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281 - Chapter 290

420 Chapters

281화. 아버지의 편지

검은 단추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도현의 과거에서 또 다른 것이 나왔다. 차명희가 오래된 금고를 정리하던 날이었다. 서류 몇 묶음과 오래된 보석 상자, 이미 효력이 끝난 계약서들 사이에서 얇은 편지 묶음 하나가 발견됐다. 누렇게 바랜 봉투. 수신인은 모두 같았다. [차명희.] 발신인은 도현의 아버지였다. 처음에는 차명희도 열어볼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이미 수십 년 전의 편지였고,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맨 아래쪽 봉투 하나에 작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먼저 죽으면 도현에게 보여줘.] 그래서 차명희는 그날 저녁 우리를 불렀다. 도현은 편지 묶음을 보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이건 읽지 않겠습니다.” 차명희가 눈썹을 올렸다. “왜?” “부모님 사생활입니다.” “네 아버지가 죽으면 너한테 보여 주라고 적어놨어.” 도현의 손이 멈췄다. “직접요?” “응.” 차명희가 가장 아래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겉면에 정말 그 문장이 적혀 있었다. 도현은 한참 동안 봉투를 받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도 읽으셨습니까?” “옛날에 받은 건데 뭘.” “내용 전부 기억하십니까?” “대충.” 차명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도현은 첫 번째 편지를 펼쳤다. 처음 몇 줄은 평범했다. 함께 갔던 식당 이야기. 차명희가 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던 날. 둘이 결혼을 고민하던 시절의 짧은 기록. 그러다 도현의 시선이 한 문장에서 멈췄다. [명희야, 나는 네가 나 없이도 잘 살까 봐 겁난다.] 도현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나도 문장을 읽었다. 너무 익숙했다. 표현만 달랐을 뿐. 도현이 예전 수없이 보여 줬던 불안과 닮아 있었다. 내가 자기 없이도 괜찮을까 봐. 자기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 봐. 내가 다른 도시에서도 잘 지낼까 봐. 그래서 가까이 두고 싶어 했던 마음. 도현은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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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화. 닮은 두 사람

도현은 며칠 동안 아버지의 편지를 읽었다. 한꺼번에 전부 펼치지는 않았다. 하루에 한 통. 많아도 두 통. 그리고 읽은 날에는 그다음 봉투를 바로 열지 않았다. “왜 그렇게 천천히 봐요?” 내가 묻자 도현은 편지를 접으며 말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보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다 읽었을 것 같은데.” “네.” “끝까지.” “네.” “한 번에.” 도현은 아주 조금 웃었다. “맞습니다.” “근데 지금은?” “모르는 게 남아 있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좋은 방식이었다. 그날 도현이 읽은 편지에는 차명희가 회사를 그만두려 했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 차명희는 회사 일을 줄이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고 했다. 잠시 해외에 나가 공부하는 것도 생각했다. 도현의 아버지는 반대했다. 처음에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다. 회사가 중요한 시기라는 것. 차명희가 빠지면 조직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둘이 함께 만든 일을 중간에 놓는 건 책임감 없는 선택이라는 것. 하지만 편지 뒤쪽으로 갈수록 이유는 달라졌다. 회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명희가 자기 삶에서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는 고백. 자신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 봐 겁났다는 문장. 그리고 결국 크게 싸웠다는 이야기. 편지 마지막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명희는 남았다. 그런데 내가 이긴 건지 모르겠다.] 도현은 그 문장을 오래 보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기다렸다. “왜요?”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저에게 했던 것과 같습니다.” “뭐가?” “당신에게.” 나는 금방 알아들었다. “내 일 줄이라고 했던 거?” “네.” 차명희는 예전에 내가 유럽 총괄 자리와 회사 일을 두고 힘들어할 때 몇 번이나 비슷한 말을 했다. 가족을 위해 조금 줄이는 게 어떠냐고. 도현과의 관계를 위해 너무 멀리 가지 않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표현은 달랐지만 중심은 같았다. 사랑하는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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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화. 편지를 태울까

