 열어 두던 문이 닫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하게 낯설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왜 닫아요?” 안쪽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들어오기 전에 두 번 두드리십시오.” “우리 집인데?” “그래서.”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냥 열어 버릴 수도 있었다. 잠긴 것도 아니고, 우리 둘이 함께 쓰는 침실이었다. 그런데 손끝에 힘을 주려다 멈췄다. 똑똑. 두 번. “들어와도 됩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도현이 대답했다. “아직.” “…뭐?” 나는 문을 빤히 바라봤다. 진짜 안 열어 줬다. “왜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기분이 묘했다. 예전 같으면 반대였다.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고, 도현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쪽. 도현은 내가 문을 닫으면 불안해했고,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이 먼저 공간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얼마나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기분 안 좋아요?” “조금 복잡합니다.” “저 때문이에요?” 그 질문을 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문 너머에서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 질문에 지금 답하면, 또 당신이 이유를 찾을 것 같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맞았다. 도현이 혼자 있고 싶다는 말 하나를 듣고 나는 벌써 내가 뭘 잘못했는지 찾고 있었다. “알겠어요.” 나는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필요하면 불러요.” “네.” 거실로 돌아왔지만 신경은 계속 침실 쪽으로 갔다. 오 분. 칠 분. 십 분. 일부러 시계를 보지 않으려 했는데 계속 보게 됐다. 결국 다시 일어났다. 문 앞에서 이번에도 바로 열지 않았다. 똑똑. “지금은?” 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자 도현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재킷은 벗어 놓았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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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브로치 대신 핀

차명희가 새로운 공식 행사에 참석하자며 브로치를 또 보내왔다. 지난번 재단 출범 행사 때 착용했던, 차가의 오래된 브로치였다. 비서가 벨벳 상자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회장님께서 오늘 행사에 착용하시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한동안 상자를 바라보다 뚜껑을 닫았다. “돌려드려 주세요.” 비서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대로요?” “네. 오늘은 이걸 할 거예요.” 나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며칠 전 직접 주문한 은색 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앞면에는 아무 문양도 없었다. 보석도 없고,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도 없었다. 아주 단순한 은색 핀. 뒤집어야만 보이는 뒷면에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서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새긴 이름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오늘 행사는 차명희가 만든 재단 행사가 아니었다. 다섯 도시의 유럽 사업 성과를 공개하고, 향후 운영 방향을 발표하는 총괄 행사였다. 나는 누구의 며느리나 배우자로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유럽 지역 총괄 한서윤으로 가는 자리였다. 행사 직전 대기실로 들어온 도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브로치 상자를 발견했다. “어머니 브로치는 안 합니까?” “오늘은 이거.” 나는 은색 핀을 들어 보였다. “왜?” “오늘 행사는 재단이 아니라 총괄 행사니까.” 도현은 별다른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내가 핀을 뒤집는 순간 뒷면의 글자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당신 이름만 있군요.” “응.” “제 이름도 없고.” “네.” “차가 이름도 없고.” “그것도 없어요.”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섭섭해요?” 예전의 도현이라면 아주 조금은 그랬을지도 몰랐다. 내가 자신의 이름과 관계없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 자체에 묘한 불안을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좋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왜?” 도현은 핀을 받아 잠시 살펴봤다. 그러나 직접 내 옷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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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검은 단추

도현의 새 정장 소매에는 검은 단추 하나가 달려 있었다.평범해 보였지만 안쪽에 아주 작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0]“번호 없앤다며요.”“그래서 0입니다.”“그게 더 수상한데.”도현은 소매를 걷었다.“0은 시작 전입니다.”“뭘 시작하기 전에?”“묻기 전.”그는 출장이나 공식 행사에서 그 단추를 만질 때마다, 감정적으로 말하기 전에 한 번 멈추기로 했다고 설명했다.나는 웃었다.“질투 방지 버튼?”“그렇게 불러도 됩니다.”며칠 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행사장에서 마르틴이 내 허리 가까이에 손을 뻗어 기자들 사이에서 길을 안내했다.도현의 시선이 바로 차가워졌다.나는 봤다.그가 소매 단추를 엄지로 눌렀다.한 번.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집에 돌아온 뒤 내가 물었다.“버튼 눌렀죠?”“네.”“효과 있었어요?”“절반.”“나머지 절반은?”도현이 가까이 왔다.“집에서 말하려고 남겨 뒀습니다.”“뭐라고?”“그 손이 싫었습니다.”“그래도 안 막았네요.”“당신이 불편해하지 않았으니까.”나는 단추를 손끝으로 눌렀다.“0.”도현의 시선이 짙어졌다.“왜 누릅니까?”“지금 주인님도 시작 전에 한 번 생각하라고.”“무엇을?”“제가 오늘 허락할지.”그의 눈빛이 순간 달라졌다.“그건 아주 좋은 사용법이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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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화. 엘리베이터 38초

