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261 - Chapter 270

420 Chapters

261화. 48시간 무직

조식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바로 호텔을 나서지 않았다.아침 햇빛이 창가까지 들어왔고, 도현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오늘 일정을 확인하려다 휴대전화를 내려놨다.휴가 마지막 이틀.도현이 갑자기 말했다.“48시간 동안 직함을 쓰지 맙시다.”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부르는데?”“이름.”“의장님도 금지?”“네.”“총괄님도?”“네.”“그럼 차도현 씨?”“가능합니다.”“한서윤 씨?”“네.”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주인님은?”도현이 멈췄다.아까까지 너무 쉽게 대답하던 사람이 처음으로 생각했다.“그건 직함이 아니라 관계 안의 호칭입니다.”“치사해.”“왜 치사합니까?”“도현 씨한테 유리한 것만 예외잖아요.”“당신이 싫다면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이번에는 또 바로 선택권을 넘겼다.나는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그럼 제가 원할 때만.”도현의 시선이 조금 깊어졌다.“좋습니다.”48시간 동안 회사 메신저도 로그아웃했다.노트북은 캐리어 안에 넣었다.도현은 비서에게 단 하나의 조건만 남겼다.긴급한 안전사고나 법적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연락하지 말 것.나는 카렐과 한예린에게 같은 내용을 보냈다.그리고 메신저 앱을 닫았다.첫날은 좋았다.아무 연락도 없었다.점심을 늦게 먹고.강가를 걷고.호텔 근처 작은 시장도 둘러봤다.도현이 엽서 한 장을 골랐고, 나는 이상한 모양의 유리컵을 샀다.“그걸 왜 삽니까?”“예쁘잖아요.”“손잡이가 없는데 뜨거운 걸 어떻게 마십니까?”“차가운 거 마시면 되죠.”도현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그래도 계산할 때 내 손에서 빼앗지는 않았다.“왜 안 말려요?”“당신 돈입니다.”“그럼 마음에 안 들어도?”“네.”“많이 성장했네.”“48시간 동안 직함 금지라면서 평가도 합니까?”“평가는 직함 아니거든요.”첫날 밤까지는 평화로웠다.문제는 둘째 날 아침부터였다.도현은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협탁을 더듬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2화. 차도현이라는 사람

48시간 무직의 마지막 밤.호텔 방 안은 조용했다.회사 메신저도 꺼져 있었고, 노트북도 캐리어 안에 들어가 있었다.도현은 침대 끝에 앉아 손목시계를 풀고 있었다.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도현 씨.”“네.”“회장도 아니고.”그가 나를 봤다.“의장도 아니고.”“네.”“주인님도 아니면.”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차도현은 뭐예요?”손목시계를 내려놓던 그의 손이 멈췄다.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평소라면 어떤 질문에도 몇 초 안에 답을 내놓는 사람이었다.회사 문제든.관계 문제든.감정 문제든.확실하지 않아도 일단 정리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사람.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말이 없었다.“남편.”한참 뒤 그가 말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그것도 관계잖아요.”도현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그럼…”다시 침묵.나는 재촉하지 않았다.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잘 모르겠습니다.”그 대답이 의외로 좋았다.모른다고 말하는 도현은 아직도 낯설었다.예전 같으면 모르는 상태 자체를 견디지 못했을 사람이었다.나는 웃지 않았다.대신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나도 한서윤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총괄이 아닌?”“응.”“작업하는 사람도 아니고?”“응.”“제 아내도 아니고?”“그것도 빼고.”도현은 잠시 생각했다.“그럼 어렵군요.”“그러니까.”둘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호텔 창밖으로 프라하 야경이 보였다.사람들은 아래에서 각자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누군가는 집에 가고.누군가는 술을 마시러 가고.누군가는 혼자 걷고.그걸 보고 있으니 문득 이상했다.우리는 늘 역할이 있었다.누구 앞에서는 대표였고.누구 앞에서는 총괄이었고.누구 앞에서는 배우자였고.어떤 순간에는 주인과 복종하는 사람이었다.그런데 그 모든 걸 걷어내면 뭐가 남을까.도현이 먼저 말했다.“그럼 하나씩 찾죠.”“뭘?”“일 안 할 때 좋아하는 것.”나는 바로 대답했다.“난 따뜻한 국물.”도현의 입가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3화. 아버지의 시계