차명희가 먼저 물었다. “편지 다 봤으면 태울까?” 도현은 바로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봤다. “왜 나 봐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제 편지 아니잖아요.” 도현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전 같으면 내가 의견을 내고, 도현이 그걸 기준으로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 편지는 차명희가 받은 편지였다. 도현의 아버지가 쓴 편지였고. 도현에게 보여 주고 싶다는 문장이 일부 적혀 있었지만, 결국 원래 주인은 차명희였다.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없앨지. 그 결정 역시 그녀가 하는 게 맞았다. 차명희는 편지 묶음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다. 꽤 많았다. 봉투마다 날짜가 달랐다. 결혼 전. 결혼 직후. 회사를 함께 키우던 시절. 도현이 태어나기 전. 도현이 어릴 때. 그리고 부부 사이가 가장 많이 흔들렸던 시기까지. 도현은 이미 대부분 읽었다. 하지만 차명희는 다시 한 장씩 펼쳐 봤다. 어떤 건 몇 줄만 보고 접었다. 어떤 건 오래 읽었다. 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뒤 차명희가 편지를 두 묶음으로 나눴다. 왼쪽. 오른쪽. 도현이 물었다. “무슨 기준입니까?” “남길 것.” 그녀가 왼쪽을 가리켰다. “버릴 것.” 오른쪽. 나는 두 묶음의 두께를 봤다. 거의 절반씩이었다. “왜 절반이에요?” 차명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부러 반으로 나눈 건 아니야.” “그럼?” 그녀는 남길 편지 한 장을 손에 들었다. “기억하고 싶은 건 남기고.” 그리고 버릴 편지 쪽을 봤다.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은 건 버렸어.” 도현의 시선이 편지 위에 머물렀다. “붙잡고 싶지 않다는 건.”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다는 뜻입니까?” 차명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요?” “이미 충분히 기억했다는 뜻이야.” 그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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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화. 재가 된 규칙

그 뒤의 우리는 더 이상 카드 한 장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카드가 재가 된 다음 날. 도현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아침 식탁에서도 평소처럼 신문을 넘겼고, 출근 준비도 똑같이 했는데 말수가 적었다. 나는 결국 먼저 물었다. “후회해요?” 도현의 손이 잠시 멈췄다. “조금.” “왜?”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 “그때의 우리가 사라진 느낌이라서.” 나는 그의 얼굴을 봤다. “그때 우리 진짜 답답했는데.” “압니다.” “문서에 규칙 엄청 쓰고.” “네.” “하나 끝나면 또 만들고.” “네.” “카드도 계속 늘어나고.” “맞습니다.” 나는 일부러 한마디 더 했다. “나 안 믿고.” 도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그 부분은 그만.”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사실인데.” “아침부터 반성문을 다시 쓸 필요는 없습니다.” “반성문 쓴 적 없잖아요.” “마음으로 많이 썼습니다.” 그 말이 너무 진지해서 더 웃겼다. 도현도 결국 아주 조금 웃었다. 조금 전까지 무겁던 분위기가 그제야 풀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등 위에 올렸다. “그래도 그때가 있었으니까 지금이 있는 거죠.” 도현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응.” “없어도 됐던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건 그렇죠.” “바로 동의하는군요.” “그럼 아니라고 해요?” 그가 한숨처럼 웃었다. 나는 손가락을 그의 손가락 사이에 넣었다. “그래도 지나온 걸 없앨 수는 없잖아요.” “네.” “그때 했던 선택 중 틀린 것도 있었고.” “네.” “필요했던 것도 있었고.” “그렇겠죠.” “그러니까 태웠다고 없던 일이 된 건 아니에요.” 도현의 시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게 위로입니까?” “아마도.” “당신답군요.” 출근 직전. 나는 서재에 잠깐 들어갔다가 멈췄다. 어제 남겨 둔 [12] 카드가 책상 위에 있었다. 원래라면 다른 기억들과 함께 상자에 들어가 있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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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화. 계약 없는 계약

비밀이라서가 아니라.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둘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회사 쪽에서 오래된 약속 하나를 다시 확인할 시간이 찾아왔다. 유럽 총괄 임기 2년 차. 계약 갱신 시점이었다. 처음 총괄 자리에 올랐을 때만 해도 5년이라는 기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두 해를 보내고 나니 조직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다섯 도시의 권한도 달라졌고. 총괄실 규모도 달라졌고. 카렐이라는 부대표도 생겼다. 무엇보다 내가 달라졌다. 이사회에서는 별다른 문제 없이 계약을 자동 연장하는 방향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첫 보고를 받은 한예린이 내게 말했다. “특별한 이견 없으면 기존 조건으로 연장될 것 같아요.” 나는 문서를 넘겼다. “자동으로요?” “네. 성과평가도 통과했고, 이사회에서도 반대 의견이 없습니다.” “그럼 안 할래요.” 한예린이 멈췄다. “뭘요?” “자동 연장.” “계약을 안 하겠다는 뜻이에요?” “아니.” 나는 계약서를 다시 앞으로 밀었다. “다시 보겠다는 뜻.” 그날 저녁 도현에게 이야기하자 반응도 비슷했다. “자동 연장을 거절했다고요?” “네.” “왜?” “조건 다시 보고 싶어요.” 도현이 나를 잠시 바라봤다. “문제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왜?” 나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없어도 다시 선택할 수 있잖아요.” 도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계속하고 싶지 않은 겁니까?” “아직은 하고 싶어요.” “그럼?” “하고 싶다는 거랑.” 나는 계약서 사본을 펼쳤다. “2년 전에 정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니까.” 도현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씩 다시 확인했다. 임기. 체류 일수. 출장 기준. 인사 권한. 도시별 독립권. 총괄실의 승인 범위. 보수. 휴가. 성과 평가 방식. 심지어 계약 종료 후 인수인계 기간까지. 2년 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항목이 지금은 중요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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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화. 한 달의 자유

