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271 - Chapter 280

420 Chapters

271화. 회사 없는 도시

노란 장갑을 그대로 둔 그 절제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소유는 전부 가져가는 일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이미 있는 것을 인정한 채. 허락받은 만큼만 가까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또 하나를 혼자 가져보기로 했다. 유럽 총괄실이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지속가능경영 컨퍼런스를 열었다. 조금 특이한 장소였다. 프라하도. 파리도. 바르샤바도. 뮌헨도. 스톡홀름도 아니었다. 우리 회사 지사가 하나도 없는 도시. 행사 자체도 회사가 주최한 것이 아니라 유럽 여러 기업과 도시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외부 컨퍼런스였다. 출국 전날 저녁. 나는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도현 씨 일정은요?” 그가 노트북에서 시선을 들었다. “서울에 있습니다.” “금요일까지?” “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리스본 안 와요?” “네.” “왜?” 도현이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듯 봤다. “제가 왜 갑니까?” “원래 잘 따라왔잖아요.” “업무가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없습니다.” 나는 괜히 서운해졌다. “이번에는 당신 도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도현은 노트북을 닫았다. “프라하는 당신 회사가 있었고, 파리는 총괄실이 있습니다. 다른 도시들도 대부분 제가 관여할 업무가 있었습니다.” “리스본은 없고?” “네.” “남편으로는?” 질문이 조금 빨리 나왔다. 도현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요?” 이번에는 답이 늦었다. “당신 혼자 있는 도시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뜻밖이었다. 예전의 도현이라면 반대였을 것이다. 자기 업무가 없어도 이유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근처 이사회. 외부 미팅. 기술 자문. 무엇이든 하나쯤 붙여 같은 비행기에 올랐을 사람. “제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압니다.” “그럼 왜?” “혼자 있고 싶은 것과 혼자 있어볼 수 있는 건 다르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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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화. 주소 없는 엽서

리스본에서 보내는 마지막 자유 일정 날. 나는 오전 컨퍼런스를 끝낸 뒤 혼자 오래 걸었다. 이번에는 일부러 길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전날 지나쳤던 골목을 다시 찾았다. 노란 벽. 파란 타일. 창문 밖으로 걸린 빨래. 작은 기념품 가게 앞에서 엽서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바다와 낡은 트램이 같이 찍혀 있었다. 딱히 특별한 사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현 생각이 났다. 나는 엽서를 한 장 샀다. 카페에 앉아 펜을 들었다. 처음에는 뭔가 길게 쓰려고 했다. 여기가 좋다고. 비를 맞았다고. 수프가 맛있었다고. 혼자 있는 게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그런데 결국 남은 문장은 하나였다. [여기서 당신 생각이 났지만 바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어.] 쓰고 나니 조금 이상했다. 보내도 되나 싶었다. 받는 사람 이름은 썼다. [차도현.] 그런데 주소를 적으려다 멈췄다. 집 주소를 쓰면 너무 평범했다. 회사 주소는 더 싫었다. 회사 없는 도시에서 쓴 엽서를 회사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호텔 프런트로 가져갔다. “혹시 나중에 이 사람이 투숙하면 전달해 줄 수 있을까요?” 직원이 예약 여부를 확인했다. 마침 몇 주 뒤 도현의 유럽 출장 일정 중 리스본 일정이 잡혀 있었다. 나는 웃었다. 역시 완전히 회사 없는 도시로 남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가능합니다.” 직원이 작은 보관 봉투에 엽서를 넣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확인했다. 주소는 없었다. 집도. 회사도. 그냥 이름 하나. 차도현. 그걸로 충분했다. 며칠 뒤 나는 파리로 돌아갔다. 엽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도현에게도.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다. 그냥 말하지 않고 두고 싶었다. 이것도 작은 서프라이즈였다. 한 달 전 도현의 검은 봉투처럼. 모든 비밀이 배신은 아니라고 했던 사람에게 돌려주는 작은 비밀. 그리고 몇 주 뒤. 도현이 리스본에 도착한 날 저녁 전화가 왔다. 나는 받자마자 물었다.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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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화. 돌아오지 않는 밤