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났다.도현은 오랜만에 본가 창고에서 가져온 상자 하나를 서재에 펼쳐 놓고 있었다.안에는 오래된 서류와 사진, 작은 소지품들이 섞여 있었다.나는 문 앞에서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들어갔다.“정리 중이에요?”“네.”“도와줄까요?”“괜찮습니다.”그 말은 혼자 하고 싶다는 뜻처럼 들렸다.나는 더 다가가지 않고 책장 쪽에 기대 있었다.도현은 서류 몇 장을 넘기다가 작은 가죽 상자 하나를 꺼냈다.뚜껑을 열자 오래된 손목시계가 나왔다.금속은 조금 빛이 바래 있었고, 가죽줄은 오래돼 딱딱해져 있었다.그런데 이상한 건 시계였다.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시각은 정확히.4시 17분.“고장 났어요?”도현이 잠시 시계를 바라봤다.“오래전에.”“왜 안 고쳤어요?”대답이 늦었다.“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멈춘 시계입니다.”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괜히 더 묻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도현이 먼저 말을 이었다.“그날 저는 회의 중이었습니다.”나는 천천히 그를 봤다.“연락 못 받았어요?”“받았습니다.”“그런데?”그는 시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둔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회의를 끝내고 갔습니다.”가슴이 묵직해졌다.“얼마나 걸렸는데요?”“삼십 분 정도.”“그럼…”도현이 고개를 저었다.“이미 늦었습니다.”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후회해요?”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왔다.“매일.”짧고 단단했다.나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도현은 여전히 시계만 보고 있었다.“왜 회의를 끝냈어요?”“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무슨 회의였는데?”“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그 대답이 더 아팠다.“당시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도현이 시계를 뒤집었다.뒷면에는 작은 흠집이 몇 개 있었다.“제가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연락 받고도?”“네.”“지금 생각하면?”그가 낮게 웃었다.웃음이 아니라 자조에 가까웠다.“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회의였습니다.”나는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4화. 4시 17분

다음 날 오후.도현은 서울 본사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프라하에서 돌아온 뒤 밀린 안건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기술 투자 일정과 하반기 예산, 유럽 쪽 장비 도입 계획까지 안건이 여섯 개나 쌓여 있었다.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그럼 다음 분기부터는 기존 방식 대신 단계별로—”보고하던 임원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도현은 자료를 넘기다가 무심코 손목을 봤다.새로 수리한 시계.초침이 움직이고 있었다.4시 16분 54초.손이 멈췄다.55초.56초.57초.도현은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숫자가 바뀌었다.4시 17분.어제는 내 옆에서 이 시간을 지나갔다.오늘은 회의실이었다.아주 오래전에도 그랬다.회의 중이었고.전화가 왔고.그런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도현이 갑자기 자료를 덮었다.“여기서 십 분 쉬겠습니다.”보고하던 임원이 멈췄다.“무슨 일입니까?”“없습니다.”“그런데 갑자기…”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십 분 뒤 다시 시작하죠.”회의실을 나와 복도 끝 창가까지 걸어갔다.예전이라면 그 시간마저 낭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회의는 예정대로 끝내야 했고.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자신이 없으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도현은 휴대전화를 꺼냈다.한참 화면을 보다가 내 번호를 눌렀다.나는 세 번째 신호에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저입니다.”“알아요.”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근데 왜 이 시간에 전화했어요?”도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딱히 할 말이 없었다.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고.확인해야 할 것도 없었다.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그냥.”전화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그냥?”“네.”“차도현 씨가?”“이상합니까?”“조금.”나는 웃었다.“처음인 것 같아서.”“무엇이?”“특별한 이유 없이 전화한 거.”도현은 창밖을 바라봤다.서울 도로 위로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평범한 오후였다.“지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5화. 차명희의 여행