첫 지역 외 근무지는 제주였다. 회사도 없고.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도 없고. 출장 동선도 없는 곳. 처음부터 그게 좋았다. 무언가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한 달 동안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것. 숙소는 바다가 아주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작은 집으로 잡았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왔고. 차로 십 분쯤 나가야 식당이 있었다. 회사에서는 필요한 장비만 보냈다. 노트북. 보안 장치. 작은 모니터 하나. 그게 전부였다. 도현은 첫 일주일만 같이 왔다. 나머지 삼 주는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처음으로 일부러 떨어져 지내는 선택이었다. 공항에서 렌터카를 타고 숙소로 가던 길. 도현이 물었다. “정말 한 달입니까?” “네.” “중간에 서울 안 올라오고?” “특별한 일 없으면.” “왜 한 달이나?” 나는 창밖을 봤다. 낮은 돌담이 지나갔다. “궁금해서.” “무엇이?”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 도현이 나를 봤다. “어디에도?” “회사도 없고.” “네.” “총괄실도 없고.” “네.” “도현 씨 일정에 맞출 필요도 없고.”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나는 바로 웃었다. “왜.” “저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도현 씨한테는 원래 속하는 거 아니잖아요.” 차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몇 초 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기분 이상하죠?” “조금.” “왜?”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가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아주 조금 줬다가 풀었다. “말로 들으니 다릅니다.” 나는 웃었다. “그럼 다시 말해줄까?” “아닙니다.” “왜.”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첫 일주일은 휴가 같았다. 도현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근처를 걸었다. 낮에는 나는 일을 했고, 도현도 서울에서 가져온 자료를 조금 봤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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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제주에서 온 사진

제주에 온 뒤부터 나는 도현에게 하루에 사진 한 장만 보냈다. 누가 정한 규칙은 아니었다. 첫날 내가 바다 사진을 보냈고. 둘째 날 돌담을 보냈고. 셋째 날부터 자연스럽게 하루 한 장이 됐다. 사진의 종류도 별 의미가 없었다. 바다. 돌담. 커피. 운동화 끝. 비에 젖은 창문. 어느 날은 그냥 길 위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 도현은 늘 비슷하게 답했다. [봤습니다.] 그뿐이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그런데 닷새째도. 일곱째도. 아홉째도. 정말 똑같았다. [봤습니다.] 열흘째 되는 날. 나는 결국 저녁 통화에서 물었다. “왜 맨날 ‘봤습니다’만 해요?” 도현이 잠시 조용해졌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데요?” “너무 성의 없잖아요.” “성의가 없어서 그렇게 쓰는 건 아닙니다.” “그럼?” 도현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더 말하면.” “응.” “당신이 저에게 반응하느라 제주를 덜 볼까 봐.” 나는 잠깐 말이 없었다. “뭐라고요?” “제가 사진마다 질문하면.” 그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어디인지.” “응.” “누구랑 있었는지.” “응.” “왜 거길 갔는지.” “응.” “다음에는 어디 갈 건지.” 나는 결국 웃었다. “예전 도현 씨네.” “네.” “지금은?” “사진을 받으면.” 그가 말했다. “그냥 당신이 오늘 이걸 봤구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봤습니다?” “네.” “진짜 많이 변했네.” 도현이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은 자주 듣습니다.” “싫어요?” “아닙니다.” “칭찬인데.” “알고 있습니다.” “받아요.” “받겠습니다.” 나는 웃었다. 예전 같으면 그 말조차 어색해했을 사람이었다. 사진을 보내는 일은 계속됐다. 열한째 날에는 바닷가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 열두째 날에는 반쯤 먹은 국수. 열셋째 날에는 바람에 뒤집힌 우산. 열넷째 날에는 아무것도 없는 회색 하늘. 도현의 답장은 여전히 짧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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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화. 돌아오라는 말