리스본 일정 마지막 날.나는 오전 회의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캐리어를 닫고 휴대전화를 확인했을 때 항공사 알림이 떠 있었다.[기상 악화로 인한 항공편 결항.]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다시 확인했다.결항.창밖을 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리기만 하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바람이 창문을 세게 흔들었다.곧 빗줄기까지 굵어졌다.나는 바로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네.”“오늘 못 가요.”잠깐의 침묵.“무슨 일입니까?”“폭풍.”“항공편은?”“결항됐어요.”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예전 같으면 이미 노트북을 열었을 것이다.다른 공항.다른 항공사.환승편.기차로 국경을 넘어 다른 도시에서 출발하는 방법까지.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정된 시간에 나를 돌아오게 하려고 했을 사람.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내일 날씨 보고 움직이십시오.”나는 오히려 당황했다.“끝?”“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대체편 안 찾아봐요?”“지금 폭풍이면 다른 편도 상황이 비슷할 겁니다.”“마드리드나 파리 경유는?”“가능할 수는 있습니다.”“그런데?”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굳이 위험과 피로를 늘릴 필요가 없습니다.”나는 창밖을 바라봤다.도로를 지나던 사람들도 우산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안 불안해요?”“불안합니다.”대답은 바로 나왔다.“많이?”“네.”“근데 이렇게 가만히 있어요?”도현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폭풍을 제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도현 씨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네.”“저도 익숙하지 않습니다.”“지금 속으로 다른 항공편 검색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매우.”“공항에 전화도?”“하고 싶습니다.”“전용기 같은 것도 생각했죠?”잠깐 침묵.나는 바로 알아챘다.“했네.”“가능성만 생각했습니다.”“하지 마요.”“안 합니다.”“진짜?”“네.”그가 말을 이었다.“당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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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화. 폭풍 이후

폭풍 때문에 하루 늦게 돌아온 뒤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도현이 내 항공편을 예전처럼 자주 확인하지 않았다.예전에는 출발 시간부터 탑승구 변경, 지연 여부, 도착 예정 시각까지 다 알고 있었다.가끔은 나보다 먼저 확인했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며칠 뒤 내가 다시 파리 출장을 준비하면서 일부러 물었다.“비행기 시간 안 물어봐요?”도현은 서류에서 시선도 떼지 않았다.“달력에 있습니다.”“지연되면?”“당신이 알려주겠죠.”나는 괜히 한 번 더 물었다.“안 알려주면?”그제야 도현의 손가락이 소매 끝으로 갔다.검은 단추.0. 한 번 눌렀다.그리고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그때 생각하겠습니다.”나는 입을 다물었다.이상했다.분명 예전 같으면 귀찮았을 질문들이었다.몇 시 출발입니까.누구와 갑니까.도착하면 연락하십시오.호텔 들어가면 메시지 남기십시오.하나하나 다 확인하면 답답했고, 왜 이렇게까지 알아야 하냐고 짜증냈다.그런데 막상 그 질문들이 사라지니 허전했다.도현이 내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왜 표정이 그렇습니까?”“아무것도 아니에요.”“아닙니다.”“뭐가.”“지금 서운한 얼굴입니다.”나는 바로 부정하려다 멈췄다.“예전엔 너무 물어서 짜증났는데.”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네.”“지금은 안 물으니…”말이 작아졌다.도현이 기다렸다.“…조금 서운해요.”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나는 바로 손가락을 들어 경고했다.“웃지 마요.”“웃지 않고 있습니다.”“방금 웃으려 했잖아요.”“조금.”“진짜.”도현은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어렵군요.”“그러게.”“물으면 통제한다고 하고.”“너무 많이 물었잖아요.”“안 물으면 서운해하고.”“아예 관심 없는 것 같잖아요.”“관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알아요.”“그런데 왜 서운합니까?”나도 그게 어려웠다.한참 생각하다 말했다.“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무엇을?”“내가 어디 가는지 도현 씨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그가 조용히 들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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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화. 재단의 첫 실패