4시 17분은 그렇게 다시 평범한 시간이 됐다.도현에게는 그 평범함이 가장 큰 변화였다.그리고 며칠 뒤.이번에는 차명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나 여행 간다.”저녁 식사 자리에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도현이 젓가락을 멈췄다.“어디로요?”“이탈리아.”“누구랑 갑니까?”차명희가 천천히 그를 봤다.“혼자.”도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안 됩니다.”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차명희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내 나이가 몇인데 네 허락을 받아?”“허락 문제가 아닙니다.”“방금 안 된다며.”“안전 때문에 그렇습니다.”“그래서 경호 한 명 붙여.”“최소 두 명.”“한 명.”“두 명.”“차도현.”“어머니.”둘이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도현이 바로 나를 봤다.“뭘 웃습니까?”“아니.”“말하십시오.”“누굴 닮았나 했더니.”차명희가 바로 끼어들었다.“쟤는 나 안 닮았어.”나는 둘을 번갈아 봤다.“둘이 똑같아요.”“아니다.”“아닙니다.”이번에는 동시에 말했다.나는 더 웃었다.“지금도 똑같아.”도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이건 안전 문제입니다.”차명희가 한숨을 쉬었다.“나 평생 사람들 데리고 다녔다.”“그래서 더 아시잖습니까.”“이제는 좀 혼자 다녀보고 싶어.”그 말에 도현이 잠깐 멈췄다.차명희는 와인잔을 내려놓았다.“회장도 아니고.”한 손가락.“이사도 아니고.”두 번째.“누구 엄마로 가는 것도 아니고.”세 번째.“그냥 차명희로.”나는 도현을 봤다.며칠 전 우리가 했던 이야기와 너무 비슷했다.회장도 아니고.의장도 아니고.남편도 아닌 차도현.이번에는 차명희 차례였다.“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신 겁니까?”도현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응.”“얼마나?”“열흘.”도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깁니다.”“네 출장보다 짧아.”“그건 업무입니다.”“내 여행도 내 일이다.”도현은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6화. 어머니의 남자

차명희가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건 열흘 뒤였다.도현은 공항까지 나가겠다고 했다가 차명희에게 한마디로 거절당했다.[오지 마. 나 혼자 들어간다.]그 메시지를 본 도현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왜요?”내가 묻자 그가 말했다.“굳이 혼자 올 이유가 있습니까?”“여행도 혼자 갔잖아요.”“경호는 있었습니다.”“도현 씨.”“네.”“또 시작하려고 그러죠?”그는 입을 다물었다.“안 합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차명희가 돌아온 뒤에도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여행이 어땠는지.어디가 가장 좋았는지.무엇을 먹었는지.그 정도만 이야기했다.문제의 ‘옛 친구’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도현도 묻지 않았다.정확히는.묻고 싶은 얼굴로 사흘을 버텼다.나는 일부러 먼저 꺼내지 않았다.차명희가 말하고 싶으면 말할 테니까.그리고 나흘째 저녁.차명희가 우리에게 식사 초대를 했다.[같이 저녁 먹을 사람이 있다.]도현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를 봤다.“누구일 것 같습니까?”“알면서 왜 물어요?”“확실하지 않습니다.”“누굴 원하는데요?”“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거짓말.”나는 옷을 고르면서 웃었다.“그 이준호 씨겠지.”이탈리아 사진에서 봤던 남자.차명희와 대학 시절 친구였고.40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사람.도현은 넥타이를 매던 손을 멈췄다.“왜 이름까지 기억합니까?”나는 그를 황당하게 바라봤다.“어머니가 메시지로 알려줬잖아요.”“그렇긴 합니다.”“설마 그것도 질투해요?”“아닙니다.”이번에는 정말 아닌 것 같았다.대신 다른 종류의 긴장이 보였다.아들이 처음으로 어머니의 사적인 관계를 직접 마주하는 긴장.식당에 도착하자 차명희는 이미 와 있었다.그리고 맞은편에 그 남자가 앉아 있었다.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인상이었다.차명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개했다.“이준호.”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처음 뵙겠습니다.”“차도현입니다.”도현은 악수를 받았다.지나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7화. 가족 식탁의 빈자리

