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렐은 그날 이후 눈치를 덜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원래도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내 앞에서도 굳이 말을 돌리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바로 짚었고, 근거가 있으면 내 안건이라고 해서 예외로 두지 않았다. “이건 다시 계산해야 합니다.” “왜요?” “지난 분기 수치를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이번 분기에도 같은 조건이 유지된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또 다른 안건에서는 더 짧았다. “필요 없습니다.” “뭐가요?” “이 절차요.” “비용 절감 때문에 넣은 건데.” “운영 안정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빼는 게 낫습니다.” 가끔은 정말 피곤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전제를 하나씩 꺼내놓고 확인해야 했고, 숫자를 다시 봐야 했고, 이미 정리됐다고 생각한 안건이 회의 중간에 뒤집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카렐이 반대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말을 더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예린은 재무적인 위험을 먼저 짚었고, 프라하 대표는 내 인력 운영안에 다른 의견을 냈다. 스톡홀름 쪽에서는 본사 지원 규모가 과하다고 직접 말했다. 회의 시간은 오히려 길어지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뒤 다시 문제를 발견해 결정을 수정하는 횟수는 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내 표정을 확인하는 일이 줄었다. 어느 날 파리와 바르샤바 공동 구매 계약을 검토하던 중이었다. 나는 새 공급업체를 추가하는 안을 설명했다. “기존 업체 의존도가 높으니까 하나 더 확보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바로 전체 물량을 넘기지는 않고—” 설명을 끝낸 뒤 회의실을 둘러봤다. 아무도 바로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가 말했다. “좋아요.” 사람들이 나를 봤다. “내 의견에 먼저 반대할 사람?”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카렐이 손을 들었다. 나는 바로 그를 봤다. “왜 맨날 너야.” 회의실 전체에서 웃음이 터졌다. 카렐도 웃으면서 말했다. “총괄님이 먼저 물
Last Updated : 2026-08-27 Read more