폭풍 이후 생긴 변화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확인하는 횟수가 줄었다. 대신 믿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런데 믿는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며칠 뒤. 여성 경영인 지원기금에서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지원 기업 하나가 폐업했다. 투자금 회수 가능성. 0%. 나는 그 숫자를 한참 바라봤다. “전액?” 재단 실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표는?” “연락됩니다.” “횡령?” “없습니다.” “투자금 유용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폐업했어요?” “매출이 예상보다 빠르게 줄었고, 후속 투자도 무산됐습니다. 원자재 계약까지 겹치면서 현금흐름이 끊겼습니다.” 나는 자료를 다시 넘겼다. 대표가 도망간 것도 아니었다. 가짜 매출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투자금을 개인적으로 빼돌리지도 않았다. 그냥. 사업이 실패했다. 그게 오히려 더 답답했다. 누군가 잘못했다면 책임을 물으면 됐다. 심사를 속였다면 계약에 따라 조치하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확한 악의가 없었다.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했고. 예측이 틀렸고. 결과적으로 돈을 잃었다. 다음 날 바로 기사가 나왔다. [여성 경영인 지원기금, 첫 전액 손실.] [심사 능력 도마 위.] [사회적 명분 앞세운 부실 투자였나.] 나는 기사 제목만 보고 휴대전화를 엎어 놨다. 차명희는 예상보다 담담했다. 재단 회의가 시작되자 자료를 한 번 훑고 말했다. “이게 투자야.” 나는 바로 그녀를 봤다.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쉽게 말하는 게 아니다.” 차명희가 자료를 내려놨다. “처음부터 실패할 기업은 한 곳도 뽑지 않겠다고 했으면 이 기금 자체를 만들지 말았어야지.” “그래도 전액이에요.” “알아.” “사람들 돈이고요.” “그래서 전체 기금 중 위험 투자 비중을 제한한 거잖아.” 옆에 있던 도현도 말했다. “실패를 허용한다고 했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는 도현을 봤다. “말은 쉽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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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화. 실패한 사람의 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정도면 충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과 감정은 늘 같은 속도로 따라오지 않았다. 재단 실패 사건이 지나간 뒤에도 나는 계속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심사 당시 제출된 사업계획서. 현금흐름표. 시장조사 자료. 투자심의위원회 회의록. 후속 투자 예정표. 폐업 직전까지의 월별 매출. 이미 세 번은 본 자료였다. 그래도 다시 열었다. 혹시 숫자 하나를 놓쳤을까 봐. 누군가 지나친 낙관을 했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까 봐. 대표가 한 말을 잘못 해석했을까 봐. 도현이 서재 문을 열었을 때도 나는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 “아직도 봅니까?” “응.” 그가 내 뒤로 와 화면을 확인했다. “뭘 찾습니까?” “놓친 거.” “어떤 것?” “뭐든.”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과거 회의록을 다시 열었다. “이때 원자재 가격 전망을 너무 낮게 잡았나 싶어서.” “당시 외부기관 전망치와 비슷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더 보수적으로 봤으면.” “그랬다면 투자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도현이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그를 흘끗 봤다. “말리지 않아요?” “왜 말립니까?” “이제 그만 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보고 싶은 겁니까?” “응.” “그럼 보십시오.” “밤새도?” 도현은 잠시 생각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가 되면 말하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아닙니다.” 그는 내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손에서 마우스를 빼앗지도 않았다. 대신 옆에 앉았다. “찾을 때까지 보십시오.” 나는 이상해서 그를 봤다. “진짜 안 말려요?” “오늘은 말리지 않겠습니다.” “왜?” 도현은 짧게 대답했다. “당신이 직접 확인해야 끝날 것 같으니까.” 나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자료는 똑같았다. 새로운 횡령 흔적도 없었다. 숨겨진 부채도 없었다. 고의적인 매출 조작도 없었다. 투자 당시 시장 상황은 실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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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화. 카렐의 반란