그는 그 말대로 기다렸다.그리고 며칠 뒤.차명희에게서 저녁 식사 초대가 왔다.이번에는 짧았다.[준호 씨도 온다.]도현은 메시지를 한참 내려다봤다.나는 옆에서 물었다.“왜요?”“아무것도 아닙니다.”“표정은 아닌데.”“그냥 가족 식사라고 생각했습니다.”“이준호 씨 오면 가족 식사 아니에요?”도현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나는 웃었다.“아직 적응 중?”“네.”예전 같으면 누가 오는지부터 확인하고, 왜 오는지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이번에는 더 묻지 않았다.저녁이 되어 차명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준호는 이미 와 있었다.그는 식탁 한쪽에 앉아 있었고, 차명희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둘 사이에는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도현의 시선이 가장 먼저 그 병으로 갔다.나는 작게 속삭였다.“확대하지 마요.”“무엇을?”“사진 없는데도 확대하려는 얼굴이라.”도현이 나를 봤다.“그 정도는 아닙니다.”“맞아요.”차명희가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왔으면 앉아.”이준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랜만입니다.”도현은 이번에도 지나치게 정중했다.“안녕하셨습니까.”나는 그 옆에 앉으며 속으로 웃었다.차명희가 바로 말했다.“또 저렇게 말한다.”“뭘요?”“회사 사람 만난 것처럼.”도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이준호가 웃었다.“괜찮습니다. 저도 아직은 조금 어색하니까.”‘아직은.’그 단어가 다시 나왔다.나는 바로 도현을 봤다.역시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차명희도 눈치챘는지 이준호를 한 번 노려봤다.“쓸데없는 말 하지 마.”“아무 뜻 없이 한 말인데.”“저쪽은 뜻을 열 개쯤 만들 사람이야.”도현이 차분하게 말했다.“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나는 바로 물었다.“정말?”“…노력 중입니다.”이번에는 차명희까지 웃었다.식사가 시작됐다.의외로 분위기는 편했다.가장 놀라운 건 이준호가 회사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차명희가 누구였는지.어떤 회사를 이끌었는지.어떤 사업을 했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8화. 미완성 바다

그는 정말. 그 말대로 기다렸다. 그리고 열흘쯤 뒤. 차명희가 다시 우리 집에 왔다. 이번에는 이준호도 없었고 수행원도 없었다. 대신 손에 커다란 포장 하나를 들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그것부터 봤다. “그게 뭐예요?” “들어가서 봐.” 도현이 곧바로 다가가 포장을 받아 들었다. “무겁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들어.” “그래도 제가 하겠습니다.” 차명희는 굳이 빼앗지 않았다. 거실까지 들어온 뒤 도현이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익숙한 푸른색이 보였다. “어?” 며칠 전까지 미완성이었던 바다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비어 있던 오른쪽 아래까지 파도가 이어져 있었다. 흐릿했던 수평선에도 색이 더해졌고, 한쪽에는 작은 배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완성된 그림이었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진짜 끝내셨어요?” 차명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40년 넘게 못 끝냈던 걸?” “못 끝낸 게 아니라 안 끝낸 거라니까.” “이제는 왜 끝냈어요?” 그녀는 잠깐 그림을 봤다. “끝내고 싶어서.” 그게 전부였다. 도현이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가져오셨습니까?” 차명희는 거실 벽 한쪽을 가리켰다. “벽이 비어 있길래.” “저희에게 주는 겁니까?” “싫으면 가져갈게.” 나는 바로 말했다. “안 싫어요.” 도현이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여기 걸어요.” “지금?” “네.” 도현은 나를 한 번 보고는 결국 그림을 들었다. 나는 벽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를 잡아 줬다. “조금 왼쪽.” “이 정도?” “아니, 조금만 더.” “서윤 씨.” “왜요?” “삼 센티미터 차이입니다.” “그 삼 센티미터가 중요해요.” 차명희가 소파에 앉아 우리를 보다가 혀를 찼다. “그림 하나 거는데 회의하냐.” 결국 십 분 가까이 걸려 위치를 정했다. 도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도 옆에 섰다. 그때 그림 아래쪽 구석에 있는 작은 글씨가 눈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69화. 노란 장갑