호텔 엘리베이터가 38층까지 올라가는 데 정확히 38초가 걸렸다.처음에는 우연히 알게 된 시간이었다.아침 회의를 마치고 객실로 올라가던 중 도현이 휴대전화를 확인하다 말했다.“38초.”“뭐가요?”“1층에서 38층까지.”“그걸 왜 재요?”“궁금해서.”역시 도현다웠다.별것 아닌 것도 한 번 궁금해지면 정확히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나는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도현도 뒤따라 들어왔다.문이 닫히자 그가 갑자기 말했다.“지금부터 회사 얘기 끝.”“왜요?”“38초 동안만.”“고작 38초?”“충분합니다.”“뭘 하기엔?”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도현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 돌아왔다.“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그게 더 이상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회의실에서 신규 물류 계약이며 인력 재배치며 숫자만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나만 바라봤다.엘리베이터 벽면 숫자가 올라갔다.7층.11층.15층.도현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도 대지 않았다.나는 괜히 재킷 소매를 정리했다.“왜 봐요.”“38초밖에 없으니까.”“그래서 계속 보는 거예요?”“네.”“뭘 하려고?”“아무것도.”“진짜?”“네.”오히려 그 대답 때문에 더 신경 쓰였다.20초쯤 지났을 때 내가 먼저 못 참고 말했다.“말 안 해요?”“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뭔데요?”“회사 말이 아닌 것.”“그게 뭐예요.”“당신이 생각하십시오.”또 저 방식이었다.원하는 답을 직접 주지 않고 내가 먼저 말하게 하는 것.엘리베이터 숫자가 29를 지나갔다.30초.나는 결국 한숨처럼 말했다.“보고 싶었어요.”도현의 눈빛이 바로 달라졌다.조금 전까지 차분했던 시선이 갑자기 깊어졌다.“다시.”“왜요?”“잘 안 들렸습니다.”“거짓말.”“다시 말하십시오.”나는 괜히 옆을 봤다.엘리베이터 벽면에 비친 우리 모습이 보였다.“보고 싶었다고요.”“누가?”“도현 씨가.”“오늘 하루 동안?”“…네.”그제야 도현이 한 걸음 가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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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화. 잠들기 전 한 문장

새로운 규칙은 내가 만들었다.잠들기 전 한 문장.하루 동안 말하지 못한 것을 딱 하나만 말하기.설명도 길게 하지 않고, 변명도 붙이지 않고, 상대가 바로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 것.그냥 오늘 마음속에 남은 문장 하나를 꺼내 놓는 규칙이었다.처음 제안했을 때 도현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 한 문장입니까?”“길게 말하면 또 회의 되잖아요.”“우리가 대화를 회의처럼 합니까?”“가끔요.”“누가 더 그렇습니까?”나는 대답 대신 침대에 누웠다.“오늘부터 시작.”도현은 더 따지지 않았다.첫날.불을 끄고 나란히 누운 뒤 내가 먼저 말했다.“오늘 마르틴한테 화났어요.”도현이 바로 물으려 했다.“왜—”“질문 금지.”입을 다물었다.몇 초 뒤 자기 차례가 왔다.“오늘 당신이 마르틴과 웃는 걸 보고 질투했습니다.”나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또?”“질문 금지라면서요.”자기가 만든 규칙도 아닌데 벌써 잘 써먹었다.“알겠어요.”그날은 정말 그것으로 끝냈다.왜 화났는지.왜 질투했는지.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하지 않았다.그냥 서로 그런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만 알고 잠들었다.둘째 날.내 차례.“오늘 회의 무서웠어요.”도현의 몸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평소 같으면 바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참았다.자기 차례가 오자 말했다.“오늘 당신이 전화를 안 받아서 불안했습니다.”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도 질문하고 싶었다.얼마나 불안했는지.또 옛날처럼 이상한 생각까지 했는지.그래도 참았다.한 문장이니까.대신 어둠 속에서 손만 조금 움직였다.도현의 손등에 손끝이 닿았다.그도 잡지는 않았다.손등끼리 가볍게 닿은 채 그대로 잠들었다.셋째 날.이상하게 내 차례가 어려웠다.하루 종일 별일은 없었다.회의도 무난했고.마르틴과도 안 싸웠고.도현과도 연락을 잘했다.그런데 밤이 되자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나는 한참 천장을 바라봤다.도현이 옆에서 기다렸다.재촉하지 않았다.“오늘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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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유리문 너머