어젯밤보다. ‘무게’라는 단어가 조금 더 편하게 들렸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실패보다 훨씬 사소한 일이 내 기분을 건드렸다. 유럽 총괄실 정례회의. 파리 물류센터 추가 투자 안건을 내가 직접 올린 날이었다. 지난 두 분기 동안 파리 지역 매출이 꾸준히 늘었고, 내년 예상 물동량까지 고려하면 지금부터 시설 확장을 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화면에 예상 성장률 자료를 띄웠다. “기존 시설 옆 부지를 장기 임차하는 방식으로 검토하려고 합니다. 당장 전면 확장하는 게 아니라 1단계로—” “반대합니다.” 말이 끊겼다. 카렐이었다. 회의실이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봤다. “어느 부분을요?” “투자 자체입니다.” 카렐은 자기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파리 물류센터 추가 투자는 필요 없습니다.” “매출이 늘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기존 시설 가동률이 74%입니다.” 나는 바로 대답했다. “평균이죠. 성수기에는 90% 가까이 올라갑니다.” “연간 시설 투자는 성수기 최고점만 보고 결정하면 안 됩니다.” “향후 성장까지 고려하면—” 카렐이 내 말을 잘랐다. “총괄님이 성장률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조용해졌다. 누군가 펜을 내려놓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한예린도 자료에서 고개를 들었다. 도시 대표들 몇 명은 표정을 숨기려는 게 보였다. 내 기분이 상했다. 분명히.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회의실 한복판에서. 그것도 내가 직접 준비한 안건에. 나는 팔짱을 끼고 카렐을 바라봤다. “근거는요?” “지난 두 분기 매출 성장의 38%가 장기 수요가 아니라 일회성 대형 계약에서 나왔습니다.” 카렐이 자료를 넘겼다. “그 계약을 제외하면 실제 반복 매출 성장률은 총괄실 전망치보다 4.7%포인트 낮습니다.” “그 계약이 연장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럼 포함할 수 있죠.” “확정 전에는 기본 시나리오에 포함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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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화. 반대하는 부대표

카렐은 그날 이후 눈치를 덜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원래도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내 앞에서도 굳이 말을 돌리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바로 짚었고, 근거가 있으면 내 안건이라고 해서 예외로 두지 않았다. “이건 다시 계산해야 합니다.” “왜요?” “지난 분기 수치를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이번 분기에도 같은 조건이 유지된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또 다른 안건에서는 더 짧았다. “필요 없습니다.” “뭐가요?” “이 절차요.” “비용 절감 때문에 넣은 건데.” “운영 안정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빼는 게 낫습니다.” 가끔은 정말 피곤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전제를 하나씩 꺼내놓고 확인해야 했고, 숫자를 다시 봐야 했고, 이미 정리됐다고 생각한 안건이 회의 중간에 뒤집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카렐이 반대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말을 더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예린은 재무적인 위험을 먼저 짚었고, 프라하 대표는 내 인력 운영안에 다른 의견을 냈다. 스톡홀름 쪽에서는 본사 지원 규모가 과하다고 직접 말했다. 회의 시간은 오히려 길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뒤 다시 문제를 발견해 결정을 수정하는 횟수는 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내 표정을 확인하는 일이 줄었다. 어느 날 파리와 바르샤바 공동 구매 계약을 검토하던 중이었다. 나는 새 공급업체를 추가하는 안을 설명했다. “기존 업체 의존도가 높으니까 하나 더 확보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바로 전체 물량을 넘기지는 않고—” 설명을 끝낸 뒤 회의실을 둘러봤다. 아무도 바로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말했다. “좋아요.” 사람들이 나를 봤다. “내 의견에 먼저 반대할 사람?”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카렐이 손을 들었다. 나는 바로 그를 봤다. “왜 맨날 너야.” 회의실 전체에서 웃음이 터졌다. 카렐도 웃으면서 말했다. “총괄님이 먼저 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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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화. 검은 단추의 실패