노트 이야기가 있고 며칠 뒤. 한예린이 생일 선물이라며 작은 상자 하나를 보냈다. 회사에서 직접 건넨 것도 아니었다. 비서실을 통해 조용히 전달된 상자. 나는 별생각 없이 집으로 가져와 식탁 위에서 열었다. 안에는 노란색 가죽 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쨍한 노랑은 아니었다. 조금 톤이 눌린 머스터드에 가까운 색. 손등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고 손목 부분만 얇게 박음질되어 있었다. “예쁘다.” 내가 장갑을 들어 올리자 맞은편에 있던 도현의 시선이 바로 따라왔다. “왜 노란색입니까?” 나는 웃었다. “내가 알아요?” “한 전무는 당신 취향을 압니까?” 또 시작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손 쪽을 봤다. 도현도 자기 질문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손가락이 소매 끝으로 향했다. 검은 [0] 단추. 꾹. 나는 결국 웃었다. “방금 눌렀죠?” “네.” “손 대봐도 돼요?” 도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장갑에?” “아니, 단추.” “이미 눌렀습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 소매 위로 한 번 더 눌렀다. “0 두 번.” 도현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효과가 두 배입니까?” “질투도 두 배잖아요.” “아직 질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뭐예요?” 도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상자에서 장갑을 꺼내 직접 꼈다. 손에 딱 맞았다.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어때요?”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갑 낀 손을 계속 보고 있었다. “싫어요?”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봐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골랐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서.” 그 말은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왜 저 사람이 이런 걸 보냈는지’부터 물었을 것이다. 의도를 확인하고. 관계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선을 더 그으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자기 감정을 말했다. 저 장갑이 싫은 게 아니라. 자기가 고른 것이 아니라서 조금 아쉽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270화. 두 장갑

공식 행사 날. 나는 옷을 다 입고 마지막으로 장갑을 꺼냈다. 왼손에는 한예린이 준 노란 가죽 장갑. 오른손에는 도현이 고른 짙은 남색 장갑. 거울 앞에서 두 손을 나란히 들어 보자 생각보다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만 같은 색인 것보다 눈에 더 들어왔다. 침실 문이 열리고 도현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내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왜 짝이 다릅니까?” “둘 다 하고 싶어서.” “행사에?” “네.” 도현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굳이 한 짝씩?” “둘 다 제 거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복잡했다. 나는 일부러 두 손을 그의 앞에 펼쳐 보였다. “어느 쪽이 더 예뻐요?” “답을 알고 묻는 것 아닙니까?” “남색?” “네.” “질투 아직 있네.” 도현의 손가락이 습관처럼 소매 끝으로 향했다. 검은 단추. [0.] 꾹. 나는 바로 웃었다. “오늘도 눌렀다.” “필요했습니다.” “장갑 하나 때문에?” “하나가 아닙니다.” “그럼?” 그의 시선이 노란 장갑에 잠깐 머물렀다. “한예린 전무가 골랐다는 사실까지 포함입니다.” “그걸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요?” “숨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예전이라면 불편한 감정을 인정하기 전에 상대부터 문제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감정이라는 걸 먼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바꾸라고는 안 하네요.” 도현은 잠시 내 두 손을 바라봤다. “당신이 선택한 겁니까?” “네.” “그럼 그대로 가십시오.”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막는 건 다르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오늘 점수 높네.” “채점하지 마십시오.” “싫어요.” 행사장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본 건 장갑이었다. 검은 드레스에 노란색과 남색. 색이 완전히 달랐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한예린도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진짜 같이 꼈네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
PREV
1
...
2526272829
...
4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