파리 센터에 새 회의실이 생겼다.벽 전체가 투명 유리였다.복도에서도 안이 훤히 보였고, 맞은편 사무실에서도 누가 앉아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개방성과 소통을 강조하자는 취지라고 했지만 나는 들어가자마자 표정이 굳었다.“싫어요.”마르틴이 바로 물었다.“왜요?”나는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계속 누가 보는 기분.”“실제로 보고 있긴 하죠.”“그 말이 더 싫은데.”마르틴이 웃었다.“블라인드 설치 요청할까요?”“네. 회의 중에는 닫을 수 있게.”그날 오후 도현에게 새 회의실 이야기를 했다.사진까지 보내자 그는 잠시 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하루만 그대로 사용해 보십시오.”“왜요?”“숨겨야 할 일이 없는 회의라면 크게 문제없지 않습니까?”나는 바로 표정이 굳었다.“그거랑 보는 건 다르죠.”도현도 내 목소리가 달라진 걸 알아챘다.“설명해 주십시오.”“숨길 게 없다는 이유로 계속 보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나는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사람이 집중 못 할 수도 있고, 표정 하나까지 계속 보인다고 생각하면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어요.”도현은 잠시 침묵했다.예전 같으면 자기 논리를 한 번 더 설명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맞습니다.”“뭐가요?”“제가 잘못 말했습니다.”너무 빨리 인정해서 오히려 내가 멈췄다.도현이 덧붙였다.“숨길 것이 없는 것과 보여 줄 의무가 있는 것은 다르군요.”“네.”“블라인드 설치하십시오.”“이미 신청했어요.”“빠르군요.”“이런 건 빠르게.”회의실은 그날 하루만 그대로 사용했다.생각보다 더 불편했다.회의 중 복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안을 바라봤고,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의식했다.한 직원은 발표 중 말을 멈추기도 했다.“괜찮아요?”내가 묻자 그녀는 민망한 듯 웃었다.“계속 밖에서 보는 것 같아서요.”결국 회의를 다른 공간으로 옮겼다.저녁에 호텔로 돌아왔을 때 도현은 이미 와 있었다.그런데 거실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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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화. 마르틴의 사직서

마르틴이 갑자기 사직서를 냈다. 아침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간 뒤였다. 그는 평소처럼 침착한 얼굴로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그가 내민 건 얇은 서류 한 장이었다. 나는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표정이 굳었다. [사직서.] “이게 뭐예요?”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이유는요?” “개인 창업입니다.” 나는 바로 서류를 받지 않았다. “경쟁사 갑니까?” “아닙니다.” “다른 회사 스카우트?”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마르틴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제가 직접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뜻밖이었다. 마르틴은 지금까지 운영 부대표로 부족함이 없었다. 현장 이해도도 높았고, 각 도시 대표들과의 조율도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모든 걸 직접 떠안지 않아도 되도록 가장 먼저 밀어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무슨 회사인데요?” “도시 간 폐기물 순환 기술입니다.” 그는 준비해 온 자료를 꺼냈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을 다른 도시의 생산 원료로 다시 연결하는 플랫폼. 프라하에서 남는 소재를 바르샤바에서 재활용하고, 파리에서 폐기되는 포장재를 스톡홀름에서 재가공하는 방식이었다. 우리와 경쟁하는 사업이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우리가 계약하거나 투자할 수도 있는 분야였다. “언제부터 생각했어요?” “오래됐습니다.” “얼마나요?” “총괄님이 유럽 지역 총괄로 선임되기 전부터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오래?” “네.” “왜 말 안 했어요?” 마르틴이 아주 조금 웃었다. “총괄님이 붙잡을 것 같아서.” “붙잡을 건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직서를 내려다봤다. 마르틴이 빠지면 당장 일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한예린도 있고. 각 도시 대표들도 이전보다 훨씬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아쉬웠다. 좋은 사람을 보내는 건 언제나 아쉬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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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화. 빈 의자

마르틴이 떠난 뒤 그의 자리는 한 달 동안 비워 두었다. 정확히는, 비워 두기로 했다. 사직 절차가 끝난 다음 날부터 인사팀에서는 후임 후보 명단을 올려 보냈다. 내부 승진 두 명, 외부 영입 세 명. 경력도 좋았고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명단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총괄님.” 인사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운영 부대표 자리를 한 달 이상 비우는 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아요.” “그러면 바로 면접 일정을 잡을까요?” “아니요.” “왜요?” 나는 비어 있는 마르틴 자리를 바라봤다. 책상도 치우지 않았다. 의자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빈자리도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지 보고 싶어요.”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대체 인력을 두지 않고요?” “네.” “업무 공백이 생기면요?” “그때 뽑죠.” “조직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흔들리는 지점부터 봐야죠.” 예전 같으면 불안해서 하루도 못 버텼을 것이다. 누군가 떠나면 즉시 다른 사람을 넣고. 빈 칸이 보이면 채우고. 문제가 생길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기다렸다. 첫 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틴이 맡았던 도시 간 일정 조정은 한예린과 각 도시 대표들이 나눠 처리했다. 둘째 주. 바르샤바와 프라하 사이 물류 일정이 한 번 충돌했다. 나는 개입하려다가 멈췄다.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묻자 프라하 대표가 말했다. “저희끼리 조정해 보겠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세요.” 두 시간 뒤 해결됐다는 보고가 왔다. 셋째 주. 스톡홀름 신규 장비 승인 문제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았다. 현지 대표와 기술팀이 협의했고, 도현 쪽 기술·전략팀은 자문만 했다. 일은 계속 돌아갔다. 마르틴이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가 좋은 부대표였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도 굴러가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틴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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