카렐이 여전히 제일 먼저 손을 드는 건 얄미웠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게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도현에게는 조금 다른 종류의 ‘신호’가 사라졌다. 행사 준비를 하던 저녁이었다. 도현은 셔츠 소매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왜요?” 나는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끼다가 그를 봤다. 도현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작은 검은 단추 하나. 익숙한 숫자. [0.] “떨어졌네.” 내가 먼저 주워 들었다. 도현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언제 느슨해졌지.” “그냥 단추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단추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돌려봤다. 처음에는 별 의미 없는 장치였다. 도현이 질투나 불편함을 느낄 때 바로 행동하지 않고 한 번 멈추기 위해 만든 것. 질문하기 전. 끼어들기 전. 상대의 선택을 줄이기 전. 한 번 누르고 생각하는 신호.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갔다. “다시 달아요?” 내가 물었다. 도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행사 끝나고.”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오늘은 그냥 가면 되죠.” 도현이 떨어진 단추를 한 번 봤다. “이상하군요.” “뭐가?” “없으니까.” 그가 자기 소매를 만졌다. 평평했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것도 없었다. “불안해요?” “조금.” 나는 웃었다. “없으면 질투 조절 못 해요?” 도현은 나를 바라봤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근데?” “습관이 됐습니다.” 솔직한 답이었다. “단추 누르면 진짜 마음이 좀 가라앉았어요?” “단추 때문에 가라앉은 건 아닙니다.” “그럼?” “누르는 동안 한 번 멈췄으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단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짧은 멈춤. 자기 감정을 행동으로 바로 옮기지 않는 시간. 몇 초짜리 틈. 도현은 그걸 손끝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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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화. 0 이후

검은 단추는 더 이상 소매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질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현은 이제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지금 불편합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어색했다. 너무 간단해서. 예전 같으면 그 뒤로 질문이 몇 개는 더 붙었을 것이다. 왜 가까이 있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왜 그렇게 웃었는지. 다음에도 같은 상황이 생길 건지. 그런데 이제는 정말 그 한 문장이 끝이었다. 어느 날 파리 쪽 화상회의가 끝난 뒤였다. 카렐이 내 옆에 서서 자료를 같이 보고 있었다. 화면이 작아서 자연스럽게 거리가 가까워졌다. 회의가 끝난 뒤 도현과 통화하는데 그가 말했다. “지금 불편합니다.” 나는 바로 물었다. “왜요?” 도현은 잠시 망설이지도 않았다. “카렐 부대표가 당신과 너무 가까이 서 있었습니다.” “그럼 멀리 서라고 할까요?”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그냥 제가 불편하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나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전부라는 게 아직도 신기했다. “알았어요.” “네.” “진짜 끝?” “네.” “카렐한테 뭐라고 하지 않아도 되고?” “네.” “다음부터 거리 둘 필요도 없고?”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업무상 필요한 거리라면.” “그럼 지금 이건 도현 씨 감정.” “맞습니다.” “내 책임 아니고.” “네.” 나는 웃었다. “진짜 단추 없어도 잘하네.” 도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십시오.” “왜. 칭찬인데.” “충분히 들었습니다.” 나는 웃으며 통화를 끊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오래 남았다. 도현이 질투를 말했는데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가 뭘 고쳐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불편함은 그냥 그의 감정으로 남았다. 예전에는 누군가 불편하다고 말하면 내가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많았다. 도현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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