제주에 온 지 스물다섯째 날. 이제 이 집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고. 바람이 강하면 얇은 겉옷부터 챙겼고. 자주 가는 카페에서는 굳이 메뉴판을 보지 않았다. 노트북을 켜면 회사였고. 노트북을 닫으면 제주였다. 그 경계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한 달이 길게 느껴졌는데. 막상 스물다섯째 날이 되자 이상하게 짧았다. 다섯 날. 딱 그만큼만 더 있으면 다시 서울이었다. 그날 저녁. 도현과 통화를 했다. 평소처럼 별일 없는 하루였다. 카렐이 또 회의에서 반대했고. 한예린이 예산표를 다시 보냈고. 나는 오후에 혼자 산책을 다녀왔다. 도현도 서울에서 회의를 두 개 했다고 했다. 한동안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도현이 말했다. “서윤.” “응?”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많이 했다. 다만 예전에는 그 문장 뒤에 무언가가 따라붙었다. 일정을 바꾸라는 말.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는 질문. 왜 굳이 더 있어야 하느냐는 이유. 혹은. 돌아오게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이번에는 달랐다. 그냥 한 문장.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물었다. “왜?” “보고 싶어서.” 대답은 바로 나왔다. “일은?” “상관없습니다.” “회사에 문제 생겼어요?” “아닙니다.” “집이 심심해요?” 잠깐 침묵. “많이.” 나는 웃었다. “솔직하네.” “요즘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5일 남았는데.” “압니다.” “참아요.” 도현도 아주 짧게 말했다. “네.” 끝이었다. 정말 끝. 나는 조금 기다렸다. 혹시라도 다음 말이 나올까 봐. [내일 와도 되지 않습니까.] [비행기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달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오히려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었습니까?”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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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화. 공항이 아닌 집

도현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약속대로 집에서 기다렸다.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도착 시간. 수하물 찾는 곳. 집까지 걸리는 시간. 예전 같았으면 도현에게 하나씩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출발 전에 한 번. [출발해요.] 도현의 답.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 곧바로 답이 왔다. [조심히 오십시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괜히 이상했다. 도현이 공항에 없다는 사실이. 예전 같으면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한 달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얼굴이라도 빨리 보고 싶지 않나. 그런 생각.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공항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도현은 그대로 했다.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내가 원하는 방식을 먼저 지킨 것. 그게 마음에 들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냄새였다. 따뜻한 국물 냄새. 나는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요.” 주방 쪽에서 도현이 바로 나왔다. “왔습니까.” 그는 몇 걸음 다가오다가 멈췄다. 나는 그걸 보자 웃음이 났다. “왜 거기 서 있어요?” “안아도 됩니까?” 한 달 만에 보는 첫 질문이었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놓았다. “네.” 이번에는 오래 안겼다. 제주에서 출발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막상 품에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힘이 조금 빠졌다. 도현의 팔이 내 등을 감쌌다. 조금 단단하게. 그래도 내가 몸을 움직이자 바로 힘을 풀었다. “더 세게 해도 돼요.” 내가 말하자 그제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 정도?” “응.” 몇 초 더. 그리고 내가 먼저 떨어졌다. 도현은 아쉬운 표정도 숨기지 않았다. “끝입니까?” “일단.” “일단.” 그가 따라 말했다. 나는 웃으며 식탁 쪽을 봤다. 냄비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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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화. 한 달 뒤의 밤

제주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낮 동안은 이상할 만큼 평범했다. 나는 밀린 메일을 정리했고. 도현은 서재에서 회의 자료를 확인했다. 같은 집에 있었지만 각자 자기 일을 했다. 한 달 전과 달라진 건 거의 없어 보였다. 다만. 서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불안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 그게 달랐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제주에서 가져온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도현이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먼저 고개를 들었다. “왜 봐요?” “생각 중입니다.” “뭘?”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원합니까?”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았다. 한 달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주에 첫 일주일 같이 있을 때도 일부러 쉬었다. 그 뒤로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지냈다. 그러니까 오늘은. 한 달 만이었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네.” 도현의 시선이 조금 깊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이라도 기존 범위를 그대로 가정하지 않겠습니다.” “알아요.” “한 달 전 괜찮았던 게 오늘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네.” “무엇이 좋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상하게. 오히려 분명했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더 잘 알 것 같았다. “손목.”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대는 싫어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리드도 오늘은 싫고.” “좋습니다.” 나는 잠시 멈췄다. 도현이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좀 세게.” 그 순간. 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남편이던 얼굴에서. 익숙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그래도 마지막 확인은 같았다. “색깔.” “초록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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